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21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커진다는 속설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계에도 역시 똑같은 미신이 있었다.
‘그런데 저놈은 진짜 크고 있잖아.’
옥상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꾼 불도깨비는 정말로 키가 자라고 있었다.
덩치가 꿈틀거리며 수십 배 커지고 매서운 화기가 지독하게 타오른다.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물었다.
“몽전에서 저런 것도 가능합니까?”
“‘풀이’의 권능을 갖고 있으니까요. 꿈을 풀이해 실현화하는 겁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으로 저렇게나 큰다니.
도깨비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중급 불도깨비가 상급 악몽을?”
“거인화라니! 상상도 못 했다!”
내가 답답해서 소리를 질렀다.
“뭐하냐? 변하고 있을 때 공격해야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 줄 거냐?”
그제야 도깨비 연합이 뒤늦게 움직였지만 불도깨비는 성장을 마친 상태였다.
거인이 된 불도깨비가 이글대는 화염을 태우며 타오르는 눈을 빛냈다.
“날 무시하던 놈들! 밟아 태운다!”
커다란 불도깨비가 발을 내리찍을 때마다 수백의 도깨비가 짓밟혔다.
도깨비 연합이 거침없이 쓸려나가는 상황을 보며 나는 입술을 씹었다.
‘저건 커도 너무 큰데.’
위기를 직감한 도깨비 연합이 구슬픈 잡몽을 꾸었지만, 눈물로도 진압할 수 없을 만큼 불이 셌다.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살갖이 타드는 것처럼 온몸이 위험한 기분이다.
저 뜨겁고 큰 놈이랑 어떻게 싸워야 하지?
‘역시 악몽을 더 꿔야 하나?’
꿈주머니에서 구슬들을 휘적대다가, 나는 문득 적당한 꿈을 찾았다.
‘이거 설마?’
보따리에 담긴 모든 구슬은 쥐는 순간, 꿈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 이거라면.’
나는 예상치 못한 꿈이 담긴 회색 구슬을 깨뜨렸다.
[동행하는 일행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하는 예지몽(상급)!]
[앞으로 10분 간 적의 모든 행동을 정확히 ‘예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카티에에게 살해당하는 꿈.
놀랍게도 이것은 악몽이 아니라, 예지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결국 미래에 벌어질 일이란 건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그놈의 예지.
결국은 벌어지게 될 일이란 건가?
“웬 쪼끄만 인간이 나댄다!”
거대한 불도깨비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고는 나를 향해서 발을 찍었다.
그러나 놈이 내려찍은 자리에서 나는 이미 멀찍이 피해 버리고 없었다.
‘보인다.’
거대한 불도깨비의 행동반경이 정확히 붉은 선으로 그려져 유추됐다.
나는 거대 불도깨비의 다음 행동을 10초쯤 앞서 ‘예지’할 수가 있었다.
내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왼쪽으로 피해라! 전부 다!”
확신에 차서 소리치자 도깨비 연합이 본능적으로 나의 명령에 따랐다.
도깨비들이 자리를 피하자마자 그들이 있던 자리를 화염이 휩쓸고 지나갔다.
도깨비들이 놀라서 나를 봤다.
“저 인간이 무려 예지몽을 꿨다!”
“상급 예지몽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 얼마나 미친 미래를 본 건가?”
“우리 도깨비조차 꾸기가 힘든 그 진귀한 예지몽을 꾸다니! 부럽다!”
저런 시선이 모여도 즐겁지 않다.
왜냐면 밴시들의 저주스러운 합창 때문에 시달리게 된 꿈이었으니까.
‘그보다는 시간이 촉박해.’
한정된 시간은 정확히 10분.
그 안에 거대 불도깨비를 처치하려면 지금부터 도저히 쉴 틈이 없다.
“모두, 전멸을 피하려면 내 말을 귀담아들어라!”
내가 불도깨비의 행동반경, 전투 동작, 화염 구도를 예측해 지휘했다.
그러자 도깨비 연합에서 탈락자가 나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거대한 불도깨비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너구리같이 비열한 것들이!”
거대 불도깨비가 이를 갈며 통곡했지만, 도깨비들은 일사불란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를 덜었다.
물론 내가 능숙한 것은 군세를 지휘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샤라펠 미궁에서 오크를 지휘했던 경험이 설마 지금 도움 될 줄은.’
도깨비들이 거대한 바위나 도끼를 꿈으로 소환해 공격했고, 불도깨비에게 차근차근 피해가 누적되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악몽 구슬을 부수고 놈의 무릎을 했다.
