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28화
“나도 진심으로 동감해요, 대장. 저 교주들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에요.”
“저것이 각 종파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서로 적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왔군요. 화력을 과시하려는 겁니다.”
“저렇게 바퀴벌레처럼 득실대는 인간 떼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야.”
“종교란 무섭군.”
우리는 절벽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거물의 세력임을 표하는 6개의 별이 박힌 육성기가 양측서 펄럭인다.
저 넓은 벌판이 빼곡히 채워지는 숫자라면 못해도 수십만은 되려나.
‘아크 리치 원정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수군.’
설마 6만 원정대보다 많은 병력을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와 함께하는 3천의 도깨비들 또한 놀라운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많은 인간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본다!”
“저기서 넘어지면 짓밟혀 죽겠다!”
도깨비들은 진지한 감정보다는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군세를 보았다.
거인도깨비 두령은 엄격히 말했다.
“우리가 마검사를 호위해야 한다!”
도깨비에겐 회귀의 존재와 불멸아귀를 죽이려는 이유에 대해 대강 설명했다.
그래서 거인도깨비 두령은 이전보다 더욱 진지한 태도로 협력해줬다.
‘그건 참 고맙다만.’
저 많은 군세 속에서, 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나 할는지 모르겠군.
그때 비행의 요술로 하늘에 떠 있던 비환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군가 말을 타고 오고 있다!”
나는 눈매를 좁혔다.
저편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검은 외투를 입고 있어,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네놈들은 뭐냐!”
도깨비들이 곧장 경계하며 불꽃을 태우거나 요술을 사용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앞장선 남자가 말의 고삐를 잡아 이끌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계 마라! 우리는 전령이다!”
검은 외투를 입은 다섯 명의 전령.
내가 소리쳐서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소식을 전달하려고 왔지?”
“범철 님께서 직접 나와 주십시오!”
“분명히 함정일 거예요. 대장.”
항상 불안해하는 카티에가 곧장 염려했지만, 내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불안해만 하면 아무것도 못 해. 신도가 다 보는 앞에서 날 해치겠어?”
나는 혼자서 전령들에게 걸어갔다.
절벽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도달했을 때, 전령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숨겨둔 검을 뽑았다.
“너의 검술을 우리에게 입증해라!”
“진짜 범철 님이면 우릴 이기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카티에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내게 외쳤다.
“거봐요!”
하여간 벌어진 상황은 받아들이자.
내가 맛조개에 소금을 팍 뿌리자 세찬 칼날이 튀어나왔다.
‘참 간단하고, 확실한 인증절차군.’
내가 저들에게서 살아남으면 진짜, 그렇지 못하면 가짜 대역이란 건가?
그렇게 의심이 간다면야 보여주지.
멀리서도 확인하기 쉽도록 일부러 동작을 크게 보이며 검을 휘둘렀다.
“커억!”
“큭!”
날 공격하던 다섯 전령의 목이 차례로 피에 젖어 떨어진다.
찬양 속에서도 날 냉철히 주시하던 몇몇 교도들마저 입을 떡 벌렸다.
“진짜다! 정말 범철 님이 확실해!”
“저 용맹무쌍한 검술을 보아라! 신화서 언급되던 바로 그 모습이다!”
“누가 감히 저 흉내를 내겠느냐!”
“의심하던 불신자들은 죄다 자결해라!”
나의 대역을 우려하던 자들마저 의심을 거두고 나를 선망하며 보았다.
아주 천천히, 그들을 내려다본다.
난 피에 젖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뜨겁고 세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넓은 벌판을 가득 메우는 신도들의 외침에 귀가 찢길 것만 같다.
‘기분이 이상하네. 꿈꾸는 것처럼.’
그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더러운 화분이나 꾸미던 내가 수십만 교도의 찬양을 받게 될 줄이야.
‘전부 회귀자다. 저 사람들도.’
120번을 살면서 피폐해진 인간들.
그런 그들이 웃고, 울며, 열광한다.
자살조차 하지 않고, 저곳에 있다.
