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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13화 (113/200)

나만 1회차 113화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절대 헤르탄의 조언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단도를 몰래 쥔 것은 혹시나 만약의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만일 카티에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미쳤다면 죽이진 못해도 싸워서 기절시켜 데려가야 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방비를 다지며 등 뒤에서는 남몰래 단도를 움켜쥘 때.

“……대장.”

갑자기 카티에가 까치발을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내가 야위었다고?

아, 하기야 그러고 보니 해골화 때문에 5킬로그램이 빠지기는 했었지.

그래 봤자 조금이나 변했을 텐데 오랜만에 봐놓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눈물짓는 소녀가 가까이서 보인다.

‘어라.’

새삼 카티에의 미모가 놀라웠다.

머리칼이 폭풍처럼 헤집어지고 눈이 토끼처럼 벌건 데다 안색이 시름시름한 여자가 어여쁜 건 처음이다.

지금 내 눈에 뭐라도 씌워졌나?

“설마 대장도 그동안 나를 못 봐서 끼니도 못 챙겨 먹었던 거예요?”

“그건 아닌데…….”

“이리와 봐요. 어……!”

카티에가 내 소매를 끌고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갑자기 휘청 쓰러졌다.

내가 놀라서 얼른 그녀의 허리를 받혔다.

“괜찮아?”

“미안해요. 마음 졸이면서 며칠이나 굶었더니 몸에 힘이 없네요.”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지금 당장 나랑 회오리 밖으로 나가서…….”

“함께 나가요? 데이트인가요?”

음, 어쩐지 우리 대화가 평상시보다 훨씬 맥락을 벗어나는 느낌인데.

카티에가 웅크려서 모래를 파내고 반짝이는 작은 구슬을 캐냈다.

“그게 뭐야?”

“환혼석. 귀한 구슬이죠. 회오리 한가운데서만 묻혀 있는 히든 피스인데, 여기 공기는 이게 만들어낸 거예요. 대장한테 주려고 아껴놨어요.”

“설마 이거 하나 나한테 주겠다고 네가 이 위험한 곳까지 온 거였냐?”

“당연하죠. 이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귀한 구슬이에요. 삼키면 대장의 건강도 금방 회복될 거예요.”

내가 그녀를 보다가 고갤 저었다.

“아니. 지금 봐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심각한데. 이건 네가 삼켜라.”

“됐어요. 대장이 피골상접한 꼴을 보니 내 가슴이 찢길 것 같아요.”

카티에는 울먹이며 가슴을 쳤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네가 무슨 우리 엄마냐?”

“우리 아이의 엄마가 될 수는 있겠죠. 아이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

그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머리칼이 헤집어지고 눈알이 붉게 핏발선 소녀를 새삼스레 바라본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구나.”

“아니요. 결단코 완전히 제정신이에요. 아이를 낳으려면 함께 자야 할 테고 그럼 우린 알몸이어야겠죠?”

카티에가 옷을 바로 벗으려 했고, 내가 얼른 그 미친 행위를 말렸다.

“빈사일 때 그 짓 하면 너 죽는다.”

“아직 내 신체 나이가 19살이라 그래요? 걱정하지 마요. 얼마 안 있으면 20살 될 테니까. 잠깐만요. 당장 옷 벗지 않고 뭐하는 거예요, 대장? 우린 얼른 아이를 만들어야 해요. 잠깐만요. 아이를 만드는 데 꼭 성행위가 필요할까요? 거기다 회귀가 지속되는 세상에 아이를 낳는 짓이란 정신을 붕괴시키기 딱 좋은 행위죠.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건 바보야. 그래. 입양! 대장. 우리가 함께 입양할 아이를 알아보도록 해요. 어떤 아이가 좋을까요? 인간은 회귀하니까 외견은 아이여도 속내는 늙었어요. 그럼 이종족의 아이가 좋겠죠. 역시 엘프? 너무 외모지상주의적이야. 그럼 오크? 식사를 너무 많이 하잖아! 아니면 드워프? 그래, 드워프가 좋겠네요. 우리 함께 수염이 수더분한 아기 드워프를 찾아봐요.”

이야기가 어디까지 흘러가나 잠자코 듣자니 내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며칠 굶은 데다 나와 떨어져 있던 카티에는 착란 증세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회귀자에 적응된 나는 적당하게 입을 다물게 할 법을 찾았다.

“그걸 억지로 먹이면 자살하겠어.”

“합!”

카티에가 얼른 작고 반짝이는 구슬을 한입에 삼켜서 꿀꺽 삼켜 버렸다.

히든 피스라는 것이 빈말은 아닌지 그녀의 안색이 금세 좋아졌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솟아요.”

내가 한숨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잘못됐어.”

“네? 구슬을 삼킨 거요?”

한껏 숨을 마시고 단숨에 말한다.

