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118화 (118/200)

나만 1회차 118화

배낭은 나에게 퍽 고마운 친구다.

말없이 늘 묵묵히 짐을 들며 내가 잊지 않는 한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잠깐만, 내 등에 업혀서 살잖아? 은근히 셈은 잘 치르는 녀석이었군.

그러니, 나에게서 도망치는 배낭에게 이렇게 소리칠 권리쯤은 있다.

“거기 서!”

하나 더. 애석하게도 배낭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가 없다.

허공에 떠오른 배낭이 두둥실거리며 저편으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다.

각종 보물과 식료품, 생필품, 심지어 여벌 옷까지 담긴 마법배낭이다.

‘무엇보다 항마의 각등!’

천지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아이템이 내 배낭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황급히 벌떡 일어나서 날아가는 배낭을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 콧소리가 들려온다.

“으힛! 메밀묵! 메밀묵 냄새난다!”

설마 내 배낭이 듣는 재주는 없어도, 말하는 재주는 있었던 것인가?

하여간 나도 절대 뜀박질이 느린 편은 아닌데 배낭과의 거리는 좁혀 지지 않고 있었다.

‘제길, 뭐가 저렇게 빨라?’

이를 악물고 호리병 뚜껑을 연다.

“쫓아라, 백야야!”

“캬앙!”

축지법을 쓰는 백야는 인간보다 월등히 신속한 속도로 움직였다.

바람처럼 내달린 백야가 떠오른 배낭을 꽉 물자 놀란 소리가 들렸다.

“우와앗! 떨어져!”

백야가 들러붙자 배낭의 움직임이 비틀대다가 현저하게 느려진다.

‘잠깐, 저거 혹시?’

내가 눈매를 좁히고 떠오른 배낭 밑을 향해서 화염구를 날려보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뭔가가 불꽃에 얻어맞고 배낭이 바닥에 떨어졌다.

“흐악!”

내가 재빨리 배낭을 회수한 순간, 불에 덴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워! 아파! 끄아앙! 아파!”

웬 조그만 생명체가 팔다리를 폴폴 대며 옷에 붙은 불을 털려고 했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정수리의 조그만 뿔과 하나뿐인 커다란 외눈이었다.

그러한 외견에 관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생물은 하나뿐이다.

“도깨비?”

“미안해! 끄아앙! 이것 좀 꺼줘!”

조그만 외눈도깨비가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아주 괴로워했다.

그래서 나는 외눈도깨비의 타고 있는 옷자락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끄아앙! 아파! 아파! 왜 때려!”

“불 꺼달라며?”

“어! 그러네! 계속 밟아! 끄아앙!”

외눈도깨비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발길질에도 순순히 짓밟혔다.

하여간 얼추 불길이 진정되자 외눈도깨비는 몸을 떨며 날 바라보았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

“제기랄, 너도 날 식인하고 싶냐?”

“아니! 너 말고! 배낭 속 메밀묵!”

저놈, 배낭에 넣어두기까지 했는데 메밀묵 냄새는 어떻게 맡은 거야?

외눈도깨비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하나만 줘! 하나만? 응? 메밀묵 하나만 주면 금은보화도 내어줄게!”

“그딴 거 필요 없어. 이거 안 놔?”

외눈도깨비는 내 다리에 꼭 달라붙더니 놓지도 않으며 귀찮게 굴었다.

백야가 도깨비에게 으르렁댔다.

“크르릉!”

“끄아앙! 암 여우다! 저리 가!”

외눈도깨비는 덩치도 작은 만큼 겁도 많은지 기겁했지만, 오히려 내 다리에 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뒤따라온 일행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범철?”

“이놈이 내 배낭을 훔치려 했어요.”

“메밀묵! 그 메밀묵을 나한테 줘!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해줄게!”

조그만 외눈도깨비가 침을 흘리면서 내 다리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퀸소히니베가 픽 웃더니 외눈도깨비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작은 짐승은 무엇인 것이야?”

“도깨비입니다.”

“도깨비? 우리 배를 침몰시켰던 불도깨비랑 비슷한 종류인 것이야?”

“장난을 좋아하고 우애가 깊으며 먹성이 좋은 청색대륙 생물입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갸웃거렸다.

“그런데 방금 배낭 가져갈 때 도깨비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야.”

“청색대륙 도깨비는 이따금 ‘투명화’ 요술을 익히고 있으니까요.”

“요술이 무엇인 것이야?”

“도깨비의 마법입니다. 일반 마법이나 도술과 꽤 다르지요. 몽환적이고 꿈과 관계된 경우가 많습니다.”

헤르탄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블라이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말고도 근처에 더 있어.”

나는 낯빛을 바꾸며 칼을 뽑았다.

