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72화
헤르탄이 쓰러지는 것을 본 나는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거워져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외쳤다.
“헤르탄!”
카티에도 모자라 이젠 헤르탄까지.
서둘러 쓰러진 그에게로 달려갔다.
몸을 숙이고 가슴에 손을 댄다.
‘……아직 숨은 붙어 있어.’
황제의 공격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버려서 온몸이 엉망이긴 했다.
조금만 더 출혈이 지체되고 시간이 지나면 그는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순간, 헤르탄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내가 지금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범…… 철.”
앞도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헤르탄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려요.”
1서클 치유마법, 별빛회복으로 그의 출혈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켰다.
그리고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복수하고 올 테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스스로가 선하다고 느끼나, 아니면 악하다고 느끼나?”
검붉게 빛나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쟌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일어섰다.
“굳이 비교하자면 악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자기합리화가 강해서.”
“나와 같은 사고방식이로군.”
“정신승리 방법이야 다양하니까.”
쟌이 검을 비척대면서 웃어 보였다.
“난 세상엔 선도, 악도 없다고 생각해. 자네와 나처럼 서로의 신념으로 부딪치는 자들만 있을 뿐이지.”
개차반 같은 논리였지만 굳이 반박하는데 쓸데없는 힘을 쓰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쟌이 입을 열었다.
“네가 회귀를 멈추면.”
쟌이 고갤 돌려 차디찬 관을 봤다.
“나는 동생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저 관에 네 동생의 시체가 있나?”
“나의 동생은 병들었거든. 회귀시점 이후로 사흘밖에는 살 수 없어.”
그가 잠시 쉬었다 말을 강조했다.
“그러니 네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반복되는 세상을. 회귀를. 결코 멈추지 마라. 내가 그리 두지 않겠다.”
“남한테서 재능을 뺏은 주제에 말을 참 번지르르하게 해대는군.”
나는 녀석의 논리를 지적하였다.
“그럼 네 병든 동생은 119번이나 죽었다는 거군. 그것도 병에 헐떡이고 괴로워하며. 그게 사는 거냐?”
“그래도 회귀를 멈추는 것보단 나아. 회귀가 멈추면 동생은 영원히 죽으니까. 나중에 동생을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글쎄, 아까부터 회귀를 멈추면 네 동생이 죽는다고 하는데, 네가 하는 소리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회귀를 멈추고, 숙원으로 네 동생을 살리면 되잖아.”
그러자 쟌이 눈살을 찌푸렸다.
“웃기는 소리군.”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 회차 목표는 ‘세 대륙의 지배자 전원 몰살’이야. 적색대륙 지배자를 죽여도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건 두 지배자를 죽였던 나뿐이지.”
“그 하나뿐인 숙원을, 나의 동생을 위해서 쓰겠다고?”
“아니. 미쳤냐.”
“…….”
쟌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힘을 줘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내게 처음부터 ‘애원’했다면, 예의 있게 비통한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했다면. 내 동료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숙원을 쓰려 했을 거다. 쟌.”
애당초 난 이루고 싶은 숙원도 그다지 떠오르지 않던 참이었으니까.
쟌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서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이군. 그래, 정신 흔드는 솜씨는 꽤 뛰어난걸.”
“네 정신이 약한 거겠지. 회귀자.”
난 카티에, 그리고 헤르탄을 봤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두 회귀자.
이제껏 다른 회귀자와는 달리 나를 믿어주고 함께 따라줬던 두 동료.
“어찌 됐든 자네가 뭘 할 수 있겠나. 지금 내게 상대가 될 것 같나?”
현재 쟌은 SSS급 재능에다가 에고 소드, 에고 실드까지 겸비하였다.
반면에 나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쥐었다가 폈다.
“네게 왼손을 빼앗겼지만, 그로 인해서 얻은 이득도 한 가지는 있어.”
“그게 무슨 헛소리지? 왼손잡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게 되었나?”
쟌이 황당해하며 비웃었다.
나는 펜타그램을 빼앗겼지만.
한 가지 이점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마법 불가 페널티가 풀렸거든.”
이득 경로가 보이는 일주일간, 마법사용이 불가한 페널티.
그러나 펜타그램을 잃어버린 내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나의 마력이 사방을 집어삼킨다.
[광범위 마법을 시전합니다.]
[대량의 마나를 소모합니다.]
[역병의 바다가 파도칩니다.]
“어디 재능끼리 한번 붙어보자고.”
곰팡이 같은 역병인자가 바닥에 쌓인 시체들을 집어삼켜 부패시켰다.
***
역병의 바다.
얼마 전 지하에서 얻은 보석을 깨뜨리고 획득한 광범위 마법이었다.
‘무려 7서클의 대마법.’
내가 자주 애용해오던 ‘화기의 뱀’은 4서클의 화염마법이었다.
