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45화
난 소녀들의 손아귀에 살이 뜯기는 통증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잘못 선택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곧이어 글귀가 떠올랐다.
[……120회차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행했습니다.]
[모든 복제자들이 소멸됩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어!”
“대장!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모든 카티에가 절규했지만, 곧 형체가 희미해지면서 모두 소멸됐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머리 카티에’를 돌아보았다.
“우리, 꽤 오랜만에 본다?”
“그러게 말이에요. 못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네요, 대장?”
“그러는 너는 이마가 훤해졌군?”
“…….”
그녀에게 눈물이 핑 돌도록 팔뚝을 꼬집히고 나서야 새삼 실감했다.
“확실히 네가 진짜긴 진짜구나.”
나는 카티에를 보았고.
카티에도 나를 보았다.
헤어졌다가 재회하면 평소에 잊고 있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내가 그녀를 껴안았다.
“다행이야. 너를 찾을 수 있어서.”
“대장…….”
내게 안긴 카티에는 콧날이 시큰해하는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난 그녀의 민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쩌다 대머리가 됐냐?”
“설명하자면 길어요. 대장.”
카티에가 이곳에 오자마자 했던 일은 다른 회차의 자신들로부터 싸우고 도망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혼자만 머리칼 색깔이 달라서 금세 신분이 탄로 나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던 와중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머리칼을 모두 깎았다.
“그래서 대장이 첫눈에 나를 눈치채지 못했던 거예요. 여기서 살려면 흰 머리칼을 모두 깎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였군.
하여간 ‘선택의 방’은 선택을 마치자 평원이 사라져 그냥 방이 됐다.
일직선의 곧고 좁은 방이었는데 빛이 드는 출구가 저 끝에 보였다.
우리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그곳을 향하여 함께 걸어갔다.
내가 그녀의 매끄러운 두피를 슬쩍 손으로 쓸어보았다.
맨들맨들하군.
“내가 탈모 조심하라고 했었지?”
“흥. 탈모는 무슨. 내가 혼자 깎아 버린 건데요. 뭘.”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좀 두드려 봐도 되냐?”
“…….”
또다시 팔뚝을 꼬집히고 말았다.
으어억, 아파서 눈물이 다 나오네.
흠, 역시 120회차 카티에가 맞아.
카티에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간 가발을 구하든가, 모자를 구하든가 해야겠어요. 대장. 혹시 배낭에 모자 같은 옷가지 없어요?”
“왜 대머리도 느낌 있고 예쁜데.”
“그게 진심이에요, 대장?”
“회귀하며 봐왔으면서도 모르겠냐. 지금 내가 거짓말하는 표정이야?”
나는 당당히 내 얼굴을 가리켰다.
카티에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닌 것 같네요. 하여튼 머리칼이 얼른 자랐으면 좋겠어요.”
“왜?”
“대장은 예쁘다 생각해 줄지 몰라도 그 못난 용이 나를 쳐다보고 놀리는 광경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카티에는 퀸소히니베가 자신을 놀리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나 보다.
‘탈모라.’
그러고 보니 배낭에 쟁여놨다가 거의 잊고 있었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나는 조그만 약병을 꺼내었다.
「사상 최강의 역대급 발모제」
제작자명: 간석
수십만 약초를 끓이고 졸인 발모제. 수 없는 실패에 좌절한 회귀자가 마침내 제작에 성공한 완제품이다.
+완성된 지 시간이 꽤 지났음.
+두피에 뿌리면 순식간에 머리칼이 풍성하게 자라남.
+탈모 완치 가능!
사상 최강의 역대급 발모제!
사기꾼 신선 간석이 사찰에서 수많은 약초를 달여서 만들어냈던 약품.
‘설마 이걸 카티에한테 쓰게 될 줄이야.’
이것만 있으면 카티에의 두피에도 다시금 머리칼이 자라나게 되리라.
“좀 불안하긴 한데, 괜찮겠죠?”
카티에가 염려하자,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설마 뭔 일이 나겠어? 딱히 부작용도 안 쓰여 있는데.”
“하긴 그렇죠?”
