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27화
본디 회귀자란 지난 기억이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자기 인생을 바꿔 버린 순간만큼은 새겨져 있는 법이다.
철파의 교주, 화비는 범철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또렷이 기억하였다.
그는 본인을 어김없이 누구에게도 비할 바 없는 천재라고 자신하였다.
‘그게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어느새 남들보다 앞서 있었으니까.’
그가 회귀라는 재앙에 남들보다 빠르게 적응하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것이 창이든, 도술이든, 활이든 남보다 앞서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어지간한 분야는 시시했다. 모두 내 앞에 무릎 꿇을 뿐이었으니까.’
8번째 삶 늘그막, 화비가 본격적으로 검을 수련하기 시작한 것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그냥 남들이 많이 쥐고 싸우니까.
멋이 나니까.
‘그런데도 나는 남들보다 앞섰다.’
예순이란 늙은 나이에 칼을 쥐었음에도 누구도 그에게 대적 못 하였다.
그렇게 20년쯤 칼을 휘두르며 살다가 죽고서 9번째 삶을 맞이했다.
그 삶에서, 그는 범철을 마주했다.
‘초보자였다. 틀림없이 당시의 스승님께서는 누구보다 초짜이셨다.’
우연찮게 여행 삼아 황색대륙에 갔고, 화비는 술집에서 그를 만났다.
‘검을 좀 배우고 싶은데. 이 근방에서 당신이 검을 제일 잘 쓴다며?’
그 사내는 자신을 범철이라 했다.
화비는 그에게 남들한테는 없는 소질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가 픽 비웃었다.
‘알고 싶어?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당연히 진지한 가르침은 아니었다.
무료한 회귀의 나날을 보내기 위한 짓궂은 심심풀이 장난쯤 되었다.
사흘쯤 검을 가르치다, 질려 버린 화비는 범철을 바로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뒈져서 회귀하였다.
자신이 죽고 회귀했다는 상황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잠시간 멍해졌다.
‘내가 졌다고?’
믿기지 않았다.
20년 경력 칼잡이인 자신이, 고작 사흘째 검을 쥔 녀석에게 졌다고?
그 허무한 패배에 화비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자존심 상했다.
‘우연이었겠지.’
그렇게 단정 지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찜찜했다.
그래서 이번엔 검을 놓지 않았다.
뭐든 쉽게 질리는 그였지만 어째선지 그날의 승부가 마음에 걸렸다.
30년쯤 검을 더 휘두르며 살았다.
그쯤 되자 어지간한 회귀자들도 화비의 칼날을 따라잡지 못하였다.
검만 들면 누구도 감히 화비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놈, 한 번 찾아가 볼까.’
그동안 가슴 한편에 조금은 거슬리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사흘만 검을 쥐고도 자신에게 승리해 버린 그 사내에 대한 짜증.
‘날 거슬리게 한 만큼 괴롭혀주지.’
화비는 자신하며 황색대륙으로 떠났고, 수소문 끝에 범철과 재회했다.
‘네놈과 만나기를 고대했지. 지난 삶의 승부는 당연히 기억하겠지?’
그러나 범철은 황당하게도 자기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였다.
‘넌 누구냐?’
화비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 치욕적인 승부를 잊지 못했던 자신과 달리 범철은 아예 기억에서 화비 따위는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기억 못 한다면, 기억나게 해주리라.
화비는 명검을 척 뽑아 들었다.
그리고 뒈져서 회귀하였다.
충격받았다.
‘또 졌다. 검으로.’
어이가 없을 만큼 단판 승부였다.
자신이 검을 꺼내는 순간, 머리가 떨어져 시선이 바닥에 닿아버렸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 내가?’
어처구니없는 연패에 화비도 슬슬 이가 갈릴 만큼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검에 몰두하며 수련하였다.
그냥 쥐었던 검이 어느새 삶의 수단이 되어갈 만큼 손에 익어갔다.
‘이번 삶에야말로 네놈을 이긴다.’
본인의 검이 전성기라 여겨질 만큼 강해졌을 때, 화비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범철에게 도전하러 떠났다.
그리고 뒈져서 회귀하였다.
충격적인 연패.
화비는 약간의 좌절감을 느꼈다.
‘세 번째 패배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볼 수도 없다.
화비는 인정해야만 했다.
범철이 자신보다 앞서고 있단 걸.
‘그 이후로도 수없이 도전했지만.’
수없이 뒈져서 회귀했을 뿐이었다.
그쯤 되자 수많은 회귀자를 패배시키는 범철의 명성도 드높아졌다.
자신을 연거푸 쓰러뜨리는 그 망할 자식이 회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니, 회귀할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신처럼 검을 써댈 수가 있다고?’
솔직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육체 상태는 리셋되어도 검에 대한 경험만큼은 나날이 느는 화비였다.
