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126화 (126/200)

나만 1회차 126화

그것이 도깨비든, 인간이든 간에.

아이를 건드리는 것은 싫어한다.

나는 항상 그래왔다.

“제자냐.”

“그래요.”

하찮은 정의감이라 비웃어도 좋다.

아이가 건드려지는 것은 싫다.

왜냐하면 나는 어른이니까.

“크헉! 마, 마검사! 너, 너……!”

목을 짓눌린 비환이 컥컥거렸다.

당연하지만 비환은 타는 나무를 두고 용암의 화신으로 변할 수 없다.

녀석도 그것을 대번에 알고 비환부터 노려 짓눌러 버린 게 분명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몽전에서 경험했듯이 비환은 절대로 허약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비환을, 대호는 아무렇지 않게 힘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범파 교주냐.”

“맞아요.”

내 사지를 자른 철파 교주에 이어 날 강간했다던 또 한 명의 수제자.

내가 검을 천천히 들면서 물었다.

“왜 저 나무를 태웠냐.”

“경고지요.”

“경고?”

“도깨비 편에 붙지 마세요. 내 편에 붙어요. 그래서 경고한 겁니다.”

정확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도깨비 편에 붙지 말란 거지?”

“스승님은 온전히 제 것이니까.”

“그래서 전생에서 나를 강간했냐?”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않아서요.”

“네 목을 돌려 버리고 싶어졌다.”

그러자 대호가 고개를 숙였다.

비환은 자기를 먹으려는 줄 알고 얼굴이 시퍼래졌지만, 아니었다.

저 짐승 새끼가 아기가 태어나는 장소에 불을 질러놓고는 웃고 있었다.

“스승님은 정말 변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즐거워요. 다 회귀하며 미쳐 가는데, 스승님만은 늘 똑바르니까.”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나한테 제자라며 나불대는데 대체 누가 정한 거냐?”

난 이젠 기억도 희미해져 가는 원예가 시절의 제자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제자로 인정한 놈은 하나뿐이었고, 그놈은 인류가 회귀하자마자 이마에 화살 처맞고 뒈졌어.”

“희소식이군요. 경쟁자가 줄다니.”

“경쟁자?”

“스승님 제자는 저뿐이어야만 해요. 제게 스승이 당신뿐인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저놈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도 회귀하면 저렇게 변해 버릴까?

카티에가 호랑이를 매섭게 보았다.

“미친 주제에 민폐까지 제대로 끼치네요. 왜 대장이 기억에도 없는 당신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 거죠?”

“어머, 성녀님. 오랜만에도 뵙네.”

“닥치고 꺼져요. 그 송곳니 기적으로 죄다 맨땅에 갈아버리기 전에.”

“그 끔찍한 주둥이도 여전하구나. 나는 항상 볼 때마다 네년이 싫어.”

카티에의 손아귀에서 아주 끔찍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자 호랑이도 가볍게 비웃으면서 카티에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너도 나랑 마찬가지 아니야? 회귀하며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나는 최소한 너처럼 피해와 민폐를 끼치며 미치지는 않았어요.”

나는 꿈의 나무를 힐끗 보았다.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나무는 활활 불에 타버리고 있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나의 그런 시선을 눈치챘는지 말했다.

“저 나무가 불타긴 했지만, 딱히 누가 죽진 않을 거예요. 경고하되, 스승님에게 원망받는 건 싫네요.”

“이미 충분히 원망하고 있는데. 죽이고 싶을 만큼.”

“그건 그것대로 괜찮군요. 스승님의 칼에 찢겨져서 죽는 것도, 나름의 괜찮은 흥분이 느껴지거든요.”

저 자식, 변태 아니야?

내가 턱짓을 했다.

“가라.”

“보내주시겠다는 건가요?”

“나랑 마주칠 정도까지 왔다면 어차피 도망칠 준비도 했을 거잖아.”

호랑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맹수의 혓바닥 밑에는 축축하게 젖은 부적 한 장이 섞여져 있었다.

“고마워요. 스승님.”

호랑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일주일 뒤, 정오. 바위벌판에 오세요. 모두가 모일 거예요. 철파까지도. 거기서 모든 걸 결정짓겠어요.”

