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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07화 (107/200)

나만 1회차 107화

하필이면 일행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조의 위험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러나 다행히 내 불안은 틀렸다.

주위의 뜨거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헤르탄은 내 사타구니만 살폈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요.”

그가 보는 사타구니에 아홉 개의 꽃이 만개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저런 게 있었지?

“구미호가 새긴 증표입니다. 범철을 찾아온 밤에 남겨놨던 거겠죠.”

“하지만 바지를 갈아입을 때 저런 문신을 봤던 기억은 없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겁니다.”

헤르탄은 스스로의 배낭을 뒤지더니 맑은 액체가 든 물병을 열었다.

“헤르탄, 그건?”

“성수입니다. 혹시나 해서 황색대륙에서 미리 챙겨왔습니다.”

그가 성수를 내 사타구니에 쏟아내자 구미호 증표가 깔끔히 지워졌다.

“됐습니다.”

헤르탄이 얌전히 손을 떼며 물러갔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퀸소히니베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참 아쉽게 된 것이야.”

“뭐가, 인마.”

내가 바지를 추스르며 핀잔 줬다.

헤르탄이 나에게 물었다.

“안개를 들이마셨을 때 정신이 몽롱하고 얼굴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예. 확실히 그러더군요.”

“분홍색 안개는 구미호의 증표를 가진 자가 마시면 병에 걸립니다.”

내가 식은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무슨 병 말입니까?”

“바로 상사병입니다.”

“…….”

웃고 싶었지만 진지한 그의 태도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가다 그쳤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찢어지죠. 위험합니다.”

“상사병은 마음의 병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마음대로 건다고요?”

“구미호는 생물에게 정신교란을 걸 수 있으니까요. 강력한 영물입니다.”

초화가 블라이넨을 잡아당겼다.

“……상사병이 뭐야?”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아픈 병.”

“……엄마는 걸려봤어?”

“나는 네 엄마가 아닌데.”

“……사랑을 해본 적이 없구나.”

“…….”

과연 천하의 블라이넨조차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초화의 순수함을 보라.

“일단은.”

블라이넨이 담뱃대를 훅 빨았다.

그녀가 담배 연기를 뱉자 사방의 기분 나쁜 달콤함이 조금 옅어졌다.

“분홍색 안개가 흐른다는 것은, 구미호가 확실히 이곳에 있단 건데.”

“그렇습니다. 우선 추적에 관해서는 저보다 블라이넨이 앞서니…….”

헤르탄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려 할 때, 갑자기 백야가 크게 내짖었다.

“컁!”

백야가 갑자기 독초가 가득한 꽃밭으로 뛰어들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애완수의 뒤를 가리켰다.

“한번 따라가 보죠. 백야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은데.”

초화가 헤르탄의 어깨에 올라타고, 우리는 백야의 뒤를 쫓아서 달렸다.

드넓은 꽃밭을 가로지르는 백야를 쫓아서 한참 달리자, 수풀과 독초가 전혀 없는 중앙의 평지가 나타났다.

“어?”

그곳에는 수십 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따로 얼굴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앞서 조사하러 꽃밭으로 뛰어든 환관무사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한 남자에게 다가가 확인하니 모두들 하나같이 숨조차 쉬지 않았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거야?”

이들 전원은 모두 성기가 없다.

그래서 당연히 전부 구미호한테 복상사 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텐데?

충만한 달빛에 꽃잎이 휘날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잉.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휘날렸다.

달빛이 내려와 그녀를 적신다.

달빛에 독초의 꽃잎이 휘날리는 그곳, 아홉 꼬리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발을 뻗고 편히 앉은 미녀는 흰 소복을 입고 짐승의 귀가 삐죽 솟아 있었는데, 꽤나 피로한 기색이었다.

눈가 밑에 찍힌 점 하나가 참 별 것 아닌데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보는 순간, 느껴졌다.

저 여자가 구미호라는 것을.

절세의 구미호가 턱을 괴었다.

“꺼져. 복상사 안 시켜줄 거니까.”

***

예상을 초월하는 첫 마디에 모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줄 놈은 생각 없는데 별것도 없는 놈들이 와 헛물 들이켜더라고.”

구미호가 하품하며 말했다.

“너희도 다른 놈들처럼 복상사하려고 온 거지? 하여간 못된 변태들.”

시체를 노려보던 그녀가 문득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너는 다르구나. 회귀 못 하지?”

저 구미호와 나는 구면이었다.