그러니 ‘역병의 바다’는 그보다 3단계나 증진된 마법이란 것이다.
사방에서 끔찍한 악취가 올라오며 소악마 시체들이 부패하며 풍화됐다.
[당신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호흡할 때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오염도가 계속 1씩 올라갑니다.]
[역병의 바다는 사용자의 역량에 의해 ‘15일’ 동안 유지됩니다.]
[시전자의 일행을 제외한 모든 적의 역병 감염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차원 미로의 오염도가 1 올라갔습니다.]
[이차원 미로의 오염도가 1 올라갔습니다.]
[이차원 미로의 오염도가 1 올라갔습니다.……]
연속해서 올라가는 미로의 오염도!
‘이거라면 가능하다.’
천하의 황제일지라도 역병에 걸린다면 전투에 페널티를 입고 만다.
기침만 해도 피가 나고, 합병증을 유발하는 감염성이 뛰어난 역병!
뛰어가면서 눈을 깜빡이고, 빠르게 호흡하자 미로 오염도가 폭주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역병인자!
그러나 쟌은 오히려 웃어 보였다.
“힘으로 안 되니 병으로 이기겠다. 괜찮은 발상이지만, 조잡하군.”
그의 손에서 순간 빛이 뿜어졌다.
[황제, 쟌이 SSS급 정화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정화의 마술이 사방에 있는 역병인자를 멸균시켜버립니다.]
역병인자가 깔끔히 사라져버렸다.
‘이젠 하다 하다 정화의 재능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 이를 악물었다.
별의별 SSS급 재능을 다 가진 녀석에게 황당했지만 역병인자를 정화시키느라 방심한 지금이 기회였다.
챙강!
나는 놈이 받아친 일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쟌은 말도 안 하고 집중하였다.
나도 검의 타격에 집중하였다.
속도가 뒤처지는 것치곤 놀라울 정도로 쟌은 내 공격을 쉴 새 없이 방패로 막았지만, 빈틈은 있었다.
‘확실히 장비는 녀석이 더 좋아.’
그러나 실력은 내가 더 앞선다.
내가 노린 검격이 쟌의 뺨을 스쳤고 그의 뺨에서는 피가 잔뜩 흘러나왔다.
[쟌에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교차되는 차원이 흔들립니다.]
순간 미로가 거칠게 진동하였다.
그러나 곧 바닥은 진정되었고, 쟌은 피를 닦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교차되는 차원이 흔들린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쟌이 상처 입을수록 이곳에 뭔가 변화가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역시 검술 재능의 소유자답군. 아쉽지만 검으론 자넬 못 당하겠어.”
쟌이 재빠르게 뒤로 떨어졌다.
나는 이어서 쉬지 않고 광범위 마법을 발동시켰다.
대형화염지대!
화기의 뱀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불길이 나의 몸을 휘감았다.
나의 온몸에서 발산하는 불길!
‘원래 7서클 마법을 이렇게까지 연속 발동하는 것은 꽤나 힘들지만.’
나에겐 SSS급 마법 재능이 있다.
그런 재능빨이 나에게는 막대한 이득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쟌도 마찬가지야. 이제까지와 달리 놈도 SSS급 재능을 가졌으니까.’
재능빨이라면 저놈이 더할 것이다.
나의 몸을 감쌌던 불꽃이 일순간 발끝으로 내려와 바닥을 휘감았다.
[온몸으로부터 불꽃이 흘러 대형 화염지대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화염지대에 있는 그 누구든, 지속적인 화염피해를 입습니다.]
[진화되지 않는 화염을 소환하지만, 시전자 또한 피해를 입습니다.]
[화염지대 범위를 근방 20미터로 한정하고, 화력을 더욱 키웁니다.]
나와 쟌, 둘만을 남기고 링을 그리듯 화염이 우릴 감싸며 돌았다.
내게도 사나운 불길이 깃들었지만, 타오르는 지배자의 갑주 덕분에 딱히 이렇다 할 피해는 입지 않았다.
반면에 쟌은 불에 피부가 그슬리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가진 거물로서의 능력은 바로 남에게서 재능을 빼앗는 거지. 그런데 상대에게서 재능을 빼앗는 조건이 뭔지 아나?”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겠지.”
“맞아. 자네를 상대하던 와중에 이미 그 조건을 충족하였으니까.”
순간, 앞에 절망적인 문구가 떴다.
[황제, 쟌에게 SSS급 마법 재능을 빼앗겼습니다!]
[모든 마나에 대한 이해와 지식, 운용원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월등한 마나를 상실하고 일반인보다 모자란 소질을 갖췄습니다.]
순간 사방에서 타오르던 불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잦아들었다.
주위의 느껴지던 마나 흐름도, 몸에 가득 차 있던 마력도 사라졌다.
‘……모르겠어.’
마법의 운용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마법의 재능을 빼앗겼다는 것을.
“끝이다, 범철. 너의 삶은.”
