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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71화 (171/200)

나만 1회차 171화

우습게도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다.

19살 때, 처음 이계에 떨어진 날.

나는 갈 곳을 잃고 세상을 헤맸다.

‘무서웠으니까.’

검과 마법, 낭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러나 내가 이계에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내가 살던 현실과는 달랐지.’

한 도시에 10년간 눌러앉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줄곧 평안한 일상을 원해왔으니까.

‘온 관계가 말썽거리 같았다.’

원예가로의 삶은 무난하였다.

그러나 술친구는 몰라도 진정한 친구라 부를만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만큼 새로운 세상에서의 ‘관계’가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소중해지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잃게 되고 마는 거니까.’

누군가 내 마음을 열고 들어와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소중해지든, 미워지든 깊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골칫덩이가 될 테니까.

그만큼 나는 트러블이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지 않던 관계를 형성한 인물이 수도 없이 많아졌다.

기억도 못 하는 전생에서의 관계가 나의 인생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을 만났다.’

무엇을 해도 날 사랑하는 여자.

무엇을 해도 날 섬기려는 남자.

그리고 친구로서 길들여진 용.

평안한 삶을 지향하기는 했었지만.

나는, 외로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과의 관계가 좋았으니까.

‘어느새 소중해졌다. 골칫덩이라 여겼던 깊은 인간관계가. 처음으로.’

그런데 그런 소중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피투성이가 됐다.

사고로 정지됐던 세계가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쿨럭!”

쟌이 내던진 카티에가 피를 토했다.

‘제기랄. 몸아, 제발 움직여라.’

행동불가 페널티 때문에 비참하게도 나는 걸어갈 수조차 없었다.

나는 비척이며 그녀에게 기어갔다.

“왜, 왜…….”

피에 젖은 그녀를 보고 난 놀랐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의 무식함에 감탄했다.

“왜 울지 않고 있어?”

참 멍청하게도 놀란 나의 입 밖에서 나온 말이라곤 그딴 개소리였다.

그러자 카티에가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니까요. ……죽음은.”

뺨이 너무 뜨겁다.

콧날이 시큰거린다.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번 삶은…… 여기서…… 끝나네요.”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제기랄.

망할, 쪽팔리지도 않냐?

봐, 카티에도 울지 않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왜 울고 있는 거냐고.

“……대장.”

카티에가 피에 젖은 손을 들었다.

희미한 숨소리가 자꾸 끊기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명확히 들렸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만일 이번 삶에서도 회귀를 멈추지 못한다면.”

오히려 카티에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피에 젖은 손이 뺨을 쓰다듬는다.

“다음 삶에도 찾아갈게요. 꼭.”

자그마한 왼손은 따스했다.

나의 뺨을 훑는 손바닥에서는 끔찍한 빛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성녀 카티에 로넬야드가 기적을 발휘하였습니다.]

[당신의 모든 탈진증상, 저주, 페널티가 치유돼 축복에 걸립니다.]

[각 능력치가 20% 상승하며 마술에 대한 내성이 크게 오릅니다.]

나는 일어섰다.

몸이 말을 듣기 시작한다.

뼈가 붙고 온몸에 힘이 깃든다.

“쟌.”

피에 젖은 카티에를 내려둔다.

갑주에 불이 타오르고, 벼락같은 격노가 나의 온 육신을 휘감았다.

“처맞으며 죽는 것이 가장 아프다고 했었지?”

***

“설마 마지막 기적을 쓸 체력이 남아있었다니. 보기보다 독한 성녀군.”

격노로 일그러진 나와는 다르게.

쟌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나는 자네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런데 이 짓을 하는 거냐?”

“정말 사실이야. 나는 ‘지금은’ 자네와 절대 싸울 생각이 없다고.”

쟌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이 찢어지며 균열에서 괴생물 군단이 쏘아져 나왔다.

“큐라아아악!”

뿔이 나 있고 흉포한 소악마들!

그러나 그 악마군단조차 나는 그냥 스치듯 지나가 버릴 뿐이었다.

“순서를 지켜. 먼저 죽이는 건 자네 동료야. 자네는 마지막이라고.”

피를 탐하는 소악마들이 돌격하여 탐사단 전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아, 아파! 아프다고!”

난 카티에를 얼른 끌어안고 칼로 소악마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제기랄, 헤르탄!”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헤르탄은 커다란 덩치 탓에 소악마 떼에 휩쓸리듯이 몰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소악마를 때려죽였지만 소악마들은 끊임없이 덤볐다.

