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08화
“13개네.”
그 짧은 새에 어떻게 구슬의 숫자를 헤아렸는지 블라이넨이 말했다.
밤하늘에 별처럼 떠 있는 13개의 구슬은 시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통은 구미호마다 하나씩만 가진 여우구슬을 무려 13개나 지녔다니.’
회귀자들이 얼마나 복상사하려 득달같이 달려들었기에 저렇게 많아?
헤르탄도 놀라서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만한 숫자라면…… 청색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강자겠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꼬리 수와 여우구슬은 곧 구미호의 힘의 척도를 뜻하니까요.”
대륙에서 손꼽힐 만한 수준이라니.
용궁에서 간을 가져와 구미호를 여정에 참여시킬 이유가 늘어난 셈이군.
“정기를 풍족하게 갈취하니, 이 귀한 여우구슬로 목걸이까지 꿰겠어.”
구미호는 한숨을 폭 쉬고 백야에게 빛나는 여우구슬 하나를 내려줬다.
“받으렴. 어미가 주는 선물이란다.”
“캬앙!”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백야는 여우 구슬을 장난감처럼 깨물며 놀았다.
[백야가 583인의 녹진한 정기가 깃든 여우구슬을 획득했습니다.]
[백야의 능력치가 10씩 증가하며, 성장력이 크게 증진되었습니다.]
[백야가 ‘축지법’을 익혔습니다!]
[백야에게 새로운 꼬리가 돋아납니다.]
백야의 꼬리가 일순간 빛나더니 갈라지듯 새로운 꼬리가 생겨났다.
“캬앙?”
백야가 두 개로 늘어난 자기 꼬리를 신기해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구미호는 흐뭇하게 웃었다.
“구슬을 더 많이 주고 싶지만, 아직 너무 어려 감당할 수 없겠구나.”
초화는 그런 백야를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백야는 좋겠다. 선물도 받고.”
애완수가 헤르탄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내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아빠. 나는 선물 없어?”
“어쩌지? 잘난 몸뚱이뿐이라서.”
농담을 던지자 초화 머리에 달린 꽃봉오리가 실망하듯 쪼그라졌다.
“……아빠는 늘 농담으로 넘어가.”
윽, 괜히 가슴이 찔리는걸.
[초화가 주인에게 실망했습니다.]
[꽃봉오리 개화가 늦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초화의 머리에 달린 저 꽃봉오리는 정체가 뭐지?
호감도와 관계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저기서는 나중에 뭐가 피어나려나? 초화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누가 그러냐?”
“……아빠. 이리 와봐. 얼른.”
손짓해 걸어가자 초화가 폴짝 뛰어올라 나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으억!”
“……아빠 기력이 제일 맛있어.”
“……그래, 많이 먹고 빨리 커라.”
안면에 뿌리가 얽혀 기력이 빨리는 데 익숙해진 내가 두려울 지경이다.
내게서 한참이나 기력을 빨아먹은 뒤에야 초화는 만족해서 떨어졌다.
“……완전 배불러.”
으윽, 현기증.
구미호가 초화의 빵빵해진 배를 내려다보면서 킥킥댔다.
“아주 멋진 드라이드네? 백야만큼 애정을 담아서 보살펴줘. 주인에게 아주 도움 되는 꽃을 피울 테니까.”
“……나는 도움 많이 될 거야.”
초화가 가슴을 쭉 펴려다 배가 어찌나 볼록한지 뒤뚱대다 넘어졌다.
하여간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구미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백야와는 어쩌다가 헤어지게 된 거지?”
“내 새끼 이름을 백야라고 지어줬구나? 그것도 참 괜찮은 이름이네.”
“……네 새끼 이름도 안 지었냐?”
“어디 짐승이 자기 새끼 이름 지어 부르는 것 본 적 있니?”
구미호는 기묘한 논리로 반박하며 백야를 쓰다듬었다.
“함께 산책하던 중에 새끼를 잃어 버렸어.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지. 그래서 사찰에서 조언을 줬던 거고.”
“감사하면 그냥 바로 협력하지?”
“어디 그럴 수야 있겠니? 너희가 믿음직한 인간인지 어떻게 알겠어?”
구미호는 환관무사 시체 중 하나의 머리를 발로 척 밟았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면 죽게 될 거야. 지금 여기 있는 놈들처럼.”
아까부터 맴돌던 의문을 표했다.
“저놈들, 복상사할 수 없을 텐데?”
“내가 지닌 여우구슬이 몇 개인지 못 봤니? 무력으로도 충분하던걸.”
구미호가 보기와 다르게 굳건한 팔뚝을 두드렸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여우구슬만 13개이니.’