그런데 매 삶마다 검을 처음 쥐어 볼 범철이 어떻게 매번 자신에게 승리할 수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세상은 범철을 불세출의 검사라 불렀다. 그리고 화비는 그를 시기했다.
그리고 그때쯤, 화비는 자신에게만 있는 특이한 기연을 발견하였다.
‘나에겐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다. 회귀할수록 발전하는 능력이.’
그는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머리칼을 몇 올 뽑아 만든 분신은 그의 능력치의 7할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거리제한 탓에 분신은 멀리까지 보낼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어.’
회귀할 때마다 생성할 수 있는 ‘분신’의 숫자가 한 명씩 늘어갔다.
‘이거라면, 녀석에게 지지 않는다.’
회귀하면 모든 것이 리셋되어버리는 어지간한 회귀자들과는 다르게.
화비는 회귀할수록 생성되는 분신의 숫자를 늘리면서 강해져 갔다.
수많은 분신과 교란하여 검을 쓰고 기습과 암습, 역습을 반복해 싸운다.
그리고 뒈져서 회귀하였다.
이쯤 되자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도대체 그 개자식은 뭘까.’
그런 남자는 난생처음 보았다.
회귀할 수 없어, 전생기억도 없는 주제에 검술서 자신보다 앞서다니.
‘언제든, 나보다 검이 앞서 있어.’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란 걸.
검을 마주하고 수없이 패배할수록 화비는 그의 검술에 매료되었다.
‘늘 빠르고, 변칙적이지만, 정교해.’
질수록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언젠가부터 마음이 변해갔다.
미워하고 이기고 싶은 것만큼이나.
저토록 재능을 타고난 범철에게서 정식으로 검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화비는 어느새 범철 앞에 무릎 꿇었다.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근방에서 검을 제일 잘 쓴다고 들었습니다.’
우습게도 제자로 만났던 남자가 자신이 꺾어야 할 스승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범철은 거절했지만, 화비는 끈질기게 찾아가 결국 제자가 됐다.
범철에게 직접 검을 배우며 화비는 그제야 패배의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구나.’
진정한 천재는 정말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눈앞의 스승 말이다.
화비는 범철에게 반하였다.
그의 재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앞설 수 없는 축복에 말이다.
함께 술잔을 나눌 때도, 검을 수련할 때도, 범철은 최고의 스승이었다.
‘스승님은 괜찮은 인간이셨다.’
범철에게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삶을 여러 번 회귀하며 정신이 퇴색되어 갈지라도 이끌려 드는 힘이.
스승님과 어깨동무를 하고, 술에 얼큰히 취해서 돌아온 그 날 밤.
‘그래서, 더욱 이기고 싶었다.’
화비는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취해서 잠든 범철의 팔다리를 끊었다.
‘아니야.’
잠자는 범철의 팔다리를 절단하고 나서야, 화비는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건 절대로 이긴 것이 아니야.’
이건, 이건 진정한 승부가 아니다.
그에게 수없이 도전해 왔던 검으로 목숨을 꺾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지?
자신은 스스로 도피해 버린 것이다.
범철과의 정면승부에서.
화비는 부끄러움에 혼자 자살했다.
스스로에게 뒈져서 회귀한 이후.
청색대륙에서는 어느 특이한 종교가 나돌고 있었다.
‘일생신교.’
자신을 범철의 수제자라 칭하는 여자가 그를 모시는 종교를 창설했다.
화비는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다.
‘수제자라고? 네까짓 게 감히?’
범철의 검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녀석이 수제자라며 신도를 모으는 행위를 화비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철파를 만들었다.’
수많은 신도가 모이고 세상은 그를 ‘거물’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그러나 화비는 만족하지 못했다.
검에 대한 욕망은 불을 지펴 회귀 속에서도 식지 않고 불타고 있었다.
‘불세출의 검사.’
화비는 그 호칭이 탐이 났다.
범철은 자신이 꺾어야 할 목표었다.
질투는 존경이 되었고, 제자는 스승이 되었으며, 신이란 목적이었다.
그렇게 120회차 세상.
화비는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스승에게 선택을 받기 위하여.
‘날 선택할 수밖에 없으실 거다.’
검에 관심도 없는 저 여자와 달리.
자신이야말로 진정으로 범철의 검을 제대로 물려받은 제자였으니까.
바위벌판으로 나아가는 그의 머릿속에 단 한 가지의 생각이 스쳤다.
‘신이시여.’
증명하겠나이다.
당신을 칼로 찢어내 죽여서라도.
내가 범철의 진정한 수제자란 걸.
***
범파의 교주, 이랑은 솔직히 그다지 검에는 관심이 없었다.
검을 쥐면 남들을 압도할 재주쯤은 갖췄지만, 딱히 즐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사는 종교였다.
1회차의 세상, 그녀는 무녀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세상에는 신이 있을까요.’
‘그럼. 그분께선 당연히 계신단다.’
