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09화
“……너는 내가 무슨 도살장 돼지로 보이냐?”
“그럼 넌 내가 백정으로 보이나?”
블라이넨은 나와 떨어진 곳에 서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먹구름이 껴서인지 바다도 험상궂다.
그런 바다를 정면으로 보는 그녀가 불굴의 영웅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내가 턱을 괴면서 툴툴거렸다.
“내 몸 어디가 잘 썰리고 잘 베이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냐?”
“너의 신체에서 연한 육질과 딱딱한 육질은 대충 구분할 줄 아니까.”
“그럼 질문이다. 나는 주로 어디 근육이 잘 뭉쳐서 둔해지곤 하지?”
“어깨와 목 주위.”
“정답. 좀 주물러봐라.”
“…….”
블라이넨이 가볍게 다가오더니 나의 목을 밀어서 바다에 빠뜨렸다.
풍덩!
스스로의 생존력에 감탄이 나온다.
그나마 수면이 얕고 파도가 바닷가로 밀리는 게 아니라면 죽었을지도.
나는 목숨을 걸고서 바다를 헤엄쳐서 해안가의 절벽 위에 올라섰다.
블라이넨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실수였어. 그냥 목 주위만 때려주려다가 힘 조절을 못 해…….”
나는 블라이넨을 정면으로 걷어차서 파도치는 겨울 바다에 빠뜨렸다.
풍덩!
적발이 풀어 헤쳐진 블라이넨이 물귀신처럼 젖어서 차갑게 돌아왔다.
“…….”
“실수였어. 살해한다는 게 그만.”
내가 손가락을 튕겨서 불꽃을 키웠고, 그녀는 쌍검을 뽑아 들었다.
“싸울까.”
“찬성해.”
“죽일까.”
“부정해.”
우리 둘이 서로를 한참 노려봤지만, 먼저 기세를 거둔 건 그녀였다.
“됐어. 내가 먼저 빠뜨렸으니까.”
블라이넨이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나도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나와 그녀라지만, 이런 점은 마음에 든다.
‘개인을 위해서 행동하지만, 결코 이기적이지는 않아.’
올바른 개인주의의 표본을 블라이넨을 통해서 종종 배우는 기분이다.
우리 둘 다 흠뻑 젖었기에 나는 마법으로 따스한 불가를 만들었다.
블라이넨은 주저하지 않고 말없이 불가 앞에 앉아서 불기를 쬐었다.
“앉으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한테 허락 맡았어. 전생에서.”
“거짓말. 전생이라도 그랬을 리가.”
“눈치가 빠르군. 앉아도 되나?”
“이미 앉아놓고서 뭘 물어보냐.”
불가가 타닥인다.
우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몇 살이냐?”
“살아온 세월은…….”
“아니, 그것 말고 신체 나이.”
블라이넨이 불꽃의 온기에 젖은 손을 쓰다듬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29살이다.”
“나랑 동갑이네. 너도 보기와 다르게 먹을 만큼 먹었군.”
“그건 왜 물었지?”
“우리, 화해하고 친구나 맺을까?”
블라이넨은 대답이 없었다.
나도 확실히 정상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가장 많이 죽여 본 여자에게 친구를 맺자는 소리나 해대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딴 개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녀가 인간으로서 제법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겠지.
오래간 침묵한 뒤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야 지겨울 테니까. 동갑끼리 여러 삶에 걸쳐서 매번 싸우는 것도.”
내가 그녀의 표정을 훑다 웃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이런 제안을 한 게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
블라이넨은 날 보지 않고 말했다.
“우린 결코 친우가 될 수 없어. 그게 내가 깨달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대충은 안다.
난 전생을 모르지만, 그녀는 내게 죽고 날 죽여 온 기억이 선명하다.
제아무리 지난 일을 잊는다고 해도 그런 과거가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왜, 원래 정반대인 놈들끼리 금방 미운 정이 쌓인단 말도 있다던데.”
“난 아니야. 널 너무 많이 죽였어.”
블라이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역시 나를 너무 많이 죽였고.”
“나는 회귀를 멈추는 게 목표야.”
내가 불가를 바라보며 중얼댔다.
“회귀가 멈추면 사람들은 최소한 미친 짓은 좀 덜 하겠지. 자살하거나 복상사를 당하려 하지도 않을 테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전생에서부터 날 죽이려는 미치광이 하나쯤은 줄이고 싶다.”
그러다가 흠칫하며 그녀를 봤다.
“아, 방금 그것도 전생에서 들어본 말이었냐?”
“아니.”
블라이넨은 날 보고 조금 웃었다.
“처음 들었어.”
막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을 때 헤르탄과 퀸소히니베가 다가왔다.
“범철. 악천후 때문에 놓쳤던 용궁으로 향하는 빛을 찾아냈습니다.”