호랑이가 혓바닥 밑에 감춰 둔 부적을 이빨로 찢으려는 순간.

나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순간가속!

[순간가속이 활성화됩니다.]

[요정장화가 가속 강화합니다.]

[속도 +95%! 지속시간 +3초!]

[6초간 공격력 500% 증가!]

당연하지만.

녀석을 맨몸으로 보내진 않겠다.

‘원래 본인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뒤통수치기 쉽지.’

곧게 뻗어간 내 칼이 두터운 가죽을 베어버리며 다리를 잘라 버렸다.

파각!

순간가속으로 이뤄진 짧은 순간.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발톱이 내 갑옷을 긁었다.

그러나 오히려 타격한 호랑이의 발이 불에 휘감겨 피해 입고 말았다.

‘과연 뼈 갑옷의 성능은 최고로군.’

동시에 순간가속을 썼는데도 반격한 교주의 민첩함에 기가 막혔다.

“그 갑옷 의외로 보통이 아니네요?”

형체가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호랑이가 비틀대며 몸뚱이를 조아렸다.

“가슴 한편에 저를 남겨주세요. 스승님.”

“호랑이 새끼랑 하는 취미 없어.”

“그건 염려 마세요. 제 본모습은 인간이니까요. 그것도 꽤 아름다운.”

“그걸 네 입으로 말하냐?”

“저도 제가 예쁜 걸 안답니다.”

다리 한 짝을 떨어뜨려 놓고, 범파 교주의 형체는 사라져 버렸다.

“켁켁!”

그제까지 목이 눌려 있던 비환이 눈물을 쏟으며 목을 감싸 쥐었다.

“후, 제기랄.”

마음 같아선 당장 놈의 흔적을 뒤쫓아서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보다도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급했다.

순간가속 때문에 온몸이 탈진되고 다리가 후들댔지만 이를 악물었다.

‘순간가속 후유증도 여러 번 겪으니 약간은 버틸 수가 있게 되는군.’

난 서둘러 진홍색 로브를 입었다.

[4서클 마법 ‘한기의 숨결’이 7서클 마법 ‘빙해바람’으로 승급됩니다.]

[‘빙해바람’은 머나먼 얼음지방의 눈보라를 실제로 가져온 마법입니다. 극지의 눈보라는 무섭도록 차가우며 대기의 이슬까지 얼립니다.]

내가 마력을 쓰자 세찬 눈보라가 몰아쳐 나무에 붙은 불을 꺼뜨렸다.

얼른 로브를 벗어버리자 이번엔 발목의 균형이 조금 맞지 않게 됐다.

[해골화가 조금 진행됐습니다.]

[발목살점이 약간 패였습니다.]

[언데드의 기운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짧은 시간만 썼는데도. 어째 갈수록 페널티가 극심하구나.’

진홍색 로브는 강력한 장비지만, 어째 점점 날 집어삼키는 기색이다.

가지가 앙상해지고 새까맣게 타버린 꿈의 나무를 보며 모든 도깨비들이 엉엉 울었다.

거인도깨비 두령이 평소보다 월등히 낮고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히도 태몽을 꾸던 도깨비들은 무사하지만…… 꿈의 나무가 타버렸다.”

그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꿈의 나무야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된다. 하지만 당분간 아이를 낳을 순 없겠지……. 그래도 괜찮다. 누구 하나 죽지 않았으니까. 마검사.”

거인도깨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저 나무를 태운 놈을 어쩔 건가.”

“죽일 겁니다.”

“같이 가자. 우리가 돕겠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파의 교주는 나에게 말했다.

도깨비의 편에 붙지 말라고.

나의 편은 제자인 자신뿐이라고.

그 말의 의미는 명확하다.

‘나에게 범파를 진정한 종파로 선택하라는 소리겠지.’

꿈의 나무를 태운 것도 그러했다.

강제적인 경고나 다름없었다.

‘범파를 선택하지 않으면, 나의 모든 것들을 이렇게 태워 버리겠다는.’

카티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판에 와달라, 모든 것을 결정짓겠다……. 결국은 뻔한 소리겠죠.”

