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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11화 (111/200)

나만 1회차 111화

해저도시 중심에 굳건히 세워져 있어야 할 수정대궐은 산산이 깨진 상태였다.

산호초와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석조건물은 무너지고 쓰러져 있다.

머릿속에 상상한 용궁은 전혀 없고 처참히 박살 난 폐허만 보일 뿐이다.

심지어 해저도시 뒤편에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까지 엿보인다.

‘저 회오리는 또 뭐지?’

헤르탄도 당혹한 기색이었다.

“이상하군요. 용궁이 이렇게나 벌써 망가질 이유가 없을 텐데.”

마차가 멈추고 문이 활짝 열렸다.

바닷물이 쏟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상쾌한 공기가 코를 스쳤다.

밖으로 나오자 산호초 가루로 이뤄진 땅이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햇빛도 없는데, 신기하게 밝군.”

맑은 공기를 위한 나무가 곳곳 보이고 심지어는 바람까지 불어댄다.

도시 전체에는 반구형 결계가 덮어져 있어 바닷물의 침입까지 막는다.

심해어의 그것과 비슷한 발광체가 가로등처럼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그래 봤자 이미 쑥대밭이지만.’

분명히 아름다웠을 해저도시는 완전히 휩쓸어지고 박살이 나 있었다.

블라이넨의 감상평은 이랬다.

“전쟁이라도 벌어졌던 것 같군.”

나도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니, 우리가 오기도 전에 누가 벌써 이렇게 깽판을 쳐 놓은 거야?

마차와 함께 헤엄쳐 온 늙은 거북이도 놀랐는지 입을 쩍 벌렸다.

“아이구우! 무슨 난리람! 내가 없는 새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요!”

용궁에 와서 그런가, 아니면 놀라서 그런가. 말투도 꽤 빨라졌네.

거북이가 저편에서 피를 쏟고 쓰러진 인어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정승님, 아니십니까요! 도대체 이게 뭔 난리입니까요?”

놀랍게도 하반신은 물고기인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용왕님께서 돌아가셨다……. 용궁은…… 쿨럭! ……멸망해 버렸고.”

“아이구우!”

거북이가 꺼이꺼이 곡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요. 우리 용왕님이 돌아가시다니요. 아이구우우!”

인어 정승이 쿨럭이며 입술 씹었다.

“그, 그녀가…… 우릴 몰락시켰다.”

늙은 거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누구입니까요?”

인어 정승은 그저 생각만 해도 무서운지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떨었다.

“서, 서, 성녀……!”

“성녀라고?”

내가 번뜩 고개를 들고 다가갔다.

“성녀라면, 설마 키가 작은 여자?”

“네놈은…… 육지의…… 생물…… 쿨럭! 그 성녀를…… 알고 있나?”

“대답해. 그 성녀는 키가 작고 흰 머리칼이 섞인 소녀였나?”

“작기는…… 하던데…… 머리칼도 새하얀 부분이…… 많긴 했지…….”

놀라운 사실이다.

카티에가 이미 용궁을 다녀갔다.

그것도 그녀가 여길 멸망시켰단다.

“어째서? 그 성녀가 왜 너희 용궁을 멸망시켰지?”

“제 나도…… 모르겠…… 으윽!”

인어 정승이 당장에라도 숨이 끊길 것처럼 힘겨워했다.

“알 수 없는 쪽지를 내게 남기고…… 그 성녀가 떠나가 버렸어.”

“쪽지? 그게 어디 있는데?”

“그건……! 커…… 어억!”

인어 정승은 차마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당황스러워하며 인어 시체를 내려보다가 가슴 옆에 종이가 엿보였다.

나는 곱게 꽂혀 있는 쪽지를 주워서 펼쳐보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장에게.

재회하면 대장부터 죽이겠어요. 나를 제일 늦게 찾고 있잖아요.〕

“…….”

***

“결국 카티에가 미쳐 버린 걸까?”

내가 일행에게 쪽지를 보여주며 심각히 물었다.

계획한 일정이 전부 틀어져 버렸다.

카티에가 우리가 오기도 전에 용궁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고, 날 죽이겠단 쪽지까지 남긴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행보의 그녀가 제정신일 거라고는 도저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헤르탄이 고개를 저었다.

