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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70화 (170/200)

나만 1회차 170화

유랑자.

솔직히 그동안 하도 많은 일이 벌어져서 ‘유랑자’에 대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세상을 방랑하고, 인과율을 비틀 수 있는 자.’

선인지 악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조차 확실치 않다.

어째서인지 나에게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는 데다가, 나한테 자신의 조수가 되겠냐고 제안했던 작자였다.

‘멸살군주와의 싸움에서 날 도왔고 폐성의 파티에서 직접 만났었지.’

나를 도와주는 것은 인과율 탓에 더 이상 개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런 쪽지를?

“‘유랑자’에게서 쪽지가요?”

“의문이 크군요. 어째서 지금.”

“어서 열어보라는 것이야!”

일행이 재촉했고, 쪽지를 열었다.

그러나 새하얀 종이의 단면에는 글씨가 전혀 적혀져 있지 않았다.

앞과 뒤를 모두 살펴봤지만, 토씨 하나 없는 흰 공백에 불과하였다.

“……아무것도 안 적혀져 있는데?”

“설마요!”

카티에가 내게서 뺏듯이 쪽지를 가져가 살펴보았지만, 공백뿐이었다.

헤르탄은 인중을 쓸었다.

“혹시 암호일지도 모릅니다. 불 위에 그슬리면 글씨가 나온다든지.”

불도깨비 비환에게서 선물 받은 화로를 꺼내고 불 위에 쪽지를 그슬려 봤다.

그러나 종이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뭘까요? 흰 종이만 주다니.”

“설마 그 유랑자가 쪽지를 잘못 넘겨준 것은 아닌 것이야?”

분명 유랑자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방관만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쪽지를 넘긴 거지?

헤르탄이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은 내용은 비었지만, 계속 범철이 갖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범철에게 온 쪽지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랑자가 보낸 쪽지를 품에 챙겨 넣었다.

“피곤하군요. 너무 지쳤어요.”

샬이 피로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하여간 오늘은 미로의 50%에 도달했으니 굉장히 무리한 것이었다.

모두가 지쳐서 금방 잠에 들었다.

“넌 여기서 안 자냐?”

“……됐어.”

아기 로크는 혼자 구석에서 깃털 수북한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잤다.

어지간히도 인간에게 경계가 쌓여 신뢰가 가지 않는 모양이로군.

나도 자려고 눈을 감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를 쿡쿡 두드렸다.

“범철. 잠깐 괜찮겠습니까?”

헤르탄이었다.

***

“왜 그럽니까, 헤르탄?”

날 따로 부른 헤르탄은 담담한, 그다지 밝지는 않은 얼굴로 말하였다.

“이번 적은 만만치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제, 쟌.

재능을 빼앗는 녀석이니만큼 많은 SSS급 재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 싸웠던 그 어떤 거물보다도 가장 강력할지 모르죠.”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문을 틔고 한 차례 쉬었다.

“‘굳이 이제 와서’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헤르탄은 담담하게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곳에서 우리는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헤르탄이 어째서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딱히 없으니까.

오히려 난 지금 위험한 만큼 더욱 신중하고 노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거야 항상 있던 일 아닌가요?”

“범철.”

헤르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이런 충고를 하는 경우는, 항상 회귀하기 직전이란 예상이 들었을 때뿐입니다.”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 얼굴이 굳어가는 게 느껴진다.

“범철은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헤르탄의 어조는 늘 그렇듯 침착했다.

“그것은 오만입니다.”

“어딜 봐서 말입니까?”

“목표하는 바를 이루는데 아무런 희생을 겪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헤르탄.”

나는 신경이 돋아서 반박했다.

“그걸 누가 정한 겁니까? 누구도 죽게 하지 않는다. 그게 왜 오만이죠?”

“지키지 못했던 회차가, 범철이 해내지 못한 회차가 수도 없습니다.”

“이번 회차는 다를 겁니다. 내가 획득한 재능만 해도 많아요. 거기다 실제로 대륙지배자를 둘이나…….”

“예전에, 제가 죽는 미래를 보셨다고 하셨지요.”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헤르탄은 날 무심히 바라보았다.

“기회가 생기면, 전 황제와의 싸움에서 범철을 지키다 죽을 겁니다. 이번 삶의 가치는 그거면 됩니다.”

어느새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어느 전생에서, 그대에게 맹세했으니까요. 모든 것을 다 바치기로.”

헤르탄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그간 보며 회귀자의 눈동자는 빛이 죽은 보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찬란했던 빛도, 싱그러운 영채도 사그라져버린 싸늘하고 슬픈 보석.

그래서 때로는 보고 싶었다.

저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전생을.

