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23화
유독 몸집 큰 불도깨비가 걸어 나오자 모든 불도깨비가 웅성거렸다.
“두령님!”
저놈이 불도깨비의 두령인가?
다른 불도깨비에 비해 늙긴 했지만 확연히 덩치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독특하게도 불로 이뤄진 수염까지 기르고 있는 두령이 불같이 화냈다.
“지금 이게 무슨 비열한 짓이냐!”
“하, 하지만 두령님! 저놈들이 몽전에서 우리한테……!”
“몽전에서 벌어졌던 일이 수치스러웠건, 잔인했건 모두 꿈으로 벌어진 일 아니냐! 꿈에서 밀렸으면 부끄러워하진 못할망정 이들을 불에 태우려 하다니! 너흰 도깨비도 아니다!”
불도깨비 두령이 엄하게 꾸짖자 나선 불도깨비들은 고개도 못 들었다.
그때 두령만큼은 아니지만 덩치가 큰 불도깨비가 황급히 고갤 들었다.
바로 최상급 불도깨비 비환이었다.
“두령님! 저놈은 마검사다! 예언에서 내려오는 가장 뛰어난 재능의 마검사! 놈이 불도깨비를 멸할 거다!”
제기랄, 저놈이 여론도 좋았는데!
비환이 말하자 시무룩했던 불도깨비들의 눈알이 곧장 활활 타올랐다.
“저놈이 그 예언의 마검사였나!”
“어쩐지 희한하게 잘 싸운다 했다!”
“그럼 지금 후환을 없애야 한다!”
“당장 저놈을 없애 버리자!”
불도깨비 두령이 즉시 나를 살펴보았고 곧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환의 말이 정말이었군!”
“다른 건 몰라도 저 인간은 죽여야 한다! 틀림없이 후환이 될 거다!”
비환이 기고만장하게 소리쳤고, 불도깨비들이 손을 들며 찬동했다.
그리고 부하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두령은 비환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꾸훽!”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도깨비 두령의 결단은 확고했다.
“저놈이 우릴 멸족하든 말든 우린 이미 몽전에서, 전쟁에서 패했다! 그런데도 무자비한 폭력을 써서 도깨비들의 철칙을 뒤엎겠단 거냐?”
“그래, 뒤엎으면 되지 않나!”
“허, 비환 이놈아! 조상님께서 내려주신 전통을 네가 깨버리겠다고!”
비환은 이를 갈며 두령에게 반항했다.
“내가 이래서 두령님을 싫어한다! 전통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딴 것보다 우리 일족이 훨씬 중하다!”
그런 비환의 의견에 동조하듯 젊은 불도깨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늙은 불도깨비들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버렸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다툼은 언제나 칼로 물 베기나 다름이 없는 법이다.
‘몽전에서 이겼는데도 왜 과업이 끝나지 않았었는지 이제야 알겠군.’
몽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불도깨비의 저항심이 사라지지 않아서다.
설령 몽전을 거듭하더라도 불도깨비가 저항심을 지닌 이상 종전 없이 도깨비 연합에게 계속 덤빌 것이다.
‘비환이라고 했던가.’
메밀묵 유혹을 이겨낸 것도 그렇고 어째 다른 도깨비들보다 유별나군.
두 도깨비의 다툼을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큰 목소리로 정리했다.
“결론은 이거로군. 너희는 지금 몽전의 결과에 승복도 못 하고, 예언 때문에 나도 죽이고 싶다는 거지?”
“참 깔끔한 요약이다! 마검사!”
비환이 으르렁거리며 말했고 카티에가 눈썹을 세우며 팔짱을 꼈다.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누구도 대장을 죽이지 못해요.”
“그럼 강제로라도 죽여 버리겠다!”
나는 한숨 쉬며 고개를 휘저었다.
“난 불도깨비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런 시간 낭비를 왜 하냐?”
“하! 거짓말하지 마라! 예부터 내려온 예언이 틀릴 리가 없으니까!”
빌어먹을, 얼마나 순진하기에 그따위 미신을 저렇게도 잘 믿어?
예언이든, 예지몽이든 간에.
다들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전부 확정된 것처럼 여기고 있지?