그녀가 사찰에서 여승의 모습을 하고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선지 생김새는 같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데?

“구미호가 할 생각이 없다고?”

블라이넨은 제법 충격받았단 표정을 지었고, 헤르탄도 마찬가지였다.

“구미호가 할 생각이 없단 건 인간이 식사하지 않겠단 소리잖습니까?”

“맞아. 식사할 생각 없다고. 배부른데 음식을 처먹는 건 미련하잖아.”

구미호는 아주 피곤한 기색이었고, 또다시 하품을 했다.

“세상에 변태가 너무 많아졌단 말이다. 복상사해달라는 놈들 천지니.”

맙소사, 세상에 변태가 너무 많다고 성행위를 거부하는 구미호라니.

그동안 구미호에 관해 가져왔던 나의 편견이 산산이 깨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약간 낯설다.

구미호는 여승으로 변장했던 그날 밤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뭐랄까, 왠지 분위기가 꽤 다르다.

성격이나 말투도 약간 다르고.

‘분위기를 압도하는 뭔가가 없어.’

내가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너, 정말 며칠 전에 나를 찾아왔던 그 구미호 맞냐?”

“넌 연기랑 실전도 구분 못 하니?”

구미호가 쯧쯧 혀를 찼다.

“음색, 연기, 애무.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필수과정이야. 나는 사람을 매혹하기 위한 가면이 아주 많거든.”

“가면이라니?”

“섹스할 때 모습 태반이 연기야.”

이건 또 신선한 충격이로군.

“굳이 뭐하러 연기까지?”

“연기를 해줘야 정사할 때 인간의 정기를 싹 뽑아먹기 아주 좋거든?”

구미호는 짜증이 꽤 쌓여 있었는지 내게 분을 풀듯이 하소연을 했다.

“어떤 여인에게는 적극적인 연하. 어떤 청년에게는 낮밤이 다른 아가씨. 또 어떤 이에게는 우울증에 걸린 처녀. 취향에 맞춰 연기한다고.”

구미호가 나를 척 가리켰다.

“너, 연상이 취향이지?”

윽, 갑자기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저게 이상형 읽는 눈초리도 있나.

구미호가 픽 웃었다.

“내가 둔갑할 대상을 조금 잘못 골랐네. 차라리 여승 말고 키 좀 아담하고 머리칼이 희고 귀여운…….”

“크흠!”

내가 헛기침을 크게 해 뒷말을 묻혀버린 뒤, 말했다.

“네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열정을 담아 사는지는 잘 알았다.”

각 잠자리마다 상대의 취향에 맞춰서 적합한 연기를 한다는 소리로군.

과연 어째서 회귀자가 구미호와 잠자리를 하려 드는지 이유를 알겠다.

“인간한테서 정기 하나 뽑아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구미호가 허리를 콩콩 두드렸다.

“결국 그래서 찾아온 놈들이랑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야. 수탉, 암탉, 영계 안 가리니 배 터지겠어.”

얼마나 많은 닭을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구미호가 지쳐 있었다.

머리칼도 정돈이 안 되어 부스스했고, 안색도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흑! 허리 아프고 피곤해. 오늘만도 무려 몇 놈이랑 해댔는지.”

구미호가 교태 어리게 투정을 부리더니 양손을 짚고 허리를 쫙 폈다.

“하여간 미친 죽음을 맞고 싶으면 딴 데를 알아봐. 최소한 당분간은.”

내가 한숨 쉬며 고갤 가로저었다.

“걱정 마. 우리는 너와 동침이나 복상사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까.”

블라이넨과 헤르탄이 각자 아쉬운 한숨을 흘렸고 초화는 돌아가는 대화를 전혀 이해 못 하고 갸웃거렸다.

“……섹스가 뭐야?”

“연인, 부부가 하는 것입니다.”

헤르탄이 답하자 초화가 나와 그를 번갈아서 돌아보았다.

“……아빠랑 엄마가 하는 거야?”

“저는 엄마가 아닙니다만.”

“야…….”

내가 인상 찌푸리며 입 열 때, 갑자기 백야가 구미호에게 달려갔다.

“캬앙!”

“어머, 내 새끼!”

구미호가 피곤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달려든 백야를 안았다.

백야가 정신없이 구미호의 얼굴을 혀로 핥아댔다.

내가 조금 놀라서 물었다.

“백야가 네 새끼였다고?”

구미호의 혈통이란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친자식이었을 줄이야.

