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06화
전쟁이 벌어진다고?
대화 내용보다도 저 말투에 놀랐다.
대륙이 흔들릴 전쟁을 무슨 수확축제나 준비하라는 것처럼 말하다니.
그래서 난 오히려 저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일급기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발설해도 되냐?”
“발설하면 뭐? 어차피 범파 놈들 포함해서 알 만한 놈은 다 아는데.”
알만한 놈이 아닌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무사가 웃었다.
“전쟁 무서워? 그러면 자살해. 다음 회차로 도망쳐서 살면 되잖아.”
불행히도 과거로 도망칠 재주가 없는 나는 일단은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구미호를 포획해서 범파와의 전쟁에 이용해 먹겠다는 거지?”
“그래. 전쟁에 쓰기에 그만한 도구가 없지. 보자니 설마 구미호를 사냥하러 왔나? 경쟁자는 곤란한데.”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잠깐 관심이 갔을 뿐. 각자 갈 길 가지.”
구미호가 날 한 번 도왔던 건 사실이나 솔직히 깊은 인연은 아니다.
거기다 이미 범파와도 좋지 않게 엮였는데, 철파도 그러기는 싫었다.
지금은 용궁으로 향하기도 바쁘다.
그런데 무사들과 우리가 서로의 갈 길을 걸으며 엇갈렸을 때.
대뜸 호리병이 열렸다.
“캬앙!”
갑자기 튀어나온 애완수는 백야였다.
퀸소히니베가 반색하며 반겼다.
“우리 백야가 나를 보고 싶어서 뛰쳐나온 것이야?”
“캬앙!”
백야는 양팔을 활짝 벌린 그녀를 외면하고 나에게 뛰어들었다.
“…….”
“웬일이냐? 혼자서 나오고.”
나는 백야의 털을 쓰다듬어줬다.
원래 애완수들은 주인 허락도 없이 이렇게 호리병에서 잘 튀어나오나.
“컁! 컁!”
백야가 낑낑대며 내 바짓단을 물어뜯고는 무사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턱을 매만지며 내려다보았다.
“내 바지가 그렇게 맛있었나?”
“크르르!”
백야가 전혀 아니라는 표정으로 으르렁댔고 나는 농담조를 거두었다.
“설마 구미호를 지켜달라고?”
“컁!”
백야가 애를 태우며 날 바라봤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 구미호와 백야는 깊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범철도 드디어 애완동물을 키우는군요. 정신건강에는 아주 좋지요.”
헤르탄이 익숙한 손길로 백야의 몸통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내가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설마 요리하려고요?”
“실망했습니다. 범철.”
헤르탄이 질책하는 어투로 말했고, 하기야 나도 조금은 심했다 싶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여우고기는 아주 맛이 없습니다.”
“…….”
결국 먹어 본 적 있다는 소리잖아.
난 한숨 쉬고 무사들에게 외쳤다.
“이봐, 잠깐!”
“왜 그러지?”
내가 백야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여기, 구미호의 약점이 있거든.”
***
‘역시 백야는 구미호 혈통이겠지.’
사실 처음 영물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잘 키우면 구미호가 찾아온다니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고야 뭐겠어.
다만 그 가설을 확정 짓지 않은 건 백야의 꼬리가 한 개이기 때문이다.
“구미호의 혈통이면 당연히 꼬리도 아홉 개어야 하는 것 아닌가?”
블라이넨이 지적했고, 나도 동일한 의문을 품고 백야에게 물었다.
“넌 왜 꼬리가 한 개냐?”
“캬앙?”
백야가 순박하게 울었다.
하기야 인간한테 넌 왜 다리가 두 개냐고 물은 것과 같은 이치려나.
하여간 어찌 되었든.
‘구미호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만 있다면, 막강한 지원군이 될 테지.’
헤르탄도 구미호를 찾아보자는 나의 의견에 찬동했다.
“구미호가 밤중에 범철을 먼저 찾아왔단 것은 관심이 지대하단 의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녀를 아군으로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거기다 생각보다 순순히 내 의견을 따르는 블라이넨이 제법 의외였다.
“너, 의외로 말은 잘 통한다?”
“구미호라면 설령 만나서 죽게 되더라도, 복상사라서 이득이니까.”
“…….”
도대체 복상사란 게 얼마나 황홀하기에 저렇게 갈구하는지 의문이다.
뭐, 겪어보고 싶단 생각도 없지만.
“……호리병에 혼자 있긴 심심해.”
