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24화
“왜 그러십니까, 범철?”
“꿈을 섞어서 아기도깨비가 태어난다면 굳이 내 꿈일 필요는 없겠죠?”
꿈을 통해서 도깨비를 낳는다니.
아무리 엇나갔어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부할 행위다.
교제나 계획 없이 함부로 애를 낳는 것만큼 무책임한 짓도 없으니까.
아무리 애완수가 필요하더라도 인간끼리 도깨비를 만드는 짓이라니.
당연히 잠재력 높은 애완수가 탐나지만, 내가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꿈을 꿀 수 있는 놈이라면 차고 널렸으니까.’
헤르탄이 예상가는 구석이 있는지 눈매를 좁혔다.
“아기도깨비를 낳는 대상자가 인간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설마?”
“썩 괜찮은 작자가 있습니다.”
나는 씩 웃고는 카티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뭐가요, 대장?”
내가 용궁에서 훔쳐온 ‘보물’을 보이며 계획을 설명하자, 카티에가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아요. 나도 예전에 비슷한 걸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장답게 참신하네요.”
“항상 뒤통수 치는 게 일상이라서.”
내가 거인도깨비 두령을 돌아봤다.
“순산하게 해준다는 제안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이가 이곳에서 도깨비를 낳았으면 합니다.”
“허, 누구를? 당연하지만 다른 인간은 함부로 데려올 수가 없다.”
“그거라면 상관이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꿈을 통해 낳았을지라도 아기는 반드시 부모를 닮는다.
그럼 괜찮은 유전자를 가진 부모여야 좋은 애완수가 태어나지 않겠나.
내가 거인도깨비 두령을 돌아봤다.
“내 앞으로 데려와 줬으면 하는 자는…….”
그자의 이름을 말하자 거인도깨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꽤나 뜻밖이로군. 그래, 알았다.”
이윽고 어느 듬직한 도깨비가 아주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끌려왔다.
바로 최상급 불도깨비 비환!
“크흑!”
사실 나는 몽전에서부터 이 불도깨비를 상당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메밀묵도 태워냈고 다른 도깨비들에 비해서 이놈은 유독 특출하지.’
유일하게 ‘용암’을 쓸 수 있는 불도깨비였고, 전투력도 제일 높았다.
하지만 재능을 지녔어도 굳건한 심지의 도깨비는 조련하기 쉽지 않다.
‘거기다 나한테 반항적이라 애완수로 삼아도 오래는 가지 못할 테고.’
그래서 내가 택할 것은 이놈의 괜찮은 유전자만 제대로 뽑는 것이다.
비환이 날 보고 이를 갈았다.
“이 찢어 죽일 마검사 자식! 나를 왜 이런 장소로 데려온 거냐?”
비환이 곧장 날뛰며 발악을 하려고 했으나 엄한 목소리가 내려졌다.
“목소리 낮춰라. 여긴 온 도깨비가 편안히 태몽을 꾸고 있는 성소다.”
거인도깨비 두령이 ‘명령’을 내리자 비환은 바로 숨죽여 복종했다.
퀸소히니베가 심각하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내 노예는 저 불도깨비에게 강제로 애를 낳게 하려는 것이야?”
“흐, 흐어억!”
비환이 창백한 기색을 내보였다.
장대한 무릎이 턱 꿇어진다.
방금까지의 기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놈이 다급히 애원했다.
“서, 설마! 너, 너무한다! 아, 아무리 내가 미워도 애까지는……!”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을 텐데.”
“끄흡…….”
거인도깨비의 엄중한 명령에 비환은 꺽꺽거리며 숨도 잘 못 쉬었다.
내가 어이없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는 내가 그렇게 미쳐 보이냐?”
“흥. 가끔은 내 노예가 회귀자보다 훨씬 영악할 때가 있다는 것이야.”
“그럼 그런 놈이랑 친구인 너는?”
“하, 친구?”
퀸소히니베가 어이없단 듯이 고개를 꺾었지만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은 비환을 보았다.
덩치 차이 탓에 시선이 딱 맞는군.
“이봐. 오해하지 마.”
당연하지만 나는 아무리 적이었다고 해도 강제로 아이를 갖게 할 만큼 정신이 엇나가 버리지는 않았다.
비환이 희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그, 그럼……?”
“뭐, 일단 애는 낳게 할 거지만.”
불도깨비의 표정도 새파래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노, 놀리는 거냐? 그래, 역시 예언 속의 마검사답게 성격도……!”
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들어. 네가 ‘직접’ 낳는 것은 아니야. 네 ‘환상’이 낳게 되겠지.”
“뭐, 뭐?”
“그러니 네 능력치만 물려달라고.”
***
나는 배낭에서 아이템을 꺼내었다.
환상을 일구어내는 흰 면포!