기척을 느끼는 감각만은 누구보다 뛰어난 블라이넨이 주변을 살폈다.

“세 놈, 아니, 네 놈이군.”

내가 외눈도깨비를 내려다보았다.

“너, 일부러 시간 끌고 있었냐?”

“흐익!”

외눈도깨비가 흠칫하며 떨어졌다.

동시에 바닥이 쿵쿵 울렸다.

“여기다! 두령님이 찾는 인간이 이곳에 있다! 샅샅이 뒤져야 한다!”

“끄아앙! 여기야! 여기!”

외눈도깨비가 소리치며 뛰어가자 놈들의 걸음이 이쪽으로 향해왔다.

뿔이 길고 듬직한 도깨비 네 마리가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전부 덩치에 걸맞은 나무방망이를 쥐었는데 그 형태가 몹시 흉악하다.

‘배를 침몰시켰던 그 불도깨비만은 못한 덩치지만, 꽤 강해 보이는군.’

칼자루를 꽉 쥔다.

그런데 놈들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들개처럼 코를 마구 벌렁거렸다.

“흐어! 흐어억! 이, 이 냄새는!”

“메밀묵! 그것도 엘프 수제품!”

“저놈이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다!”

수염 무성한 도깨비들이 나무방망이를 질질 끌며 침도 질질 흘렸다.

“그 메밀묵을 내놔라! 그것만 내놓으면 삼대가 호화를 누릴 것이다!”

“하! 웃기지나 말라는 것이야.”

소유욕이 강력한 용답게 퀸소히니베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눈도깨비가 얼른 뛰어가 듬직한 도깨비의 어깨에 착 앉았다.

“알솔! 몸에 화상 자국이 있잖아!”

“끄아앙! 쟤가 불을 밟아 꺼줬어!”

“저놈, 괜찮은 녀석이군! 그래도 메밀묵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

내가 팔짱을 끼고 짜증 냈다.

“언제부터 남이 내 물건을 양보할 수 있고 없고를 정하게 된 거지?”

그러자 도깨비가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하다! 표현이 무례했다! 그러나 메밀묵이 정말 너무 먹고 싶다!”

“공갈협박을 쳐서라도 말인가?”

블라이넨은 언제든 놈들이 오면 베어버리겠단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카티에가 나에게 속삭여줬다.

“모든 도깨비는 메밀묵에 환장해요. 특히 엘프 수제는 엄청나죠. 지금 거의 제정신도 못 차릴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도깨비가 솔깃해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공갈협박? 그걸 하면 내줄 건가?”

“…….”

블라이넨은 검을 반 뼘쯤 뽑았다.

정말 제정신들이 아닌 모양이군.

내가 고갤 젓고 놈들에게 말했다.

“설마 맨입으로 달라는 건 아니겠지. 메밀묵을 주면 뭘 해줄 건데?”

도깨비들은 잠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더니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좋다! 네가 순산하게 해주겠다!”

순간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내가 어딜 봐서 애를 낳게 생긴 몰골이란 거지? 난 남자라고.”

“그런 인간 수컷은 애를 못 낳나?”

“그럼 도깨비 수컷은 애도 낳아?”

“난 어저께 딸아이를 낳고 왔다!”

어째 대화할수록 한숨만 나온다.

내가 카티에를 뒤에서 껴안았다.

“도와줘. 점점 가면 갈수록 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

“난 그런 대장도 사랑하겠어요. 하지만 애는 회귀가 멈추면 가져요.”

“제기랄, 전부 비정상이야.”

투정은 그만두고 세상에 녹아들자.

“어쨌든 딸아이를 순산했다니 축하한다. 미역국이나 한 사발 끓여줘?”

“축하는 고맙다! 그러나 미역은 싫어해!”

그 도깨비는 정중히 내 배려를 사양했고 지친 내가 상황을 정리했다.

“방금 너희 두령인가 뭔가가 누구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냐?”

“맞아! 메밀묵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깜빡 잊고 있었어!”

그것참 자랑이로군.

“너희 전부, 우리를 따라와라!”

“어째서?”

도깨비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너희를 우리 잔치에 초대하겠다!”

***

“도깨비 두령이 인간을 초대하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사례입니다.”

우리는 험진 산속을 걷고 있었다.

안개가 곳곳에 끼었지만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행이군요. 또 흔치 않은 확률로 괴상한 생물이 날 찾아왔던 거라면 내 운세는 대흉으로 입증됐을걸요.”

헤르탄이 나뭇가지를 헤쳤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깨비에게 초대되는 부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류 말입니까?”

“보통은 헛된 꿈을 즐기는 자. 몽상가나 허언증 환자를 초대하지요.”

“허언증 환자요?”