오로지 나를 믿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받은 건가요, 대장?”
카티에가 피 묻은 뺨을 닦아줬다.
“아니, 새삼 우스워서.”
“뭐가 말이에요?”
“회귀자들이 1회차인 나를 찬양한다는 게 말이야. 참 우습잖아.”
“대장.”
나를 닦아주던 손수건이 멈추었다.
내가 흘깃 그녀를 보았다.
카티에가 피가 젖은 손수건을 꼭 쥐고는 조금은 낮게 속삭였다.
“회귀자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요.”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을 즈음.
몇몇 신도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범철 님이시여! 전령의 봇짐을!”
“그곳을 부디 살펴주시옵소서!”
나는 전령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봇짐을 풀어헤치자 웬 화려한 빛깔의 노리개가 나왔다.
「울림 도술의 노리개」
목소리를 크게 확장시켜주는 패물. 지엄한 신선의 도술이 걸려 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 쓸데없이도 친절하네.’
하여간 허리춤에 노리개를 달자 내 목소리가 벌판에 크게 울려 퍼졌다.
“다들 입을 닫아라.”
그러자 귀가 찢어질 듯 소란스럽던 군세가 금세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일생신교의 신도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아주 조용히 올려다봤다.
이것 참 괜히 긴장되고 떨리는군.
“알다시피 난 회귀를 멈추는 것이 목표다. 세상을 돌려놓기 위해서.”
당연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저것들은 날 신으로 안다.
그렇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회귀가 멈춰지면 세상은 돌아올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고 있다.”
사방이 고요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목젖이 꿀렁이는 소리만이 귓가에 스며드는 벌판.
“회귀를 멈추려면, 불멸아귀를 죽여야 한다. 하나 모두를 데려갈 순 없다. 내가 선택할 것은 오직 하나.”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일종의 기선제압이었다.
범파와 철파.
두 세력이 소리쳤다.
“스승님이시여. 철파의 교주로서 말하겠습니다. 절 선택해 주십시오.”
나와 똑같은 노리개를 찬 철파의 교주, 화비가 앞장서 소리쳤다.
화비는 언뜻 봐선 체인메일과 비슷한 양식의 철갑옷을 입고 있었다.
“쇄자갑입니다. 청색대륙의 갑옷 종류인데, 철파교주의 주 복장이지요.”
헤르탄이 귀띔해 주었고, 나는 눈썹이 짙고 잘생긴 교주를 바라보았다.
‘저 자식, 자긴 못생겼다 하더니.’
설마 처음 대면했던 오징어 대가리 속에 저런 용모가 숨겨져 있었다니.
반면에 범파는 어떠한가.
“일생의 신이시여. 범파의 교주로서 말씀드릴게요. 저에게 선택을!”
호랑이를 통째로 벗겨 만든 가죽을 걸친 교주가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카티에가 얘기해 줬던 정보를 상기했다.
‘범파 교주 이름은 이랑이랬던가.’
이랑은 보기 드문 미녀였으나 내게 잘린 팔 하나가 없어 외팔이었다.
이쯤 되자 내가 전생에서 얼굴만 보고서 제자를 뽑았나 의심이 든다.
‘하여간.’
난 여유를 갖고서 놈들을 보았다.
이미 가슴속 결단은 내려졌으니까.
범파의 교주, 이랑이 나의 것과 동일한 노리개를 달고서 외쳤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진정한 일생신교인 범파에 붙으십시오.”
“어째서?”
“이번 회차의 범철 님께서는 불멸아귀를 살해하려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강한 화력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너희가 철파보다 화력이 우월하다는 건가?”
“우월한 수준을 넘어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이유나 좀 묻지.”
교주 이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희는 백룡을 포섭하려 합니다.”
일순간 군세가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백룡이라면?”
“예. 청색대륙에서 자라난 자라면 모를 리가 없는, 용조차 두려워하는 용. 그 포악한 백룡을 말입니다!”
이랑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현재 백룡은 동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함부로 깨웠다가는 천재지변이 벌어지고 말겠지요.”