용궁을 털어서 가져온 그 보물을 나는 비환을 향해서 사용하였다.
[면포가 환상을 일구어냅니다.]
[환상의 바탕이 설정됐습니다.]
[대상: 최상급 불도깨비 비환.]
“어, 어?”
비단처럼 화려하게 너풀거리는 흰 면포가 비환의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비환의 그림자를 따라 본떠진 형체가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서 감탄했다.
불도깨비 형상을 반짝이는 선으로 따서 밤하늘에 스케치한 것 같았다.
내가 블라이넨을 팔꿈치로 찔렀다.
“너는 저게 안 놀랍냐?”
“나도 회귀하며 처음 보긴 하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리 덤덤해?”
“감흥이 없어. 회귀하면 다 그래.”
블라이넨은 입이 허전한지 담뱃대를 불 없이 척 물기만 했다.
성스러운 꿈의 나무에서는 어지간한 불씨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기야 비환도 불도깨비면서 이곳에서는 자기 몸의 불을 끄고 있군.’
하긴 아기들이 태어나는 곳이니까.
그리고 붓 두 자루가 소환되었다.
[대상의 능력치를 바탕으로 두 개체의 환상체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환상묘사의 붓이 주어집니다.]
[붓을 쥘 두 명이 필요합니다.]
[장봉과 단봉 중 선택하십시오.]
“대장은 처음이니까, 내가 환상체 창조 요령을 가르쳐줄게요.”
“그리는 거냐? 미술은 젬병인데. 괜히 내가 쥐었다 망치면 어떡해?”
“붓을 쥐기만 할 뿐, 아주 쉬워요. 대장 애완수를 위해서니, 대장이 직접 환상체를 창조해야 의미 있죠.”
카티에가 짧은 붓을 잡아 쥐었다.
“제가 단봉을 쥐겠어요. 초심자는 긴 붓을 쓰는 것이 간편할 거예요.”
“그러면 나는 장봉이겠군.”
나는 허리가 긴 붓을 감싸 쥐었다.
카티에가 붓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붓을 휘두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현실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손이 가는 대로 편하게 움직여 그어 봐요.”
다행히도 환상체를 창조하는 데는 미술적 재능 따윈 요구되지 않았다.
긴 붓을 쥐고 환상체를 그려간다.
카티에가 살짝 미소 짓고는 본떠진 형체를 보며 붓을 허공에 휘저었다.
휘젓는 붓의 끝을 따라서 빛나는 환상체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기분이 묘한걸.’
나는 생명을 그리고 있었다.
10년간 평안히 살아가던 소도시를 뛰쳐나와 무작정 여정을 떠났다.
쥐어보지도 않았던 검으로 남의 생명과 이득을 취하고.
내가 지금껏 살아온 대륙을 지배하던 강력한 몬스터도 퇴치하고.
나에게 집착하는 수많은 회귀자를 만나고 죽이고 함께하는 여정에서.
지금 바로 나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살아 있는 생명을 그려가고 있었다.
‘살아 있어.’
마음 같아선 아주 거대한 도깨비를 그리고 싶었지만, 비환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환상체는 그릴 수 없었다.
나는 근육질 도깨비를 그리고, 카티에는 영민한 도깨비를 그려낸다.
그림을 그려대는 카티에를 보았다.
그녀가 원래 저렇게나 아름다웠나.
‘난 살아 있어. 너희도 그러겠지?’
한쪽은 남성에, 긴 붓을 사용해 뿔이 길고 근육질의 도깨비가 되었다.
한쪽은 여성에, 정반대의 붓을 사용해 영민한 외눈도깨비가 되었다.
비환의 능력을 베꼈지만, 그 외모와 성격은 전혀 다른 두 도깨비.
카티에가 붓을 거두고 말하였다.
“대상을 베껴서 태어난 환상체는 그렇게 오래 유지될 수가 없어요.”
비환의 능력치만은 그대로 베껴왔지만 외모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기하다…….”
비환이 입을 벌리며 자신을 밑바탕으로 탄생한 두 환상체를 바라봤다.
서로 상반된 두 도깨비가 서로 손을 잡고 나무 아래에서 눈 감았다.
그리고 거인도깨비가 말하였다.
“꿈을 꾸어라.”
두 도깨비가 꿈을 꾸었고, 동시에 가지 끝에서 환한 빛이 내렸다.
동시에 머리에 작은 뿔이 달린 아기도깨비가 가지 끝에서 태어났다.
[꿈의 나무에서 아주 건강하고 튼튼한 아기도깨비가 태어났습니다.]
[강력한 환상체에게서 태어나 몹시 높은 잠재력을 물려받습니다.]
[다만 환상체 특유의 불완전한 특성으로 인해 ‘특이점’이 생깁니다.]