왜 구미호가 복상사로만 인간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까.
‘고궁의 전설이라던 환관무사들이 어쩌다가 맥없이 죽었는지 알겠군.’
어찌 됐건 구미호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용왕의 간을 가져와야만 한다.
난 절차는 확실히 했다.
“우리도 신뢰가 필요한데. 네가 간만 먹고 튀어버릴지 누가 아냐?”
“신뢰? 그거야 여기에 있지.”
구미호가 백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양손으로 잡아 내밀었다.
“카아앙.”
“내 새끼를 너한테 맡기겠어. 이것보다 충분한 신뢰가 더 필요할까?”
나는 그 소리에 제법 놀랐다.
“감동적인 재회 같던데, 벌써 이별하려고?”
“이 아이가 너와 함께 다니는 걸 더 좋아하니까. 새로운 모험과 찬란한 여행길을 막는 부모가 되진 않겠어. 물론 네가 함부로 내 새끼를 막 보살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상당히 이해심 많은 어머니로군.
하긴 짐승이니까 본래 부모 밑에서 떠나도록 강하게 키우는 걸지도.
구미호가 하품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만 또 이동해 볼까.”
“야, 잠깐! 간을 들고 나오면 너를 어떻게 찾아 전달해야 하는 건데?”
“용왕의 간을 하늘 높이 던지고, 어디서든 ‘미별’이라고 외쳐. 그게 내 이름이거든. 참 부르기도 쉽지?”
구미호가 싱긋 웃으며 뛰어오르자 바람과 함께 형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럼 다음에 봐. 청색대륙의 회귀자가 모시는 한 번 사는 신이시여.”
블라이넨이 구미호가 사라진 자리, 발자국 남은 흙바닥을 보며 말했다.
“구미호는 언제나 신출귀몰하군.”
“복상사 경쟁도 치열하고 회귀하며 좀처럼 볼 수 없는 영물이니까요. 직접 마주한 것은 오래간만이군요.”
무색한 두 회귀자가 감상평을 나눌 때,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쿠, 쿨럭!”
환관무사의 시체 중 하나가 몸을 들썩이더니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내가 놀라서 황급히 다가갔다.
“가울? 너, 살아 있었냐?”
환관무사 무리의 대장 가울.
그러나 가울은 다가온 날 보며 두려움과 놀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이 버, 범철 님이셨다고?”
내가 미처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헤르탄이 먼저 반응했다.
“방금 우리의 대화를 들었나 보군.”
“구, 구미호를 포획하려고 죽은척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설마 다, 당신이 범철 님이었다니……!”
이런, 아까 얘기를 엿들었나 보다.
뭐, 이놈은 신식회도 아니니까 그렇게 문제 될 것까지는 없겠지?
그때 헤르탄이 내 어깨를 밀쳤다.
“당장 죽여야 합니다. 비키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가울을 죽이려 한다.
예상 밖의 태도에 내가 놀랐다.
“왜 그럽니까, 헤르탄?”
그는 대답 없이 가울의 목을 굵은 손으로 낚아채 조여 죽이려 했다.
그러나 가울 쪽이 약간 더 빨랐다.
“크읏!”
재빠르게 그가 몸을 구르며 부적을 찢자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기랄.”
헤르탄이 드물게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범철. 대형 종파에 그대의 정체가 알려지게 되면 몹시 곤란해집니다.”
“예?”
눈살을 찌푸리며 엘프 고을에서 범파를 만났던 일에 관해 설명한다.
그러자 헤르탄이 기막혀했다.
“이미 범파에게도 그대의 정체가 탄로 난 상황이었단 말입니까?”
“그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짜증 냈다.
“하여간 얼른 말해 봐요. 평소답지 않게 왜 그렇게 호들갑입니까?”
헤르탄이 한숨을 쉬었다.
“저와 카티에가 자리를 비운 탓입니다. 미리 경고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번 회차가 꼬여 버렸군요.”
“무슨 소리입니까? 이번 회차가 꼬여버리다니요?”
“범파와 철파. 두 대형 종파 교주들이 범철의 위치를 파악하면 우리의 여정이 곤란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둘은 회귀할수록 강해지는 ‘거물’이자, 범철의 ‘수제자’입니다.”
“그 두 교주가 내 제자였다고요?”
“예. 꽤나 먼 전생의 일이지만요.”
회귀계 거물이라면 멸살군주나 창천의 여제만큼 강하다는 의미인가?
거기다 내가 기억이 없는 전생에서 가르쳤던 두 명의 수제자라니.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두 놈이 그렇게 위험합니까?”