“카티에는 원래 미쳐 있습니다.”

“…….”

“그러나 범철. 카티에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상합니다.”

“그 녀석이 머리가 좋다는 것은 충분히 압니다.”

“카티에는 그대가 죽자, 인류를 한 번 멸망시켰던 경험도 있습니다.”

“……예?”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블라이넨은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깊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헤르탄은 빠르게 정리했다.

“카티에가 멀리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불멸아귀가 서식하는 ‘천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용궁을 지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즉, 우리와 접선하기 위해서 이곳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예리하게 지적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이 마비될 만큼 미쳤다면 쪽지 따위는 절대 남기지 못합니다.”

헤르탄이 결론지었다.

“간략히 말해서.”

그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카티에는 그대에게 삐친 겁니다.”

“…….”

도대체 세상 어느 여자가 토라졌다고 금역 하나를 파괴시켜 버릴까.

***

우린 폐허로 변한 용궁을 걸었다.

이곳은 소규모 도시만 한 규모였으나 거리까지 모조리 박살 나 있었다.

늙은 거북은 쓰러진 인어의 시체를 볼 때마다 아주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구우우! 인어아가씨! 어려서부터 내 등딱지 짓밟고 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셨습니까요!”

“으어어! 산호사육사 덕수 아닌가! 만날 날 잡아서 몸보신 하겠다고 비웃더니 어찌 나보다 먼저 가는가!”

“이런! 이러어언! 설마 내 코에 나뭇가지를 처박고 놀았던 자네까지!”

내가 어이가 없어 거북이를 봤다.

“하나같이 널 괴롭히고 천대한 놈들인데 죽었다고 눈물이 나오냐?”

“그래도 죽음은 슬픈 겁니다요오.”

늙은 거북이가 꺼이꺼이 울었다.

저놈은 자기가 평상시 괴롭힘당하면서 화낼 줄도 모르는 호구로군.

“그 성녀, 아주 대학살을 벌였군.”

블라이넨이 시체를 넘으며 말했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카티에가 미쳤다고 아무나 막 죽이는 녀석은 아니라고 보는데.”

퀸소히니베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그 미친 성녀가 어딜 봐서 그렇게 투철한 도덕심이 있었던 것이야?”

“도덕은 없어도 머리가 있으니까.”

헤르탄이 의외란 얼굴로 날 봤다.

“예. 그녀는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해서 미리 진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한 짓이라고요?”

“어차피 그녀가 아니었어도 용궁은 우리의 손에 무너졌을 테니까요.”

어라, 그건 제법 충격적인 말이군.

퀸소히니베가 놀라서 물었다.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나 멋진 도시를 무너뜨렸을 거란 것이야?”

“일족에서 쫓겨난 악한 인어들이 건설한 제국이 바로 용궁입니다.”

헤르탄이 시체들을 가리켰다.

“마차에서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 인어들은 실수로 들어왔거나 용궁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온 인간을 숙청하 거나 먹어버립니다. ‘천지’에 가기 위해선 이만한 수준은 아니어도 용궁을 붕괴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용궁의 도시에 쓰러진 심해민들의 시체는 모두 인어들이었다.

나는 뒤늦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용궁에 사는 인구가 전부 인어들뿐인데 땅과 산소가 있군요?”

“인어들이 항시 물속에만 산다는 것은 동화가 만들어낸 편견입니다. 그들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빛을 맞으며 땅을 걸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용궁은 낮에는 빛과 공기가 가득하고, 밤에는 물과 어둠이 찹니다.”

아하, 그래서 우리가 활동하기에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것이로군?

그런데 인어들은 하반신이 꼬리밖에는 없던데 낮에는 어떻게 걷는담.

블라이넨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밤 시간대가 되면 용궁은 바닷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건가?”

“아니요. 그것은 괜찮습니다.”

헤르탄이 결계의 외관에 배수로처럼 보이는 구멍들을 가리켰다.

배수관 근처의 난간에는 갑옷을 입은 인어들의 시체가 가득하였다.

“본래 배수로를 관리하는 인어병은 우리가 용궁에서 활동하기 위해 가장 먼저 처치할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카티에가 미리 전멸시켰군요.”