헤르탄의 이곳저곳이 물어뜯기며 소악마 떼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가 불타는 눈동자로 잔을 봤다.

그러나 분노와는 별개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왜 지금 녀석한테 회귀자 살해 재능이 발동되지 않는 거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쟌은 분명 본체였다.

그런데 어째서 회귀자 살해 재능이 발동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쟌은 어깨만을 으쓱였다.

“논리가 통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자네를 이해시키도록 하는 거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희 동료 둘이 죽게 되었잖아.”

쟌의 입은 즐겁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사납게 분노하고 있었다.

“자. 이제 진심으로 궁금하군. 어쩔 건가? 회귀자 동료 둘이 죽게 생기지 않았어. 참 소중한 둘이지? 그런데 어째? 회귀를 멈추더라도 죽어버린 두 사람은 영영 살아오지 못해.”

쟌은 새까만 관 옆에 섰다.

소악마들이 쉴 새 없이 날뛰는 와중에도 그곳만은 아주 깨끗했다.

“자, 이래도 회귀를 멈출 테냐? 내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게 됐지? 넌 고작 동료지만, 난 동생이라고!”

헤르탄 쪽과 쟌 쪽을 번갈아 보던 난 칼을 들고 놈을 세게 노려봤다.

쟌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뭐야? 동료를 구하지 않을 건가?”

“시전자는 네놈이다. 너만 죽이면 소환된 소악마들도 없어지겠지.”

나는 자세를 낮추고 돌격했다.

쟌이 여유롭게 마술로 나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롬!”

내가 품에서 검붉은 검을 풀고 녀석을 향해서 힘껏 내던졌다.

본능적으로 에고 소드를 잡은 롬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롬! 내가 왔어, 이제 정신 차려!

자아보존무구인 에고 소드가 일갈을 하자 롬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롬은 잔의 뒤쪽을 노려 방패를 찍었고, 나는 검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앞과 뒤, 모두 노린 쌍방공격!

그러나…….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지. 물론 제정신이었을 때 말이야.”

나는 뒤로 세차게 튕겨 나갔다.

어느새인가, 롬은 쟌의 팔에 들려져 있었다.

키가 너무 큰 롬이었기에, 쟌의 손은 그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크, 크헉!”

-롬!

-롬!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가 비명을 질렀고 롬은 피를 토하며 버려졌다.

쟌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이봐, 범철. 난 줄곧 맨손인데 너만 무기를 든 건 불공평하지 않아?”

황제는 검과 방패를 주워들었다.

쥘 수도 없을 만큼 격렬히 진동하는 무구들이었지만, 황제의 손에 닿는 순간 반항이 점차 잦아들었다.

[쟌이 SSS급 약탈 재능과 SSS급 마술 재능을 동시에 발휘합니다.]

[재능의 합성!]

[쟌이 강제적으로 에고 소드, 에고 실드에게 복종세뇌를 겁니다.]

[강한 마술의 힘을 에고 소드, 에고 실드는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쟌은 시푸른 방패를 갖추고 검붉은 검을 쳐들며 내게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전투에서는 무기를 들고 싸워야 제맛 아니겠나. 안 그래?”

***

황제가 롬의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를 빼앗아 장비했다.

그 행동이 야기하는 바는 컸다.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는 롬이 거물로서 가진 모든 능력이었다.

그런데 쟌은 그 두 무구를 동시 장비해 그 능력마저 가져가 버렸다.

“아주 좋은 무구야. 이렇게 날이 깃든 검과 훌륭한 방패를 역으로 쓰다니. 보는 입장에선 천인공노할 노릇이지.”

쟌이 검신을 검지로 쓸자, 에고 소드가 검붉게 빛났다.

‘저놈, 대체 SSS급 재능을 몇 개나 가진 거지?’

재능으로 에고 소드와 에고 실드를 강제로 빼앗았을 뿐 아니라, 어째선지 회귀자 살해 재능도 안 통한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째서 눈앞의 남자가 적색대륙 최강의 회귀자인지 새삼 이해가 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난 등 뒤에서 싸늘한 살기를 느꼈다.

“흡!”

에고 소드의 이동기 마법!

어느새 고갤 돌리자 비소를 짓는 놈의 숨결이 가느다랗게 느껴졌다.

순간 난 공포가 몸에 스며들었다.

‘죽는다. 정말로. 지금 이놈한테.’

지금껏 죽을 위기는 수없이 겪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단 느낌이다.

“잘 가게, 한 번 사는 친구.”

쟌이 모든 것을 벨 듯 예리한 에고 소드로 마무리를 지으려던 찰나.

파가각!