“범파 교주는 그대를 수없이 강간했었고 철파 교주는 그대의 사지를 절단하고 살해한 전과가 있습니다.”
……뭐, 그딴 수제자들이 다 있어?
***
“야, 상의 좀 입어라.”
“땀에 젖으면 거슬리는데.”
“지금 시야에 거슬린다고.”
“네 눈을 신경 썼다면, 애초에 벗지를 않았겠지.”
현명한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고 낚싯대 바늘 끝에 미끼를 달았다.
한적한 겨울 바다에서 울리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평안하게 적셔준다.
내가 해안가 절벽서 때아닌 겨울 낚시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전생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 자신을 가장 오래 섬겨온 회귀자와 72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대기시간이 만료되어, 전생의 돌이 두 번째 과업을 부여했습니다.]
[그 어떤 회귀자도 낚아보지 못한 어류를 낚으십시오.]
[동행하는 일행이 낚아 올린 어류도 획득 목표에 함께 가산됩니다.]
‘딱 바닷가에 오자마자 낚시에 대한 과업이 내려지다니.’
전생의 돌이 내리는 과업은 환경이나 상황에도 영향을 받는 걸까?
그나마 낚시의 재능을 갖춰서 망정이지,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다.
‘몇 천 년 넘게 살아온 회귀자들도 낚지 못한 물고기가 어디 흔해?’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가 낚싯바늘을 거친 바다에 던졌다.
미끼가 달린 낚싯바늘이 수면에 퐁당 빠지자마자 곧장 입질이 오셨다.
팽팽!
SSS급 낚시재능!
내가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대어가 알아서 미끼를 물려고 헤엄쳐 온다.
손에 착 감기는 강한 느낌을 봐선 엄청난 대어가 문 것이 분명하다.
엘프 고을에서 구매한 달빛 낚싯대는 어지간해선 줄이 끊기지 않았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무거워?’
내가 이를 꼭 깨물고 있자 칼을 수련하던 블라이넨이 곁눈질했다.
“도와줘?”
“됐어, 인마.”
나는 숨을 몰아쉬고 단숨에 팽팽한 월척을 낚아 올렸다.
“이야앗!”
촤아악!
바늘에 꿰여서 올라온 것은 전혀 기대에도 없던 거대한 고물 궤짝.
궤짝을 열자 종잇조각이 있었다.
[고대해적선장이 숨겨놓은 보물지도의 12번째 조각을 낚았습니다.]
[몹시 놀라운 발견입니다! 모든 해역을 아우르는 업적이 될 수 있으며, 실력 있는 고고학자라면…….]
문구를 읽지도 않고 던져 버린다.
평범한 낚시꾼이라면 히든 피스를 딱 보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설레했겠지만, 난 한숨부터 나왔다.
‘제기랄, 또 허탕이네.’
지금까지 내가 낚아 올리며 곁에 쌓아둔 잡동사니는 대충 이러하다.
보물지도, 유령선장 고서, 왕의 유서가 담긴 병, 코달타 해역의 고대 창 조각을 찾는 순은 나침반 따위.
특히 보화나 유품을 찾는 지도는 하도 많이 낚아서 지겨울 지경이다.
‘아니, 물고기나 낚이라고.’
확실히 진귀한 아이템들인 것은 맞지만, 지금 낚아야 할 것은 어류이다.
낚시재능이 너무 과해도 문제로군.
하기야 이런 악천후가 치는 겨울바다에 물고기가 낚이긴 쉽지 않겠지.
“역시 날씨가 문제야.”
낚시꾼의 흔한 변명을 중얼대며 나는 다시금 낚싯대를 던졌다.
‘앞으로가 걱정이군.’
두 대형 종파에 나의 정체가 탄로 나버린 것은 솔직히 위험한 상황이다.
나에 대한 단서를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내 위치를 추적하려 들겠지.
‘전생에서 나를 수없이 강간해 봤던 제자와, 사지를 절단했던 제자라니.’
나를 신봉하는 종교의 교주인 것도 모자라 그런 미친 행위를 했었다니.
분명히 보통의 회귀자보다도 훨씬 더 미쳐있는 녀석들이 분명하다.
낚싯대 쥐면서 한숨이 푹 나온다.
‘제기랄. 평안히 좀 살겠다는데 뭔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냐.’
때마침 땀을 촉촉이 흘린 블라이넨이 숨을 몰아쉬며 검을 거두었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어도 그녀 주위로만 다가가면 꽤 따뜻하겠는걸.
블라이넨이 내 등을 손가락으로 짚고는 대충 간격을 재면서 말했다.
“여기가 유독 연하고 잘 썰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