“아기 드워프를 입양한다는 너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아기 엘프를 입양하는 것이 외모지상주의 판단이라면 아기 드워프를 입양하는 것은 동정이란 의미가 되어버려. 입양을 동정으로 하는 것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아이를 키우겠다는 의미 아니겠냐? 나는 그런 입양이라면 반대해. 차라리 정상적인 섹스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이 훨씬 낫지. 하지만 아이를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너무 일러. 섹스는 그저 섹스로. 그럼 당장 옷을 벗고 생식기나 부딪쳐야 할까? 아니. 그건 아니지. 왜냐하면 스물 이상하고만 섹스하는 것이 나의 관념이고, 휘몰아치는 재앙의 중심이 아니어도 정상적이게 생식기를 부딪칠 수 있는 장소는 꽤 넘쳐나거든. 결론은 뭐냐? 피임 확실하게 하고 내년에나 함께 자자.”

“대, 대장……? 왜 그래요……?”

카티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녀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자, 이제 네 정신상태가 파악돼?”

“…….”

날 미친놈처럼 바라보던 카티에는 그제야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장 덕에 내가 얼마나 미쳤었는지 이해했어요.”

“그럼 너는 앞으로 뭘 해야 할까?”

“푹 쉬고 안정을 취해야 해요.”

“이제 네가 해야 할 말을 뭐지?”

소녀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콧숨이 가볍게 들어갔다 오간다.

카티에가 나의 가슴에 파묻혔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대장.”

“나도 그랬어. 카티에.”

내가 지쳐서 미소를 지었다.

어째 회귀자랑 어울리다 보면 정신 상담 재능까지 발견할지 모르겠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던 거냐?”

“기적을 써서 수압을 견디고 회오리를 갈랐어요. 대신에 여기 갇혀 버린 신세가 되어버리긴 했지만요.”

“간을 기증했던데. 몸은 괜찮고?”

“용왕의 마법 덕분이에요. 간을 내놓고도 용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생명에는 무리 없어요.”

“됐어.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내가 안쓰러워 그녀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너는 조금 쉬어야겠어.”

“……대장. 너무 졸려요.”

나의 가슴을 고개를 파묻은 카티에가 눈을 감고 몸을 맡겼다.

난 순진하게도 자는 그녀를 안아 들고 회오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한 빈틈이었다.

“어.”

움켜쥐려 했지만 어느새 단도는 나의 손에서 금세 빠져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절명환각의 단도는 카티에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단검을 든 소녀를 보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등골에 땀이 흘렀다.

‘악몽.’

예지된 꿈에서 카티에가 나를 죽일 때 사용하던 무기가 바로 단검이다.

지금 그 예지가 실현되는 것일까?

카티에가 정색한 얼굴로 단도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내가 대장을 죽일까 봐 두려워요?”

나는 솔직히 시인했다.

“당연하지. 날 죽인다고 써놨잖아.”

“그 쪽지를 믿었어요? 내가 설마 정말 대장을 죽이기나 하겠냐구요.”

“그만큼 네가 미칠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대장한테 삐치기는 했었어요. 날 제일 먼저 찾으려 했다면 이미 날 찾아오고도 남았을 테니까.”

“…….”

거참 머리가 비상하기도 하군.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킬게요. 반드시. 내가 미치더라도 대장을 지키면서 미칠 거예요.”

카티에가 천천히 다가와서는 나의 손에 단검을 부드럽게 쥐여 주었다.

귓가에 애원하는 속삭임이 스쳤다.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요. 대장.”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울어댄다.

나는 대답 없이 카티에를 안았다.

호리병이 대뜸 열린 건 그때였다.

초화가 눈을 비비며 중얼댔다.

“……아빠. 나 쉬이.”

타이밍 나쁘게도 애완수는 곧장 부둥켜안은 우리를 목격하고 말았다.

초화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백야야! 아빠가 바람피워!”

“크르릉!”

백야가 뒤따라 호리병에서 튀어나오더니 나를 향해 으르렁대었다.

평소엔 그렇게 순박하더니 불륜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야, 괜한 오해를…….”

“컁!”

미처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백야가 내 다리를 덥석 깨물었다.

“으억!”

어지간하면 내가 금방 피할 텐데 이 녀석 언제 이렇게 민첩해졌어?

카티에가 놀라며 물었다.

“대장. 이 애완수들은 뭐예요? 아빠라는 소리는 또 무슨 의미구요?”

나는 다리를 깨문 백야를 떼어놓고 나서야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했다.

“……아빠 친구였어?”

“캬아아앙.”

백야가 아주 미안해하며 머리를 비비고는 깨문 다리를 혀로 핥아줬다.

“…….”

초화는 수줍은 성격답게 곧장 내 뒤에 숨어 카티에를 힐끔 훔쳐봤다.

“모두 이번 삶에 처음 보는 애완수예요. 엄마를 갖고 싶어 한다구요?”

카티에가 살며시 뺨을 붉혔다.

“그러면 내가 엄마 해줄까요?”