“벌써요? 참 빠르네.”
내가 먼저 일어선다.
퀸소히니베가 불을 쬐던 나와 블라이넨을 번갈아 보고는 갸웃거렸다.
“역시 두 사람은 친한 것이야?”
“적어도 나는 그래보고 싶어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블라이넨은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걸었다.
***
“용궁을 가본 적 있습니다. 아마도 두 번. 그리 많지 않은 횟수이지요.”
헤르탄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 인어가 살아가고 깎아지른 산호초가 장엄하지요.”
“말로 듣기만 해서는 관광명소가 따로 없을 것 같은데요?”
“용궁이 괜히 금역인 것은 아닙니다. 생존이 굉장히 버거운 곳이죠. 그곳에 가면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파도치는 해수면을 바라본다.
용왕의 손거울에서 빠져나온 빛은 바다 저편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
용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차가운 바다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용궁까지 도달하는 여정만 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 여러 번 죽었고 실질적으로 용궁에 도달했던 것도 두 번뿐이었습니다.”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용궁을 경험한 헤르탄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용궁으로 향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뭡니까?”
헤르탄이 검지를 폈다.
“첫째, 종족을 바꾸는 것.”
“종족을 바꾼다고요?”
내가 놀라서 묻자 헤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색대륙 북측 해안가 폐허를 살피면 상반신을 물고기로 바꾸는 저주서가 있습니다. 이를 역이용해 우린 용궁을 헤엄쳐 갈 수 있습니다.”
퀸소히니베가 얼굴을 찡그리며 질색했다.
“물고기 대가리라니. 고귀한 용의 자존심이 분명히 구겨질 것이야.”
당연히 나도 내키지는 않는다.
상반신이 물고기가 되면 그거 물 밖에서 숨은 쉴 수 있으려나.
“두 번째는요?”
헤르탄이 중지를 폈다.
“둘째,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면 용궁에 걸어갈 수 있습니다.”
블라이넨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바다를 가르는 건 항상 이놈과 붙어 있는 성녀나 가능한 일 아닌가?”
“맞습니다. 아쉽게도 일행에 카티에가 없으니 불가능한 방법이지요.”
카티에가 바다도 가를 수 있다고?
성녀가 그렇게 엄청난 기적까지 보유를 했다니, 정말로 놀랍군.
헤르탄이 마지막 약지를 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걸로 갑시다.”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만.”
“보통은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면 마지막 것이 제일 그럴듯하던데요?”
“그럴듯한 추론입니다만, 범철. 이 세 번째가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혹독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뭔데 그럽니까?”
헤르탄이 진지하게 말했다.
“셋째로, 거북을 잡아야 합니다.”
“거북이라고요?”
앞엣것들에 비하면 꽤 평범한데?
그러나 헤르탄을 고개를 저었다.
“그 거북에게 손거울을 보여주면 우리를 용궁까지 안내할 겁니다. 다만 그 거북은 돌풍이 몰아치는 지대를 오갑니다. 위험한 해역이지요.”
돌풍이 몰아치는 해역이라니.
그래도 생선 대가리보다는 낫겠지.
“어차피 가능한 방법은 하나군요.”
내가 큰 생각 없이 내뱉었다.
“세 번째로 가죠.”
***
“아니! 제기랄! 빌어먹을! 망할!”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쏟아지는 빗소리와 천둥에 묻혀 버렸다.
젖은 머리칼을 확 넘긴 퀸소히니베가 내 허리를 붙잡으며 악을 썼다.
“이딴 곳에서 죽게 되면 평생토록 내 노예를 원망하겠다는 것이야!”
“얼마든지 원망해! 저승에 우리가 앉을 술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는 것이야!”
돌풍이 몰아치는 해역에서 우리 넷은 쪽배를 타고 괴물과 대적한다.
난 악을 썼고, 퀸소히니베는 요동치는 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를 붙잡았고, 헤르탄은 선체의 균형을 잡았고, 블라이넨은 한숨 쉬었다.
“망할.”
***
이 긴급하게 돌아가는 재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전으로 가볼까.
“그 거북은 겁이 많아서 큰 배를 띄웠다간 근처에 오지도 않습니다.”
헤르탄의 그 말이 화근이었다.
돌풍이 몰아치는 해역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배를 구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런 곳에는 가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봤자 회귀할 건데, 위험한 해역에 왜 못 가겠단 겁니까?”
“허? 이보쇼. 세상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소. 안락한 죽음, 끔찍한 죽음. 나는 죽어도 안락하게 죽고 싶지, 그딴 지옥에서 죽고 싶진 않소.”
뱃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내뱉으며 우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거기다 작은 배로 가야 한다 말하니 미친놈으로 보는 시선은 덤이었다.
헤르탄이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은 우리끼리 가야겠군요. 제 항해술은 그저 기본뿐입니다만, 각 해역의 주된 항로만은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쪽배를 타야만 했다.