퀸소히니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뻔한 소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야?”

헤르탄이 나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뒤, 그대는 범파와 철파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할 겁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와버렸다.

선택해야 할 시간이.

***

나는 전생의 돌을 만지며 누워 있었다.

북동풍에 들판의 잡초가 스러진다.

“뭐냐.”

“너 보러 온 것 아닌데.”

“한 대 태우러 왔군? 그럼 꺼져.”

나는 계속 누워 있었다.

다만 그녀도 날 계속 내려다봤다.

“뭘 보냐.”

“지금 네 눈이, 전생에서 죽어가며 절명하기 직전의 눈과 꽤 닮아서.”

“…….”

블라이넨은 내 곁에 편히 앉았다.

담뱃대를 물고 연초를 태운다.

나는 중얼거렸다.

“한탄 중이다.”

“뭐를?”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리도 혹독하게 사나 싶어서.”

“꽤나 정신이 흔들리나 보군.”

“끝없는 자기합리화라면 내 뛰어난 주특기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거든.”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겉으로 힘들지 않은 척하는 거지. 사실은 힘들어 미칠 지경이라도.”

내가 새파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나도 너처럼 미치면 편할 텐데. 제정신 깨져 버릴 일도 없을 테고.”

“나도 너처럼 회귀하지 못했으면, 정신이 마모될 일도 없었겠지.”

우리는 서로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서로 각자의 투정을 배부른 소리라고 판단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군.”

블라이넨은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는 말했다.

“너는 너를 수없이 죽인 나와도 친구가 되자고 했잖아. 그럼 그 제자들과 협력하지 못할 이유가 뭐지?”

“하도 미친놈을 많이 봐서 알겠더라고. 얘기만 되는 미친놈과 얘기도 안 되는 미친놈. 그놈들, 후자야.”

“그럼 나는 전자라는 건가?”

“아니. 넌 얘기하기 싫은 미친놈.”

“…….”

블라이넨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심장을 베는 감촉이 그립군.”

“그러면서도 계속 함께 다녀주는 걸 보니 내가 매력은 꽤 있나 보다?”

“너는 진짜…….”

나는 싱긋 웃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휘젓고 벌떡 일어섰다.

“한탄은 벌써 끝난 건가?”

“응. 결정했어. 방금 막.”

매만지던 돌멩이를 품속에 넣는다.

가슴이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내가 어느 쪽을 택할지 말이야.”

***

비환이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내가 너를 돕겠다! 빌어먹을 호랑이 놈! 내 손으로 박살 내버리겠어!”

“예언 때문에 날 죽이겠다더니?”

“그, 그건! 사, 사과하겠다!”

“됐고. 제대로 활약해 되갚아라.”

회귀자들이 벌인 만행에 불도깨비들도 치를 떨며 크게 분노하였다.

꿈의 나무는 도깨비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나무가 아닌, 성소였으니까.

나는 전투태세를 준비하는 도깨비들의 단일한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회귀자가 벌인 악행이 도깨비들을 하나로 만들었군.’

갈라졌던 도깨비들을 하나로 합심하는데 공동의 적만 한 것이 없었다.

약속의 날, 나는 일행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장. 준비는 되었어요?”

“그래, 이미 결단은 내렸어.”

“계획대로 풀렸으면 좋겠군요.”

“‘그 방법’을 쓰더라도, 결국은 내 노예의 결단이 중요할 것이야.”

“가지.”

약 3천 마리의 도깨비를 이끌고.

우리는 바위벌판으로 향하였다.

본래 허허벌판이었을 바위벌판은 드넓고 황량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숨 쉴 틈 없다.

“저쪽은 이미 벌써 도착했군.”

벌판에, 벌떼처럼 무수한 회귀자 병력이 양측으로 밀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신도들이 오직 단 한 명, 나를 향해 무릎 꿇었다.

“범철 님이시여!”

“너무나 오래도 기다려왔습니다!”

“길 잃은 어린 우리에게 선택을!”

“어느 쪽이 참된 종파입니까!”

누구와 함께 불멸아귀에게 대적하여 싸울 것인가.

태양이 작열해 벌판은 뜨거워진다.

선택의 시간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