두 애완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엄마 더 필요 없어.”

“캬아앙.”

어라, 이건 나도 좀 의외로군.

당연히 일행한테 그런 것처럼 엄마가 되어 달라고 조를 줄 알았는데?

카티에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요?”

그러자 초화가 고개를 조금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똘똘하게 설명했다.

“……엄마가 셋 있는데, 한 사람은 남자고, 한 사람은 여자를 좋아하고, 마지막 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카티에가 크게 충격을 받고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대장. 내가 없는 사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녔던 거예요?”

“야,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라고.”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상한 짓 하고 다닌 건 너도 만만치 않지 않을 텐데?”

“이상한 짓? 뭐가 말이에요?”

카티에가 대놓고 시치미를 뗐다.

내가 좀 주저하며 말했다.

“넌 그 마지막 쪽지에는 자기 피로 글도 썼잖아?”

그러자 카티에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거요? 인어 피로 쓴 건데. 시각 효과를 더하면 대장이 더 빨리 올 것 같아서요.”

“…….”

나는 블라이넨을 죽일 것이다.

***

“아니던데?”

“아니었나.”

블라이넨은 꽤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아주 이를 갈았다.

“그게 다냐?”

“뭐를 할까.”

내가 칼자루에 손을 얹자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죽어줘?”

“됐고. 갚아라.”

“미안. 그러지.”

저 녀석, 알고 그랬던 거 아니야?

한편 카티에는 일행과 간단하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왔어요.”

“오랜만입니다. 카티에.”

두 회귀자는 어찌 보면 무심하고 상당히 겉치레 없이 인사를 마쳤다.

반면에 퀸소히니베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빤히 내려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네년에게? 하, 전혀.”

“그러니까,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내가 보고 싶었다는 의미겠죠?”

“내가 언제……!”

퀸소히니베가 기막혀하며 입 열었지만 카티에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대장.”

“왜?”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나요.”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 카티에는 블라이넨을 보는 순간부터 적대했다.

“아로즈 사건을 잊었나요, 대장?”

“저놈은 최소한 전 부인은 아니야.”

“저 여자가 대장을 죽여 본 횟수만 해도 우리들 손가락 개수를 넘어요.”

블라이넨은 나를 향해 턱짓했다.

“동행 제의는 저쪽에서 먼저 했어.”

“뭐라구요? 도대체 어째서…….”

“거기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곰방대로 담배 연기를 훅 빨고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듯 말했다.

“서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 삶에서 사랑 고백과 잠자리도 나눴네.”

“당장 저 여자를 쫓아내야 해요!”

또다시 미칠법한 카티에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블라이넨을 째려보았다.

“야, 자꾸 오해 사게 말할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블라이넨이 턱을 까닥이며 웃었다.

저 자식이 저런 장난기도 있었나.

카티에는 온갖 언변으로 기가 막히고 가슴이 멎는단 식으로 떠들어댄 뒤에야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했다.

“우선 저 매섭고 쓸모없는 노력가 검사에 관해서는 나중에 묻겠어요.”

좀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나는 카티에에게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그래서 너는 혼자서 어떻게 이렇게 큰 용궁을 멸망시켰던 거냐?”

“그거야 아주 간단했어요. 인어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거든요.”

“반란?”

“쉽게 말해서 민중파가 규합해 반란하다가 용왕파와 함께 궤멸한 거예요. 뒤늦게야 자유를 향한 민중의 투쟁이 아니라 내가 모략한 항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지만.”

나는 내심 놀랐다.

힘으로 쓸어버린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공작으로 멸망시켰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이 인어들한테 거짓 정보를 퍼뜨려서 정치적 암수를 쓴다는 게 말만큼 쉽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살면서 용궁에 와보았던 경험이 25번쯤 되니까요. 익숙했죠.”

“…….”

전생에 2번 와봤다던 헤르탄의 무려 12배가 넘어가는 경험의 양이군.

“도대체 너는 세상 곳곳에 안 가본 곳이 있기는 하냐?”

“그것에 관해서는 일단 내 간부터 안전하게 되돌려놓고서 말해 봐요.”

우리는 간 저장고에 도달했다.

유지되는 용왕의 마법 덕분에 카티에는 간을 내놓고도 살아 있었다.

그녀가 아주 태연하게 요청했다.

“간을 무사히 몸에 다시 집어넣어야겠어요. 헤르탄,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헤르탄이 카티에의 간을 집었다.

내가 황당해서 물었다.

“간이라는 게 그냥 손으로 집어넣는다고 바로 몸속에 집어 넣어지냐?”

“이곳은 용궁이니까요. 누구나 간을 적출하고 집어넣기가 편리해요.”

그녀가 누워서 상의를 걷었고 옆구리에는 휑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퀸소히니베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간 아프지도 않았던 것이야?”

카티에가 나를 보면서 중얼댔다.

“그러게요. 옆구리가 좀 시리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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