“범철. 나약해지지 마십시오. 희생을 각오하는 것도 그 과정입니다. 저희가 없더라도 마지막 적을 죽이러 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멍청하게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어째서 그가 날 따로 불렀는지를.

“이번 싸움, 혹은 그 이후에도 저나 카티에가 죽더라도 이를 위해 숙원은 낭비하지 마십시오. 저흰 범철을 위해서 마지막 삶을 소비하더라도 일말의 후회조차 없으니까요.”

나는 주먹을 떨리도록 꽉 쥐었다.

“그대에게는 ‘우리를 희생할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뻗지도, 내밀지도 못하였다.

“그저 이 말만을 하고 싶었습니다. 숙면을 방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헤르탄은 정중히 내게 고갤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서 걸어갔다.

혼자 남은 나는 이를 악물고 차마 뻗지 못한 주먹을 바라볼 뿐이었다.

***

“내 노예가 헤르탄과 싸웠던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따지고 물었지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헤르탄도 평소와 같은 눈빛이었고, 나도 평상시와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대화를 하지도,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우리 둘 사이의 차가운 거리감을 느낀 퀸소히니베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 노예와 헤르탄이 사랑싸움을 한 것 같다는 것이야.”

그러자 카티에가 픽 웃었다.

“웃기고 있네요. 댁도 블라이넨이랑 싸운 다음에는 저랬나 보죠?”

퀸소히니베가 곧장 으르렁대었다.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전 애인 이야기를 꺼낸 것이야?”

“어머, 전 애인이었던가요? 못 본 지 오래되어서 벌써 까먹었네요.”

“웃기지나 말라는 것이야. 절대 잊지 못하는 기억력을 가진 주제에.”

퀸소히니베가 카티에를 잔뜩 쏘아보다가 고개를 휘젓고 말하였다.

“그런데 항상 죽이 잘 맞던 둘이 싸우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야.”

“헤르탄이 저래 봬도 회차 초기엔 대장한테 꽤나 많이 죽었어요.”

“어째서 말인 것이야?”

“덤볐으니까요. 대장한테 엄청.”

“그게 참말인 것이야? 저 침착하고 냉정한 헤르탄이 그랬었다고?”

“전생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속삭이는 잡담 소리는 들렸지만, 나는 굳이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서로 입을 다물고 걷고 있자 탐사단조차 우리 눈치를 봤다.

아기 로크는 그런 분위기는 신경 쓰지 않고 우릴 안내하며 자기 할 말을 했다.

“이쪽 길로 조금만 더 가면 휴식할 만한 곳이 나올 거야.”

“황제가 있는 곳엔 언제 도착하지?”

“한참 더 가야 해. 황제는 자신의 방에 있을 거야. 이곳 미로는 여러 세계의 마력이 흘러들어서 황제도 자신의 환영을 보낼 수는 없거든.”

“황제는 늘 적한테 자기 환영을 보내서 싸우는 건가?”

아기 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스스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아. 조심성이 심하게 많으니까.”

확실히 깊이 들어갈수록 이차원 미로 벽에는 각양각색 문이 빼곡했다.

“어째 갈수록 차원문의 숫자가 늘어나는데.”

“조심해. 문을 잘못 열었다가 아주 끔찍한 세상과 통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로크는 낡은 문고리를 잡고 문 하나를 열었다.

샬이 기겁하면서 말했다.

“막 열어도 되는 겁니까? 잘못 열면 끔찍한 세상과 통한다면서요?”

“위장용 문이야. 미로를 빠져나와 황제의 거처로 가는 지름길이지.”

아기 로크가 연 낡은 문 너머에는 그리 크지는 않은 평방이 보였다.

미로에 있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도록 옅은 잔디와 꽃이 있는 장소.

널찍한 평방의 중앙에는 고풍스럽게 제작된 기다란 관이 보였다.

“저건 관이잖아?”

“왜 이차원 미로에 관이 있죠?”

그러자 아기 로크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나의 동생의 관이야.”

황제는 친절히 답하고 움직였다.

탐사단 한 명의 목이 찢겨졌다.

촤아악!

다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쟌은 오른손에서 뿜어진 빛을 잠재우고, 뺨에 튄 피를 닦았다.

“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 여기서 자세 잡고 대기하느라 진 빠졌어.”

우리 모두가 각자 놀라 움직였다.

“화, 황제다!”

“다, 다들 전투를 준비해!”

우리 전원과 대치한 쟌이 롬을 보고서는 짝다리를 짚으며 웃었다.

“오래간만이군. 롬. 백치가 됐으면서도 날 기억해 주다니 영광이군. 어지간히도 복수심이 강했나 보지?”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롬이 울부짖으며 방패로 돌격했다.