“그래. 병 때문에 죽은 남편과 낳은 유일한 아이야.”

흐음, 설마 구미호가 미망인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난 잡설을 마치고 본론을 말했다.

“널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야. 우리는 회귀를 멈추려고 한다. 협력하지 않겠어?”

세상의 회귀와 회차 목표에 관해서 나는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다.

영물인 구미호가 함께해 준다면 불멸아귀를 죽일 확률도 늘어난다.

구미호는 신중히 이야기를 듣고서 판단을 내렸다.

“싫어.”

거참, 단호한 결정이시군.

그 보기 힘들다는 구미호와 조우했는데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야 하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구미호가 킥킥대며 피로한 눈으로 말했다.

“뭐,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세상의 회귀가 멈춘다는 건 썩 구미가 당기네. 최소한 미쳐 버린 인간들이 복상사하려 들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구미호가 턱을 척 들었다.

“너희, 용궁으로 가고 있다 했지?”

“그래.”

“그러면 거기 가서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가져와. 그러면 나도 너희가 불멸아귀를 죽일 때 함께해 줄게.”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물? 어떤 것 말이야?”

“피로회복에는 간이 최고지.”

구미호가 싱긋 웃었다.

“용왕의 간을 훔쳐다 줘.”

***

구미호는 당연히 생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조건은 용궁에 사는 왕의 간을 훔쳐달라는 것이다.

‘토끼 간 먹는 용왕은 몰라도 용왕 간 훔쳐달라는 구미호는 처음이네.’

구미호는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도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용왕도 나처럼 간을 좋아해 궤짝째로 간을 쌓아두고 먹는데. 그러면 그렇게 몸보신한 용왕의 간은 아무렴 어떻겠니? 탱글탱글하고 맛도 아주 그만이겠지? 그걸 빼앗아다 줘.”

“캬아.”

백야도 그 말을 듣고 입맛이 도는지 침이 고인 혀를 날름거렸다.

‘용왕을 죽이고 간을 적출하라니.’

어째 지금까지 읽어온 전래동화의 동심을 몸소 배반하는 기분인걸.

“상당히 까다로운 의뢰인데.”

“하지만 신출귀몰하고 재빠른 내게 이런 부탁 받는 자도 흔치 않은걸.”

“네가 제아무리 빨라 봐야…….”

내가 말하던 도중, 갑자기 구미호가 사라지더니 누군가 등을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싱긋 웃는 그녀가 서 있었다.

“설명됐니?”

“……됐다.”

헤르탄이 부연해서 설명했다.

“오래 산 구미호는 한 걸음으로 천 걸음을 걸을 만큼 빠르고, 아주 멀리에서도 무슨 말이든 듣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살았기에?”

“나? 올해로 3천 살은 먹었을걸.”

구미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300년 산 지네 한 마리 잡는 데 그 고생을 해야 했는데, 무려 3천 년의 세월을 아득히 살아온 영물이라니.

헤르탄이 구미호를 보며 중얼댔다.

“아직 애기군요.”

블라이넨이 연기를 훅 뱉었다.

“한창 젊고 철이 없을 시절이지.”

“…….”

맞아, 이것들은 119번 회귀했었지.

가끔 내가 몇 천 년 산 회귀자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잊고는 한다.

“하여간 내 새끼를 오랜만에 봤으니 이 어미가 선물을 줘야겠구나.”

구미호가 백야를 쓰다듬으며 가슴에 손을 얹자 허공에서 빛이 떠오르며 구슬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저게 뭐죠?”

내가 묻자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헤르탄이 설명했다.

“여우구슬은 수없이 많은 인간의 정기를 뽑아 만들어진 강력한 보물입니다. 보통 구미호가 평생에 하나 간직하며 가족처럼 소중히 여기지요.”

블라이넨도 구슬을 보며 덧붙였다.

“청색대륙 용의 여의주보다는 못하지만, 지닌 힘을 훨씬 늘려주지. 복상사한 인간 정기로 만든 거니까.”

보통 여우구슬 하나만 쥐고 있어도 구미호의 힘은 몹시 증폭한다 한다.

그래서 보통 구미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뿐인 여우구슬을 무척 아낀다고 한다.

‘그만큼 강력하고 희소하단 거군.’

구미호가 집중하자 허공에서 빛나는 구슬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그때였다.

떠오른 구슬의 숫자를 헤아려본다.

여우구슬이 하나, 둘, 셋…… 저거 대충 잡아도 도대체 몇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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