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12화
그래, 카티에가 나의 모든 행동을 예견하고 있다면 마지막 쪽지도 그냥 내가 느낌 가는 데 있지 않겠나.
해저의 중심부에 놓인 수정대궐.
수정으로 건축되어 찬란했을 궁전의 기와가 부서지고 떨어져 있었다.
비록 잔해더미지만, 빛을 반사하는 수정조각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퀸소히니베가 수정조각을 매만지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붕괴 이전, 대궐의 완벽한 형태를 보지 못해서 내심 아쉬운 것이야.”
“무너진 형태로 봐서는 2차 붕괴 우려는 없을 테니 들어가 봅시다.”
누구도 출입이 제한되지 않았다.
첨예한 비늘로 이뤄진 갑옷을 착용한 인어병은 모두 죽어 있었으니까.
우리는 무너진 수정대궐을 조심히 걷다가 독특한 시체를 발견하였다.
평범한 인어들보다 덩치가 크고 머리 위에 녹용 같은 뿔이 달려 있다.
금실로 수 놓인 곤룡포를 입고 있었는데, 독특하게도 훤한 푸른색이다.
옆구리에 무언가 찔린 흔적이 있고, 핏물이 잔뜩 배어 나와 창백하다.
블라이넨이 그 시체를 조사했다.
“앞에서 봤던 다른 인어들 시체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골격이 크군.”
“용왕입니다. 이자도 죽어 있군요.”
난 화려한 용왕의 시체를 살폈다.
‘구미호가 간을 가져다 달랬었지.’
회귀자가 등장한 이후, 비위가 참 잘도 좋아진 내가 시체를 해체했다.
그러나 옆구리를 헤집고 내장을 뒤엎어보더라도 간은 보이지 않았다.
“헤르탄. 인어의 신체구조가 인간이랑 다르기라도 한 겁니까?”
곁에서 나의 해체를 지켜봐 주던 헤르탄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발 늦었습니다. 누군가 용왕의 시체에서 간을 빼갔군요.”
이미 간을 빼앗긴 용왕 시체라니.
도대체 누가 간을 적출해 간 걸까?
“카티에일까요?”
“글쎄요. 우선, 아직 간이 용궁의 영역 내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간은 인어에게 마력의 샘입니다. 그리고 용궁은 용왕의 마법으로 유지되죠. 그의 간이 사라졌다면 용궁의 결계, 마법도 사라졌을 겁니다.”
퀸소히니베가 뺨에 손바닥을 짚고는 염려했다.
“누군가 먼저 그 맛있다는 간을 먹으려고 가져갔을지 모르는 것이야.”
블라이넨은 용왕의 피를 쓸었다.
“간만 정확하게 적출해 간 것을 보면 심해 포식 생물의 행실은 아니군.”
문득 용왕의 간에만 집중했단 것을 깨닫고 나는 좀 더 위를 조사했다.
자세히 살피니 용왕의 뿔 사이에 조그만 쪽지가 친절히 끼워져 있다.
나는 그 쪽지를 뽑아서 펼쳤다.
〔수고하셨어요. 마지막 쪽지예요.
회오리 속으로 날 찾아와요.〕
‘회오리?’
나는 용궁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신경 쓰였던 바다 회오리를 떠올렸다.
그렇게 끔찍하게 위험천만한 곳에서 카티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기다리기는커녕 근처로만 사람이 가도 휙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데.’
거기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마지막 쪽지의 글귀는 다른 쪽지와는 다르게 새빨갛게 적혀져 있었다.
내가 혹시나 하며 중얼댔다.
“설마 이거…….”
블라이넨이 쪽지를 살피고 말했다.
“인간의 피로 쓴 거군.”
“…….”
제기랄, 상황이 끔찍하게 심각한데.
고작 몇십 일 떨어져 있었다고 카티에가 이렇게 무너져 버릴 줄이야.
자기 피로 글씨를 쓸 정도면 정신이 얼마나 퇴폐한 것인가.
‘……가만히 서서 경악하고만 있어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
“가자.”
“어디로?”
“어디긴. 바로 저기지.”
내가 휘몰아치는 재앙을 가리켰다.
***
우리는 멀리서 바다 회오리를 봤다.
“과연 참신한 발상입니다. 범철. 지금까지 바다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서 사망했던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신박한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저건 도를 넘은 것이야.”
“여기서 회차를 끝내기는 싫은데.”
모두가 흉악하게 몰아치는 재앙에 지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티에는 저 거칠고 세찬 회오리 속으로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
용궁에 와봤던 헤르탄조차도 회오리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는 방법에 관해선 지식이 없다.
회귀자라면 전생지식이 없는 돌발 변수에 당황하고 한참을 헤맸겠지.
그러나 나는 다르다.
‘전생지식이 없어도, 방법은 있다.’
애당초 나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정보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는 거라면 평상시처럼 익숙하다.