“크헉!”
한쪽 무릎이 꿇려진 거대 불도깨비가 이를 갈며 몸의 화력을 키웠다.
“이 얄미운 것들! 함께 가자!”
거대한 불도깨비의 화염이 갑자기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게 커졌다.
몸체가 부자연스럽게 커지며 뜨거운 열이 축적되듯 뱃살이 팽창한다.
그러자 도깨비 연합이 기겁했다.
“저놈이 설마 같이 폭사하려고?”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모두 전멸하면 몽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
빌어먹을, 설마 거인화 유지시간이 끝나기 전에 자폭하려고 할 줄은!
불도깨비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저런 짓이 가능할 줄은 전혀 몰랐다.
‘자폭을 막으려면 한 가지뿐이야.’
놈을 지금 일격에 끝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럴 만한 자리,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닌 것은 단 한 명뿐이다.
“블라이넨!”
내가 소리치자 블라이넨이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재빠르게 뛰었다.
쌍검에서 드맑은 검기가 치솟는다.
그녀가 거대 불도깨비를 향해 뛰어드는 동시에 검은 연기가 폭발했다.
퍼어엉!
풍압이 흩날리며 검은 연기가 눈앞을 자욱하게 메워서 눈이 매웠다.
“콜록! 콜록!”
눈물을 훔치면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저편의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의쇠가 설마 하며 소리쳤다.
“쓰러뜨렸나?”
잠시 뒤, 시꺼먼 안개가 걷어지고.
불도깨비의 이마에 쌍검을 내리꽂은 블라이넨의 모습이 장엄하게 드러났다.
도깨비 연합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쓰러뜨렸다!”
“와아아아!”
“과연 마검사의 일행이다!”
불발로 끝난 거대 불도깨비의 형체가 스르륵 사라지고 나서야 난 긴장이 풀려서 칼 내리고 한숨 쉬었다.
‘몸 상태가…… 갑자기 이상한데.’
딱히 몸이 아픈 것은 아닌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뭔가 불안하다.
꼭 턱 끝까지 공포에 질린 것처럼.
‘지금 내 몸이 왜 이러지?’
카티에가 걱정해하며 다가왔다.
“대장. 예지몽 말이에요. 설마 블라이넨에게 죽는 꿈을 꾼 거예요?”
“아니. 다른 여자.”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몽전 끝나면 얼른 저 용을 쫓아내 버려요.”
“…….”
헤르탄이 나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고는 고개를 휘저었다.
“악몽을 너무 연달아 꿨습니다. 여기서 더 꾼다면 정신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버틸 만해요.”
“경험에 의하면, 범철의 그 말은 당장 쓰러질 것 같단 의미입니다.”
정말 나를 뼛속까지 잘 알고 있군.
어찌 됐건 지금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안정을 취하려던 그 순간, 대지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상급 불도깨비 700마리 습격!]
[어느 한 마리도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굳게 방어하십시오.]
[‘풀이’ 권능을 보유한 불도깨비 전사가 20마리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불꽃이 지친 우리를 향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지?
중급 불도깨비도 간신히 처치했는데 저렇게 많은 적이 몰려오다니.
결국 과업을 실패로 끝내야 하나?
그런데 모든 도깨비가 주춤하던 그때 혼자 앞으로 나선 자가 있었다.
“대장은 이번 차례에는 쉬어요.”
카티에가 혼자 앞장서 몰려오는 불도깨비 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 혼자서 뭘 어쩌려…….”
“대장. 잠깐만 눈을 감아줘요.”
“눈은 왜?”
“어서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카티에가 말했다.
“됐어요. 눈 떠요.”
“너, 뭐했냐?”
“대장 앞에 떠오른 문구가 자연적으로 사라질 시간까지 기다렸어요.”
주위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크아앗! 죽어라! 이 연적아!”
“왜, 왜! 우린 같은 편…… 크억!”
“시끄러워! 감히 내 남자를 탐내!”
갑자기 상급 불도깨비들이 저들끼리 마구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냥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일 듯 아군끼리 싸우고 있다.
내가 눈앞의 광경에 놀라 물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냐?”
카티에의 홀쭉해진 자신의 꿈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몽전에서만 가능한 획기적 병법이죠. 제 분홍색 구슬을 30개나 깼으니 서로 다투지 않고 배기겠어요?”
“분홍색 구슬은 무슨 꿈인데?”
“음몽淫夢이에요. 적들에게 내가 꿈에서 느낀 ‘질투’를 불어넣었죠.”
