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17화
“설마 배고파서 조개를 주웠겠냐?”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하고 주운 맛조개를 제대로 살폈다.
대나무 마디를 닮았지만 일반 맛조개와 달리 껍데기가 아주 딱딱하다.
손에 쥐어진 무게도 제법 무겁다.
[고급감정 (Lv2)으로 인해 아이템의 숨겨진 기록이 드러났습니다!]
[고급감정(Lv3) 달성!]
고급감정!
겉으로는 허술한 아이템일지라도 진가를 파악하게 해주는 스킬이다.
아이템의 새로운 옵션을 확인한다.
「용왕의 ᄃ국검(감정됨)」
사악한 인어용왕이 애용하던 명검. 조개의 속에 검신이 봉인되어 있다.
*조개에 소금 뿌리면 검을 뱉는다.
*민물에 1시간 동안 담가두면 칼날에 ‘모래폭풍’ 스킬 권한 1회 부여.
*칼날이 화기에 훼손되지 않는다.
*검술 경지가 높을수록 위력 배가.
배낭에서 소금을 꺼내 조개에다가 뿌리자, 철컥하고 칼날이 뽑혔다.
매서운 칼날을 살피곤 휘둘러본다.
휘익!
‘첨예하고 매서우니 제법 괜찮군.’
맛조개는 대나무 마디처럼 생긴 생김새 덕에 칼자루로 쓰기 적합했다.
카티에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대장. 바닥에 구르는 조개에 그런 성능이 있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재능으로.”
그녀는 황당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도 와봤지만 그런 검이 있다는 건 전혀 알지도 못했어요.”
나는 검을 입수하고도 쓸모가 있다고 판단된 아이템은 모조리 쓸었다.
「역병치유의 구리 화로」
「환상을 일구어내는 흰 면포」
「길과 흉이 교차하는 장기알」
배낭이 터질 것처럼 빵빵해진 뒤에야 나는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헤르탄은 보라색 불빛을 발하는 특이한 각등을 집었다.
“그건 뭡니까, 헤르탄?”
“이게 있어야 불멸아귀가 사는 ‘천지’로 향할 때 길을 잃지 않습니다. 우선은 범철이 지니고 계십시오.”
나는 아이템의 옵션을 살펴봤다.
「항마의 각등.」
불길한 기운에 저항하는 각등. 신비한 불빛을 뿜어내어 특수한 장소에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악마 계열 마물에게 저항력 +35%
천지로 갈 수 있는 아이템!
우리가 용궁에 온 본 목적이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용궁을 붕괴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거였습니까?”
“예. 수정대궐의 보물을 털려면 도시를 마비시키는 게 제일이니까요.”
한편 의외로 블라이넨은 수공품 몇 개만 챙기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너는 무기 안 챙기냐?”
“괜찮은 검이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어이없어하며 양팔을 펼쳤다.
“사방에 검이 이렇게 많은데도?”
“내 것보다는 못해.”
나 원 참, 자기 검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블라이넨이 허리에 찬 밋밋하고 수수한 쌍검을 한번 살펴봤다.
「편월의 검 아일레크(각성함)」
광기의 검 애호가가 벼려낸 악검. 왕가를 멸할 뻔한 전적으로 인해 봉인 당했었다. 쌍둥이 검과 공명한다.
*왕가 제일의 검.
*검만은 절대 부수지 못한다.
*주인에게 구타당해 굴복해 있음.
*오직 검의 소유주만이 확인 가능한 옵션이 숨겨져 있음.
「만일의 검 로놀샤크(각성함)」
광기의 검 애호가가 벼려낸 악검. 소유주마저 집어삼키는 전적에 봉인 당했었다. 쌍둥이 검과 공명한다.
*왕가 제이의 검.
*검만은 절대 부수지 못한다.
*주인에게 짓밟혀서 굴복해 있음.
*오직 검의 소유주만이 확인 가능한 옵션이 숨겨져 있음.
“…….”
“난 회귀하자마자 국고부터 털지.”
왕가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의 발언 치고는 상당히 기괴한 면이 있군.
쓸 만한 보물을 싹 쓸어버린 우리는 창고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런데 헤르탄이 용왕의 시체로 걸어가더니 녹용 같은 뿔을 떼어냈다.
“뭐합니까, 헤르탄?”
“용왕 뿔을 곱게 갈아 수액과 함께 섞어주면 그만한 명약이 없습니다.”
과연 헤르탄은 못 먹는 게 없군.
우리는 수정대궐 폐허에서 나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구미호의 의뢰만 끝내면 더 이상 용궁에는 볼일이 없다.
“시체에서 간을 빼간 사람은 너였지? 지금 용왕의 간은 어디 있냐?”
“용궁 전체의 마법을 유지시키기 위해 일단은 저기 발광체에 뒀어요.”
카티에가 결계 중앙 꼭대기에서 햇빛처럼 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 발광체를 가리켰다.
“용왕의 간을 가져가면, 마법이 풀려 결계는 사라져 버릴 거예요.”
