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142화 (142/200)

나만 1회차 142화

순간 예지된 내 미래가 떠올랐다.

과거 샤라펠 미궁에서 밴시들의 합창곡을 듣고 난 뒤부터 꾸는 악몽.

‘내가 카티에에게 살해당하는 꿈.’

설마, 이곳에서 그 꿈이 실현될까?

내가 밀친 ‘서큐버스 카티에’가 날개를 퍼덕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칠어요. 대장.”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서큐버스 카티에’한테 호의적일 이유는 없다.

내가 이곳에서 구출해야 할 것은 그녀가 아니라 120회차의 카티에니까.

도리어 경계하며 질문했다.

“왜 내게 친절히 경고하는 거지?”

“내가 경고를 해주는 건 외견 때문에 회차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죠.”

“속인다고?”

“저런, 대장. 생각을 해봐요. 여기서 선택받은 1명의 나를 제외하면 119명의 나는 죽게 된다구요. 그러니 어느 내가 자기가 살던 회차가 몇 회차인지 솔직하게 밝히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소리였다.

이곳의 모든 카티에는 내게 선택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소멸되고 만다.

그러니 당연히 내게 자신이 120회차라며 선택받으려 할 게 뻔하였다.

“너도 선택받지 못하면 존재가 소멸될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

“서큐버스는 그런 것과 연관이 없어요. 그저 본능의 삶만 충실하죠.”

난 ‘서큐버스 카티에’가 낯설었다.

‘카티에가 저런 면이 있었나?’

그저 다른 회차일 뿐인데 성격과 말투가 꼭 외딴 사람처럼 달랐다.

평소의 불안정한 분위기보다는 매혹적이고 농염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카티에의 서큐버스 회차는 유독 욕망만 발달한 시기가 아닐까.

‘불멸아귀를 쓰러뜨릴 때는 모두 자아 없이 명령을 들어서 인형 같았는데, 이 녀석을 보니 전혀 아니군.’

하기야 이전 회차일수록 카티에가 회귀로 덜 마모된 성격일 테니까.

‘서큐버스 카티에’가 은근히 권유했다.

“대장. 아니면 함께할래요? 대장의 민감한 곳은 속속 꿰뚫고…….”

“됐어. 지금 그럴 시간이 없거든.”

조언자를 얻는 것도 괜찮지만, 지금 저 녀석은 신용할 수가 없었다.

‘서큐버스는 악마. 일단은 악마로 변했단 것 자체가 타락했단 거지.’

조언은 고맙지만, 근본이 썩었다.

본연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됐다.

난 ‘서큐버스 카티에’를 무시하고 넓고 공허한 평원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 카티에가 120명이나 있다니.’

선택의 방은 평원답게 넓었고, 밀이 무성한 초원이었다.

나는 목적을 상기하였다.

‘이곳에서 120회차의 카티에. 즉, 진짜 카티에를 찾아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모든 카티에는 각자 본인이니 외견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차마다 복장, 성격 따위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회귀하며 직접 그녀를 보아 왔다면 카티에를 찾기 쉬웠겠지만.’

아쉽게도 난 회귀의 기억이 없다.

그래서 추리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나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설령 모두 외모가 같아도 120회차 카티에를 찾는 방법은 분명 있다.

허리까지 높이 자라있는 황금빛 밀을 헤치면서 나는 평원을 이동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난 바닥에 웅크리며 울고 있는 ‘카티에들’을 봤다.

“기적을 많이 쓰면 난 죽게 돼.”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할까?”

“반복되는 삶이 싫어. 역겹다고.”

나는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똑같이 생긴 아름다운 소녀들을 보게 되는 건 기묘한 일이다.

30명의 카티에가 트라우마를 겪으며 몸을 슬프게 떨고 있었다.

“이번 삶도 대장을 지키지 못했어. 내가 회귀해 봤자 실패할 뿐이야.”

“회귀를 멈출 수 있을까? 동료도, 세상도, 나도, 전부 미쳐가고 있어.”

“끔찍해. 귀찮고. 전부 포기할래.”

회귀 탓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려서 생존마저 포기해 버린 카티에들.

‘전부 몇 회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티에가 제정신을 잃을 만큼 정신이 붕괴됐던 회차가 저렇게 많다니.

아니, 어쩌면 여기 있는 녀석들 말고 좌절한 녀석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

‘……회귀로 인한 고통이라.’

안쓰러운 동정심에 목이 막혔다.

어째서 카티에가 불안증에 시달리고 항시 울음이 잦은지 알 것 같다.

120번의 반복된 회귀란 사람을 저토록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대장?”

어느 카티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좌절 카티에’들도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장이에요? 정말 대장이에요?”