좌우지간 나는 약병을 열고 그녀의 매끄러운 두피에 발모제를 뿌렸다.
***
“그 털북숭이는 무엇인 것이야?”
“…….”
퀸소히니베가 배를 잡고 웃었고 카티에는 머리칼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분노가 여실히 느껴졌다.
‘괜히 사상 최강의 역대급 발모제란 과장된 이름이 붙은 게 아니군.’
발모제의 효과가 어찌나 훌륭했는지 카티에는 라푼젤 부럽지 않을 만큼 머리칼이 아주 치렁치렁하였다.
그녀의 작은 키를 훌쩍 뛰어넘게 자란 머리칼이 바닥에 길게 쓸렸다.
“헤르탄. 다음부터 쪽지는 그냥 줘요. 보따리라 괜히 기대했다고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선, 카티에의 머리칼부터 잘라야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한테 맡겨라!”
도깨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 하며 가위를 찰칵대며 다가왔다.
그러나 카티에는 확고히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그건 엿 자를 때 쓰는 가위잖아요. 내 머리칼은 헤르탄이 잘라요.”
그러자 도깨비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카티에.”
헤르탄은 무신경한 눈빛과 손짓으로 그녀의 긴 머리칼을 잘라내었다.
“아시다시피 저의 미용 솜씨는 그렇게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발은 제법 자를 줄 알았잖아요? 그만하면 나는 만족해요.”
희고 검은 머리칼이 떨어진다.
바닥까지 끌리던 머리칼이 잘리고 그녀는 적당한 길이의 단발이 됐다.
그러한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본 퀸소히니베의 감상평은 이러하였다.
“과연 본판이 좋으니 어지간한 머리 모양도 어울리게 되는 것이야.”
“칭찬인가요?”
“흥. 알아서 생각하란 것이야.”
“꼭 인형같이 생긴 인간이다!”
도깨비들조차 그녀의 외모에 감탄했지만, 나만은 그러지 못하였다.
카티에가 단발을 쓸면서 입술을 툭 내밀고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은 역시 내가 장발이었을 때가 더 좋았나요?”
그러나 나의 표정이 굳은 것은 그저 내 취향이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단발머리.’
언젠가 카티에가 날 살해하는 미래,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차츰 모든 것이 운명대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미래에 관해 고민해 보다가 고개를 휘젓고 문득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이제 카티에도 구출했고.’
심신은 피곤하지만, 쉴 틈은 없다.
‘드디어 점검할 때가 되었군.’
슬슬 내가 불멸아귀를 사냥하고서 획득한 보상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우선, 난 푸른색 부적을 꺼내었다.
‘보물 박 소환권.’
아마도 불멸아귀가 지키고 있던 보물을 소환하는 부적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 안에는 블라이넨이 찾고 있던 백치치료명약도 있겠지.
그리고 나는 엷은 푸른빛을 띠고 있는 투구를 바라보았다.
『담청색 구중 투구』
청색대륙 지배자, 불멸아귀가 가장 아끼던 무구. 대륙지배자의 비늘로 덧대어져 있어 내구력이 막강하다.
+기력회복속도 75% 상승.
+완력, 각력, 정력 80% 증가.
+강대한 투기 발산.
+고유스킬, ‘강 포효’ 사용 가능.
+모든 타격술 파괴력이 3단계씩 오르며, 박치기는 추가 보너스 적립.
+장시간 착용하면 ‘구중인격九重人格’으로 변할 위험확률이 높음.
‘미쳤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숨죽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진홍색 로브와 비슷하군.’
막강한 위력을 지녔으나 그에 못지 않은 페널티를 동반한 투구!
마력을 충족시켜 주던 로브와 다르게 무력을 올려줬다.
‘거기다 페널티도 특이한 면이 있군.’
구중인격.
즉, 불멸아귀처럼 아홉 개의 인격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리라.
‘어찌 보면 해골화보다 끔찍한 페널티인데.’
해골화는 초화 덕분에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꼼수가 가능했지만 구중인격은 정신적 참사라 어쩔 수 없다.
‘하여간 투구는 일단 보류해 두고.’
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던 보상품을 손에 쥐었다.
‘시간의 돌.’
