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30화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두 가지 이상 현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서 소리란 것이 완전히 소멸했든지, 아니면 내 귀가 멀었든지.
그만큼, 지금.
사방이 조용하였다.
“…….”
본인은 모르겠지만, 수십만 신도가 전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우습고 보기 드문 광경이다.
스스로 발언하고도 헛웃음 나왔다.
‘하기야 자기가 믿는 신이 두 대형 종파 모두 버리겠다 선언했으니까.’
모두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때.
“……너.”
처음 입을 연 건 블라이넨이었다.
그녀는 날 어이없게 쳐다보다가 서서히 얼굴의 한 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개소리는 안 되게 한다. 걱정 마.”
“누가 걱정했어? 욕만 치미는데.”
“나중에 먹어주마. 안 그래도 남들보다 짧은 인생, 길게 좀 살아볼까.”
블라이넨은 당장 날 찢고 싶다는 기색이었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날 모시는 수십만 신도 앞에서 날 죽일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니까.
카티에가 눈썹을 날카로이 세웠다.
“역시 저 여자가 양성애자였나요?”
“…….”
헤르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범철. 분명 지금의 선택으로 우리의 운명은 확연히 갈렸습니다. 정말 수십만의 병력을 포기하고 그녀 하나를 택할 작정입니까?”
“예.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그러면 가십시오. 따르겠습니다.”
상당히 의아스러웠을 내 결단에도 헤르탄은 확고한 충성심을 보였다.
반면 퀸소히니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초조하게 하늘만 보았다.
곧 신도들이 당혹해하며 웅성댔다.
“블라이넨이라면…… 그 명성 높고 강한 불세출의 검사 중 한 명……?”
“그런데 저 여자가 두 교주님보다 검을 잘 쓴다고? 무슨 헛소리야? 교주님들은 그 범철 님의 제자라고.”
“헛소리? 범철 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잖아! 교주보다 검을 잘 쓴다고.”
신도들의 혼란스러움이 커지자 당황한 두 교주가 나를 향해 외쳤다.
“스승님께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지금껏 스승님을 섬겨온 저희를 버리겠다고요? 헛소리입니다!”
“범파 교주에게는 반대하지만, 이번만은 그녀가 옳습니다! 저힐 버리고 고작 사람 하나를 택한다니요?”
내가 두 사람을 천천히 바라봤다.
“내 선택에 반대하겠다는 거냐?”
그러자 철파 교주 화비가 성냈다.
“예! 당연합니다! 블라이넨을 택하다니요! 그 여자가 저희 종교랑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하물며 저 여자가 드높은 검사일지라도, 불멸아귀를 사냥할 때 철파의 화력보다는 훨씬 미약할 것……!”
짝!
내가 손뼉을 쳐 놈의 말을 끊었다.
“거기까지.”
“하지만 스승님! 그 선택은 말도 안 됩니다! 회귀를 못 하시니 상황 판단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지나친 손해입니…….”
“시끄러워. 선택은 이미 내려졌다. 난 너희 둘 다 옳다고 보지 않아. 그래서 철파, 범파 모두 버린다고.”
“제기랄! 도대체 무슨 근거로!”
화비가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혀가 기네.”
내가 손뼉을 한 번 더 쳤다.
짝!
그 순간, 벌판이 번뜩였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르르릉!
그리고.
콰아아아앙!
쾌청한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으어억!”
“뭐, 뭐야!”
신도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교, 교주님이……!”
화비의 몸은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흔적만 남겨졌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벼, 벼락이다! 벼락이 떨어졌어!”
“범철 님께서 불같이 노하셨다! 지, 직접 날벼락을 내리신 거야!”
신도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내지르고, 울면서 나에게 몸을 조아린다.
천벌을 내릴 시간이 도래하였다.
이 미치광이 사이비들에게.
***
카티에가 흔적을 멀리서 살폈다.
“시체가 보이지 않아요. 아까 벼락 맞고 타죽은 것은 분신이었네요.”
분신능력을 가졌다는 거물, 화비는 분신으로 자기가 죽는 것을 막았다.
과연 대형종파의 교주답게 목숨이 잡초처럼 질기군.
도깨비들이 불꽃과 요술로 퇴로를 만들었고, 우린 서둘러서 내달렸다.
“신이시여!”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두 종파 중 하나에게 선택을!”
신도들이 끈질기게 나에게 붙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수십 명이 불타며 죽어버렸고, 신도들조차 그런 천재지변에 기겁하였다.
“그, 근처로 절대 다가가지 마!”
“날벼락이 떨어진다! 천벌이야!”
결국 범파 교주 이랑도 소리쳤다.
“스승님을 가게 두어라! 막으려고 해봤자 우리만이 죽게 될 뿐이야!”
