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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05화 (105/200)

나만 1회차 105화

상류로부터 떠밀려온 시체는 어느 남성이었는데 핏기 없이 창백했다.

시체가 흐르는 냇가에서 씻었다면 구역질부터 날 텐데, 헤르탄은 별 난색을 표하지 않고 시체를 살폈다.

“하체가 훤하고 입꼬리가 올라가 경직됐습니다. 사인은 확실하군요.”

“설마 누군가한테 죽은 겁니까?”

“복상사입니다.”

“…….”

제기랄, 하여간 그놈의 복상사.

“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복상사한 시체가 상류에서 내려옵니까?”

“치정극에 휘말린 시체일 수도 있겠지만,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고, 복상사하기에도 너무 젊습니다.”

하기야 시체의 나이는 못해도 삼십 대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병약한 게 아니고서야 확실히 정사하다가 죽지는 않을 텐데.

헤르탄은 시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고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물가에 있었지만 입가에서 엷은 박하향이 납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마비독이군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으니, 추리가 손쉬워집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구미호의 만행입니다. 부패가 없으니 죽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군요.”

구미호라니.

설마 며칠 전 밤에 나를 찾아왔던 그 구미호의 짓인가?

“청색대륙에 현존하는 구미호는 오직 한 마리뿐입니다. 구미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놀랍군요.”

그렇다면 그놈의 소행이 맞겠군.

구미호가 나를 찾아왔던 일을 설명해주자 헤르탄이 크게 아쉬워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군요.”

“동침하지 않아서 말입니까?”

“구미호에 의한 복상사는 남녀노가 가장 최고로 치는 죽음입니다.”

그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구미호는 여성이었는데, 남녀노가 최고로 치는 복상사라고요?”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지요.”

“여자끼리도 복상사할 수 있어요?”

“뜨거운 정사에 심장이 멈추는 절정은, 성별이 구분되지 않으니까요.”

심장이 멈출만한 절정이라니.

과연 회귀자는 별의별 죽음을 다 겪어봐서인지 사망지식이 풍부하군.

“하여간 주위에 구미호가 있다면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삶의 목숨은 절대 포기해선 안 되니.”

“헤르탄의 그 태도가 참 좋군요.”

“누가 그간 무적이었던 황색대륙의 지배자를 최초로 죽였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보며 픽 웃을 때 블라이넨이 피에 젖어서 걸어왔다.

내가 놀라서 물었다.

“너, 꼴이 왜 그래?”

“성욕에 취한 남자들과 마주쳤어.”

“뭐? 설마 너희한테…….”

불안한 예감에 눈썹을 찡그린다.

설마 떨어진 사이, 두 사람이 회귀자한테 험한 꼴을 당할 뻔한 건가?

블라이넨이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네 불알을 떼먹겠다고 하던데.”

“…….”

세상이 왜 이렇게 고단할까.

* * *

어쩌면 나는 굉장한 행운아일 터다.

세상 그 누구도 자기 고환의 가치를 남들까지 인정해주진 않으니까.

‘하여간 빌어먹을 일이로군.’

뛰어가 보니 퀸소히니베가 팔짱 끼고 사내들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범철의 고환을 따먹으면 정력이 오른다는 것이야?”

“어디 그뿐일까! 비단 정력만을 위해서 신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요. 팔을 씹으면 신검을 익히고, 다리를 삼키면 나는 듯 뛸 수 있게 되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이 살갑게 말했고, 그녀는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그러면 혀를 삼키면?”

“그야 뻔하지 않겠소? 신의 완벽한 언변과 말솜씨를 얻게 되는 거요.”

아주 헛소리를 하고 앉았네.

나는 그녀를 향해서 핀잔을 줬다.

“넌 뭘 진지하게 듣고 앉아 있냐?”

“…….”

퀸소히니베가 어째선지 나를 뚫어져라 보며 침을 꼴깍 삼켰고, 그래서 나는 기묘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뭘 봐?”

“내 노예의 혀가 탐스러운 것이야.”

“왜? 내 혀라도 뽑아먹게?”

“미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최소한 그 비슷한 효과를 검증하려면…….”

내게 속삭이며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얼른 피하고,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은?”

