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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47화 (147/200)

나만 1회차 147화

“적색대륙까지 가려면 범선으로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겁니다.”

“그렇게 항해가 오래 걸린다고요?”

“그 6개월도 재난 없이 항해해 가장 빨리 도착할 경우라는 가정입니다. 범철.”

헤르탄의 말에 나는 기가 찼다.

6달을 배에서 먹고 자며 지내야 한다니, 벌써 앞날이 깜깜하군.

“그만한 장기간의 항해라면 반드시 실력 있는 뱃사람이 필요하겠어요.”

카티에가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빠르게 셈을 했다.

“아주 큰 배를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인원은 많지 않으니까. 물과 식량이야 구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인력이에요. 적색대륙까지 무사히 가기 위해선 아주 실력 있는 뱃사람들이 필요해요.”

구성원이라면 생각해 둔 자가 있다.

때문에 나는 먼저 일어났다.

“좋아. 일단 둘이서 배를 구해줘.”

“대장은요?”

“혼자 들려야 할 곳이 있어서. 괜찮은 뱃사람도 구해서 돌아오마.”

***

“캬아앙!”

“우와아! 귀여워!”

엘프 소녀 솔이가 백야의 꼬리를 뒤쫓아서 쫄래쫄래 뛰고 있었다.

한편 초화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너, 날 앞으로 누나로 모실 거지? 대답 안 하면 긍정한 거야.”

“……!”

슬프게도 낯을 잃어버린 달귀는 예전과 다르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눈이 곱게 내려앉은 엘프 고을.

나는 이곳에 다시금 방문하였다.

“비밀스러운 재방문이시군요. 무슨 볼일로 이곳에 들리셨습니까? 죄송하지만 메밀묵은 아직 숙성이 덜 되어서 더 드릴 수 없습니다만.”

엘프 촌장은 날 성대히 환영하는 초보적인 무례는 저지르지 않았다.

신도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신분을 숨기고 왔으니까.

나는 오른손을 내뻗었다.

“엘프 유령기사 소환.”

그러자 유령기사단 중에서 엘프 유령기사만이 따로 소환되었다.

“너, 청색대륙 출신이라 했었지?”

내가 엘프 고을에 재방문한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엘프 유령기사가 이곳에 들려달라고 나에게 간곡히 요청하였던 것이다.

엘프 유령기사가 촌장을 보더니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이군. 라이. 네가 다음 촌장이 되었을 줄이야.」

“선배님!”

엘프 촌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건틀릿으로 소환되는 엘프 유령기사가 바로 이곳 출신이었던 것이다.

둘은 깊은 얘기를 오래 나누었고, 엘프 유령기사는 한숨 쉬며 말했다.

「적색대륙. 그곳에 바로 단장님의 무덤이 있었단 말인가.」

“예. 생전 선배께서 항상 적색대륙의 드워프를 만나러 가려 했습니다. 그곳에 바로 단장의 무덤이 있다며.”

그러자 엘프 유령이 평소의 껄렁댐과는 다르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적색대륙으로 향해다오. 주인. 그곳에 우리가 잊고 있던 생전의 기억을 완벽히 되살려줄 뭔가가 있다.」

나의 손에 소환되는 유령기사단.

그들은 다들 하나같이 불완전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적색대륙을 여행할, 한 가지 목표가 추가된 것이다.

‘이제는 뱃사람을 구해야겠군.’

이미 백룡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한, 내가 점찍어둔 뱃사람이 존재했다.

***

카벨 선장은 10회차 이후로 한 번도 제값 치르고 식사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경력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배 난파당하고, 선원들 흩어지고, 내 배 굶주렸고, 지갑은 텅 비었고.’

무전취식하기 참으로 좋은 날이다.

마침 회귀자 세 놈을 죽이고 약탈한 터라 뱃속에 거지도 들어앉았다.

그는 관리가 안 된 커틀라스를 허리춤에서 흔들어대며 곁눈질했다.

‘청색대륙 식사는 입에 잘 안 맞던데. 여기는 꽤나 괜찮을 것 같군.’

끝내주는 냄새에 허기짐이 동한다.

간판에 ‘먼산바라기’라고 쓰여 있는 독특한 이름의 주막이었다.

카벨 선장은 주막에 들어서며 주모에게 무심히 말했다.

“국밥 한 그릇 말아주시오.”

“그걸로 돼요? 두 그릇 말아주죠.”

카벨 선장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뱃사람답게 횡재를 즐기기보단, 괜스레 경계부터 하는 편이었다.

“인생까지 말아먹게 할 작정이요?”

“독약 타서 소지품 뺏을 거라면 괜히 천 년을 넘게 장사를 했을까?”

결국 카벨 선장은 감탄해 버렸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었나.”

“집 나간 원수 같은 남편이 돌아왔거든요. 양동이로 물도 끼얹고 욕도 퍼 주니 기분이 날아가게 됩디다.”

카벨 선장은 횡재했다고 느꼈다.