혼자 남겨져서 지루해진 초화도 병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초화는 날 지나쳐서 헤르탄에게 꾸물꾸물 다가갔다.
낯을 그렇게 가리면서 뜻밖에도 초화가 헤르탄의 바짓단을 꼭 잡았다.
“……태워줘.”
“드리아드로군요? 알겠습니다.”
식물을 다루는 드루이드는 드리아드와 유독 친화도가 높았던 것이다.
흐음, 괜히 서운한걸.
헤르탄의 어깨에 올라탄 초화의 눈가가 흔들리며 뺨을 붉혔다.
“……엄청 잘생겼어.”
“압니다.”
헤르탄의 태연스러운 대답을 누군가는 거만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헤르탄을 본 자라면 누구도 그가 잘난 체하거나 거만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내가 애달픈 현실에 한탄하였다.
“왜 세상 대부분 미남은 자기도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을 아는 걸까?”
“나도 내가 예쁜 걸 아는 것이야.”
“너무나 한없이 슬픈 일이로군. 세상의 모든 거울을 박살 내야겠어.”
내가 우스갯소리를 던지는데, 처음 나랑 대화했던 무사가 킥킥 웃었다.
“참 두서없는 대화로군.”
“헛소리라면 사흘도 지껄여.”
“그래? 넌 꽤 재밌는 녀석이구나.”
키는 크지만 소년처럼 앳된 얼굴의 환관무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가울이라고 한다. 너는?”
“난 보잘것없는 놈이라, 이름도 알 것 없어. 그냥 알아서 부르라고.”
“그럼 ‘아무개’라고 불러도 될까?”
“그냥 부르라니까. 뭘 허락까지.”
본인을 가울이라고 소개한 무사는 환관무사에서 대장을 맡고 있었다.
말문을 틔자마자 딱 봐도 친해지기 쉬운 인간상이란 것이 느껴진다.
보통 이런 놈이 정보 캐기 쉽지.
“아무개 씨 일행이 범파를 위해 구미호 포획을 도와준다니, 사례는 제대로 하겠어. 그런데 구미호 혈통이라는 저 백여우는 어떻게 구했지?”
“우린 정처 없이 떠도는 편이라, 만나는 생물들도 다양해서 말이야.”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방심할 때 질문을 던져야 정보를 얻기 쉽다.
우선, 나는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식부터 확인해 보았다.
“범파와 철파와의 전쟁이 정말 대륙이 궤멸할 만큼 규모가 큰가?”
“청색대륙 대부분 인구가 일생신교에 종사하고, 두 종파 규모도 비등하잖아. 대륙이 전쟁터가 되겠지.”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니.
그러나 헤르탄과 블라이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두 회귀자는 그저 ‘아, 전쟁이 벌어지는구나’ 하는 듯한 무심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너무 반응이 없어서 심각한 내가 무안할 지경인데.’
반면에 회귀를 못 해 나와 동병상련하는 퀸소히니베의 감상은 어떨까.
“전쟁이 벌어져 인간이 멸종하면 앞으로는 용의 시대가 올 것이야.”
……됐다.
내가 가울을 보면서 물었다.
“전쟁 준비라면, 당연히 철파는 승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겠지?”
가울은 고개를 저었다.
“이기는 것은 크게 관계없어.”
“전생에서 승리가 관계없다니?”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가울은 도리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줬다.
“왜긴? 우린 회귀자잖아. 죽고 죽이는 것에는 상관없어. 어차피 이뤄야 할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이 전쟁의 목적은 절대 그것이 아니야.”
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환관무사들도 한 마디씩 참견했다.
“가울 님의 그 말이 맞습니다.”
“오히려 이겨도 다음 회차에서 철저히 앙갚음당할 일만 생기겠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럼 전쟁을 왜 하는 건데?”
“장대한 관심 끌기이지.”
“관심을 끌어낸다고?”
가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종파는 범철 님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거야.”
나의 관심을 끌려고 전쟁을 벌여?
내가 겉으로 놀란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유지하는 사이, 가울이 설명했다.
“우리 철파와 범파는 범철 님이 나타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거야. 결국 과정에서 청색대륙은 멸망에 가까울 만큼 쑥대밭이 되어버리겠지. 그런 멸망을 막으려면 누가 등장해야겠어? 아주 선량하고 강력한 신.”
가울의 눈빛은 순수한 신앙심을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세상에 숨으신 범철 님이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으실 테지.”
갑자기 머리 한편이 뜨거워진다.
그가 잠시 쉬었다가 나를 봤다.