“미안해요. 사죄할게요.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 줘요.”

“날 안아줘요. 내 눈물을 닦아줘요. 괴로워요.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모든 ‘좌절 카티에’가 내게 붙었다.

그러나 굳은 표정으로 외면했다.

‘일단 내 추리라면 저 사이에 120 회차 카티에가 있지는 않을 거야.’

괴로웠지만, 나는 좌절한 그녀들을 외면하고 걷는 수밖에는 없었다.

의외로 ‘좌절 카티에’들은 날 억지로 붙잡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끝없는 좌절 속에선 그런 의지조차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리는 법이다.

힘없이 내게 다가오는 시선을 외면하자 그녀들은 제풀에 꺾여버렸다.

“대장한테마저 버림받았어.”

“하기야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회귀해도 나란 것은 늘 이런 꼴이지.”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 차라리 여기서 소멸돼 버린다면 다 끝나겠지.”

좌절 카티에 들은 또다시 몸을 웅크리며 자괴감에 빠져버릴 뿐이다.

난 걸으며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빌어먹을.’

정말 끔찍한 기분이다.

내게 소중하고, 내가 아끼는 여자를 뿌리치고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심지어 내 선택에 의해 그녀들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버린단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살아가는 삶은 이번 120회차가 유일하다.

내가 아는 카티에는 120회차였다.

나는 언제든 나와 함께하고, 날 위해 눈물을 흘려준 그녀가 소중하다.

‘그러니까, 카티에는 다른 회차로 대체될 수 없어.’

자칫해서 ‘진짜 카티에’를 놓치고 다른 카티에를 선택하면 위험하다.

‘다른 회차의 카티에를 선택하면, 진짜 카티에는 소멸되어버리니까.’

가슴 속 의지를 더욱 세게 굳힌다.

모두가 카티에이기 때문에 내가 더욱 감정에 휘둘리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카티에들은 120회차를 빼면 각 회차로부터 ‘복제’되었다.

그녀들이 사라진다고 시간이 뒤틀리거나 과거가 왜곡되진 않는다.

‘안쓰러운 감정은 감추고, 냉정해지자. 지금은 그게 이득이니까.’

그리고 평원의 중심, 선택의 방 중앙에 도달했을 때 나는 경악하였다.

“대장! 내가 여기에 있어요!”

“아니! 내가 120회차예요!”

“웃기지 마! 내가 120회차 카티에라구요! 정말 못 알아보는 거예요?”

난 밀 사이에 숨어 그녀들을 봤다.

어여쁜 소녀로 가득 찬 평원이라.

‘황홀할지는 몰라도 조금 묘한데.’

묘사만 듣자면 화려하지만, 황홀경과는 거리가 굉장히 먼 광경이었다.

내게 선택받지 않으면 말소된다.

과연 모든 카티에가 필사적으로 나를 찾아다니며 눈에 불을 켰다.

‘저게 도대체 다 몇 명이야?’

요리모 쓴 카티에, 양갈래머리 카티에, 삭발까지 한 대머리 카티에, 하녀복 카티에, 무도복 카티에, 외알 안경 카티에, 하녀복 카티에, 안대 찬 카티에, 드레스 카티에 등등.

“딱딱!”

“나의 피에 대고 맹세해요! 대장. 내가 진짜 120회차 카티에라구요!”

심지어 스켈레톤이나 눈이 붉은 흡혈귀 카티에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향해 선택해 달라고 외치는 카티에들.

“…….”

난 그저 말없이 그녀들을 보았다.

선택의 방에서 소멸되어버리면 끝없이 반복되는 회귀도 끝나버린다.

그러나 ‘카티에’는 살고 싶어 한다.

스스로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니까.

‘대부분의 그녀가 살고 싶어 한다.’

때로는 궁금했다.

120회차 동안 회귀를 멈추기 위해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카티에는.

스스로의 인생을 어떻게 종결짓고 싶었기에 그렇게 노력했던 것일까.

‘됐어.’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 잡념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선택의 방에서 ‘진짜 카티에’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원래는 120회차의 카티에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렵고 까다롭겠지만.

나는 하나에 중심을 두고 보았다.

‘머리칼의 색깔.’

카티에는 기적을 많이 쓸수록 원래 희었던 머리칼이 검어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머리칼이 전부 검게 변해버리면 그녀는 사망하게 된다.

‘불멸아귀가 흰 손아귀에게 끌려갈 때, 오직 한 명. 단 한 번도 기적을 쓰지 않은 카티에가 존재했지.’

그건 바로 ‘120회차 카티에’.

나랑 미리 얘기를 해뒀던 것이다.

즉, 나는 이 중에서 머리칼이 유독 새하얀 카티에만 찾으면 그만이다.