계산은 안 할 거니, 딱히 한 그릇이든 두 그릇이든 상관은 없었다.

“뜨끈뜨끈한 국밥 나왔습니다!”

남편으로 보이는 중년이 국밥을 가져왔는데, 뺨에 꽤 큰 점이 있었다.

‘손짓은 어째 아내보다 못 하구만.’

카벨 선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저를 들고 뜨거운 국밥을 먹었다.

적당히 배를 채웠다는 확신이 들자 마자 카벨은 곧장 일어나서 떠났다.

“이봐요. 계산 안 해요?”

주모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느긋했고, 너무 당당하여 붙잡기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붙잡힌다면 베어주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버림받은 120회차.

세상의 치안을 직접 관리하던 윤회수뇌부도 몰락한 지 오래 아니던가.

‘지금만큼 막살기 좋은 때가 없지.’

그런데 아무도 그의 등을 붙잡지 않았다.

도리어 카벨 선장을 멈추게 한 것은 익숙한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계산 안 해도 됩니다. 내가 사죠.”

“당신은……?”

맞은편에서 주막에 들어서는 한 남자는 아주 익숙한 사내였다.

낚시만 하면 대형괴물이 돌아다니고, 마법과 검을 잘 쓰던 승객.

재수 없게 저놈을 노렸던 불도깨비에게 불똥이 튀어 카벨은 겨울 바다를 헤엄치며 사경까지 헤매야만 했다.

‘거참, 잘도 살아 있었군.’

그러나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저 남자는 승객이었고, 자신은 이제 배까지 잃은 한량 신세였으니까.

그런데 국밥을 나르던 중년이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몸을 덜덜 떨었다.

“버, 범철 님이시여!”

“밥값은 잘 갚고 있겠지?”

카벨 선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범철?

회귀자조차 썰고 다닌다는 1회차?

어째서 저 남자한테 그런 말을?

‘설마…….’

그러고 보니 배에서 해적이랑 싸울 때부터 칼솜씨가 보통 아니긴 했다.

꽤나 오래 칼밥을 먹어온 카벨의 눈으로도 그의 검은 기억에 남았다.

주모도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어머, 당신은 그때 그 손님……?”

“대추 차 마시러 왔습니다. 저 사람까지 해서 한 자리 괜찮죠?”

카벨은 얼결에 사내와 합석하였다.

뜨끈한 대추차가 나올 때까지 그를 노려보다 카벨은 벌떡 일어섰다.

“지금 일어서는 겁니까? 차가 이제야 나왔는데.”

“……진짜요? 방금 저 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당신이 범철이었다고……?”

“진짜 믿기지 않을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사실 얼마 전에 불멸아귀를 살해한 참입니다.”

“허풍치고는 실패요. 안 웃긴데.”

“죽였더니 이런 전리품을 주더군요”

범철이 기품 있는 투구를 보여주자, 카벨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척 봐도 고급품. 그것도 회귀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품질!’

마른침이 절로 꿀꺽 넘어간다.

분명히 1회차라고 들었는데 회귀자도 함부로 못 할 짓을 성공하다니.

‘내가 1회차였을 때가 떠오르는군. 독하고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이.’

카벨 선장이 도로 앉아 찻잔을 집었다.

“그래서, 내게 뭘 바라는 거요?”

범철이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배를 몰아주십시오. 적색대륙까지.”

***

출항 날.

아침부터 항해준비로 모두 바빴다.

두 눈이 시뻘겋게 부은 퀸소히니베가 짐짓 딴 곳을 보며 툭 말했다.

“헤어진 것이야.”

“뭐?”

북적이는 항구는 꽤나 시끄러웠다.

그러자 그녀가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블라이넨이랑 이별한 것이야.”

“아, 그래? 잘 왔다. 와서 이거 좀 도와라. 네가 힘은 제일 세잖아.”

내가 대수롭잖게 말하며 짐을 향해 턱짓했고, 그녀가 소매를 걷었다.

“어디까지 옮기면 되는 것이야?”

“저기 배까지. 넉 달 치 식량을 묶어놓은 꾸러미라 꽤나 무겁다.”

일꾼 열 명이 끌어도 쩔쩔매던 짐을 퀸소히니베는 가볍게 들었다.

허, 내가 대륙지배자 잡고 능력치가 오르긴 했지만, 저만큼은 아닌데.

배에 짐을 내려놓고서 퀸소히니베는 태연히 내려와 나를 바라봤다.

“다음 짐은?”

“저거. 오크통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건데, 수십 통이라 꽤 무겁다.”

퀸소히니베는 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너, 왜 그래?”

그리고 나는 제법 놀라버렸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앙칼진 울음에 젖어 있었다.

“내 노예는 왜 다리가 두 개인 것이야?”

“뭐? 그게 갑자기 뭔 소리야?”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퀸소히니베는 젖는 눈초리를 세우며 따졌다.

“왜 태양은 하나인 것이야?”

그녀가 또 울먹이며 말했다.

“오늘 날씨는 또 왜 이리 화창한 것이야?”