그런 그녀가 철파를 매도하였다.
“물론 저희의 이런 움직임을 포착했는지 철파도 구미호를 포획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해 버렸다더군요.”
“저 말은 저열한 궤변입니다!”
철파의 교주, 화비가 즉시 반박했다.
“백룡을 깨우려면 장차 백룡의 무녀가 될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범파는 엘프 고을에서 그 인재를 납치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엘프 고을에서 범파가 납치하려던 촌장의 딸이 떠올랐다.
‘백룡의 무녀가 될 인재라 했었지.’
그래서 그 엘프 고을을 습격해서 촌장의 딸을 납치하려고 했던 거군.
백룡을 포섭하기 위해서 말이다.
“철파는 결코 범파에게 화력이 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미호를 포섭 못 하였듯, 저들도 백룡을 데려올 수가 없으니까!”
각 종파의 교주는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첩자를 심어놨었는지 상대 종파의 정보를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다냐?”
“예?”
“겨우 그게 다냐고.”
두 교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회귀자들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입 밖의 목소리가 아주 무겁고, 엄숙하도록 바꾸어서 말했다.
“내 앞에서 너희가 보여줄 것이 고작 유치한 다툼으로 끝나는 거냐?”
고작 말 한마디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의한 파장은 컸다.
신도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나에게 몸을 조아리고 무릎 꿇고는 울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버, 범철 님이시여! 살려주세요!”
태어나 신이란 작자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양반 꽤 재미나게 살겠다.
목소리 깔고 말 한마디 하면 수십만 명이 벌벌 떠는 경우가 흔해?
두 교주가 혼란해하는 교도들을 다독이기 위해서 크게 외쳐 항변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저희 범파가 그간 일생신교에 헌신한 일은……”
“오해십니다! 바로 저야말로 스승님의 검을 제대로 물려받은……!”
그러나 둘의 목소리는 끊겨버렸다.
폭발이 일어난 게 그때였으니까.
콰앙!
‘뭐야.’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전령의 시체가 불쑥 일어나더니 폭발해 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휩싸이며 나의 주변이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누, 누구냐! 폭발이라니!”
“감히 누가 저런 짓을 벌였지!”
예정된 일이 아니었는지 교주들이 당황하며 마구 소리치고 있었다.
일행이 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괜찮아요?”
“범철!”
“내 노예가 무사한 것이야?”
하나 오히려 내가 그들을 말렸다.
“오지 마.”
누군가의 손이 입을 가로막는다.
굳이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빨려드는 느낌과 함께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
처음 들려온 것은 울음소리였다.
희열에 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
“우, 우리가 해냈어!”
“범철 님께서 현신하셨다……!”
“시, 신이 바로 나의 눈앞에……!”
눈을 뜨자 드넓은 동굴 속이었다.
수백이 들어와도 될 만큼 범위가 넓고 안락하게까지 느껴지는 동굴.
‘이동 부적을 써서 날 납치한 건가. 빌어먹을. 어느새 속박까지 당했군.’
난 십자가형틀에 칭칭 묶여 있었다.
어찌나 쇠사슬로 세차게 조였는지 손목과 발목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동굴의 저 아래로부터 수백의 사람들이 날 봤다.
‘신도들이네. 딱 보더라도.’
저들도 날 경외시하며 떨고 있다.
그러나 대형종파와는 차이가 있다.
저들은 눈물이 아니라,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신을 먹을 수 있게 됐어!”
“나누는 것은 어떻게 나눌 거야!”
“신을 붙잡아온 것은 바로 나야!”
나를 두고 저들끼리 마구 다툰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기는커녕 나는 오히려 스스로를 비웃고 말았다.
‘범파랑 철파만 있는 게 아니었지.’
나를 신봉하는 종파는 사실 범파와 철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날 향하는 탐욕의 눈길, 그리고 입맛을 다시는 혀를 보니 감이 왔다.
나 자신을 지나치게 선망하는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린 제3의 세력.
‘신식회.’
나를 먹고자 하는 신도들 수백 명에게 나는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의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