[화염의 속성이 상실됩니다.]
나는 태어난 생명체를 내려다봤다.
‘이게 도깨비라고?’
아직 솜털조차 보송보송한 아기도깨비가 성큼성큼 나에게 걸어왔다.
“…….”
아기도깨비는 아주 작고 귀여웠다.
그러나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
바로 ‘얼굴’이 없었던 것이다.
‘귀, 입, 눈, 코. 아무것도 없군.’
달걀귀신처럼 이목구비가 없었다.
내가 아기도깨비를 내려다보았다.
“안녕. 내가 널 태어나게 했어.”
“…….”
“너, 도깨비가 맞긴 하지?”
“…….”
당연히 아기도깨비는 입이 없으니까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티에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회귀하며 이런 도깨비는 처음 봐요. 얼굴이 없다니. 왜 이럴까요?”
“……!”
그러자 얼굴 없는 도깨비가 주먹을 꽉 쥐곤 화난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말했다.
“그래, 미안해.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내 애완수가 되어주겠냐?”
그러나 아기도깨비는 고민도 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낯이 없는 환상도깨비가 당신의 애완수로 편입되었습니다.]
[조련스킬 숙련도가 오릅니다.]
[포획 성공!]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거인도깨비가 웃고는 재촉하였다.
“독특한 도깨비가 태어났군. 이제는 이곳에서 어서 내려가자.”
“어, 벌써 말입니까?”
“이곳에선 조심해야 한다. 태몽을 꾸는 도깨비들은 안정이 깨지거나 자칫 다치면 아기도 해를 입는다.”
괜히 거인도깨비가 비환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명령한 게 아니었군.
우리는 꿈의 나무로부터 벗어났다.
얼굴 없는 아기도깨비는 눈이 없는데도 신기하게도 잘 걸으며 다녔다.
나는 애완수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환상도깨비(이름 없음)』
특이사항: 환상을 부모 삼아 도깨비. 아직 그 능력은 수수께끼이다.
힘: ? 체력: ? 민첩: ? 마력: ? 행운: ?
소지스킬: ?(Lv1). ?(Passive)
주인에 대한 충성도: ‘???’
현재 건강상태: 건강함.
잠재력: S급(쳐다만 봐도 열등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깨비. 불완전한 환상체를 부모로 삼고 태어나 아직 ‘낯’이 형성되지 않았다.
+특수한 방법으로 ‘낯’을 획득한다.
*호감도를 쌓을수록 환상도깨비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환상도깨비!
무려 처음 얻은 S급 애완수였다.
‘그런데 정보가 전혀 나오질 않아.’
등급은 역대 최고이지만 애완수 정보에는 물음표가 지나치게 많았다.
능력치조차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도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비밀이 많아?’
내가 쳐다보자 환상도깨비가 몸을 웅크리고 자기 등을 탁탁 두드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날 업어주겠다고? 가능하겠냐.”
“……!”
환상도깨비가 발끈한 것처럼 달려와서는 내 하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억!”
“쪼끄만 게 힘이 장사다! 과연 날 베낀 환상체에서 태어난 녀석이다!”
비환은 자존심 상한 것도 잊어버렸는지 환상도깨비를 보며 껄껄댔다.
간신히 바닥에 다시 내려온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핥았다.
‘S급이라 그런가. 다르긴 다르네.’
태어나자마자 날 드는 괴력이라니.
또한, S급 애완수를 보유하며 나에게는 새로운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S급 애완수를 보유했습니다.]
[조련(Lv5) 달성!]
[조련 스킬 강화가 가능합니다.]
조련 스킬 5레벨 달성!
비환을 조련하지 못하며 느꼈던 한계를 제대로 성장시킬 시간이었다.
[현재 A급 애완수 2마리, S급 애완수 1마리를 보유 중입니다.]
[뛰어난 재능으로 ‘조련’이 ‘중급조련’의 경지를 바로 뛰어넘어 ‘상급 조련’ 스킬로 강화되었습니다.]
조련스킬의 강화!
SSS급 재능 덕분에 곧바로 조련이 상급의 경지로 강화가 되었다.
[스킬, ‘상급조련(Lv1)’을 깨달았습니다. 소유 애완수에 대한 이해도가 오르며 호감이 증가하고 단숨에 조련 난이도가 파악 가능합니다.]
상급조련!
기존조련보다 훨씬 짐승을 강력히 조련할 수 있는 스킬이 분명했다.
난 슬쩍 퀸소히니베를 곁눈질했다.
[이름: 퀸소히니베.]
[종족(특이사항): 중립을 어긴 용]
[이미 조련되어 있는 용입니다.]
[자존심 높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으면 애완수로 삼지 못합니다.]
[당신을 무척이나 아낍니다.]
“흥. 내 노예가 뭘 보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