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41화
120회차에는 절대적 규칙이 있다.
‘회귀자는 밴시에게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암묵적이고 본능적인 룰.
태생적으로 불리한 숯이 불을 상대로 이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블라이넨은 그 규칙을 꺾어버렸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참으로 형편 없는 일격이었다.
나를 부축하느라 무게중심은 잡지 못했고, 손에 담긴 힘은 너무 적다.
그러나 나의 눈에 그녀가 밴시를 향해 휘두른 일격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검의 참격보다도 장렬했다.
「꺄아아아아악……!」
형편없는 일격이었으나 하급 밴시는 하급답게 간단히 소멸해 버렸다.
블라이넨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소모한 것처럼 식은땀을 흘려대며 비틀대었다.
‘블라이넨의 검기는 혼까지도 벨 수 있다고 했었지.’
실제로 그녀의 검기를 감은 칼은 지금 밴시를 베어 소멸시켜 버렸다.
밴시는 고작해야 하급 유령 몬스터에 불과하나 그녀는 회귀자였다.
나는 직접 보고도 회귀자가 밴시를 베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인간을 초월한 근성.’
120회차를 매번 노력해 온 회귀자.
누구보다 강한 근성을 갖춘 블라이넨은 높은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밴시들은 그런 블라이넨을 보며 처음으로 경계하는 기색을 띠었다.
「저 여자가 자매를 베었다……!」
「우리가 혼쭐을 내줘야 해……!」
「어이가 없군……! 하……!」
더욱 수도 없이 많은 밴시들이 우리 앞길에 몰려들고 있었다.
비명 소리가 더욱 커지고 높아진다.
심지어 개중에는 검기를 보고도 그녀에게 달려들기 위해 눈을 빛내는 호전적인 밴시들까지도 존재하였다.
“우욱……!”
블라이넨은 구토하였다.
노란 물이 나올 때까지 역류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그녀는 참으로 회귀자다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
블라이넨은 한쪽 발끝을 용암에 담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하고 잔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기랄, 그만해!’
나는 외치고 싶었다.
다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까부터 숨쉬기가 힘들더니, 기도가 마비라도 되어버린 것인가.
그녀의 발끝이 불타며, 신발 거죽이 말소되고, 살점이 타들어 갔다.
눈물 젖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 흘렸지만, 독한 눈빛을 보였다.
내가 그 눈빛을 마주 보았다.
“살…….”
그녀가 무어라 말했지만, 목소리가 작고 발음이 희미해 들리지 않았다.
나를 부축한 블라이넨은 절뚝대면서도 용케 고통을 참으며 걸어간다.
밴시들이 위협적으로 주위를 떠돌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버텨내고 있어.’
블라이넨은 밴시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초월적인 인내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그녀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밴시의 울음이 계속되면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백치가 돼버린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블라이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뭐라도 돕고 싶다.
난 진심으로 그녀를 돕고 싶었다.
굳어버린 나의 몸이 지독히 밉다.
‘재능이 있으면 뭐하냐고. 중요한 순간에 허수아비처럼 무력한데.’
내 눈에서도 뭔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전염된 것일까.
절뚝이는 발걸음.
위태로운 산책.
그러나 블라이넨은 멈추지 않는다.
「이, 이년……! 우리가 위협해도 그냥 가만히 있지를 않잖아……?」
「회귀자 아니었어? 인간은 전부 다 우릴 무서워해야 정상이라고!」
「인간이 아닌 걸까? 대체 뭐야!」
오히려 밴시들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그녀에게 겁을 집어먹었다.
몸을 떨며 우리가 나아가던 그때.
울음이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위대한 두 인간이여. 너희가 한낱 미물이 아니란 것은 입증하여줬다.”
우리가 비척이며 고개를 들었다.
비늘이 찢겨 흉하고 상처 입어 전신이 너덜너덜한 백룡이 우릴 봤다.
“크롸아아아앗-!”
「꺄아아아아악……!」
백룡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밴시 떼가 놀라서는 우리를 피해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허억……!”
그제야 블라이넨은 나를 부축하던 손을 놓고서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나는 수없는 회귀자를 보았다. 그러나 너희 둘은 내가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인간상이다. 아, 물론 한 놈은 회귀자가 아니지만.”
백룡이 천천히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를 표한다. 고귀한 자들이여.”
우리는 맞절을 올릴 기운도, 겸손한 대답을 해줄 기력도 전혀 없다.
백룡이 공기를 후욱 빨아들였다.
상처 입은 그가 크게 포효하였다.
“날벼락을 내리는 용이, 폭우라고 내리지 못할쏘냐.”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빗방울이 몇 줄기 내린다.
쏴아아아……!
백룡이 폭우를 내리고 있었다.
천지의 불이 꺼져간다.
“…….”
“…….”
나는 블라이넨을 보았다.