다행히 쏟아지는 벼락과 도깨비들의 원호로 우린 벌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랑은 나를 멀찍이 지켜보며 허리를 굽히고는 크게 외쳤다.
“머지않아 다시 뵈어요! 스승님!”
나는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올리며 작별인사를 했다.
“됐고! 그냥 내 인생에서 꺼져라!”
대형종파의 추격에서 벗어난 우리는 쉼 없이 달린 끝에야 멈춰 섰다.
“이쯤 벗어나면 됐겠죠.”
“대형종파도 함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따돌렸군요.”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에게 벼락을 내리는 신비한 힘이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무슨 진짜 신도 아니고.’
“말이 있으면 편했을 텐데. 비행하는 도깨비에 탔더니 몸이 쑤셔요.”
카티에가 다리를 콩콩 두드렸다.
“하여간 백룡이 우리를 도왔다는 것은 호의적이라는 의미긴 하네요. 이전 회차에선 재앙 자체였는데.”
비환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로 듣기는 했지만 신기하다! 정말로 백룡이 벼락을 떨어뜨리다니!”
벌판에다 날벼락을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청색대륙의 백룡이었다.
‘무녀가 있어야만 다룰 수 있고, 대형종파에서 포섭하려 했던 백룡.’
청색대륙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생명체.
그런 막대한 생명체가 나를 도왔던 것은 며칠 전의 일 때문이었다.
용궁에서 막 육지로 왔을 때, 나는 용왕의 간을 던져 구미호를 불렀다.
‘정말 용왕의 간을 가져왔구나! 그런데 왜 감질나게 절반만 주니?’
‘그 간을 얻느라 꽤 고생했거든? 그래서 나도 너한테 부탁할 게 생겼어. 나머지 반은 그때 가서 주마.’
나는 구미호에게 개별적인 의뢰를 부탁했다.
바로 백룡과 접선해달라는 것!
‘원래 동면 중인 백룡을 불러와 포섭하려면 무녀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혈연이 있으니까 말이지.
도깨비의 도움을 받은 우리와 달리, 산책하듯 뒷짐까지 지고 여유롭게 걸어온 미별이 길을 안내했다.
“나와 따로 얘기한 백룡은 여기로 자기 딸을 데려오랬어. 자, 불러봐.”
우리는 산등지의 동굴에 멈춰섰다.
커다란 동굴이었지만, 조용하였다.
퀸소히니베가 떨면서 물었다.
“아, 아빠?”
동굴 깊숙한 곳, 목소리가 울린다.
“딸이냐.”
***
이젠 나도 용이라면 꽤 익숙하다.
용의 재판에 참석한 적도 있고, 그들과 함께 싸운 적도 있으며, 무엇보다 퀸소히니베와 같이 다니니까.
그런데도 카티에의 설명에 따르면 백룡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백룡은 강력한 존재예요. 수십의 용이 합쳐도 백룡에게는 당하지 못해요. 지난 회차에서 저 백룡을 잡으려다 대장과 내가 죽었으니까.”
“맞아. 지난 회차에서 백룡을 사냥하려 했다고 말했었지? 왜 그랬어?”
“지난 회차목표가 세상의 포악한 용들을 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회차목표로 설정될만한 생명체라면 포악하고 강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멀리서도 날씨를 조종해 벼락을 떨어뜨릴 정도니까.’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그만한 권능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리고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동굴서 누가 걸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나의 딸이여.”
백룡은 예상 밖의 외견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인 그가 놀랍게도 졸린 표정의 미소년이었던 것이다.
퀸소히니베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아, 아빠예요?”
“오빠로 보였느냐. 흥겹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딸은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데 언어장애가 있었던 것이냐.”
뭔가 말하시는 게 꽤나 괴짜로군.
청색대륙의 포악한 백룡은 자기 딸의 자태를 슥 훑더니 혀를 찼다.
“황색대륙 용은 이래서 안 된다. 제 힘으로 대륙조차 못 벗어나고, 중립을 벗어나면 본모습도 잃으니.”
“하, 하지만 아빠도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시잖아요?”
“오랜만에 딸을 보는데 속옷 바람으로 나갈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백룡은 품격 있게 안부를 물었다.
“나의 반려이자, 너희 어머니이신 분은 무사히 죽어서 묻히셨겠지?”
“……언데드로 부활하셨는데요.”
“거, 씨. 그 여편네, 왜 살아났지.”
……생긴 건 미소년인데 말하는 건 배불뚝이 아저씨 뺨치니 미묘하군.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백룡은 뒤늦게 뒤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의 딸이 인간에게 길들여졌군.”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하며 눈썹을 올렸다.
