나만 1회차 175화
틀림없었다.
이들은 120회차 초반에 종탑에서 떨어져서 자살했던 네 사람이었다.
용병대에서 나를 처음으로 만나고 100회차나 동고동락을 했다는 이들.
‘그 첫 만남이 21회차였다니.’
설마 초반에 자살했던 저들과 재회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봐. 악수 안 받아?”
미청년 세베켈이 무안하게 말했고, 난 퍼뜩 정신 차리고 손을 잡았다.
“……반갑군.”
“어째 얼빵해 보이는데. 난 나보다 못하다는 판단이 들면 용병대고 뭐고 바로 떠날 테니까 알아두라고.”
그가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고, 동시에 상태창이 떠올랐
[21회차로 역행하였습니다.]
[21회차 7월 18일경 당신의 몸에 빙의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능력치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후일과 무관한 평행 세계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평행세계서 벌인 일은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미래가 바뀌거나 과거가 개변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가령 여기에서 누군가에게 후일을 설명해줘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말도 안 되는 악행을 저질러도 차후 나에 대한 카티에의 인식이 나빠지진 않는 것이다.
‘타임 패러독스 같은 귀찮은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활동해도 되겠군.’
착용 장비와 아이템을 쟁여둔 배낭은 사라지고 경갑만 걸치고 있었다.
내가 착용한 장검은 평범하고, 배낭 속에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
‘21회차 초반의 나에게 빙의해서 그런가. 아이템은 사라져 버렸군.’
그러나 왼쪽 손등을 살피자 악마의 펜타그램은 여전히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전생인데 왜 펜타그램이 빙의한 나한테까지 그려져 있지?’
21회차의 나에게 펜타그램이 있었을 리 없으니, 이건 따라온 것이다.
장비나 아이템은 유지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펜타그램은?
‘딱히 한 몸인 것도 아닌데.’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아주 중요한 문구가 떠올랐다.
[제1과업: 제1반란군장 제압.]
[제2과업: 일행과 친밀해지기.]
[제한시간: 30일.]
[과업을 달성하면 돌아갑니다.]
21회차에서 내가 이뤄야 할 과업.
‘반란군장 제압’은 그렇다 쳐도 ‘일행과 친밀해지기’는 제법 의외였다.
‘저 네 사람과 친해져야 한단 건가.’
세상을 버리고 자살했던 네 사람.
첫인상이 나에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카티에가 대표로 나서서 설명했다.
“모두 환영해요. 용병대를 꾸린 것은 나지만 대장은 이 사람이에요.”
그녀가 나를 흘깃 보았고,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범철이야. 잘 부탁한다.”
“난 포그돈이라고 한다. 고아 출신이라서 딱히 성이라 할 건 없어.”
거한이 퉁명스럽게 말했고, 깡마른 소년이 단검을 훅 불고서 말하였다.
“틴 워커. 그냥 틴이라고 불러라.”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여성이 씩 웃으며 안경알을 톡톡 두드렸다.
“글래스 레이베르. 안경이랑 함께 붙여서 연상하면 외우기도 쉬워.”
모두 자기소개를 마치고, 카티에가 우리 용병대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다들 이번 회차 목표인 ‘세 대륙 용병의 통합’을 노리고 모였겠지요. 우리 목적은 이곳 전쟁에 참여해서 소년왕을 죽이려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거예요. 여기서 공적을 크게 세우면 회차 목표에도 다가가겠죠.”
어쩐지, 싸움터가 가까운 것처럼 보이더라니 대충 그런 상황이었군.
그때 갑자기 틴이 손을 들었다.
“잠깐.”
그가 제지한 순간, 갑자기 저편에서 화살이 기습적으로 날아들었다.
틴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였다.
“기습이다.”
완벽무장한 사람들이 수풀 너머에서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긴 검을 빼는 세베켈이 대충 적들의 견적을 살피고서는 말했다.
“반란군 놈들이다. 최소 이십은 넘어 보인다. 도망치자고. 쪽수로는 상대도 안 돼.”
“쳇, 아무리 분쟁지대라지만 벌써 기습해 오다니. 어쩔 수가 없군.”
포그돈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들은 도망치려고 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참 재수도 없다.
“다시 살아도 왕정의 졸개로 사는 것들이! 감히 어딜 도망치려고!”
웬 반란군 하나가 내 뒤를 노렸고, 난 그 급작스러운 기습을 허용했다.
그러나 나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크흑!”
허리를 스칠 뻔한 창날을 피해내고 아슬아슬하게 접근해 칼을 뽑는다.
동시에 창을 든 용병의 목을 갈라 버리고 몸을 두 쪽 내버렸다.
“뒤쪽!”
글래스가 소리쳤고, 나는 곧장 뒤를 돌아 날아오는 화살을 갈랐다.
그리고 왼손으로 화기의 뱀을 쏘아서 기습한 궁병을 불태워버렸다.
“끄아아악!”