“그러면 이렇게 하지.”
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투항하겠다. 대신에, 패배를 인정하고 종전해라.”
“그 말이 정말 진심인가!”
비환이 의심 가득한 눈길로 물었고, 의쇠는 깜짝 놀라서 울컥했다.
“마검사! 너는 우리가 부탁해 참전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위해서 너 혼자서만 희생하려 드는 것인가?”
“설마 우리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제 목숨까지 내줄 줄은 몰랐다!”
“저런 영웅적인 인간을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우리가 너무 한심하다!”
무수한 도깨비들이 감동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헤르탄이 남몰래 속삭였다.
“범철,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위험해지면 그 방법을 써야만 합니다.”
“예. 우선은 과업부터 완료해야죠. 제가 죽을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불도깨비가 도깨비 연합과 종전선언을 한다면 과업은 완료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엔 내가 놈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어진다.
“제법 싹수가 있는 마검사다!”
“얼른 저 마검사의 숨통을 끊어버려라, 비환!”
불도깨비들이 신이 나서 말했지만, 오직 비환만은 신중히 고갤 저었다.
“다들 진정해라! 비록 바다에서였지만 나한테서 살아남고, 몽전이긴 했지만, 나를 꺾었던 마검사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각별히 조심해!”
저 자식, 정말 도깨비 맞아?
나는 싸울 의도가 전혀 없단 것을 보여주기 위해 빈손을 들어 올렸다.
“양손을 머리 뒤에 대어라!”
비환이 경계하며 외쳤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도깨비와의 전쟁을 멈추는 것이 목적이다. 종전을 선언해야지만, 너희가 하는 명령에 따르겠다.”
“종전을 선언하라고? 하! 네가 먼저 명령에 따라야 종전해 주겠다!”
서로가 단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아서 시간만 지체되고 있을 때.
주위를 휩쓰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꿇어라-!”
도깨비 연합 측에서 시퍼런 거인도깨비가 대지를 울리며 걸어왔다.
어찌나 거인도깨비의 목소리가 컸는지 귓속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건 불도깨비들이 실제로 무릎을 꿇었단 것이다.
“저, 저항할 수가 없다……!”
“모,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호전적인 비환을 포함한 온 불도깨비가 찍소리도 못하고 무릎 꿇었다.
“저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카티에가 내게 귀띔을 해줬다.
“몽전에 승리한 두령은 패한 측에게 강제명령을 내릴 수 있어요. 젊은 도깨비는 잘 모르는 사실이죠.”
헤르탄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확실히 저도 처음 듣습니다.”
아하, 그래서 불도깨비 두령이 그렇게 비환을 호되게 꾸짖었던 거군.
거인도깨비 두령이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의 논리가 참으로 괘씸하다! 몽전에서 패배했는데 승복을 못 하시겠다? 내기에서 져놓고서 배 째라는 식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두령은 몽전에 참전 못 한다는 철칙만 아니면 내가 진즉에 네놈들의 배를 배꼽째로 째 줬을 거다!”
그녀의 서슬 퍼런 일갈에 젊은 불도깨비들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거인도깨비 두령이 날 가리켰다.
“그에 비해서 이 마검사는 얼마나 훌륭한가! 우리 도깨비가 추하게 싸울 때 이자는 우리를 도왔다!”
뭐, 사실은 선의보다는 과업을 완료하기 위해서였지만 잠자코 있자.
의리와 우애를 중시하는 거인도깨비가 모든 도깨비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예언을 신용하지만, 몽전에서 누구보다 열렬히 싸우는 마검사의 의리에 반했다! 너희 불도깨비가 현실에서 덤비겠다면 얼마든지 응해 주겠다! 그러나 절대 이 마검사의 목숨만은 절대로 건드리지 못한다!”
“와아아아아!”
도깨비 연합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뜨거운 함성을 내질렀다.
가장 연장자인 불도깨비 두령이 분위기를 살피고 고개를 내리 숙였다.
“인정하겠다. 우리 불도깨비는 몽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승리한 거인도깨비 세력에 합류하겠다.”
[불도깨비들이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세 번째 과업을 완료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씩 오릅니다.]
[세 가지 과업을 마쳤습니다.]