“우리는 신을 세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이 전쟁을 벌이려는 거야.”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방식에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범철이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는 거냐? 그렇게 해서 그 너희가 얻는 게 도대체 뭔데?”
“증명.”
가울은 확고하게 말했다.
“신께서 직접 간택하여 주시길 바라는 거다. 철파와 범파. 과연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 집단인지.”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간택해 주길 바란다고?”
“철파와 범파. 두 집단은 지독하게도 오래 싸워왔어. 이런 싸움이 종결되려면 하나밖에 없지. 범철 님께서 어느 쪽이 옳은지 선택해 주셔야 해. 그러면 선택받은 집단은 정당한 종파가 되고, 선택받지 못한 다른 집단은 이단이 되어서 몰락하겠지.”
“만약 범철이 둘 다 선택하거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럴 리는 없어. 범철 님은 분명 우리 철파가 옳다고 하실 테니까.”
가울은 완강히 부정했고, 나는 머리가 복잡해 한동안 할 말 잃었다.
나의 그런 얼굴을 두려움으로 해석했는지 가울이 웃으며 등을 때렸다.
“왜, 무서워? 그러게 말했잖아. 자살해서 다음 회차로 도망치라니까.”
되뇌어도 믿기지가 않는 소리였다.
내가 나타나길 바라며 두 대형 종파가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인다니.
심지어는 나한테 어느 집단이 옳은 쪽인지 선택까지 해달라고 한다.
‘선택받지 못한 집단은 파멸하고.’
나는 관자놀이를 세게 긁었다.
‘만일 내가 두 종파의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번 회차에서의 전쟁으로 청색대륙이 멸망해 버릴 것이다.
‘제기랄.’
한숨이 나온다.
회귀가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에는 내가 이런 엄청난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앞으로 나의 행보에 따라서.
대륙의 존망이 결정되는 것이다.
‘뭔가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었군.’
회귀자들 간의 종교전쟁이라니.
나도 그간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륙 인구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큼 규모가 크진 않았다.
불멸아귀 죽일 계획만 해도 번거로운데, 대륙에서 벌어지는 회귀자 간의 종교전쟁에 휘말려야만 한다니.
“우리가 구미호를 잡으려 하는 것도 전쟁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야. 구미호쯤은 등장해야 멸망이 되겠지.”
이런 나의 속내도 모르고 가울이 한가롭게 떠들어대던 찰나.
“구미호의 발자국을 찾았습니다! 틀림없이 이 근처가 분명해요!”
어느 무사가 외쳤고 우리는 흔적을 따라서 깊숙한 곳을 향해 뛰어갔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연분홍색 꽃밭이었는데, 진한 박하향이 풍겼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째 굉장히 익숙한 향기인데요.”
내가 독에 당할 뻔했을 때마다 맡았던 박하향, 바로 그 향기였다.
헤르탄은 꽃잎을 살피지도 않고 향기만 맡고도 품종을 알아내었다.
“망울꽃입니다. 세 대륙에서 자라나 1회차 시절에는 잡초라 여겨졌지만, 어느 회귀자에 의해 사실 간편한 독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가울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흙을 제대로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호가 분명 근처에 있다. 이 주변을 샅샅이 훑어봐라.”
“예!”
환관무사들은 진한 향기를 내뿜는 꽃밭을 밟으며 샅샅이 수색했다.
하기야 저놈들은 고자라서 구미호를 만나더라도 죽을 리가 없겠군.
그런데 그때, 저편에서 희미한 기체 같은 것이 이쪽으로 흘러왔다.
‘안개인가? 분홍색이네.’
꽃잎과 다르게 아주 짙은 분홍색.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손을 휘저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응?”
어라, 갑자기 뭔가 조금 몽롱하다.
술도 먹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뺨이 아주 뜨거워지는 것만 같은…….
“용서하십시오. 범철.”
헤르탄이 굳으며 걸음을 멈추더니 초화를 어깨에서 내려놨다.
“뭐가……?”
내가 물으려고 할 때 헤르탄이 나의 어깨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얼굴을 찡그렸을 때, 그가 이미 나의 바지춤을 강제로 내리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내가 당황했으나 그는 주저 없다.
오히려 헤르탄은 무방비한 틈에 나의 속옷 차림의 양다리를 쩍 벌렸다.
“어머나! 내 노예가 드디어…….”
퀸소히니베가 얼굴을 붉혔고, 블라이넨은 못 볼 꼴인지 인상을 구겼다.
초화가 휘둥그레 그를 올려다봤다.
“……엄마야?”
반면에 나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헤, 헤르탄? 야,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