그것도 네 명이 앉기에도 비좁은.
지금 생각하니 가히 미친 짓이다.
“해역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반나절입니다. 그리 멀지 않아요.”
그만한 거리라면 쪽배라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승선하였다.
해가 질 즈음, 먹구름이 꿀렁이며 차디찬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풍의 해역에 진입했습니다.]
[사시사철 비바람이 몰아치고 복잡한 해류가 항로를 어지릅니다.]
[유령선, 식인어가 출몰한다는 괴담이 무성한 음험한 지역입니다.]
돌풍의 해역! 한겨울에도 장마처럼 비가 내린다.
“여기는 빗물이 얼지도 않나? 당연히 눈이 내려야 하는 것 아니야?”
쪽배를 적신 빗물이 낮은 기온에 조금씩 얼고 극심한 추위가 맴돈다.
“이곳은 아주 추운 것이야.”
퀸소히니베마저 추위를 느낄 지경!
나는 양손에 마나를 집중해서 뜨거운 불길을 배의 위에다가 떠올렸다.
차가운 빗물에도 꺼지지 않는 불덩이들이 쪽배를 환하게 밝혔다.
헤르탄이 불을 올려보며 감탄했다.
“정말 따스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마법의 경지가 늘어가는군요. 범철.”
“그야 매일 연습하니까요. 하여간 거북이를 잡으려면 뭘 해야 하죠?”
“이곳은 우리를 용궁으로 안내해 줄 거북이 자주 지나는 구간입니다.”
그가 턱을 쓸었다.
“평소라면 그물을 써야 하지만, 그건 몇 달이 넘도록 걸릴 겁니다. 범철의 낚시 재능을 믿어보겠습니다.”
“아무렴요.”
내가 척 낚싯대를 들었다.
이번에 쓸 미끼는 무려 메밀묵!
‘인간 외의 모든 짐승이 맛있게 느끼는 묵이라면, 거북이도 똑같겠지.’
당연히 말랑한 묵은 바늘에 꿸 수 없으므로 잔뜩 말려서 가져왔다.
말린 묵 조각을 바늘에 걸다가 나는 어쩐지 기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오늘 낚시 운이 영 별로기는 했는데, 설마 별일이야 없겠지?”
그러자 세 사람이 말했다.
“쪽배로 이토록 거친 해역에 오래 머물다가는 체력이 빠질 겁니다.”
“헤르탄 말에 동조하는 것이야. 분명 맛있는 거북이가 잡힐 것이야.”
“체력이 빠지는 것은 괜찮지만, 불안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하기야 내가 걱정이 너무 심했나.
낚시찌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휙 던진다.
그런데 낚싯바늘을 담그자마자 귀신같이 끔찍한 그림자가 몰려왔다.
[초대형 괴물이 낚였습니다!]
[돌풍해역의 포식자, 심해아가리가 먹잇감들에게 포효합니다!]
[과업: 120회차를 통틀어 4,258명의 회귀자가 낚은 어류입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나.
“으억!”
내게 낚인 건 징그럽게 눈알이 우둘투둘 달린 식인 거대물고기였다.
어찌나 크기가 거대한지 쪽배의 수십 배는 넘어가 버리는 초대형 규모!
‘아니, 어떻게 재수 없게 첫 입질부터 무슨 심해괴물 같은 게 낚여?’
남시에 재능 있다고 좋아했는데 낚이는 것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희귀한 것만 척척 낚아 올리다 보니 최악의 대어조차 올라오는 것이다.
‘제기랄. 이렇게 위험한 해역서 내가 하는 낚시는 SSS급 낚시재능이 아니라 SSS급 괴물소환재능이겠어.’
그래서 결국 우린 심해아가리와 조우해 치열한 혈투를 벌이는 것이다.
“야, 좀 떨어져 봐! 날면 되잖아!”
“너무 기류가 극심해 함부로 날지도 못하겠다는 것이야! 꺄아악!”
퀸소히니베가 넘어져 불안정한 나의 허리를 놓치고 뱃머리를 잡았다.
빗물과 천둥에 목소리가 파묻히기 쉬워 각자 아주 크게 소리쳐야 했다.
헤르탄이 괴물에게 부딪쳐 뜯긴 구멍을 잡동사니로 막다가 소리쳤다.
“서둘러서 배의 무게를 줄여야 합니다!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요!”
이런 망할! 배가 침몰하면 죄다 개죽음이다.
결국 슬픈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
“우린 결국 친구가 될 수 없겠다.”
내가 애달프게 소리치며 곧바로 그녀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접근했다.
“사랑한다. 블라이넨!”
“아니, 내가 더 사랑해.”
우리는 서로를 배에서 떨어뜨리려다가 결국 둘 다 바다에 빠졌다.
풍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