“만나서 반갑소. 나는 사동이라 하오. 혹시 그쪽도 일생신교 신자요?”

“전혀. 신이라면 지긋지긋해서.”

“아하, 무교라고? 그럼 잘되었군.”

사동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신식회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포교활동에는 전도가 포함되지. 우리랑 범철 님을 사냥하지 않겠소?”

“……자기가 모시는 신을 사냥하겠다는 발언치곤 너무 자연스러운데.”

“아아, 오해하지 마시오. 대형 종파에서는 우리를 굉장히 싫어하지만, 여기서 사냥이란 신성모독이 아니니까.”

어째 전형적인 사이비의 논리인데.

“자기 종교의 신을 사냥하는데, 그게 어째서 신성모독이 아닌 거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신이란 무릇 신자 위에 세워진 존재요. 우리가 신을 믿듯, 신도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오. 그러니 당연히 범철 님께서도 먹히시면 기뻐하지 않으시겠소?”

기쁘지 않으시다. 이 회귀자 놈아.

하여간 설마 아닌 밤중에 신식회를 조우하게 될 줄이야.

“너희가 신식회의 전부인 건가?”

“그럴 리가 있겠소. 우리는 극소수요. 신식회는 대륙 전역에 퍼져 있지.”

난 어떻게 해야 그놈들 전부를 적출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반면에 사동은 내 고심하는 표정을 믿음의 갈림길에 선 호구의 망설임으로 해석했는지 웃으며 반색했다.

“우린 신을 잡으면 독식하겠다는 미련한 생각 따윈 하지도 않소. 혹시 누가 알겠소? 거기 그대들이 지금부터 신식회에 들어오면 범철 님 발가락 하나쯤은 씹어보게 될는지.”

당연히 나는 신식회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다.

‘내가 내 고환 뗄 일 있나.’

하여간 길을 가다 보면 수상한 집단에 가입하라는 신도가 있게 마련이다.

“그게 정말 사실인 것이야?”

……그리고 거기에 이끌리는 순박한 녀석도 한 놈쯤 있게 마련이고.

내가 가만히 속삭였다.

“내 발가락을 씹고 싶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신발 벗어줄 수 있는데.”

“내 이빨이 노예의 발가락을 앙큼하게 찢어 뜯기를 바라는 것이야?”

“아니면 뭘 그리 진지하게 물어?”

“흥. 나는 그저 진위 여부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이라는 것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헤르탄이 고개를 내저었다.

“신식회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들과는 피해야겠지요.”

“이미 충분히 알아요. 어느 사냥꾼 한 놈한테 먹힐 뻔했던 적 있어서.”

“애석한 일입니다. 별 맛도 없는 고기에 집착해 평생을 얽매이다니.”

그건 여러모로 동감이다.

“그런데 너는 어디서 누구의 피를 묻혀온 거냐?”

블라이넨은 피가 묻은 손으로 담뱃대를 물고는 후욱, 빨아들였다.

“미끼.”

“뭐?”

“오네.”

가끔 이 자식은 두 글자로만 대답하는 병에 걸렸나 의심되고는 한다.

그제까지 쉴 새 없이 떠들던 사동은 좀 진정됐는지 어조를 낮추었다.

“……신식회가 범철 님의 육신만 탐내는 단체라 여기는 자가 무수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소. 우리는 신에 관한 지식도 풍부하지. 실제로 범철 님께서는 그 자신의 신자에게 편안한 죽음을 내리시는데…….”

그리고 사동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화살이 날아들어 꽂혔다.

편안했을지, 불편했을지 모르나 표정을 봐선 후자가 확실한 것 같다.

“헉?”

사동은 쓰러졌다.

그가 믿는 신이 그를 천국으로 데려갔을지, 아니면 또 과거로 회귀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숨통은 끊겼다.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애도를 표하기보다 검을 쥐는 것이 급선무였다.

“뭐해? 검 안 잡냐?”

“괜찮아.”

블라이넨은 태평하게 말하며 칼도 쥐지 않고 가만히 연초만 피웠다.

그리고 화살비가 우리가 아닌, 저들에게만 꽂힌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아악!”

스무 명 남짓한 신식회가 도망을 쳤지만, 화살은 멸살의 귀재였다.

