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46화
난 한 번도 책을 써본 적이 없고 딱히 글 쓰는 걸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다른 세상에라도 가게 되면 ‘회귀자를 상대하는 지침서’란 책은 한 권 써보고 싶다.
그 책의 첫 대목은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회귀자 애인을 뒀다면 반드시 첫날밤을 대비해 둬라.’
수없이 함께해 그대를 뼛속까지 파악하는 회귀자와 하면 당신은 그날 말도 못 할 감정을 느낄 테니까.
‘고작해야 하룻밤이 온몸에 이토록 뼈저리게 각인될 수도 있구나.’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에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했다.
간략히 묘사하자면 황홀함이란 수식언도 부족한 하룻밤이었달까.
어느 주막, 어느 대실, 우리는 발가벗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나는 구슬픈 목소리로 중얼대었다.
“지켜준다더니.”
“지킬 순결도 없는 몸이잖아요?”
“됐고. 날 책임져라.”
“그러지 않을 거면 하지도 않았어요.”
방금까지 자다가 막 일어나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몽롱하였다.
헐벗은 카티에가 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손가락을 가져가 그었다.
“대장. 좋았어요?”
아찔한 밤을 보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참으로 간단한 감정이었다.
여태껏 내가 몇몇 여성들과 지새웠던 밤은 결코 밤이 아니었단 것을.
‘그 말이 맞았어. 진짜 서큐버스로 괜히 살았던 것이 아니었군.’
카티에는 나의 몸에 관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고, ‘전문가’였다.
그녀는 완벽한 고수였고, 난 그저 몸을 맡겨 신음이나 흘렸다.
카티에가 가느다랗게 숨을 쉬며 나의 가슴팍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좋았냐구요.”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껏 지새웠던 밤은, 밤이 아니었단 것을 네 덕분에 깨닫게 됐어.”
“완벽한 대답이에요.”
그녀는 만족했는지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곤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기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보고 싶다는 것도.
난 그녀의 잔뜩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조금 쓸어봤다.
검은 머리칼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늘어서 장막처럼 늘어져 있었다.
‘카티에는 기적을 많이 써서 모든 머리칼이 검어지면 죽게 된다.’
잠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했던 발언은 진심이었다.
‘사랑이라.’
지금껏 여성편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가 있었냐고 물으면 아니라 답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주었던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 태평스럽고 이기적인 삶이지.’
나는 평안하게 사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나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었던 애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건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 타협점을 존중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그렇게 이성을 아끼는 것에 중점을 두지도 않았다.
“카티에.”
눈을 감았는데도 그녀는 답하였다.
“왜요?”
“선택의 방에서, 1회차 시절의 너를 보았어. 전혀 회귀하지 않았던.”
카티에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입을 연다.
“나한테 실망했나요?”
“실망했냐고?”
“1회차 시절의 난 바보였지만, 순수하기도 했어요. 지금의 나는 그런 것이 없죠. 그래서 내가 싫나요?”
“아니, 전혀. 다만 차이를 느꼈어. 1회차의 너와 120회차의 너에게서. 1회차의 너는 내게 관심 없었거든.”
회귀란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그래서 지금 와서 묻고 싶었어.”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
“나를 울게 했으니까요.”
그것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을 내리고서, 숨을 가느다랗게 쉬니 긴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대장은 날 가장 처음 울게 했어요. 울어도 된다고 해줬잖아요.”
“내가…… 그랬었어?”
“난 모든 회차의 대장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카티에는 분명한 울보였다.
그런 잠자리를 나누고서도 울다니.
굳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울어야 할 것은 이쪽일 텐데 말이다.
“내가 대장을 지킬 거예요. 설령 회차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회귀하기 전까지 대장을 지키겠어요.”
눈물을 감추지 않는 카티에였다.
선택의 방에 끌려가고, 모든 회차의 그녀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지금 눈앞의 여자는 회귀로 미쳐가면서도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사랑은 채무와 상환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미쳐가면서까지 날 사랑해 준 여자에게, 설령 나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뒤늦은 행복을 선물하겠단 각오가 드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나를 지켜줘.”
내가 지금껏 지새운 모든 밤은 그녀와 함께했던 오늘보다 못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너를 지킬 테니까.”
나는 카티에를 끌어안았다.
체온에는 현실의 따스함 말고도 가슴속의 공허를 채우는 온정이 있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세상의 모는 끔찍한 걸 잠시 잊게 해주었다.
***
드넓고 한적한 공터.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네 싸웠냐?”
어째 두 여자의 기류가 이상했다.