제사장이던 아버지는 인자하셨다.
그러나 24회차 즈음 그런 아버지가 말도 통하지 않을 만큼 미쳐 버리신 뒤에야, 이랑은 직감하게 되었다.
‘세상에 신이란 것은 없구나.’
회귀가 계속되며 정신이 마모되어 가는 세상에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 신 따위는 전혀 없단 것을.
‘신이 없으면, 구원도 없겠지?’
이랑은 세상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신기하게도 회귀할수록 점차 강력해지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모피를 짐승으로 살려내는 능력.’
죽음의 조각인 모피를, 그녀는 다시 짐승으로 되살려낼 수가 있었다.
이랑이 토끼 모피에 손대면, 토끼가 살아 숨 쉬며 깡충깡충 뛰었다.
‘심지어 모피를 입은 사람까지도.’
심지어 순록모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에게 손을 대면, 그자를 순록으로 변신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피를 입으면 그에 맞는 짐승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룬 짐승 형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피로 돌아갔다.
‘허무해.’
산뜻한 생명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선 불가능하였다.
‘모두가 회귀하는 세상에 생명의 산뜻함은 전혀 느낄 수가 없구나.’
어찌 됐건 회귀할수록 모피에서 되살릴 수 있는 짐승 수가 늘어갔다.
‘용이나 코끼리만 한 맹수는 전혀 불가능하구나. 내가 모피로 되살릴 수 있는 맹수는 호랑이가 한계야.’
이랑은 권력자였다.
사람을 죽이기도 해보았고, 찢어도 보았고, 서로 죽이게도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세상에 신이란 없는 것이니까.’
그녀를 처벌할 자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없이 회귀하며 감정 없이 허무하게 살아가던 와중에.
이랑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세상에 신이란 없거든.’
‘그럼 나도 너를 죽여도 되겠군?’
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패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살려뒀다.
‘날 왜 죽이지 않지?’
‘아아. 손이 좀 덜 풀렸었어.’
그리고 뒈져서 회귀하였다.
회귀한 직후.
이랑은 그에게 빠지게 되었다.
강하고, 올바르며, 제정신이니까.
‘사랑?’
아니, 그리 진부한 감정이 아니다.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며 그의 흔적을 추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랑은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회귀하지 않는 남자란 걸 알게 됐다.
‘선택받은 분.’
이랑은 손이 떨렸다.
이 미쳐가는 회귀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산뜻한 생명을 느낄 수 있는 남자라니.
흥분되지 않을 리 없다.
‘그분은 이 미쳐가는 세상에서 오로지 혼자서만 선택받으신 거야.’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이것은 신을 향한 경건함이었다.
‘신앙심이로구나.’
무녀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 혈통답게 신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
‘범철은 신이구나.’
이랑은 그를 보며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이 세상을 이끌 신이구나.’
이랑은 곧바로 범철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골치 아픈 사실을 알았다.
항상 범철의 곁에는 눈엣가시 같은 흰 머리칼 성녀가 함께 대동하였다.
‘저 성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신의 곁에 있을 것은 성녀인 그녀가 아니라, 무녀인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범철과 접촉하려 할 때마다 그 골치 아픈 성녀가 방해를 했다.
‘거슬리기는.’
그 머리 좋은 성녀를 몰래 독살하고서 이랑은 범철에게 접근하였다.
‘스승님에게서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나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범철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녀의 끈질긴 집착에 결국 승낙했다.
가까이서 검을 배우며 이랑은 그의 모든 것을 눈과 몸에 익혀갔다.
그리고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애타게 바라온 산뜻한 생명의 기운을.
‘이 사람은 때 묻지 않았구나.’
온건한 인간성.
이랑은 그것이 정말로 부러웠다.
‘부러워. 지독하게.’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태생적인 문제였고, 육체적인 결함이기에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랑은 단 한 번도 그것을 결점이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미쳐가는 회귀 속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단 것은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이랑은 신을 범하였다.
당연히 그는 저항했기에 묶어내서.
‘오로지 나만 신을 가질 수 있어.’
그러나 이랑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범한 직후, 범철의 칼에 맞아서 그녀는 죽고 나서 회귀하였다.
신에게 죽고 나자, 그녀는 더욱 진하고 묘하며 새로운 감정에 빠졌다.
‘그분은 진정 신이시다. 날 죽이실 때마다 새 감정을 불어넣으시니.’
그래서 이랑은 범철을 모시는 일생신교를 창설했다.
화비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생신교를 이용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랑은 달랐다.
그녀는 진정 그를 신이라 여겼다.
‘날 선택하실 수밖에 없으시겠지.’
검에만 환장해 당신을 찢어 죽일 생각밖에는 없는 저 교주와 다르게.
진정으로 당신을 신으로 모시는 교주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신이시여.’
***
“그냥 둘 다 또라이 새끼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