“길들여지다니요? 오히려 제가 이 인간들을 노예로 끌고 다니는걸요.”
“내 딸이 언어장애뿐만 아니라 인식장애, 계급장애까지 있던 것이냐. 걱정을 덜어내어라. 나의 딸이여. 장애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
카티에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고 퀸소히니베는 팍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눈물까지 닦고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추었다.
“정말로 고맙네요. 회귀하며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일은 드물어서요.”
“과찬의 말씀이시군. 미물이여.”
백룡은 찬찬히 도깨비까지 둘러보다가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였다.
“반갑습니다. 범철입니다.”
“미물의 신이 날 뵙는군. 절할까?”
과연 백룡의 태도는 오만하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물의 신이라고 해봤자 청색대륙을 호령하는 백룡에 비하겠습니까?”
“말을 뻔뻔하게 하는 걸 보니 개 같군. 그렇게 내 마누라도 홀렸나?”
“아빠!”
퀸소히니베가 참을 수 없어 하며 얼굴을 붉혔고, 백룡은 입맛을 다셨다.
“들어와라. 누추한 너희가 있기에는 지나치게 귀하신 둥지이니까.”
폭포 뒤에 숨겨진 큰 동굴은 그야말로 동화처럼 웅장한 공간이었다.
커다란 실내에는 용의 크기에 걸맞은 각종 장식과 물건들이 있었다.
“끄아앙! 여기 봐! 물병이 크네!”
“불도깨비는 불을 꺼라! 잘못해서 가구를 태워 버리면 실례다!”
“여긴 뭐든지 다 크다! 아이코!”
도깨비들은 신이 나서 달리다가 넘어지고, 그릇을 엎었지만, 백룡은 딱히 신경도 안 쓰며 태연히 걸었다.
‘백룡은 원래가 정리정돈이랑은 거리가 먼 성격인가 보군.’
하기야 공간에 비하면 그다지 정리가 되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 데서나 일어나라.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한다.”
상당히 자유방임적인 백룡은 그리 말하고 둥지 깊숙한 곳으로 갔다.
다들 잘 곳이나 쉴 곳을 찾아볼 때, 블라이넨이 내 등을 건드렸다.
“잠깐.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나와 그녀, 둘만이 남겨지자 블라이넨이 벽에 등을 기대고 말하였다.
“이제 말해라.”
“뭘?”
“날 왜 선택했지?”
“너를 얻어야지만, 불멸아귀를 죽일 수 있으니까.”
나의 대답에 그녀는 전혀 만족한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날 얻어야 한다고? 대형종파의 막대한 화력을 포기해가면서까지?”
“그럼. 당연하지.”
블라이넨은 황당해하는 기색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제대로 믿고 함께 싸울 수 있는 회귀자. 최소한 교주 놈들보다는.”
“웃기지 마.”
그녀가 입술을 씹자 내가 히죽 웃었다.
“왜? 그래도 서로 사랑 고백에 잠자리도 함께한 사이지 않냐.”
“진짜 죽일까. 나는 널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다. 그런 날 믿겠다고?”
“난 전생의 부인을 죽였어. 나를 납치해서 애를 낳게 하려 했었거든.”
나는 그녀가 무는 곰방대를 봤다.
정말 가끔은 그녀처럼 담배라도 태우면 정신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가끔은 후회도 됐고, 울기도 했고, 살짝 미칠 뻔하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좀 다른 선택을 하려고.”
블라이넨은 연기가 한껏 뒤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거기다 너는 원래 불멸아귀 죽이는 것까지는 돕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렇게 크게 벌여야만 날 돕겠지.”
“그래. 돕기는 하겠지만, 너는 후회할 거다. 아무리 나라도 수십만 병력과 비견될만한 가치는 전혀…….”
“필요 없어.”
“뭐?”
블라이넨이 되물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불멸아귀를 죽이는 데, 수십만 병력이나 모일 필요 없다고. 낭비야.”
황색대륙 지배자, 아크 리치를 죽이는 데만 6만의 병력이 대동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병력은 도깨비들까지 합해봐야 고작 3천 남짓.
‘하지만.’
내 손에 전생의 돌이 쥐어져 있다.
“그저 우리만으로도 충분해.”
한참 전, 나의 앞에는 이러한 문구가 떠올랐다.
[전생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 자신을 가장 오래 섬겨온 회귀자, 자신을 가장 많이 살린 회귀자와 168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대기시간이 만료되어, 전생의 돌이 마지막 과업을 부여했습니다.]
[해당 과업을 완수하려면 연이 깊은 세 명의 회귀자가 필요합니다.]
[과하게 불가능한 난이도의 과업이므로 보상이 먼저 표기됩니다.]
[과업 완료 시 획득하는 전생 관련 특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