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04화
“헤르탄이라고 하기엔 너무 예쁘고, 퀸소히니베라 보기엔 차가운데.”
“웬 헛소리지.”
놀랍게도 쓰러지는 나의 허리를 받아준 사람은 바로 블라이넨이었다.
지쳤는데도 그녀의 배려에 감동하기보단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날 수없이 죽였다더니, 이번 삶에야 나에 대한 우정이 샘솟은 거냐?”
“내 칼 위에 네가 있으니까. 비켜.”
블라이넨이 바닥에 떨어진 자기 칼을 챙기고, 내 허리를 바로 놓았다.
“큭!”
바닥에 부딪친 난 신음을 흘렸다.
하기야 저놈이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기절했던 건 괜찮냐?”
내가 밉살스럽게 묻자 블라이넨이 눈물자국을 쓸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참 싫어.”
“나도 그래. 우리는 참 안 맞아.”
“그런데도 함께하고 있지.”
“검사로서의 명예를 걸고서 딱 정하자. 네가 떠날래, 내가 떠날까.”
“명예란 덧없어. 그게 내가 가장 처음 회귀했을 때 깨달은 사실이지.”
그녀는 에둘러 말했지만 나는 계속 동행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기야 우리가 서로를 좀 밥맛이라 여겨도 우리만 한 강자가 없으니까.
블라이넨이 대왕철강지네의 시체로부터 독니를 전부 밟아서 부쉈다.
[독니를 모두 깨뜨렸습니다.]
[고급등급 칭호 ‘영물을 꼬드기고 배신하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지속효과: 중립관계일 때는 영물과의 호감도가 오르기 쉽고, 적대관계일 때는 피해가 증가합니다.]
그녀는 깨뜨린 독니에서 흘러나온 누런 독액을 빈 병에 모두 담았다.
커다란 영물의 시체답게 유독한 액체가 열 병이 넘어가도록 채워졌다.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날 암살하는 데 쓰려고?”
“넌 독 없어도 죽일 수 있어.”
진실로 나를 폭행한 블라이넨이 헤르탄에게 독액이 찬 병을 맡겼다.
“이건 나보단 네가 더 잘 쓰겠지.”
“감사합니다. 블라이넨.”
혼자 독점할 수 있을 텐데도 남한테 맡기는 걸 보니 그릇도 참 크다.
헤르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 있을 힘이 없는데요.”
“큰 전투 뒤마다 매번 탈진하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입니다. 범철.”
“쓴소리 고맙군요. 내 다리도 감사하다고 후들거리며 애교를 떠네.”
“업히십시오.”
헤르탄은 당장 눈꺼풀을 감을 것만 같은 날 업었고, 퀸소히니베가 왔다.
그제야 우리는 뒤늦게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간 가끔씩 헤르탄의 근황이 궁금하기는 했다는 것이야.”
“저를 보고 싶었다는 의미겠지요.”
“하, 내가?”
퀸소히니베가 정곡을 찔린 듯 목소리를 높였고, 헤르탄은 미소 지었다.
“곧바로 일행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일이 쉽지가 않았지요.”
* * *
헤르탄은 불도깨비한테 배가 침몰한 뒤, 침착하게 겨울바다를 헤엄쳤다.
그러나 육체까지 침착하지는 못했기에 곧 기절해 파도에 휩쓸렸다.
“깨어나니 사방이 물컹하고 아주 어둡더군요.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운 좋게 땅까지 쓸려온 나와 퀸소히니베와는 달리, 불행히도 헤르탄은 향유고래한테 먹혀버린 것이다.
“이전 삶에서도 향유고래한테 먹혀 본 경험이 있기에, 고래 뱃속에서 생존하는 것은 힘겹지만 가능했습니다.”
그는 고래 뱃살을 갈라서 먹고 기름을 모아서 촛불을 켜 연명했다 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위액을 피하고 커다란 기생충과 싸우며, 고래가 집어삼킨 잡동사니를 주워 사용했다.
‘그만한 생활이 가능하다면 이계의 고래는 현실보다 훨씬 큰가 보군.’
고래 뱃속에서 생존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청결과 위생이었다.
헤르탄은 병에 걸리지 않게 정수로 씻고 명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다.