‘바다라면 바다생물이 잘 알겠지.’
나는 아직도 바닥에 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는 늙은 거북을 찾아갔다.
“이봐. 저 회오리를 알아?”
“아이구우! 예……? 쿨쩍, 저 끔찍한 회오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요?”
보기만 해도 무섭다는 투로 거북이가 등껍질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저거야 가끔 나타났다 없어지는 재앙이죠. 용궁이야 결계 덕에 무사하다지만 볼 때마다 놀랍니다요.”
“그러면 저 회오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설마 저 무서운 회오리 속으로 들어가실 작정이십니까요?”
“그래. 미친 짓이지. 알고 있어?”
“그거야……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쿨쩍! 간단하지요.”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뜻밖에도 바로 대답이 나왔다.
늙은 거북이 울적해하며 말했다.
“간을 배밖에 내놓아야 합니다요.”
***
세상은 무모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에게 간이 배밖에 나왔다 한다.
그래서 나도 당연히 늙은 거북의 말이 그런 비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가 버렸다.
“대체 이 기괴한 전시실은 뭐냐?”
“용왕님의 생간 저장고입니다요.”
수정대궐은 무너졌지만, 지하에 존재한 이 석실만큼은 무사했다.
난 어이가 없어 저장고를 살폈다.
‘참나, 와인 저장고는 들어봤어도 생간 저장고는 태어나서 처음 보네.’
방에는 여러 궤짝이 열려져 있었는데, 온갖 크기의 간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궤짝에 담긴 간은 방금 적출한 것처럼 신선했다.
“딱히 여기가 춥지도 않은데, 모든 간이 신선하게 보관되어 있군요.”
헤르탄도 간을 눌러보며 감탄했다.
늙은 거북은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아주 뿌듯해하며 말했다.
“용왕님께서 간이라면 사족을 못 쓰셔서 이 저장고에다 보관해 놓고는 했습죠. 이 궤짝에만 담기면 어느 간이든 신선도가 유지됩니다요.”
“하여간 그래서 이게 왜 간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건데?”
“회오리 속에 들어가려면 물의 저항을 받지 않아야 하고 그러려면 장군님들 무구를 착용해야 합니다요.”
“장군이라면 대궐에 쓰러져 있던 인어병 중 하나를 말하는 건가?”
블라이넨이 묻자 거북이 끄덕였다.
“예예.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요. 그런데 장군님의 무구를 착용하시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요. 간을 적출해 여기 궤짝에다가 기증하고 소유자 이름 석 자를 써놓으셔야 용궁의 장비를 착용할 수 있으십니다요.”
간을 뽑아내서 이곳에 기증해야 용궁 장비를 착용할 수 있다고?
저건 또 무슨 헛소리야?
“간을 뽑으면 당연히 죽을 텐데? 죽으면 장비도 착용을 못 하잖아.”
“용궁에서는 신비로운 용왕님의 마법 덕분에 모든 시체, 장기가 썩지 않습니다요. 또한, 간을 적출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지요. 그래서 용왕님은 이 방법을 이용해 수많은 인어의 간을 기증받아오셨습니다요.”
“…….”
어쩐지 인어 시체가 방금 죽은 것처럼 부패하지도 않고 신선하더라니.
물속에서 생활하는 장비를 소유하는 자격으로 자기 간을 기증하라니.
이건 뭐, 완전 사채가 따로 없네.
“기증했다 치자. 왜 그렇게까지 해서 그 무구를 착용해야 하는데?”
“장군님들의 용궁제일무구를 착용하시면 저 수압이 깊은 심해에서조차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하십니다요. 회오리도 뚫을 수가 있겠지요.”
늙은 거북은 보기보다 용궁과 바다에 대한 지식이 아주 풍부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간을 기증하는 행위에 관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장비의 소유 자격을 얻는데 간을 기증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없냐?”
“허,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요?”
“어디서 오래 산 거북이로 탕을 끓이면 국물이 아주 그만이라던데.”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거북이를 보며 입술을 핥고 침을 꼴깍 삼켰다.
“너는 맛좋은 것이야?”
“아이구우! 살려주십시오오!”
늙은 거북이가 새파랗게 질려서는 엉금엉금 기어가며 도망쳤다.
도망치는 것도 정말 느려 터졌네.
‘하는 짓을 봐서는 사실이긴 한데.’
관자놀이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고민해 보자고. 회오리까지 많이 갈 것도 없으니, 딱 한 명만 여기다 간을 기증하면 되겠는 데.”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중에서 누구의 간을 빼야겠는가.
“장기기증은 역시 봉사적이고 헌신적인 헤르탄이 어울리는 것이야.”
“우리 중 가장 장기 적출에 능숙한 달인이라면 역시 블라이넨입니다.”
“회귀자도 몰살시키는 1회차의 장기라면 매끄럽게 적출할 수 있지.”