“딱히.”
“…….”
블라이넨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퀸소히니베는 아주 화난 표정을 지으며 떠나가 버렸다.
“쟤, 왜 혼자 삐쳤냐?”
“말해줄 이유가 없는데.”
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설마 네가 퀸소히니베한테 강제로 살이라도 섞으려 했다면 정말…….”
블라이넨이 가는 눈초리로 나와 피부가 윤택한 카티에를 번갈아봤다.
“살을 섞었던 것은 너희 아닌가.”
“어머, 그걸 어떻게 알……?”
“크흠!”
하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겠군.
나는 불멸아귀를 쓰러뜨리고 획득한 부적을 바라보았다.
보물 박 소환권!
부적을 찢어버리자 줄기를 늘어뜨린 보물 박이 주렁주렁 소환되었다.
“초가집만 한 박이 4개나 된다!”
“저기 안에 보물이 있을 거다!”
도깨비들이 욕심 가득한 눈길로 박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각자 주먹을 휘두르고도 아파서 깨물 뿐이었다.
“아아악! 무슨 박이 이런가!”
“너무 딱딱해 절대 못 부수겠다!”
나는 어지간한 강철보다도 훨씬 딱딱한 박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톱질이라도 해야 하나?”
“불로 태우거나 백룡이 파괴시키는 것은 내용물에 해가 가겠군요.”
헤르탄은 박의 시퍼런 껍질을 자세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이넨. 당신의 검기라면 보물을 훼손하지 않고 박을 벨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라이넨을 검을 뽑아 박을 향해 민첩하게 휘둘렀다.
쩌어억……!
어찌나 검술이 뛰어난지 쩍 갈라진 박의 크기가 일정하기 그지없었다.
갈라진 박에선 번쩍이는 비단, 옥구슬, 비녀, 손거울 따위가 나왔다.
심지어 가장 큰 박에서는 으리으리한 빛깔의 궁궐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야!”
“여기서 평생 살아도 되겠다!”
도깨비들이 신이 나서는 비단과 옷가지를 마구 쓸어 담았다.
‘독식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아직 우리는 청색대륙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도깨비들도 마땅한 보상을 얻어야만 불만을 가지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나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소질이 있으니까.
SSS급 보물탐색 재능!
겉은 화려하나 별 가치 없는 물건은 도깨비가 가져갔고, 난 수수하나 실속 있는 보물을 모조리 챙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깨비들은 이런 나의 미덕에 감탄하며 칭찬했다.
“이런 보물을 같이 나누려 하다니!”
“역시 우리가 마검사를 잘 봤다!”
거기다가 평판까지 오르니 최고다.
그리고 보물 박에서 튀어나온 황금의 대부분은 백룡이 가져가 버렸다.
“상도를 아는 인간이로군. 과연 내 딸과 다니는 인간답구나.”
백룡은 졸린 눈으로 하품을 했다.
동면할 시기라 활동에 제약이 있는데도 보물을 탐내며 튀어왔던 것이다.
하기야 어차피 120회차 세상에서 황금은 어지간한 강철보다 못하다.
그냥 버릴 바에는 백룡한테 줘버리는 편이 차라리 속이 편하리라.
“보물이 고마우면 부탁 좀 합시다.”
“뭘 말인가?”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합니다. 외다리에 수염이 수북한 인간인데…….”
백룡이 끄덕이며 날아올랐다.
“그만한 부탁이라면 들어주겠다.”
한편 블라이넨은 가장 빛나는 붉은 약병을 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백치를 치료하는 명약이냐?”
“그래. 정말 내 손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군. 불멸아귀가 지키고 있다 들었는데, 설마 놈을 쓰러뜨려야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니.”
“그걸 쓰면 정말 백치가 치료될 수 있기는 한 거냐?”
“일단 설명 문구만 보자면 치유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하긴 하는군.”
블라이넨은 약병을 품에 챙겼다.
내가 일부러 과장되게 칭찬했다.
“밴시를 극복한 회귀자께서 임무에 그렇게 충실하니 왕도 행복하겠어.”
“또 하라면 못할 거야. 그땐 기적에 가까웠지. 발 한 쪽도 타버렸고.”
용암에 한쪽 발이 뭉개진 블라이넨은 계속 절뚝여서 걸어야만 했다.
“그 몸 상태로 황색대륙까지 갈 수 있겠냐? 호위가 필요하다면…….”
“동정은 필요 없어. 양다리를 잃었던 삶에도 난 멀쩡히 살았으니까.”
하기야 어련하실까.
그녀가 나에게 미리 경고하였다.