바닥에서 자라난 온갖 질긴 넝쿨이 우거지며 쟌의 몸을 칭칭 감았다.

“……!”

목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못할 만큼 입, 눈, 귀까지 넝쿨에 휘감긴다.

그리고 폭화초가 피어나더니 쟌의 몸 가까이에서 터져 버렸다.

콰가가가광!

나조차 폭발에 휘말리기 직전, 나를 구한 것은 바로 헤르탄이었다.

그의 육신은 핏물과 이빨 자국투성이였고, 뒤쪽에는 해치운 소악마의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방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식물의 씨앗을 썼습니다.”

“그럼 황제는…….”

“잠시 묶어둘 뿐입니다. 조금 있으면 놈은 다시금 움직일 겁니다.”

난 헤르탄의 상처를 보고 놀랐다.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이 경악스러울 만큼 아주 심각한 중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 그대로의 침착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헤르탄! 상처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황제가 우릴 쫓아올 겁니다.”

우리는 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미로의 저 너머 공간으로 움직였다.

몸이 묶인 쟌에게서 떨어졌을 때, 헤르탄이 냉정히 나를 바라보았다.

“적색대륙에 오기 전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전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하셨어야 합니다.”

“그야 당연히……!”

“이것만은 아십시오. 범철.”

헤르탄이 차갑게 내 말을 끊었다.

“카티에가 그대를 지키려는 것만큼이나.”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전 그대가 죽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파악 쥐었다.

헤르탄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카티에가 줄곧 나 몰래 무언가를 써오던 필기장이었다.

“카티에가 저한테 맡긴 것입니다.”

“이게 뭔데요? 도대체 뭐기에 카티에가 그동안 저 몰래 썼던 겁니까?”

“120회차를 통틀어 저와 카티에가 기억하는 모든 전생지식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상세히 축약하느라 집필이 좀 걸렸습니다.”

“예?”

순간 난 머리 뒤쪽이 뜨거워졌다.

헤르탄이 ‘무슨 의도’로 나에게 이런 책을 건네주는지 깨달았으니까.

“저희가 죽더라도 이 책이 범철의 여정을 끝까지 도울 겁니다.”

나는 이빨을 세게 악물었다.

그러나 헤르탄은 설명을 이었다.

“최소한 전생지식 때문에 회귀자한테 밀리거나 살해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유의할 사항과 전생의 원수 또한 적혀져 있습니다. 거기다 어지간한 회귀자도 잘 알지 못할 히든 피스나 숨겨진 비기들을…….”

“필요 없습니다. 이딴 책 따위!”

나는 곧장 이를 악물면서 헤르탄이 내밀고 있던 필기장을 내쳤다.

필기장이 바닥을 구르며 더러워지고, 페이지가 흩날렸다.

“내가 내게 없는 전생지식이나 보충하자고 두 사람과 함께 다녔다고 생각합니까?”

도저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헤르탄의 이런 행위가 이번 삶이 ‘처음’은 아니었을 테니까.

“이런 책을 전생에서 몇 번이나 나한테 넘겨줬죠? 그래서 그렇게까지 늘 침착하고 담담할 수 있는 겁니까? 이렇게도 여러 번 죽어봐서? 이조차도 여러 번 해봤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없으면 회귀를 멈추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차라리 나도 여기서 함께……!”

짜악!

“사십시오.”

그가 때린 내 뺨이 붉어졌다.

동료에게 처맞은 얼얼한 충격과 함께 뜨거웠던 머리가 식혀진다.

헤르탄의 말은 짧았다.

“사십시오. 살아남으십시오. 죽지 마십시오.”

나의 머리에 상황을 인식시키기 위해, 그가 반복해서 계속 말하였다.

“명심하십시오. 깨달으십시오. 현실입니다. 바꿀 수 없습니다. 억지 부릴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곧 죽습니다. 저 위압적인 거물에게. 그대는 이곳에 남습니다. 버림받은 120회차에.”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저편에서 뭔가 끊어지고, 누군가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르탄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살아라.”

그는 걸어갔다.

기억 못 하는 전생의 나의 신하.

“죽지 말고 견뎌내 살아가라. 그것이 나의 왕이 갖출 유일한 의무다.”

떠나던 그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여주었다.

“우리가 없더라도, 그대는 살아가야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쳐 피투성이가 된 등이 보였다.

“시간을 끌겠습니다. 피하십시오. 어디로든.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그 말을 끝으로 헤르탄은 뛰었다.

내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헤르탄!”

불빛이 쏟아지고, 피가 튀었다.

스러진다.

……나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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