내가 오기 전에 카티에가 깽판을 아주 제대로 쳐 놓긴 한 모양이군.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이 켕긴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카티에가 결코 약한 녀석은 아닙니다만, 용궁 전체를 궤멸시킬 힘까지 있었습니까?”

“저도 그것에 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녀가 어떻게 용궁을 멸망시켰는지 정보를 수집해 봐야겠습니다.”

헤르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문득 발에 뭔가 차였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인 줄 알았는데 얇은 쪽지가 묶여져 있었다.

‘이건…….’

내가 설마 하면서 쪽지를 폈다.

어찌나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는지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다.

〔진심으로 보고 싶은 대장에게.

첫 쪽지와 20분 도보거리. 지금쯤 대장은 내가 어떻게 용궁을 멸망시켰나 궁금해하고 있을 거예요. 앞으로도 이런 쪽지가 아주 많아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본다.

하지만 당연히 폐허가 된 용궁에는 우리 말고는 전부 시체들뿐이었다.

‘내가 지금쯤 이곳을 지날 거라고 정확히 예상하고 쪽지를 쓴 건가?’

카티에의 영민함에 혀를 내두른다.

일행에게 쪽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보아하니 카티에가 쪽지를 꽤 남긴 것 같습니다. 이것만 모은다면 그녀의 뒤를 쫓을 수 있겠는걸요. 물론 카티에가 남긴 쪽지를 다 찾으려면 폐허를 샅샅이 뒤져야겠지만.”

그러나 일행들의 표정은 굳어 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헤르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철. 뒤편에도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쪽지를 받아들고 뒤편을 살펴 보자 오싹한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여도 돼요. 내 쪽지는 항상 대장의 발걸음이 닿는 그곳마다 있을 거예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회귀자라니,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

주춧돌의 사이, 기와의 아래편, 인어병의 비늘 틈, 시체 겨드랑이까지.

나는 용궁을 쏘다니며 어디서든 접혀있는 쪽지를 주울 수 있었다.

〔대장은 나 없이 무사히 지내고 있을까. 나는 수없이 걱정했어요.〕

〔부디 내가 못 본 새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벌이지 않았길 바라요. 낯선 여인과 자거나 함부로 바지 벗고 다리를 벌리거나 새 여자를 일행에 받거나 하는 짓 말이죠.〕

〔대장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지만, 효율적으로 행동했어요. 그래서 인어를 다 죽였어요. 잘했죠?〕

〔내가 어째서 이렇게 쪽지를 써대는지 아나요.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리워 자살할 것만 같아서예요.〕

〔지금 딱 보고 싶은 만큼만 대장을 써보겠어요. 대장, 대장, 대장, 대장, 대장, 대장, 대, 장, ㄷㅐㅈㅏㅇ…….(이후의 글씨는 눈물 자국에 뭉개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대장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서 난 지금도 눈물을 흘려요. 정 못 견딜 것 같은 날은 속옷 벗고…….〕

난 거기까지 읽고 쪽지를 태웠다.

“지금 카티에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녀한테는 내가 필요하겠어요.”

“하지만 쪽지에서부터 그 못된 성녀가 내 노예를 죽인다 한 것이야.”

평소 카티에랑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퀸소히니베가 의심스러워했다.

“제정신이 아닌 성녀인데 내 노예가 무사할 거란 보장 없는 것이야.”

“제정신이 아닌 것치곤 쪽지를 뿌려놓은 동선이 너무 치밀하던데.”

내가 정보를 줍겠다고 이동한 것도 아닌데 가는 곳마다 쪽지가 있었다.

심지어 쪽지의 갈피와 순차도 내가 가는 순서대로 딱 정리되어져 있다.

대체 날 얼마나 잘 알면 행동반경을 이렇게 완벽히 예상할 수 있지?

물론 카티에가 완전기억능력을 가진 회귀자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어찌 됐건 몇십 통이나 되는 쪽지를 주운 나는 잠시 이동을 멈췄다.

‘어차피 카티에가 내 행동을 예측하고 가는 곳마다 쪽지가 있다면.’

뒤따라오던 헤르탄이 물었다.

“예상가는 곳이 있습니까, 범철?”

내가 저편의 다 쓰러져 버린 수정 대궐의 잔해더미를 가리켰다.

“예. 마지막 쪽지를 찾으려면 수정 대궐. 저곳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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