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61화
고풍스러운 검과 방패를 역으로 찬, 헤르탄을 뛰어넘는 거한의 회귀자.
내가 본 자는 바로 ‘불세출의 검사’이자, 동시에 ‘거물’인 롬이었다.
‘지난번에 회귀자의 무덤에서 싸웠다가 사라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솔직히 그때는 싸운 것도 아니고 저놈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텄다.
그런데 설마 드워프의 도시에서 저놈과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여기엔 뭐하러 온 거지?’
롬은 어딘가 희번득한 눈동자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걷는 동작이 뭔가 과격해 광인이라 느껴질 수준이다.
‘카티에 말론 분명 백치라 했었지.’
하지만 난 롬과 직접 싸워보았다.
그래서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방패로 공격하고, 검으로 방어하는 그의 싸움법은 어딘가 희한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강했으니까.
‘백치라고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싸우는 모습을 봐서는 전혀…….’
롬은 백치라 회귀자임에도 밴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나 아무리 봐도 백치의 그것이라 보기엔 그의 싸움은 너무 정교했다.
‘어찌 됐든 간에 여기서 마주치는 건 좋지 않아. 그냥 피해가야…….’
그 순간 롬이 멈췄다.
“…….”
녀석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온다.
“……?”
나와 퀸소히니베는 숨을 삼켰다.
최대한 숨죽여 뒷골목에 숨어 있었는데, 망할 설마 벌써 들킨 건가?
그러나 롬은 이쪽을 바라보다 멈칫하더니 그냥 혼자 걸어갈 뿐이었다.
녀석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고작 인간 주제에 용을 이렇게나 살 떨리게 만들다니. 내가 원래 모습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불만스레 한숨을 토했고, 나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너희는 안 돌아가고 계속 여기 있냐?”
나는 숨어 있다가 벽에서 튀어나오는 유령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적을 처치하란 내 명을 완료했는데도 유령기사단은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의 낯익은 기운이 우리가 명계로 귀환하는 걸 막아주고 있다.」
「어째 기분이 미묘하구만그래.」
「꼭 우리가 여기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아까부터 쭉 느꼈지만, 유령기사들과 이곳이 뭔가 연관이 있나 보다.
‘시체가 출현하는 도시라 그런가?’
이유야 어찌 됐든 유령기사들은 계속 이곳에서 함께하기로 했다.
“저 종이 아마 근원인 것 같은데.”
그러나 시계탑 문은 잠겨 있었다.
퀸소히니베가 시계탑의 꼭대기로 날아가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결계에 틀어 막혀 접근하지 못했다.
[탑의 결계는 모든 언데드를 쓰러뜨려야만 해제가 됩니다.]
[제4의 종소리를 기다리십시오.]
‘결국 저 종을 부수려면 출현한 언데드를 모두 죽여야 한다는 건가?’
우선,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이미 모두 밴시 후유증을 극복하고 얼추 정신을 다시 차렸다.
“그럼 도시에 배회하는 언데드를 처치해, 그 종부터 파괴해야겠군요.”
헤르탄이 끄덕였고, 사지가 부러진 남자를 치료하던 카티에는 놀랐다.
“이곳에서 롬을 만났다구요?”
“맞아. 그래서 의아해. 그놈이 여기는 왜 온 걸까?”
“글쎄요. 롬도 성좌의 금속 제조법 따위를 탐내서 온 걸까요?”
하여간 나는 롬에 관해서 가진 의문점을 카티에한테 물어보았다.
“그런데 롬은 어떻게 백치라면서 그렇게 검, 방패로 잘 싸울 수가 있는 거냐? 그건 일반인이 아니라 천재의 몸놀림이었어.”
“그건 저도 알지 못해요. 하지만 대장도 느끼지 않았어요? 롬은 ‘너를 죽일 것이다’란 말밖에 하지 못해요. 머리가 정상은 아니란 거죠.”
그런데도 싸움은 천재적이라니.
어쨌든 여기서 롬과 되도록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피해서 다녀야겠다.
좌절하고 있는 탐사단 중에서 그나마 침착해 보이는 샬이 다가왔다.
“그럼 일단 그 종을 부술 겁니까?”
“예. 그래야만 하겠군요. 이 도시에서 무사히 탈출하려면 말이죠.”
우리 모두가 종탑에 접근했을 때, 다시금 종이 큰 소리로 울어대었다.
뎅-! 뎅-! 뎅-! 뎅-!
네 번의 청아한 종소리.
동시에 도시 곳곳에서 몬스터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제4의 종이 울렸습니다.]
[혼을 탐닉하는 상급 스켈레톤이 출현했습니다.]
“끼에이이익!”
온 뼈가 굵은 스켈레톤이 광장 곳곳에 출현해 우리 모두를 노려왔다.
숫자는 어림잡아 200마리 정도.
방금보다 수도 많고 소환된 몬스터도 무척이나 강력해 보였다.
「이놈들, 처치가 꽤나 어렵군.」
「그래 봤자 한낱 뼛골. 우리의 검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12인의 유령기사단이 그대로 가세하여 전투는 평소에 비해 쉬웠다.