모든 신식회가 순식간에 사망한 뒤에야 저편에서 한 무리가 걸어왔다.

“이 빌어먹을 이단 새끼들. 범철 님을 먹겠다고? 너희가 무슨 권리로?”

검과 활을 메고 있는 사람이 사동의 시체를 짓밟아 이마를 으깼다.

처음에는 워낙 목소리가 엷어서 뒷머리를 짧게 묶은 여자인 줄 알았지만, 가슴과 골격을 보자니 사내였다.

여인 같은 사내가 날 향해 말했다.

“너희는?”

“길 가던 여행자. 그리고 그 질문은 오히려 이쪽에서 하고 싶은데.”

신기하게도 사내들은 어지간한 여자보다 골격이 엷고 체형이 늘씬했다.

거기다 모두 하나같이 잘생겼는데, 머리칼과 옷차림도 무척 단정했다.

“우리는 철파에 소속된 무사들이야. 구미호를 포획하기 위해 왔지.”

철파.

예전에 엘프 고을에서 마주한 범파와 적대하는 일생신교 대형 종파다.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구미호를 포획하러 왔다고?”

체형은 호리호리하나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구미호한테 당한 시체가 있더군. 그런데 누가 칼로 복부를 파헤쳤어. 핏자국을 밟아 쫓아왔지.”

그건 블라이넨의 소행이 분명했다.

“그런데 보기도 싫은 신식회 놈들이 여기 있더군. 일단 너희는 한패가 아닌 것 같아 죽이지 않았다만.”

감탄이 나온다.

일부러 시체를 헤집어 철파가 신식회를 잡도록 유도했던 건가.

그러니까, 블라이넨은 손 안 대고 코를 풀어 상황을 해결한 것이다.

‘항상 신기하군. 늘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리니.’

천성부터 나와는 다른 녀석이지만, 역시 같이 있으면 배우는 게 많다.

“하여간 우리를 구해줘서 고맙군.”

나는 일부러 악수를 청했다.

키가 훤칠하고 근육이 많지는 않지만, 손아귀에는 굳은살이 만져진다.

검을 오래 쥐어본 인간이긴 한데.

“검을 꽤나 쓰지? 딱 알겠는데.”

상대방도 나의 손을 만지고는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가능한 모양이다.

저쪽도 보통내기는 아니란 거겠지.

‘하여간 구미호를 잡으러 왔다니.’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전략이다.

매혹적인 구미호를 포획하는 데 남자, 그것도 건강한 청년을 쓴다니.

살아온 세월은 오래됐어도, 20대의 육체는 성욕이 들끓을 때가 아닌가.

포획은커녕 뭘 해보기도 전에 구미호에게 홀려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그런데 헤르탄은 그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감탄하였다.

“철파 교주는 과연 교활한 전략가군요. 구미호의 천적을 포섭하다니.”

“천적이라고요? 어디를 봐서?”

“저들은 복상사가 불가능합니다.”

“예?”

블라이넨이 담배연기를 훅 뱉었다.

“고자라는 의미야.”

* * *

회귀가 없던 1회차 시절, 청색대륙에도 왕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당시 고궁의 왕의 곁에는 항시 환관무사라는 직종이 호위했다.

왕은 무사에게 성욕 따위는 걸림돌이라고만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궁의 왕은 거세한 청년만을 무사로 고용하였다고 한다.

환관무사는 단순한 호위뿐만 아니라 왕가를 지키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항시 수련만큼이나 몸단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세는 치명적인 급소를 사라지게 하고, 까다로운 잡념을 잊게 한다.

덕분에 환관무사들은 매일 정점을 목표하며 수련을 할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 환관무사가 저들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문벌, 학식을 겸비한 환관무사는 고궁의 전설이었지요.”

헤르탄의 설명을 듣고 나자 나는 신기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대륙 간의 문화가 다르다지만 신기한 일이로군.’

수련을 위해 거세한 무사집단이라.

내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구미호를 포획해 뭘 하려고?”

“빌어먹을 호랑이를 잡아야겠지.”

“호랑이라면, 혹시?”

범파를 적대하는 철파가 끄덕였다.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거야. 최소한 대륙의 절반은 죽을 테고, 어쩌면 멸망까지 가겠지. 회귀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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