현재 내 가슴에 박혀 있는 전생의 돌처럼 이것은 평범한 돌멩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노이즈가 치직 일기도 하고, 형체가 희미해졌다가 뚜렷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뭔가 지금 모습은 불안정한데.’
형체가 고정되지 못하는 시간의 돌을 계속 보자 정보 문구가 떠올랐다.
[시간의 돌은 유동적입니다. 소유자 의지에 따라 언제든 특수한 모습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동적인 아이템이라.’
이 돌이 무엇을 위해 쓰일지는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전생의 돌이 불멸아귀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니 내게 시간의 돌도 필요한 순간도 반드시 오리라.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서 시간의 돌을 품속에 조용히 챙겨놨을 때.
“대장.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카티에가 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
“벌써 올해가 지났네요.”
어느덧 날짜가 그렇게나 흘렀다.
그렇게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올해 초라는 사실이 놀랍군.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 자신은 얼마나 많이 변하였던가.
‘그게 스스로의 삶에 좋았는지, 나빴는지 나도 잘 가늠할 순 없지만.’
나와 카티에는 강을 걷고 있었다.
작은 강이나 물결이 세고 맑았다.
청색대륙은 그 이름이 붙어진 이유답게 강이 무척 아름답고 푸르렀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새해를 맞이할 시간도 없었잖아? 좀 아쉬운걸.”
“새해를 맞이한다니. 나한텐 우스운 말이네요. 축하할 것도 없는데.”
하기야 회귀자라면 그럴 것이다.
새해도, 연말도 무의미할 테니까.
“그래도 기념일이라도 좀 챙기면 낫지 않겠어? 퇴색된 기분 말이야.”
“회귀자에게 기념일은 없어요. 내 생일도 챙겨 본 기억이 희미한걸요.”
그것참, 슬픈 일이군.
우리는 나무그늘에 앉아 쉬었다.
시푸르지만 벌레 먹은 잎사귀를 손가락에 스치며 카티에가 말하였다.
“대장. 고마워요.”
“뭐가?”
“나를 찾아와준 것 말이에요.”
나는 수염을 밀지 못해서 까칠해진 턱을 쓸었다.
“글쎄. 나는 너한테 감사 인사보다 훨씬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뭘요?”
“사실 선택의 방에서 인류를 멸망시켰던 회차의 너를 봤었거든.”
“내 흑역사를 봤군요.”
카티에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그때 당시의 너는 회귀를 멈춘다는 목표 자체를 부정하던데.”
“대장. 누구에게나 좌절하는 순간이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런데 왜 이젠 생각이 바뀌었지?”
“여느 회귀자가 그렇듯, 내겐 목표가 필요했으니까요. 미치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집중할 수 있는 목표.”
카티에는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
“하지만 그저 할 게 없어서 회귀를 멈추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삶을 반복할수록 회귀는 멈춰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꼈으니까요.”
“어째서?”
“이대로 가면 인류가 미칠 테니까.”
“지금도 충분히 미치지 않았냐?”
“아직은 고작 120회차예요. 하지만 누군가 회귀를 멈추지 않으면 얼마나 회차가 이어질까요? 1,000회차? 아니면 10,000회차? 그 지경이 되어버리면 되돌릴 수가 없게 돼요.”
확실히 그 말이 옳았다.
인류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회귀는 멈춰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 침묵했다.
새해의 햇빛이 강에 깃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햇빛을 받고 있는 카티에가 저 시푸른 강물보다 아름다웠던 것이다.
‘내 눈에 벌써 뭐가 씌었나.’
그런데 카티에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정색하였다.
“가요.”
“어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진지하고 빠르게 말했다.
“난 알아요. 대장의 그 미묘하게 경직된 표정과 집중하는 눈빛을. 그건 이성한테 반했을 때 짓는 거죠.”
나는 제법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이성한테 바로 반한 감정이 읽히면 누구나 혼란스럽지 않겠나.
카티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뭐해요? 가자니까요.”
“야, 그러니까 어딜……?”
“나는 이제 스무 살이니까요.”
카티에가 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얼떨결에 서버렸다.
그녀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에둘러 말해 뭐하겠어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