거기다 탐사단 단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싸웠다.
‘스켈레톤이지만 상급답게 뼈가 붙어도 재생하고, 방어력도 드높군.’
뼈를 던지거나 울부짖어 아군의 사기를 깎아버리는 상급 스켈레톤!
상대가 너무 강했기에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아아악! 살려줘!”
“배, 밴시! 반이 밴시가 됐어!”
죽은 자는 그대로 밴시가 된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나는 미리 밴시를 퇴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빈사자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밴시가 되는 순간, 마법으로 급습한다.
「끼에이이익!」
밴시가 피할 새도 없이 처치한다.
다들 누군가 죽으면 밴시가 될 것을 알기에, 회귀자임에도 이번 삶을 포기할 생각 없이 죽을 힘을 다했다.
모든 언데드를 처치하고 회귀자들이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쉴 때.
끼이익.
시계탑의 문이 열렸다.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자 자동적으로 시계탑의 결계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도대체 드워프가 살아가던 도시가 어째서 던전화 되어버린 걸까?’
그런 의문이 앞섰지만, 일단은 이 도시부터 벗어나고 알아야 한다.
“퀸소히니베.”
“알겠다는 것이야.”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시계탑으로 날아가 악력으로 종을 부숴버렸다.
[종을 부쉈습니다.]
[도시의 핏빛이 지워졌습니다.]
그러자 광장의 지면이 흔들렸다.
기괴한 문이 올라와 열렸다.
문의 안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기괴한 계단이 엿보였다.
[‘정체 모를 자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개방되었습니다.]
[지하보다 깊은 심연에는 더욱 무서운 몬스터들이 기다립니다.]
[핏빛의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위험한 심연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정체 모를 자의 무덤?”
“그게 도대체 누구 무덤인데?”
“이름만 봐서는 이곳보다 더욱 난이도 높은 던전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12인 유령기사단은 모두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 기사유령이 드물게 흥분해서는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단장님의 무덤이었군! 우리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해줄 기사단장님이 이곳 아래에 묻혀계셨던 거다!」
기사단장의 무덤.
그곳도 내가 적색대륙에서 찾으려던 장소 중 하나였다.
“이 밑에 너희가 살아생전 모시던 기사단장의 무덤이 있다고?”
「그렇다! 분명 이 밑에 있다. 그런 기운이 영혼에 느껴지고 있어!」
어쩐지 유령기사단이 소환되고서부터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어차피 도시에서 탈출하려면 심연으로 내려가야만 하니까.’
내가 물었다.
“그 무덤을 찾으면 이득은 되냐?”
「무슨 당연한 소리를. 생전 기억이 맑지는 않지만, 단장님은 은혜를 반드시 갚으신다. 우리를 그 무덤까지 데려가 주면 너에게도 분명 마땅한 보상을 하실 것이 틀림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덤으로 기사단장의 무덤까지 찾을 수 있다면 더 큰 이득을 보게 된다.
내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도시에는 확실히 의문이 많다.’
드워프의 대실종.
언데드의 습격과 밴시 부활까지.
기사단장의 무덤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이곳을 내려가 보면 그런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하 밑의 지하, ‘심연’.
더욱 밑으로 향하는 문을 내려가자 비좁고 어두워서 걷기가 힘겨웠다.
“이곳에선 이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탐사용 장비인데 이렇게 어둡고 비좁은 굴에서는 아주 제격입니다.”
탐사단은 채굴 장비를 완벽히 갖고 왔고, 그래서 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밝은 광휘석이 길을 밝히고, 위험 감지 터번이 무너질 수 있는 지대를 미리 알려줘 피해갈 수가 있었다.
‘확실히 적색대륙답게 독특한 마술이 걸려 있는 도구가 다양하게 있군.’
내려가는 지하에는 각종 박쥐와 벌레 따위가 가끔 보였지만, 징그러울 뿐 그리 위협적인 생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위협적인 심연의 첫 몬스터와 조우하고 말았다.
“쿠루와아악!”
맹독을 뿜어대는 지하도마뱀!
그러자 샬이 덜덜 떨면서 놀랐다.
“맹독을 뿜어내는 지하도마뱀입니다. 스치기만 해도 살결이 타버립니다. 저 녀석은 당장 피해야 해요!”
“적색대륙 지식이 풍부해서 좋군요. 그럼 공략법도 알고 있습니까?”
“패턴은 간단합니다. 독을 내뱉고, 그다음 쉬는 간격이 길죠. 하지만 저놈 독은 워낙 빠르고 독해 답이 없습니다. 반드시 사망자가 나올 수 밖엔 없어요. 오아시스에서만 나는 귀독초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샬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는 당장 고개를 돌렸다.
“안 되겠어요. 역시 돌아갑시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예?”
그가 되물었지만 나는 답하지 않고 맹독 지하도마뱀을 향해 걸어갔다.
“쉬이이익!”
그러자 맹독 지하도마뱀이 날 경계하며 독을 내뱉으려 뺨을 부풀렸다.
“퀸소히니베.”
“응?”