그러나 쟌은 그대로 서 있었다.

딱히 수인을 긋거나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 주위에 어둠이 피었다.

“백치인 자네가 그렇게 잘 싸울 수 있는 것은 자아보존무구 덕분이지?”

[어둠의 마술이 행해졌습니다!]

[상대의 SSS급 정신지배 재능이 마술에 부가적 효과를 더합니다.]

[에고 실드가 착란을 일으킵니다!]

-아아악! 머, 머리가!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방패가 혼란스러워하자 파트너였던 롬도 당황해하며 멈춰서 버렸다.

아기 로크가 이를 갈면서 외쳤다.

“네놈이 어떻게 미로에! 너라도 여기까지 환영을 보내진 못할 텐데!”

“내가 일일이 너의 논리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단다. 아기 새야.”

아기 로크는 당장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위압적인 눈빛의 쟌이 날려 하는 아기 로크의 목을 낚아챘다.

“꺄아아악!”

“부활했나? 어쩐지 아담해졌군.”

“끼힉…… 끄흑……!”

쟌이 고개를 갸웃대며 비틀었다.

“두 번째 부활도 가능한가? 확인해 보고 싶은데 말이야. 진심으로…….”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빠르게 검을 들고 기습한다.

그러나 놈의 반격은 신속했다.

“자네는 잠시 가만히 있어. 체험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순간 엄청난 힘이 담긴 주먹이 나의 복부를 맹렬하게 후려쳤다.

“크흑!”

나는 순간 피를 쿨럭 토했다.

‘환영이…… 아니야.’

황제, 쟌의 주먹이 제대로 닿았다.

이제까지와 달리 놈은 환영이 아닌, 본체가 직접 등장한 것이다.

타오르는 지배자 갑주가 있는데도 막강한 힘 탓에 격통이 느껴진다.

[갑주의 21%가 갈라졌습니다.]

[황제, 쟌이 SSS급 권투 재능과 SSS급 마술 재능을 합성합니다.]

[재능의 합성!]

[모든 기력을 빼앗겼습니다!]

[반나절 간 행동불가 페널티를 입습니다.]

주먹 일격에 빼앗겨버린 기력!

뼈 갑주가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고통이 저릿저릿하게 느껴져 왔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노력했지만 몸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제…… 기랄!”

“다들 조심해! 저놈이 마술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어!”

“상대는 황제야! 적색대륙 최강의 회귀자라고!”

모두가 전투를 준비하고 잔을 노리려 했지만, 놈의 목표는 하나였다.

왼손에서 끔찍한 빛을 내뿜으려던 카티에가 뒷덜미를 붙잡혀 버렸다.

“꺄아아악!”

“기적. 천한 황색대륙에서 유일하게 경계할만한 무기이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도 불린다고 했었나?”

“끅…… 끄흐흑!”

“내가 빼앗지 못하는 재능이라 유감이군. 기적만 한 재능은 없는데.”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불타는 눈빛으로 입에다 벼락을 머금었다.

“당장 그 손 놓으라는 것이야.”

“용. 자네는 길들이려고 했지만, 생각이 좀 바뀌었어. 잠들어 있으라고.”

쟌이 손가락을 삐죽 내밀자 퀸소히니베의 몸에 푸른 연기가 휘감겼다.

[청의 마술이 사용했습니다.]

[용에게 수면 욕구를 키웁니다.]

[SSS급 마술 재능이 용의 강력한 저항력을 강제로 무시합니다.]

“이런…….”

퀸소니히니베가 이를 갈며 벼락을 토하려 했지만 결국 수면에 빠졌다.

쟌에게 목을 졸리는 카티에가 괴로워했고, 난 일어서려 악을 썼다.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지만, 힘이 부족해 움직이지 못했다.

“끄흑……, 끄흐윽……!”

목이 졸리는지 카티에는 숨도 못 쉬지 못하고 쌕쌕대기 시작하였다.

“저런. 질식사는 너무 빠르고 편한 죽음 아닌가. 회귀자라면 다 알지.”

쟌은 주먹을 들고서 휘둘렀다.

“아사. 중독사. 복상사. 수많은 죽음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처맞으며 죽는 게 제일 아프더라고.”

카티에는 격렬히 저항하려 했지만, 주먹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리고, 살결이 찢기고 핏물이 터졌다.

카티에가, 폭행당하고 있었다.

“으그윽……!”

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핏줄이 서고 제정신도 아니었다.

그런 격노 속에서 녀석이 말했다.

“범철.”

황제, 쟌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피투성이가 된 카티에를 비틀었다.

“원한다면, 회귀를 멈춰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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