“얘기가 도대체 왜 그렇게 흘러?”
모두가 발을 빼니 시간만 걸린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에 카티에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그럼 여기서 가장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 기증하는 건 어때?”
셋의 눈길이 곧장 나를 향하였다.
“회귀를 못 하는 인간이란 가정에서 보자면 범철이 가장 무모합니다만.”
“나는 용이라 그렇다 쳐도, 내 노예는 정말 간이 너무나 큰 것이야.”
그리고 블라이넨이 쐐기를 박았다.
“너도 정상은 아니지.”
“……나도 알아, 인마.”
망할, 내 무덤을 파버렸군.
내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서 배를 갈라 간을 뽑아야 하나 고민할 때.
헤르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
“예?”
“이미 카티에가 기증해 버렸군요.”
그가 궤짝의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를 보십시오.”
[성녀 카티에 로넬야드의 간.]
[장비소유자격 대리인: 이범철]
“아무래도 그녀가 범철을 위해 미리 간을 적출하고 간 모양이군요.”
“…….”
그녀의 깊은 배려에 감탄한다.
광기가 얼마나 숙련되어야 절대 민폐 끼치지 않으며 미칠 수 있을까.
“내 이름을 써놨다는 것은…….”
“예. 범철만 오길 바라는 겁니다.”
그녀가 용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모조리 끝마쳐둔 것은 참 고맙지만, 어쩐지 앞일이 두려워지는군.
헤르탄이 내 표정을 보고 말했다.
“본디 악인들의 제국보다 비상한 미치광이가 훨씬 위험한 법이지요.”
그리고 그 비상한 미치광이가 내게 집착한다는 것은 애석한 사실이다.
***
나는 수정대궐의 인어장군들 시체에서 각기 장비를 훔쳐서 입었다.
인어들은 하반신 지느러미에도 특이한 장신구를 달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인간이라 그것은 입지 못했다.
[용궁에 간이 기증되어 용궁원산무구의 착용자격을 소유했습니다.]
[심해하장군의 비늘경번갑을 착용했습니다.]
[심해상장군의 아가미펜던트를 착용했습니다.]
[심해대장군의 백합귀걸이를 착용했습니다.]
[삼장군 무구세트의 세 종류를 착용했습니다.]
[수중저항이 크게 감소합니다.]
[바다와의 친화력이 오릅니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장비를 모두 입자 확실히 저 수압이 엄청난 심해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블라이넨을 돌아보았다.
“행운을 빌어줘.”
“명복을 빌겠어.”
……하여간 저 망할 자식.
헤르탄이 나에게 말했다.
“카티에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만약 카티에가 미쳐서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카티에를 쉽게 죽이려면 귓속에 이름을 속삭이며 안고 찌르십시오.”
“…….”
태연히 동료를 죽이는 노하우를 전해주는 그의 조언에 기운이 빠진다.
그나마 정상인(?) 퀸소히니베가 걱정스러워하며 내 머릴 쓰다듬었다.
“내 노예가 회오리에 빨려 죽게 되면 전부 그 성녀가 잘못한 것이야.”
“고마워. 그나마 너밖에 없다.”
“흥. 내 노예는 꽤나 소중하니 함부로 죽어 오지나 말라는 것이야.”
용궁의 결계 밖으로 나오자 오한이 들며 어두운 심해가 눈앞을 덮쳤다.
짜디짠 바닷물에서 눈을 뜨기 힘들었지만 수압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에서 숨까지 쉬어지다니. 과연 인어무구를 착용한 보람이 있군.’
저편의 거센 회오리 재앙을 향해서 헤엄쳐가며 나는 혼자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꺼림칙하기는 하다.
‘설마 그간 꿈에서 보았던 미래가 잠시 뒤에 실현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심지 굳게 나아갔다.
악몽 따위에 휘둘리지는 않겠다.
정해진 미래라면 내가 바꾸겠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힘들군.’
회오리에 파고들자 해류에 몸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헤엄은 힘겨웠다.
물보라가 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설수록 물살에 몸이 쓸렸다.
나는 회오리의 물살에 몸이 내쳐지지 않으려 애를 쓰며 헤엄쳐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문득 손끝에 물이 전혀 없는 지점까지 닿자 이윽고 난 튕겨 나갔다.
“크윽!”
바다 회오리의 한가운데.
모래와 부산물이 가득한 바닥.
이곳은 아무런 바람과 폭풍도 없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지점이다.
심지어는 어째선지 희박하지만 숨까지 쉴 수 있는 공기도 존재했다.
‘이런 곳에 카티에가 있다고?’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내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 실로 오랜만에 보는 소녀가 나를 보며 돌처럼 굳어 있었으니까.
“……대장.”
“카티에.”
내가 속삭이며 소녀를 껴안았다.
손아귀에 몰래 쥔 칼에 땀이 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