궁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21회차 카티에가 놀라서 물었다.
“마, 마법도 쓸 줄 알았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움직였다.
내가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쓸 때마다 용병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아, 안 되겠어! 이놈들!”
“조련사! 늑대들을 풀어버려!”
당황한 용병들이 소리쳤고, 뒤편에서 흉터 짙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조련사로 보이는 그의 손에는 목줄이 걸려 있었다. 목줄 끝에 걸린 늑대들은 피를 먹인 늑대들인지 눈알이 아주 붉고 사나웠다.
“쉬잇! 저 자식을 먹어치워!”
늑대 열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평균적인 덩치보다 훨씬 큰 늑대!
그러나.
“깨갱!”
늑대들은 전혀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조련사의 애완수는 내가 걷어차자 허무하게 목이 날아갔다.
“아, 안 돼! 내 애완수가!”
“피, 피의 늑대가 전부!”
“뭐, 뭐야! 이놈은 도대체!”
나는 싱거워서 한숨을 쉬었다.
이래 봬도 황색, 청색대륙 지배자를 죽이고 능력치까지 계속 쌓아왔다.
‘그랬던 놈이 늑대한테 당하겠냐.’
거기다가 재능까지 유지가 되니까 이건 완전 양민학살이 따로 없다.
포그돈이 경악하며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그냥 되더라. 더 묻지 마.”
21회차의 초반.
이곳에서 나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
[포그돈은 당신의 순수한 강함에 관하여 감탄하고 있습니다.]
[틴은 특유의 비정한 천성으로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글래스는 당신의 근원 모를 힘에 관해서 호기심을 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에 대한 일행의 인식을 알아볼 수 있는 건가.’
지금 당장 이런 정보가 쓸모없을지 모르겠지만, 알아두는 게 좋겠다.
‘동료들과 친해지는 것도 과업의 목표이니 기억해두면 이득이겠어.’
하여간에 나는 피 묻은 칼을 휘젓고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용병대를 꾸렸으니 전쟁에 참여해야죠. 가요. 절차는 밟아놨으니까.”
카티에가 앞장을 섰다.
***
21회차의 평행세계.
시간을 역행하여 왔지만, 이곳의 일은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막 나가는 짓을 벌여도 120회차 카티에가 성격이나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일은 없다.
일단 현 목표는 과업의 완료.
21회차의 평행세계에서 나는 이들 모두와 친밀해져야만 하였다.
포그돈은 덩치답지 않게 걸어가며 수다스럽게 말하였다.
“전장에 참여하는 것은 좋아. 그런데 전방에 서는 것은 반대야.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회귀자가 많을수록 오히려 후열이 이득이잖아?”
우선, 전사계열인 포그돈.
회귀 시점 당시에는 그저 호전적인 거한이라고만 느껴졌는데 의외로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구석이 있었다.
‘덩치만 보자면 헤르탄 급인데.’
포그돈은 내가 방금 보인 강함에 상당한 믿음을 보이고 있었고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싶었다.
그다음은 틴.
“위치는 개의치 않아. 어차피 회귀자 싸움이라고. 중요한 건 회귀하지 않고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지.”
도적계열의 포지션으로 깡마른 체구의 소년은 냉소적인 성격이었다.
그에 못지않게 의심도 짙은지 당장 지금만 해도 날 의심스럽게 본다.
‘아까 보니까 기척을 잡아내는 실력은 꽤나 괜찮은 것 같던데.’
나도 몰랐던 적의 기척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린 것은 바로 틴이었다.
그건 도적으로서 중요한 감이었다.
“글쎄. 나는 일단 대장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 그렇지 않아?”
글래스는 소환마법을 다양하게 익힌 연금술사라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에게 좀 호기심을 품은 것 같긴 한데…… 딱히 적대적이진 않다.
“동감해. 최소한 내가 중간에 버리고 떠날 실력의 대장은 아닌 것 같으니.”
세베켈은 이중에서 유일하게 포지션을 추측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우선은 장검을 들었으니 전방에 서는 검사 쪽이 아닐까 싶었다.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성격이 시원시원한 놈이라 친해지는 데 그다지 무리는 없다고 본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난 백발 머리칼 소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시종일관 찬 눈초리였다.
21회차 카티에는 나랑 친해질 생각도 없는 데다가 성격도 차가웠다.
‘과업을 완수하려면 21회차의 카티에와도 친밀도를 쌓아야 할 텐데.’
예전에 120명의 카티에도 만났었지만, 역시 전생의 그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어쩌면 여기서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건 카티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
왕정 병사들과 용병이 연합하여 반란군과 대적하는 핏빛의 전장.
“으억!”
“사, 살려줘! 제발!”
전장에 참여한 나는 어지간한 반란군들은 전부 처치할 수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한회귀가 가능한 놈들이라 목숨을 아끼는 것도 없다.
그래서 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덤벼오는 놈들을 편안히 척살했다.