마법의 재능은 검술과 더불어 내가 가장 자주 애용하는 재능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단 것은 내 전투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는 소리다.
지금의 나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왜, 다음 회차의 너한테 어떤 말이라도 전해 줄까?”
쟌의 어조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화내지 않았다.
마법 재능은 그저 미끼였으니까.
“네가 한 번에 모든 재능을 뺏을 수 있다면 진작 초면에 그랬겠지.”
그러나 쟌은 그러지 않았다.
그 말은 재능을 하나씩 뺏을 때마다 사이사이 시간이 필요하단 거다.
나는 뒤로 감추었던 달빛 낚싯대를 꺼내서 힘차게 낚싯줄을 내던졌다.
“……!”
쟌은 경계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내가 노린 것은 놈이 아니다.
만물낚시!
황금빛으로 물든 낚싯줄이 녀석의 품을 파고들고 어떤 물건을 훔쳤다.
낚싯바늘에 꿰여서 딸려온 물건은 얇고 작은 휴대용 경전이었다.
[관찰 스킬과 칭호 효과를 무시하는 ‘베일의 경전’을 훔쳤습니다.]
[솔로몬 교의 신자만이 사용 가능하며 월등한 마술 실력자일수록 효력이 증대하는 물건입니다.]
[단, 일정 시간마다 경전에 쓰인 솔로몬 말씀을 읊어야만 합니다.]
“이런 망할, 불신자 자식이…….”
쟌은 이를 갈았지만 내가 빨랐다.
비록 외손일지라도 순발력까지 줄어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쩐지 동굴 초반에 네가 자꾸 경전 어구 읊는 게 수상하다 싶었지.”
내가 휴대용 경전을 짓밟아서 갈기갈기 걸레 조각처럼 만들어버렸다.
[신화등급 칭호, ‘거물에게 저항하는 파괴자’가 발동됩니다.]
[거물을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거물의 특수능력이 당신에겐 별 특별한 효과를 미치지 못합니다.]
[회귀자 살해 재능이 발동됩니다.]
줄곧 의문이었다.
쟌이 거물로서 가진 특수능력이 재능을 빼앗는 것이라면.
왜 ‘거물에게 저항하는 파괴자’ 칭호를 가진 내게 능력이 통한 걸까.
그리고 왜 저놈은 본체인데도 회귀자 살해 재능이 발동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이 경전으로 칭호와 재능의 효과를 무시해왔던 거였어.’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추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책이 품에 있었군. 보물탐색 재능으로 찾는데도 한참 걸렸어.”
이제야 비로소 내 눈에 잔을 살해하기 위한 변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쟌》
설명: 황제라는 별명의 거물. 다재다능하며 처세에 강하다.
*고급감정(Lv3)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SSS급 재능을 빼앗는 특수능력을 지녔다. 해당 능력 발동조건은…….
고급감정이 3레벨이 되어서일까.
쟌에 대한 정보에는 능력 발동조건까지 깔끔하게 서술이 되어 있었다.
나는 빠르게 정보를 속독하였다.
[해당 회귀자가 기피하는 변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나는 곧바로 속으로 긍정하였다.
[펜타그램이 소실되어 상위변수창출확률이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최하급 변수 3개 획득!]
『쟌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출신에 관해서 놀리면 그는 아주 짜증 낼 것입니다.』
『그의 동생의 관에다가 오줌을 싼다면 쟌은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쟌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10번의 삶을 빠르게 숨질 수 있습니다.』
[최고급 변수 2개 획득!]
『해당 장소에서 쟌이 가장 두려워하는 행위는…….』
최하급 변수 3개와 최고급 변수 2개!
펜타그램이 없어져 상위변수가 나올 확률은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쟌이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를 장비한 덕에 강함의 격차가 커져 최고급 변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변수는 설마…….’
나의 이상행동을 눈치챈 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었다.
“잡담이 너무 길었군. 이제는 마지막. 너의 차례가 되었다.”
쏟아지는 빛의 세례!
스치기만 하여도 왼손을 잃었을 때처럼, 접촉부위가 다른 세계로 이전하게 되리라.
나는 다급히 도망치며 생각하였다.
‘그곳! 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해.’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지만, 쟌은 어느새 나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에고 소드의 이동기 마법!
“커헉!”
매서운 에고 소드를 휘두르자 내 뼈 갑옷의 겉 부분이 일렬로 부서졌다.
뒤로 몇 걸음 빠르게 물러나지 않았다면 내장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쓰러지지 않고 독기를 품은 눈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이거지?”
내가 잡은 것은 바로 어느 커다란 차원 문의 ‘문고리’였다.
그러자 쟌이 처음으로 당황해하며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안 돼! 이런 멍청한 자식! 그 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될……!”
그러나 그런 놈의 말을 무시하고.
미로 벽의 대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익……!
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른 세계의 존재가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