블라이넨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검처럼 예리하고 깊은 만감의 감정을 교차시켰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공교롭게도, 우린 같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살아.”
지독히 짧고 명료한 두 글자였다.
***
결국 나는 죽고 말았다.
그러니 이곳은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일 테고(그래, 난 참 양심도 없는 놈이다), 눈앞의 저자는 천사겠군.
“요새 천국은 직원할당제로 근육질 미남 천사까지도 수용하나 봅니다?”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제정신이군요. 범철.”
헤르탄의 핀잔에 나는 뺨을 세게 쓸면서 찌푸린 눈동자를 폈다.
“여기는……?”
“어느 주막입니다. 구암산에서는 아주 멀리 벗어난 지역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헤르탄이 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백룡이 저희를 구해줬습니다.”
“백룡이요?”
헤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도깨비만 두고 우선적으로 저희와 도깨비들을 구출했지요. 도중에 깨어난 구미호가 빠르게 백룡의 몸에 일행을 업어다 줘서 일이 재빠르게 풀렸던 이유도 있습니다.”
내가 기절한 새, 그리됐던 건가?
정말이지, 백룡과 구미호랑 결전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군.
“하여간 다행입니다. 그런데…….”
배를 훑어보니 상처는 없었다.
깊고 흉측한 흉터만 있을 뿐이다.
어, 분명 내장이 삐져나왔었는데?
‘카티에도 없고, 심지어 있더라도 쉽게 치료 가능한 부상이 아니었어.’
그러나 지금 나는 신기할 만큼 몸이 멀쩡하고 부상도 나아가고 있다.
나는 가장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습니까?”
“용궁에 갔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헤르탄의 되물음에 고갤 끄덕였다.
그가 공이에 잘게 빻아져 뭉쳐진 고약 같은 것을 나에게 보여줬다.
“용왕의 뿔을 갈아 만든 명약입니다. 이것이 범철을 살려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헤르탄이 용궁에서 용왕을 따로 회수했었지.
명약이라는 소린 들었지만 설마 그만한 상처가 나을 만큼 뛰어날 줄이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나흘입니다. 어찌나 체력을 한계까지 쏟았는지 깨지도 않더군요.”
어쩐지 엄청 배가 고프더라니.
헤르탄이 예의를 갖춰서 물었다.
“간호식을 드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재빨리 거절했다.
그는 내 왼편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있는 여자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쪽은?”
“사양하지.”
블라이넨은 편히 누워서 금속 테 안경을 쓰고 책을 뒤적대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도 살아남았군.’
용암에 담갔던 왼쪽 발은 붕대로 감겨 있고, 심지어 뭉개져 버렸다.
그런 그녀를 보자 나는 괜스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블라이넨.”
“왜?”
“날 살려줘 고맙다. 네 발은…….”
“되도 않는 위로는 회귀하며 지겹도록 들었어. 그보단 보상을 원해.”
“보상? 나한테서?”
“불멸아귀가 지키고 있다던 명약. 그건 대륙지배자의 생명을 끊은 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겠지.”
백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명약.
그것이 블라이넨이 청색대륙에 온 이유이자, 소년왕을 위한 충정이다.
헤르탄은 그녀에게 무릎 꿇었다.
“블라이넨. 당신이 범철을 위해 한 일은 백룡에게서 익히 들었습니다.”
“딱히 저놈을 위해서 한 게 아니야. 저놈이 살아야 나도 목표로 했던 명약을 얻을 수가 있었으니까.”
블라이넨은 차게 대꾸했다.
그러나 헤르탄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한 최고로 뛰어난 회귀자입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이후도 절대로 변함없을 것입니다.”
“과찬이군.”
“확신합니다. 모든 회차를 통틀어 밴시를 극복한 회귀자는 당신이 최초니까요.”
블라이넨은 무신경하게 책의 페이지만 넘길 따름이었다.
한편 헤르탄은 천천히 일어나며 품에서 특이한 철가면을 꺼내었다.
“헤르탄. 그 가면은 뭡니까?”
“반죽음이던 범철의 가슴에 있던 철가면입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이건 범철이 45회차의 왕으로 활동한 시절에 썼던 가면과 같습니다.”
나는 꿈같은 환상 속에서 전생의 내가 무언가를 주었던 기억이 났다.
‘내게 맡긴다고 했었던 물건.’
왜 전생에서 가장 강했던 내가 지금의 내게 철가면을 전달해준 걸까?
‘어째서 자신이 쓰던 철가면을.’
설마 범죄 저지를 때 쓰라고 준 건 아닐 테고.
나는 주의 깊게 철가면을 살펴보았지만, 아이템 옵션은 뜨지 않았다.
“이 가면의 성능은 뭡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색이 변조되어 신분위장이 가능한 걸 빼면 그저 평범한 철가면이지요. 다만…….”
“다만?”