‘회귀 횟수가 적어서 그런가? 확실히 120회차에 비해 난이도가 낮아.’
21회차의 회귀자들은 확실히 경험도 낮고 장비도 현저히 부실했다.
‘120회차는 어수룩한 회귀자도 최소 히든 피스 하나는 들었었는데.’
하기야 21회차는 120회차에 비해 중요한 전생지식이 그리 대중적으로 퍼지지 않았을 시기일 테니까.
‘제기랄, 21회차만 되도 이렇게 할 만한데. 120회차는 진짜…….’
괜스레 버림받은 120회차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러웠다.
[21회차 회귀자 반란군 세 부대를 모두 해치워버렸습니다.]
[뛰어난 공적을 세웠습니다!]
[힘이 1 오릅니다.]
‘능력치 올리는 작업도 쏠쏠하군.’
그다지 숙련되지 않은 회귀자들이 전장에 가득하니 성장하기에 좋다.
나는 단순히 능력치만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킬도 수련을 하였다.
‘불세출의 검.’
그저 허공에 맨손을 내 쥐었다.
그러자 바람이 휘감기며, 나의 보이지 않는 검이 되었다.
불세출의 검 5레벨 달성 효과!
‘내가 손에 쥐는 모든 것이 나만의 검이 되는 스킬. 오랜만이군.’
무엇을 쥐더라도 검이 되어버린다.
설령 불이나 물, 공기를 쥐더라도 난 검으로 생성해 휘두를 수 있다.
‘그동안 용왕의 국검이란 뛰어난 검이 있어 그다지 쓰지 않았지만.’
불세출의 검은 자력으로 검을 생성하지만, 명검보다 성능이 떨어진다.
하나 지금은 뛰어난 검이 없는 상태라 불세출의 검을 쓰기 적합했다.
[공기로 이뤄진 무영無影의 검으로 병사 셋의 목을 갈랐습니다.]
[불세출의 검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회귀자를 척살해 올라가는 경지!
‘여기가 불세출의 검 숙련도를 올리기에는 딱 좋은 장소로군.’
나는 모처럼 뒤를 신경 쓰지 않고 회귀자 살해에 열중하였다.
외딴 용병이 혀를 내둘렀다.
“저 자식, 괴물 아니야?”
“회귀자 살해에 도가 튼 놈 같다.”
“처음 보는 놈인데, 엄청나군.”
빠르게 적을 해치워대자 병사들도 나를 보고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원래의 역사와 달리, 빠르게 강자의 직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번 삶의 진행이 원래 역사와는 다르게 바뀌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낸다!”
내가 마지막 반란군 병사의 목을 꿰뚫자, 왕정 장교가 크게 소리쳤다.
글래스가 내 어깨를 팍 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대장이 괜히 대장이 아닌걸? 저 사람들 시선 좀 봐. 우리 용병대가 역대급 업적을 세웠대!”
세베켈도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틴이 빠르게 고개를 젖혀 외쳤다.
“습격이다!”
전투가 끝났다고 안심하고 있던 우리에게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습격?’
하지만 경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해머를 쥔 채 달려오고 있는 인간의 형체가 보였다.
우습게도 우리에게 지금 다가오는 기습세력은 고작 한 명인 것이다.
‘반면에 아군의 숫자는 수백.’
전혀 전황이 바뀔 리 없는 숫자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다르게 당황한 왕정 장교가 고함을 내질러대었다.
“짙은 검은색 마스크와 해머! 제1반란군장! 지금 달려오는 저놈이 제 1반란군장이라고! 당장 놈을 죽여!”
나는 재빠르게 시선을 굴렸다.
‘지금 습격한 놈이 제1반란군장?’
저놈을 제압해야 카티에의 죽음을 막고 원래 세상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저 자식이 뭐기에 무조건 피해 다녀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저놈이 제1반란군장? 목만 취해도 왕정이 최고 보상을 내린다는?”
“반란군 수뇌부 중 한 명이라며?”
“하! 그럼 내가 상대해 줘야겠군.”
포그돈이 욕심이 그득한 눈으로 돌진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제1반란군장이 해머를 휘둘렀다.
“크어억!”
방패로 막았지만, 그 큰 체격의 포그돈이 힘에 밀려서 나가떨어졌다.
포그돈을 나가 떨어뜨린 제1반란군장은 눈빛을 번뜩이며 달려온다.
수백의 용병이 그 눈빛에 맞섰다.
“저 자식이!”
“우릴 뭘로 보고 혼자 덤벼!”
“어디 끔찍하게 회귀시켜줄까!”
막대한 수적 차이.
하나 반란군장은 물러서지 않는다.
해머를 휘두르며 뼈를 깨부순다.
수많은 용병과 동시에 싸우며 그가 쓰고 있던 마스크가 떨어져 버렸다.
‘……저 사람은.’
제1반란군장이자 내가 제압할 자.
내가 목격한 그는 광포하게 용병들을 내찢는 21회차의 헤르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