나는 퀸소히니베의 양팔을 붙잡고 등 뒤에 서며, 그녀를 방패로 썼다.
철퍽!
결국은 퀸소히니베가 정면으로 지하도마뱀 맹독이 흠뻑 뒤집어썼다.
“맙소사!”
샬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나는 그런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독을 한 번 뱉어 독기를 모으는 사이, 나는 놈의 목을 따버렸다.
[맹독을 뿜어대는 지하도마뱀을 사냥했습니다.]
[힘 능력치가 1 오릅니다.]
그러자 탐사단 대원들이 핼쑥한 표정으로 날 보며 비명을 질렀다.
“동료를 방패로 써버리면 어떡해요? 여기서 죽으면 밴시가 된다고!”
“그까짓 거 괜찮습니다.”
내가 당당히 말하자, 샬이 기막혀 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봐, 당신 혼자 밴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지금 함부로 말…….”
샬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맹독에 젖은 퀸소히니베가 아무렇지 않게 독액을 털며 일어난 것이다.
“딱히 아프지는 않지만, 방패로 쓰이니 기분이 참 불쾌한 것이야.”
독이 통하지 않는 용의 면역력!
실제로 퀸소히니베는 독이 담긴 술을 마시고도 무사했던 전적이 있다.
“동의 없이 날 방패로 쓰다니. 내 노예가 본분을 잊어가는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날 노려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넌 어차피 독에는 내성 있잖아?”
“흥. 그래도 몸은 살짝 저린 것이야. 용이라고 다 무적은 아니니까.”
그다음 층에서는 더욱 무서운 상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맹염을 뿜어대는 지하도마뱀!
엄청난 덩치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노려보며 위협적인 불꽃을 내쉰다.
“맹염도마뱀입니다! 저놈은 어지간한 철갑옷도 단번에 녹여버려요! 그냥 살아 움직이는 용광로라고요. 당장 도망쳐 목숨을 부지해야 합니다!”
샬이 새파래진 얼굴로 속삭여댔지만, 퀸소히니베는 우아하게 말했다.
“어머. 방법이 여기 있는 것이야.”
“…….”
퀸소히니베가 나의 양팔을 붙잡고 등 뒤에 서며, 빠르게 방패로 썼다.
화르르륵!
온몸에 끓어오르는 맹염을 직격타로 처맞은 나는 불타며 내굴렀다.
그러자 샬이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봐요! 잊었어요? 여기서 죽으면 밴시가 된다니까!”
그러나 그런 우려가 우습게도.
난 멀쩡히 일어나 불을 털었다.
“뭘 봅니까?”
“…….”
타오르는 지배자의 갑주 효과 덕에 난 불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탐사단을 무시하고 우리는 다음 층으로 향했다.
암흑을 뿜어대는 지하도마뱀!
샬이 이번에야말로 끝장이라는 듯 두 눈을 감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암흑도마뱀입니다! 저놈은 태생부터 흑마법의 정수를 갖고 있어요! 평범한 사람은 살갗만 스쳐도 저주에 걸리고 말 겁니다! 우린 이제 다 끝났어! 전부 백치가 될 거라고!”
“아까부터 느꼈는데 설명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체질입니까?”
내가 반문할 때, 카티에가 까치발을 하며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대장. 방법이 여기에 있는 걸요.”
“…….”
난 한숨 쉬며 그녀를 방패로 썼다.
“쉬이이익!”
지하도마뱀이 날카롭게 흑색 숨결을 내뱉었지만 허무하게 소멸됐다.
성녀가 가진 신성력 덕분에 암흑속성이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이다.
“대장. 나를 방패로 쓰니까 기분이 좋나요? 내가 도움이 되고 있나요?”
“……그래. 기분 참 즐겁다.”
내가 좀 빈정대듯 말했는데도, 카티에는 뺨을 붉히면서 속삭였다.
“날 몇 번이든 방패로 써도 되요. 내가 대장을 꼭 지켜줄 거예요.”
날 아껴주는 건 고마운데 가끔은 꽤 미친 것 같아 좀 무섭단 말이지.
탐사단은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어떻게 동료를 방패로 쓰고도 전부 무사할 수가 있는 거예요?”
“원래 우리가 맷집이 좋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다음 층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통로를 통째로 가로막는 덩치의 큰 도마뱀이 우리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투기를 뿜어내는 지하 왕도마뱀!
이제껏 마주한 세 도마뱀보다 훨씬 강력하고 격한 크기의 몬스터였다.
“범철.”
“왜요? 또 방법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헤르탄이 방패가 될 거예요?”
내가 지친 표정으로 묻자, 헤르탄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싸울 필요 없습니다.”
“쿠르르르럭!”
지하 왕도마뱀이 비척이며 울더니 커다란 몸을 옆으로 쓰러뜨렸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뒤쪽에서 몸이 반쯤 뭉개져서 사망한 것이다.
헤르탄이 우리가 미처 오기 전, 왕도마뱀을 사냥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자가 이미 다 쓸어버렸군요.”
그곳에는 롬이 바위에 주저앉아 매서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는 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