“……첫 연애는 대개 씁쓸하지.”

이제야 알겠군.

그녀는 누구나 겪는, 후회막심한 실연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다.

퀸소히니베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전 애인에 대한 욕을 쏟았다.

“나쁜 년.”

신은 어찌나 우리에게 가혹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첫 연애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과거로 남는가.

그러나 따져봤자 답변해 줄 신 따위는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실연의 슬픔을 푸는 법이 있다.”

“그게…… 훌쩍! 무엇인 것이야?”

“잡일.”

“…….”

퀸소히니베가 슬픔을 짐 나르기로 푼 덕에 시간이 훨씬 절약되었다.

한편 도깨비들은 우리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잘 가라! 마검사!”

“적색대륙에서도 몸조리 잘해라!”

특히 비환은 내게 안부를 전하며 불이 활활 오르는 화로를 건네줬다.

“이게 뭐냐?”

“소형화로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지 불을 피울 수 있다! 물에 닿더라도 절대로 불씨가 죽지 않는다!”

“어라, 선물로 주는 거냐?”

내가 묻자 비환이 크게 끄덕였다.

“초면 때 오해해서 미안하다! 네가 불도깨비를 다 죽인다는 예언 때문에 모두 신경이 날카로웠으니까!”

“까짓거 이해한다. 고맙군.”

그다지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는 한적한 항구에서 출항한다.

나는 구미호 미별을 척 바라봤다.

“용왕의 간은 맛있었냐?”

“꽤나 괜찮았지. 하지만 너랑 지내면서 겪은 일들이 훨씬 재밌었어.”

미별은 자신의 품에 안긴 백야를 보면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언젠가 독립하더라도 나를 잊지 말아주렴.”

“캬아아앙.”

미별의 품에서 뛰어내리며 백야는 걱정 말라는 듯 힘차게 울어 보었다.

카벨 선장이 크게 소리쳤다.

“이제 출항시간이오!”

드디어 청색대륙을 떠날 시간.

선원들과 함께 나와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가 배에 오르려 할 때.

웬 고함이 우리의 걸음을 막았다.

“출항을 멈춰라!”

한적하던 항구에 인파가 몰려왔다.

‘저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천 명은 될법한 인파.

하나같이 눈물에 젖거나 다급한 표정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외쳤다.

“범철 님이시여!”

“부디 청색대륙을 떠나지 마시옵소서! 이곳에 남아 저희처럼 어리석은 어린 양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두 교주님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이번 회차의 저희를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신으로서 군림해 주소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오늘 여기서 출항하는 건 어떻게 알고 저렇게나 몰린 거야?’

바글바글한 수많은 신도들 속에서 두 남자가 나왔다.

다름 아닌 바로 범파의 장로 오삭과 철파의 환관무사 가울이었다.

“범철 님이시여! 저희에게 간택을!”

“범파와 철파.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옳단 말입니까!”

저것들이 아직도 저 짓이군.

“솔직하게 말해줄까? 너희 중에 어느 쪽이 옳은 종파인지.”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신도들을 향해서 말했다.

“너희는 둘 다 병신이다.”

신도들이 나의 폭언에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했다.

“너희, 두 교주. 나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둘 다 나의 손에 죽었지.”

“버, 범철 님! 저, 정말로?”

오삭과 가울이 나의 말에 놀라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신도들까지 충격받은 분위기.

하지만 난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러니까, 날 믿지 마. 너흰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야. 세상 어느 신이 자기 신도랑 목숨 걸고 싸우냐.”

내가 돌아서자 신도들이 소리쳤다.

“붙잡아! 떠나시게 둬선 안 돼!”

“신이시여! 우릴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곳에 남아주시면 평생 호의호식하시면서 지내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내가 아랑곳하지 않자, 신도들은 각자 다급히 검을 뽑았다.

무력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떠나는 것을 막겠다는 다급한 태세!

그러나 그들의 외침조차 묻어버리는 거대한 포효가 항구에 울렸다.

“크롸아아아!”

수많은 회귀자들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선다.

“배, 백룡!”

“어, 어떻게 저런 존재가 지금!”

모든 신도가 벌벌 떨며 무너졌다.

날개를 젖히며 백룡이 포효하였다.

“누구라도 이 배의 출항을 막는다면,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으리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더라도 백룡의 위압만으로 저들은 얼어붙었다.

하기야 백룡한테 걸리면 곱게 죽을 수가 없을 테니까.

퀸소히니베가 잠시나마 우울한 빛을 감추고 백룡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다녀올게요!”

“언젠가 네 어미한테 안부 전해 줘라. 퀸소히니베, 정점까지 성장하여라. 나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훗날 중립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범철, 내 딸을 잘 부탁하마.”

“염려 마시죠. 백룡.”

내가 범선에 탑승하며 신도들에게 친절히 가운뎃손가락을 날려 주었다.

“부디 그딴 종교 좀 버리고 살아라. 이번 삶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배가 항구를 벗어날 때까지 신도들은 그저 허망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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