“…….”
결국은 야한 꿈을 꿨다는 소리군.
저 많은 700마리의 상급 불도깨비를 저들끼리 다투게 할 수 있다니.
“그럼 몽전에서는 그냥 음몽이 최강인 것 같은데? 물론 네가 사용한 구슬 횟수가 많기야 많다지만.”
그러나 카티에는 고개를 저었다.
“보통 음몽은 절대 저런 효과를 낼 수 없어요. 끽해봐야 유혹으로 공격 억제하는 정도죠. 그만큼 내가 꿈에서 느꼈던 감정이 강렬했거든요.”
“네 꿈속에서 누가 나왔는데?”
“내 입으로 말하게 할 거예요?”
“…….”
카티에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조금 부끄러워서 되도록 안 쓰려 했는데, 사실 대장 꿈을 많이 꿔요.”
“…….”
“대장. 그래도 이런 꿈이라도 꿔야 내가 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찝찝한 점이 많다.
나에 대한 질투심이 강하더라도 저렇게 진득한 음몽을 잔뜩 꾼다고?
“700명을 혼란시킨 음몽이라니. 너 전생에서 무슨 서큐버스라도 됐냐?”
“어,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
“사실 전생서 서큐버스로 변한 경험 때문에 음몽을 많이 꾸긴 해요.”
도대체 얘는 못 해본 일이 뭐야?
헤르탄이 나에게 충고해 줬다.
“범철. 카티에는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회귀자입니다.”
“예. 말 안 해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와 달리 꿈 내용을 확인한 퀸소히니베가 새빨개져 말을 더듬었다.
“그런 꿈을 꾸는 것이야? 남녀 간에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이야?”
“당신은 어리니까, 몰라도 돼요.”
“흥. 나도 먹을 만큼 먹은 것이야.”
“글쎄요. 표정 보니 아닌 듯한데.”
카티에가 픽 미소를 지었고, 퀸소히니베는 약이 오른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알 것은 전부 아는 것이야.”
“그래요? 한 번 시험해 줄까요?”
“하! 당연히……!”
언제 다가왔는지 블라이넨이 퀸소히니베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쯤 해요.”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고집부렸다.
“흥. 참 쓸데없는 참견인 것이야. 블라이넨도 내가 어리단 것이야?”
“아니요. 하지만 계속 그러면…….”
퀸소히니베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나에게 화라도 내겠단 것이야?”
블라이넨이 진지하게 말했다.
“삐치겠어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야.”
퀸소히니베를 곧장 꼬리 내리게 하는 블라이넨도 보통 솜씨가 아니군.
하여간 저들끼리 다투는 상급 도깨비들을 처치하는 것은 손쉬웠다.
‘자기들끼리 질투하고 다투느라 가진 꿈을 제대로 활용도 못 하는군.’
모든 상급 불도깨비가 전멸하고.
도깨비 연합이 소리를 내질렀다.
“드디어 마지막 수비전이다!”
“꿈을 많이 꾸는 인간들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꽤 소름 끼치고 음란하긴 해도 일단 같은 편이니 좋은 인간들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저편에서 마지막 적이 몰려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걸어오는 불도깨비는 고작 한 마리뿐이었다.
‘저놈은…… 설마?’
[최상급 불도깨비 1마리 습격!]
[어느 한 마리도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굳게 방어하십시오.]
[지금 눈앞의 불도깨비는 일족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전사입니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낯익은 불도깨비.
놈은 그야말로 불같이 화나 있었다.
“이 지리멸렬할 것들아! 우리 일족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카티에가 확신하며 말했다.
“그때 그 불도깨비네요. 우리 배를 침몰시키고 대장을 기절시켰던.”
확실하군.
앞에 있던 불도깨비들보다 월등히 화력이 우월하고 근육도 두꺼웠다.
내가 놈을 알아본 것처럼, 불도깨비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놀랐다.
“마검사! 왜 안 죽고 살아 있나! 틀림없이 그때 바다에 빠뜨려서…….”
“보다시피 명줄이 더럽게 질겨서.”
내가 능청스레 말하자 불도깨비가 이를 갈며 내게 미친 듯 돌격했다.
“마검사! 죽여야 한다! 꺼져라!”
“나한테 메밀묵이 있다. 꽤 많이.”
“뭐, 뭐?”
달려오던 불도깨비가 멈춰 선다.
저놈이 불도깨비 최고의 전사라고?
메밀묵 단지를 꺼내 들며 웃어줬다.
“너, 나한테 조련당해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