헤르탄이 그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시 범철이 이 가면을 쓰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왕으로서 군림하고 통치하는 순간.”
그의 음색은 진지하고 짙었다.
“그리고 둘째는,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이를 지키는 순간이었습니다.”
순간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였다.
어째서, 뭘 위해 전생의 내가 이것을 넘겨줬는지 의도를 알 것 같다.
그 철가면을 꽉 움켜쥐었다.
“일단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군요.”
나는 철가면을 품안에 챙겼다.
블라이넨은 여전히 시선은 이쪽에 두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신기한 일이군. 전생의 자신한테서 물건을 받게 되다니. 그것도 전생의 돌 덕분에 가능했던 일인가.”
그러고 보니 난 가슴을 매만졌다.
전생의 돌이 박혔던 부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매끄러울 뿐이다.
‘평생 돌이 박힌 채 살아야 하나?’
뭐, 딱히 생활에 지장은 없겠지만.
그보다도, 나는 슬쩍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그런데 그거 무슨 책이냐?”
“골방에 있던데. 꽤나 유익하더군.”
블라이넨은 내게 표지를 보여줬다.
「우리 집 하녀는 체리향」
“…….”
그 야시시한 도색서적이 여기에도 있었나.
***
몸이 회복되자마자 나는 일어났다.
당장 불멸아귀를 죽인 보상부터 확인하고 싶지만, 그보다 훨씬 급하고 중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마검사가 깨어났다!”
“몸은 어디 성한가!”
보초 서던 도깨비들이 날 보고 놀랐다.
나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신도들 탓에 내가 이곳에 숨어 회복하고 있단 것은 엄연한 기밀이었다.
“내 노예가 괜찮은 것이야?”
용왕의 명약을 쓰고도 걷게 될 때까지 며칠이나 걸린 나와는 달리, 퀸소히니베는 흉터 없이 멀쩡했다.
“과연 용의 회복력이야. 부러워 죽겠다. 벌써 다 나았냐?”
“하. 말 돌리지나 말란 것이야. 그 성녀는 여러모로 민폐라니까.”
“민폐는 무슨. 카티에 아니면 불멸아귀는 잡지도 못했어. 잊었냐?”
“흥. 그러든 말든.”
퀸소히니베는 어린애처럼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 따름이었다.
“하여간 내 노예가 죽거나 다치면 나는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이야.”
“걱정 마라. 자연사하게 해줄게.”
서로 퉁명스럽기는 해도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이해하였다.
한편 헤르탄은 그답게 충고해 줬다.
“범철. 카티에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데요?”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내게 무슨 묵직한 보따리를 넘겨주었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이게 뭐죠?”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위기 시에 반드시 이걸 풀어보십시오.”
헤르탄의 확신이 담긴 발언에 나는 일단 보따리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 전생의 돌이 몸 안에 박힌 뒤부터 느껴지는 기운을 집중했다.
‘기묘한 감각이군.’
[선택의 방에 입장하겠습니까?]
[오직 전생의 돌 소유자만 유일하게 선택의 방에 입장 가능합니다.]
카티에는 각 회차의 자신들과 함께 선택의 방으로 이전되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야 한다.
“그럼, 다녀올게.”
동의하자마자, 새 문구가 떠올랐다.
[선택의 방에 입장합니다.]
[각 회차의 카티에 중에서 120회차 카티에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물의 선택을 마치면, 나머지 인물들은 자연적으로 소멸됩니다.]
[선택의 방에서는 마법을 비롯한 모든 마나의 행위가 차단됩니다.]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난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눈을 뜨자, 새하얗고 먼지 한 톨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방이라고? 이렇게나 넓은 곳이?’
기껏해야 건물 수준을 생각했던 난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에 놀랐다.
놀라서 곧장 일어서려고 했을 때.
무언가 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뭐야.”
그곳에서, ‘서큐버스 카티에’가 참 다정한 얼굴로 나를 짓밟고 있었다.
왜 서큐버스인지 알았냐면 검고 긴 꼬리, 그리고 파격적인 복장 탓이다.
흰 머리칼 몇 올만 제외하고 새까만 머리칼과 몹시 고혹적인 분위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다 고개를 휘젓고서 정신을 다잡았다.
“너…… 다른 회차의 카티에냐?”
“맞아요. 대장이 살던 회차와는 다르죠. 그보다는 지금 만난 대장에게 곧바로 경고해 줄 것이 있어요.”
그 카티에가 나의 가슴 한가운데에 발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대었다.
“잘 들어요. 이제부터 잘못하면 죽게 될 거예요. 선택의 방에서는 모든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해요.”
“……내가 죽게 될 수 있다고?”
선택의 방에서 시작부터 목숨 잃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귓가를 매만지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냐하면 ‘인류를 멸망시켰던 회차’의 내가 대장을 찾고 있거든요.”
나는 곧바로 벌떡 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