“원래 이야기는 거짓말이 뒤섞여야 더 재밌는 법이잖습니까. 도깨비들은 이야기라면 아주 좋아하지요.”

나는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 도깨비들이 우리를 초대한 것은 의외라 할 만하군요. 우리 중에는 몽상가나 허언증 환자도 없는데. 무슨 의도로 초대한 걸까요?”

“글쎄요. 지금 당장은 추측하기 어려우니 가봐야만 알 것 같습니다.”

사실 염려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우린 불도깨비에게 공격당해 배가 침몰했으니까.

내가 우리에게 길 안내를 하며 앞서나가는 다섯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저 도깨비들이 불도깨비처럼 우리를 노리고 함정을 판 거면 어쩌지?”

“불도깨비는 특수한 경우에요. 대장. 어지간한 다른 도깨비들은 먼저 인간을 공격하거나 거짓말로 함정을 파대는 비열한 꾀는 쓰지 않아요.”

뭐,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퀸소히니베가 기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잔치라니. 달의 폐성에서 우리가 즐겼던 파티와 비슷한 것이야?”

“그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도깨비들 잔치는 좀 더 격식을 따지지 않고 흥겹게 취하며 노는 식입니다.”

카티에의 설명에 나는 온 세상 강자가 모여들었던 파티를 떠올렸다.

‘유랑자가 개최했던 파티였지.’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닌데, 지금 회상해 보니 엄청 옛날 추억 같군.

그러고 보니 그때 그 파티복들도 내 배낭에 그대로 있는데 말이지.

“가까워졌나 본데.”

블라이넨이 말하자 희미한 풍악 소리가 내 귓속에 살포시 들어섰다.

보통 안개 낀 산속에서 풍악 소리면 음침할 법도 한데 묘하게 흥겨웠다.

“거의 다 왔다! 따라와라!”

앞장서는 다섯 도깨비를 따라 걸어가자 탁 트인 공간이 앞에 나왔다.

도깨비들이 과하게 큰 가야금과 대금을 켜며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다.

‘상당히 호화스러운 잔치인데.’

상찬이 차려져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잔칫상이 여러 개가 놓여 있다.

수수범벅, 소 머릿고기, 돼지 머릿고기, 산적, 맑은 술잔이 그득하다.

작은 외다리도깨비들이 폴짝폴짝 뛰며 빈 그릇을 열심히 날랐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군침을 다셨다.

내 배낭에 있는 메밀묵 단지는 천으로 꽁꽁 싸매고 향료를 뿌려서 다행히 도깨비들에게 냄새가 가지 않는 듯했다.

도깨비들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잔칫상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유쾌하고 망측하나 비범하다! 그것이 바로 도깨비로구나! 얼씨구!”

여기까지만 보자면 그저 평범한 잔치겠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거의 수십 마리의 도깨비가 편히 베개를 얹고 푹 자고 있는 것이다.

“저것들은 뭐지?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데?”

“도깨비 잔치에서 잠이란 하나의 여가다! 아주 편하고 몽환적이지!”

잔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깨비는 정중앙에 위치한 퍼런 도깨비였다.

체형을 봐서는 여성이었고 아주 커다란 술동이를 손에 잔처럼 쥐고 있었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거인이라 불러도 될 도깨비가 껄껄 웃고 있었다.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자라! 그거야말로 도깨비의 잔치지!”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다섯 도깨비가 거인도깨비 앞에 무릎 꿇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마검사를 우리가 데려왔다! 두령님!”

뿔이 긴 도깨비가 대표로 말하며 나를 가리켰다.

“마검사?”

순간 커다란 술동이를 들고 있던 도깨비 두령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소리쳤다.

“당도하셨도다! 세상에서 불도깨비를 멸해 버릴 예언 속의 영웅께서!”

뭐?

예언 속의 영웅이라니? 내가?

쩌렁쩌렁 울린 목소리에 온갖 도깨비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전쟁에 참여해다오! 자네가 있어야 우리가 승리한다!”

대뜸 전쟁에 참전해 달라니.

어쩐지 우릴 왜 초대했나 싶었다.

이유야 모르지만 불도깨비와의 전쟁에서 날 병력으로 써먹겠단 거다.

‘도깨비들과의 전쟁이라니. 지금은 그런 것에 낄 여유도, 이유도 없지.’

지금의 문제만 해도 골치 아프다.

내가 거부 의사를 밝히려던 찰나.

[전생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 자신을 가장 오래 섬겨온 회귀자, 자신을 가장 많이 살린 회귀자와 120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대기시간이 만료되어, 전생의 돌이 세 번째 과업을 부여했습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을 종식시키십시오.]

내 인생이 어쩜 이리 미쳐 가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