‘혼자만 기적을 쓰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들을 눈으로 훑었다.

거의 모든 카티에가 흰 몇 올을 제외하고는 싹 검은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이중에서 머리칼이 새하얀 카티에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다른 카티에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끔 몰래 그녀에게 접근하였다.

“오래 기다렸냐?”

“아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장?”

난 어렵지 않게 흰 머리칼의 ‘120회차 카티에’를 찾아냈다.

백의를 입은 복장부터 머리칼까지 내가 알고 있는 카티에와 일치했다.

내가 120회차 카티에를 찾자마자 몇몇 카티에들이 곧바로 눈치챘다.

“대장! 걔는 120회차가 아니에요!”

“내가 대장을 위해서 훨씬 더 도움이 되고 함께 있어 줄 수 있어요.”

“자신해요! 내가 다른 회차들보다 훨씬 대장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제길, 몰래 접근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하여간 내 행동은 귀신같이 안다.

대부분의 카티에가 내게 선택받기를 위해서 맹렬히 달려들었다.

‘방법이 없군.’

선택의 방에선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딱히 그녀들을 검으로 베고 싶다는 생각도 일절 없었다.

나는 카티에의 손을 붙잡고 그녀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내달렸다.

카티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빨리 뛰는 것 아니에요?”

“어여쁜 미녀한테 둘러싸여서 죽고 싶은 게 내 꿈이긴 했는데, 굳이 지금 이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참, 말재간하고는.”

평원에서는 카티에들을 따돌릴 수 있는 각종 지형물이 있긴 하였다.

나는 지친 카티에를 아예 업고서 다른 회차의 그녀들을 따돌려냈다.

‘후. 그나마 바위가 있어 다행이다.’

간신히 그녀들을 따돌리고 우리는 기암괴석 뒤편에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카티에를 바라보았다.

[해당 카티에를 택하겠습니까?]

그 창에 동의하기 전에.

순간 나는 턱을 까닥이며 물었다.

“네 원래 일행은 어떻게 됐지?”

“그게 무슨 소리죠, 대장?”

“이전 회차부터 함께한 놈들 말이야. 회차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카티에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야 회차 초반에 자살했잖아요?”

다행히 제대로 알고 있군.

내가 한숨 쉬며 말했다.

“얼른 가자고. 퀸소히니베가 또 네가 보고 싶다면서 징징대고 있다.”

“네. 그래요.”

카티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네?”

나의 눈빛이 가늘게 빛났다.

“퀸소히니베가 널 보고 싶어 한다 말했잖아. 녀석이 누군 줄 알아?”

“그야 이번 회차에서 만난 인간이잖아요. 뭘 되묻고 그래요?”

나는 바로 한숨 쉬며 판단 내렸다.

“너, 가짜였군.”

“그게 무슨 소리죠, 대장?”

카티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나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퀸소히니베는 120회차에서만 생존한 용이다. 현재 나와 함께하고 있지. 그녀를 제대로 모른다면, 너는 절대 120회차의 카티에가 아니야.”

그러자 카티에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웃기지 마요. 대장. 내 머리칼이 하얀색인 건 어떻게 설명하려구요?”

확실히 모든 카티에들 중에서도 머리칼이 흰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간략히 살펴보고 나서야 감을 잡았다.

“밀가루로 위장했군. 평원에 나 있는 밀을 빻아 머리칼에 뿌렸겠지.”

카티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소매에서 단검이 튀어나온다.

챙!

내가 날아든 단검을 쳐내자, 역방향으로 튕겨 그녀의 뺨을 베었다.

핏줄기가 흘렀으나 ‘가짜 카티에’는 아프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녀석이 위조된 밀가루를 털어내자 본연의 검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역시 대장은 속이기 어렵네요. 뭐, 사실은 별로 기대도 안 했지만.”

“검으로 나랑 싸울 생각이냐?”

나는 칼자루를 굳세게 쥐었다.

그러나 어느 회차인지 모를 그 카티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참고삼아서 가르쳐줄까요? 내가 살던 회차에서 인류는 멸망했어요. 전부 나에 의해서 말이죠.”

“묻지도 않았는데, 왜 가르쳐줘?”

“내가 얼마나 외롭고 괴로워했는지에 관해 알려주는 거예요. 대장.”

‘인류를 멸망시킨 카티에’가 나를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사실 대장이 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도 우리 모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다들 알고 있겠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참 소름 끼쳤다.

“대장을 여기에 가둬두는 거예요. 그럼 그만큼 우린 존재할 수 있죠.”

확실하다.

틀림없이 그녀는 분명 미쳐있다.

단검을 꼬나 쥔 카티에가 비척이며 다가오며 피가 묻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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