[일정한 대기시간이 지나고, 특전을 위한 최종과업이 내려집니다.]
세 번째 과업 완료!
‘다음이 드디어 마지막 과업인가.’
마지막 과업까지 완료하면 드디어 ‘전생 관련 특전’을 얻을 수 있다.
‘아직도 도대체 무슨 보상이 나올지 예상이 전혀 안 가기는 하지만.’
패배한 불도깨비들이 ‘명령’에 의해 인솔되고 우린 잔치판으로 갔다.
거인도깨비가 술판을 진득하게 벌이며 우리를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마검사! 자네가 없었으면 승리도 없었다. 원하는 보상을 말해봐라!”
보상?
그거라면 처음부터 생각해 두었다.
“예. 불멸아귀를 쓰러뜨릴 때 도깨비가 우리에게 협력했으면 합니다.”
“불멸아귀? 그런 마물이 청색대륙에 서식한단 말인가!”
당연하지만 대륙지배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막대한 화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술을 부리고 불을 다루는 도깨비는 최적의 병력이다.
거인도깨비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깨비는 기꺼이 돕겠다! 다만!”
“다만?”
“자네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보상을 더 주고 싶은데!”
흠, 조금 의외기는 하지만.
보상이야 많을수록 나야 좋으니까.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거인도깨비가 짓궂게 웃었다.
“순산하게 해주겠다!”
***
어두운 숲속, 가지가 새까만 나무.
커다란 수목 위에서 도깨비들이 배에 손을 올리고 쿨쿨 자고 있었다.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거인도깨비가 그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평상시 말을 크게 하는 도깨비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목소리를 낮췄다.
“어때. 어쩜 다들 자는 모습까지 너무나도 사랑스럽지 않나?”
처음에 순산하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기겁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아하하! 우리 도깨비는 태몽으로 아이를 낳거든! 그런 것도 몰랐나!”
이곳, ‘꿈의 나무’에서 태몽을 꾸면 놀랍게도 아기 도깨비를 낳는단다.
실제로 어느 조그만 도깨비가 잠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가지에서 빛이 쏟아지며 아기 도깨비가 태어났다.
아기 도깨비는 신기하게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금세 일어나서 걸음마를 하고 부모에게 다가가 안겼다.
“크와!”
“내 아이다……!”
조그만 도깨비가 자신과 쏙 빼닮은 아기를 보고 눈물 흘리며 기뻐했다.
‘생명 탄생 순간은 참 감동스럽군.’
뭐, 꿈으로 애를 낳는 광경을 난생처음 봐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건 왜 가져왔습니까?”
도깨비 두령은 큰 바구니에 산적을 가득 담아왔는데 남편 선물이란다.
꿈을 꿔서 아이를 낳는 것에는 성별이 관련 없어서 수컷도 가능했다.
“임신한 반려에게 가장 귀하고 맛난 것만 먹이고 싶어. 안 그런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의 고운 마음씨에 눈물이 날 것만 같군.
어찌 됐건 내가 ‘꿈의 나무’까지 온 것은 아기 도깨비를 얻기 위해서다.
“아기 도깨비의 태몽을 꾸는 것은 본래 인간에게는 절대 주어지지조차 않는 막대한 기회입니다. 범철. 태몽으로 태어난 아기 도깨비는 일반 애완수에 비해 잠재력도 꽤 높지요.”
헤르탄의 그런 말까지 들으니 나도 결국 두령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높은 잠재력의 애완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 넘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태몽을 꿔서 아이를 낳는다니, 너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군.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아기를 낳을 수 없다. 너와 함께 이 나무에서 꿈을 섞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의 꿈을 뒤섞어야 한다고?’
나는 일행의 세 여자를 돌아봤다.
카티에가 뺨을 발그레 붉혔다.
“대장. 나는 이미 답을 알아요.”
퀸소히니베가 어이없어했다.
“내 노예가 감히 벌써 아이를?”
블라이넨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꿈 깨.”
카티에, 퀸소히니베, 블라이넨.
이중 누구와 아기를 만들어야 하지?
‘고민할 것은 없다.’
이미 답은 나와 있으니까.
나의 결단은 망설임 없었다.
“헤르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