“경계해. 적색대륙에 가게 되면 강대한 회귀자가 셀 수 없이 많아.”
“밴시까지 벤 너보다 강하겠냐?”
블라이넨이 태연히 고갤 끄덕였다.
“적색대륙에는 혼자서 밴시 떼를 이끌고 다니는 회귀자가 있지.”
내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회귀자가? 그게 가능해?”
“120회차에서 불가능한 일이란, 불가능해.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블라이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청명한 날씨였다.
“그리고 내가 떠나기 전에…….”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 온다.
“그간 미뤄뒀던 승부, 지금 하지.”
나는 씩 웃고 말았다.
***
물길이 쏟아지는 폭포.
우리는 단둘이서 검을 마주 봤다.
“시작해 볼까.”
“이번에는 나부터 가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그녀를 향해서 빠르게 달려들었다.
챙!
쇄도하는 검을 막아내는 반격!
틀림없이 왼발이 뭉개져 거동이 불편할 텐데, 내 연격을 막아내는 그녀를 보면서 무언의 감탄이 나왔다.
“같잖군.”
그녀가 말을 내뱉는 동시에 쌍검으로부터 환한 검기가 흘러나왔다.
불멸아귀를 죽이기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눈부신 밝기.
그녀의 쌍검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나는 연거푸 방어했지만, 두 개의 검을 막기에는 여력이 부족하였다.
챙!
다행히 검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막대한 일격에 손이 버티질 못했다.
결국 검을 놓쳐버린 나는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곧바로 그녀가 나에게 쇄도해 온다.
그러나 나는 싱긋 웃고 말았다.
“이거 아냐, 블라이넨?”
맨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편다.
그러자 무언가 손아귀에 잡혔다.
블라이넨이 놀라서 이를 악물었다.
“너, 설마 벌써……!”
“불세출의 검. 5레벨이 되었거든.”
불멸아귀의 목숨을 직접 끊고서, 나는 이전보다 훨씬 크게 성장했다.
맨손을 가볍게 내쥔다.
그러자 공기가 딱딱하게 휘감기며, 보이지 않는 검이 되었다.
불세출의 검 5레벨 달성 효과!
‘내가 손에 쥐는 모든 것은 나만의 검이 된다.’
무엇을 쥐어도 내구력이 오른다.
설령 불이나 물, 공기를 쥐더라도 난 검으로 생성해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블라이넨은 겁먹지 않고 나한테 깊게 들어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내가 충고했다.
“참고로 이거, 대검이야.”
챙!
내가 휘두른 정타에 그녀의 쌍검이 튕겨 나가 허공에서 반 바퀴를 굴렀다.
‘공기로 만든 검은 공격력, 내구력은 약하지만 눈에 보이지가 않아서 야바위를 치기에는 아주 적절하군.’
아직까진 구현할 수 있는 검의 종류가 소검, 대검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차후에 성장하면 더욱 많은 검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으리라.
내가 쓰러진 그녀의 목에다가 공기로 이뤄진 검을 대고는 내려다봤다.
“더할까?”
“개 같은 새끼.”
오래 걸렸지만, 승패는 결정 났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왼발이 거의 뭉개져 버린 그녀가 불멸아귀를 죽이고 능력치가 오른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아쉽군. 네 발만 괜찮았으면…….”
“아니. 괜히 위로하지 마. 설령 몸이 멀쩡해도 너는 이기지 못했어.”
블라이넨은 나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핑계 대지 않고 인정하겠어. 너는 이제 나보다 강하다.”
“의외로 순순하군. 회귀하면서도 끝까지 인정 안 하고 덤벼대더니?”
“이번 회차는 유독 특별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라이넨은 그 손을 맞잡았다.
“드디어 내 손을 잡아주는 거냐?”
“딱히 별일도 아닌데.”
내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블라이넨은 절뚝이며 돌아섰다.
내가 그녀의 뒤에 대고 물었다.
“벌써 가는 거냐, 황색대륙으로?”
“백치가 된 소년왕을 치료해야 하니까. 그래서 애당초 청색대륙에 왔었고.”
“다른 사람들한테 인사는 안 하고?”
“할 필요 없어. 가장 중요한 사람과는 이미 작별했으니까.”
내가 그제야 이해했다.
“그래서 아까 둘이 싸웠던 거군?”
“이별은 괴롭고 슬프지. 회귀해도.”
“블라이넨.”
그녀가 멈춰 섰다.
내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고마웠어.”
딱히 끄덕이거나, 대답은 없었다.
검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간다.
그저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