그럼 바닷물이 들어차 우리가 있을 수는 없게 된다는 거로군.
늙은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육지로 가는 마차는 미리 대기시켜 놨습니다요.”
“고맙다. 너는 이제 어쩔 거냐?”
“노예처럼 부려 먹히던 용궁도 없어졌으니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지요. 아내한테 안부 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요.”
발광체는 결계의 꼭대기에 있었다.
본래는 수정대궐의 옥상에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라지만 지금 대궐은 무너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퀸소히니베는 간단히 등에서 날개를 뻗어 발광체로 날아갔다.
그녀가 발광체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돌리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날 두고 가지 말란 것이야!”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미리 해마가 끄는 마차에 탑승한 내가 양손을 모아서 크게 소리쳤다.
퀸소히니베가 재빠르게 발광체에서 간을 빼내자마자 결계가 사라졌다.
“꺄아악!”
그녀가 허겁지겁 날개를 펼치며 쏟아져 오는 바닷물을 피해 내려왔다.
추락하듯 내려온 퀸소히니베를 향해서 내가 힘껏 손을 내뻗었다.
“잡아!”
새파래진 얼굴의 퀸소히니베가 내 손을 붙잡았고, 세차게 끌어당겼다.
얼른 마차 문을 닫았지만, 이미 새어든 바닷물에 바지를 적셨다.
“사, 살아남은 것이야.”
“참, 아쉽게도 됐네요.”
퀸소히니베가 카티에를 째려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밖을 봤다.
“몇 번을 봐도 이건 장관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회귀자답게 별 감흥이 없는 어투지만, 최소한 감탄이나 한 게 어딘가.
그만큼 창밖의 경관은 대단했다.
결계가 없는 용궁을 물이 휩쓴다.
시체, 건물, 대궐까지 파도는 공평하게 휩쓸며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거친 회오리가 내려와서 용궁의 잔해를 흔적도 없이 말소했다.
“조금만 늦어도 저렇게 됐겠지.”
블라이넨이 불길한 소리를 해대며 턱을 괴고 장관을 바라보았다.
내가 몸에 묻은 바닷물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얼른 육지로 가자고. 이제 소금기라면 지긋지긋해.”
***
퀸소히니베가 가만히 숫자를 썼다.
“……백이, 백삼, 백사, 백오…….”
블라이넨은 고작 두 손가락만을 사용해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이슬처럼 땀을 맺은 그녀의 널찍한 등짝을 보니 갑자기 따라하고 싶군.
“윽!”
그러나 나는 겨우 10회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망할, 아무리 근육을 키워도 난 그녀처럼 손가락 힘까진 단련 못 하겠어.
블라이넨이 땀을 흘리며 일어났다.
“팔굽혀펴기는 요령이야. 정자세로 제대로 해야만 수련이 되지.”
그녀가 나의 자세를 짚어줬다.
“능력치는 보정에 불과해. 근육을 고루 단련해야 검을 쓸 때 편하니까.”
회귀하며 평생을 노력에 바쳐온 그녀는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었다.
“생각해 보니 너는 평소에 얼마나 수련하냐? 능력치도 어지간한 회귀자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 같던데.”
“10시간을 피나게 수련하면 가끔 능력치가 1씩 올라가. 온몸이 탈진할 만큼 계속하면 칭호가 생기고 능력치 증폭돼. 그걸 무한히 반복해.”
“……그렇게 다 가르쳐줘도 되냐?”
“알아도 못 따라 해. 다들.”
나는 질색해 버렸다.
나도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닌데, 어째 이 녀석만 보면 반성하게 된다.
“회귀자 중에서 그만한 근성으로 능력치 올리는 놈은 너뿐일 거다.”
“회귀자도 아니면서 그만한 재능으로 정점 오르는 놈도 너뿐일 테고.”
내가 갖가지 수련을 할 때마다 블라이넨이 곁에서 충고를 해줬다.
“네 체격에 그런 수련은 맞지 않아. 더 힘겹고 고된 것을 해야 해.”
“고많긴 한데 너, 나중에 나랑 다시 검으로 붙겠다고 하지 않았냐?”
“네가 강해져도 난 이길 테니까.”
“그러시냐? 그런데 그보다.”
내가 블라이넨을 슬쩍 곁눈질했다.
“너, 내 몸에 관해 엄청 잘 안다?”
“많이 썰어봤으니까.”
“…….”
저 자식은 날 도축용 돼지로 보나.
블라이넨이 회상하며 말했다.
“수련 초기에 몸이 깨질듯이 아파.”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하냐?”
“한껏 울고, 악물어 버티지.”
그녀가 저만한 검술을 이루기까지 걸어온 길이 예상가서 존경스럽군.
“그런데 수련해 봤자 회귀하면 리셋되는 거 아니냐? 힘 빠지진 않아?”
“육체라면 회귀 시점부터 단련되어 있고, 정신력과 경험이 늘어나니까.”
블라이넨은 확신하며 말했다.
“노력은 가끔 배신도 해대지만, 결국은 내 품에 돌아오게 되어 있어.”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곁을 지켜주고, 가라 해도 가지 않던데?”
“개 같은 새끼.”
“엿 같은 자식.”
서로에게 비정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나는 땀을 닦고 훈련을 마쳤다.
[효율 좋은 수련을 마쳤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하여간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게 되는 법이다.
“넌 나한테 뭐 배우고 싶은 거 없냐?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꽤 있는데 말이야.”
“한때 마법을 배워보고 싶었지.”
“아, 마법이라면…….”
“됐어. 난 그쪽에 재능 없으니까.”
검과는 다르게 마법은 재능이 없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분야였다.
그래서 불행히도 재능이 없는 자라면 노력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가끔 그녀를 볼 때마다 내게 있는 재능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게 된다.
“그럼 나중에 술이나 사지. 재능 없고, 회귀 못 하는 놈끼리 먹자고.”
“글쎄.”
퀸소히니베가 블라이넨에게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이야.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게 있다니.”
“안겨도 될까요?”
“…….”
왠지 눈꼴이 시려서 보기 싫군.
반면 카티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용과 저 여자가 가깝게만 지내주면 나는 전혀 바라는 게 없겠어요.”
용궁에서 벗어난 우리는 불멸아귀가 서식하는 ‘천지’로 향하고 있다.
현재는 어느 한적한 들판에 머무르고 있는데, 엷게 쌓인 눈이 차갑다.
‘구미호…… 아직은 부를 때가 아니겠지.’
나는 반쯤 뚝 떼인 용왕의 간을 살펴보다 배낭에 넣어두고 말했다.
“‘천지’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못해도 15일이면 충분합니다.”
헤르탄이 말했다.
“항마의 각등이 있으니 천지로 가는 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만. 이제는 병력소집이 관건이 되겠군요.”
당연하다.
불멸아귀를 죽이기 위해선 그저 우리 일행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황색대륙에서도 아크 리치를 죽이기 위해서 무려 6만의 병력과 25마리의 용이 대동 되지 않았었는가.
‘이번에도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화력을 구해야 할 텐데.’
그러나 이곳은 황색대륙과 달리 자살기도회처럼 대륙지배자를 죽이는 걸 평생 업으로 삼은 협회는 없다.
그런데 도대체 그만한 병력을 어디서 모을 수가 있을지.
헤르탄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있지 않습니까.”
“뭐가요?”
“범파와 철파. 둘 중 하나만 범철이 도움을 요청해도 그 세력은 완전히 범철의 소유물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나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일생신교 신도를 규합한다.
그러면 당연히 황색대륙 때와 준하는 병력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대신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이 완전한 적이 되어버리겠죠.”
범파와 철파는 서로를 증오한다.
내가 어느 한쪽 편을 들면 다른 한쪽은 이단으로 몰려 파멸할 거다.
두 대형 종파의 신도는 청색대륙 인구의 전체와 맞먹는다고 한다.
나의 선택에 의해 거의 대륙인구 절반이 사망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맞아요. 나도 반대예요. 각 파 그 교주들, 얼마나 대장한테 극성인데.”
카티에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특히 범파 교주. 그 인간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참을 수 없어요.”
“범파 교주라면…….”
“네. 전생에서 대장을 무참히 강간했던 그 수제자 말이에요.”
남부럽지 않게 진한 사제관계에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만 같군.
각 종파의 교주가 미친 제자라는 것 역시 나의 거부감 중 하나였다.
그런 녀석들이 교주로 있는 종파와 제대로 믿고 함께 싸울 수 있겠어?
“그보다 고민입니다. 범파랑 철파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했던 거요.”
범파와 철파는 전쟁을 벌인다 했다.
서로에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를 세상에 끌어내기 위해서.
그러나 헤르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당분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범철.”
“확실히 두 대형종파의 교주는 미쳤지만, 헛짓할 바보들은 아니에요.”
카티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을 끌어내기 위한 전쟁이지만, 지금은 대장위치가 탄로 나버렸죠. 그래서 전쟁의 이유가 없어요.”
“하기야 그렇게 되긴 하겠군.”
“아이러니하게도 대장의 정체가 밝혀져서 우린 위험해졌지만, 대륙은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거죠.”
헤르탄이 현실적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분간’입니다. 범철. 범파와 철파 교주는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찾으려 할 테고, 그대는 언젠가 두 대형 종파 가운데서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할 겁니다.”
확실히 불멸아귀를 죽이기 위해 병력을 소집하기 위해선 그래야겠지.
범파와 철파. 두 세력의 강약을 비교하기보단 그 나마 제정신인 곳을 골라야 할 텐데.
‘내 눈에는 둘 다 미친 것 같지만.’
앞날을 걱정하며 한숨을 쉴 때.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뭐야?’
수련하느라 잠시 벗어두었던 배낭.
그것이 천천히 허공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