“물론 항문으로 탈출하는 수단이 있지만, 고래가 육지 근처에 있단 확신이 없어 시도치 못했습니다. 겨울바다에서 표류하면 죽을 테니까요.”
고래 뱃속에서조차 질기게 살아남은 헤르탄의 생존력에 탄성이 나온다.
퀸소히니베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럼 도대체 헤르탄은 무슨 묘책으로 고래 뱃속에서 탈출한 것이야?”
“못했습니다. 수온 때문에 내년 봄쯤 탈출하려 했는데, 오늘 나왔군요.”
“…….”
“밀폐된 공기가 참 맑아 좋군요.”
어쩐지 행색이 꾀죄죄하더라니.
나는 탈진한 와중에도 질문했다.
“그러면 아까 함정으로 썼던 청색대륙의 씨앗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향유고래는 무엇이든지 삼킵니다. 개중에는 찢겨진 열매나, 인간이 닿지 못하는 금역의 진흙도 있지요. 그곳에서 좀처럼 손에 넣기 힘든 극지의 진귀한 씨앗을 모았습니다.”
그래도 나름의 전화위복이 되었군.
하여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노화의 악신이 헤르탄이었다니.
간석의 헛짓거리 덕분에 오래 헤어질 뻔한 헤르탄과 재회한 것이다.
‘……아니, 전부 조력자 덕분이지.’
펜타그램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찾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 누군지도 모르는 조력자가 썩 괜찮은 녀석일 거란 착각이 드는데.
의식이 흐려진다.
나는 고래의 위액 때문인지 악취가 풍기는 넓은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 * *
모처럼 재회한 카티에가 날 죽이려 한다는 것은 참 애석한 악몽이다.
평소의 외견과 달리 거뭇거뭇한 단발의 그녀가 사뭇 내 시선을 이끈다.
이제는 당연하단 것처럼 그녀가 단검으로 내 목을 찔러서 끝내버린다.
그러나 악몽의 단점은 죽은 뒤에도 의식이 얼추 남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허공을 향해 떠오른다.
성별이 짐작되지 않는 아이, 인과율에 간섭하는 유랑자가 나를 본다.
“어쩐지 불길해 보여. 아주. 범철이란 인물 그 자체가.”
불길하다고, 내가 왜?
그러나 유랑자는 답해주지 않았다.
“언젠가 재회하기를 바라지. 물론 자네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이야.”
유랑자의 형체가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커다란 해골이 등장한다.
아크 리치가 커다랗게 외쳐댄다.
“한 번 사는 자. 네놈은…… 신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다.”
의미심장한 말이 마구 파고든다.
“세상에서…… 전지전능한 신을 꿈꾸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좀 깔끔히 답을 달라고.
다들 의미심장하게만 말하면 멋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목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짜증스러워하자, 불도깨비 머리가 불쑥 나왔다.
귀청이 뜯겨질 것처럼 외쳐댄다.
“마검사! 여기, 마검사가 있다! 그 놈을 죽여야 된다! 없애버려야 해!”
* * *
“……얼마나 지났죠?”
“깨어났습니까, 범철?”
어느덧 눈을 뜨니 일행은 밤길을 걷고 있었다.
퀸소히니베가 그새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 알밤을 까먹으며 말했다.
“내 노예가 기절한 사이, 우리는 수련관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야.”
엄청 오래 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몇 시간쯤 의식을 잃었나 보다.
어째 기절도 자주 하니 내성이 생겼나, 유지시간이 퍽 짧아지네.
“고마웠습니다. 내려줘요. 헤르탄.”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다리가 감사 인사는 마쳤어요.”
어두운 밤, 일행은 용궁으로 향하는 빛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가장 앞장서 걷는 것은 바로 블라이넨이었다.
“승려들은 어떻게 따돌렸냐? 우리가 신상을 부숴서 화가 났을 텐데.”
“그래서 쥐처럼 튀었지. 발걸음이란 낮보다 밤이 더 빠른 법이니까.”
손거울에서 빠져나와 길을 안내해 주는 빛이 그녀의 안면을 비췄다.
무심하고 감정통제가 철저한 그녀가 울었던 광경이 새삼 떠오른다.
그런 걸 보면 회귀자에게 밴시란 보통 무서운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저곳에 냇가가 있군요.”
헤르탄이 물소리가 흐르는 어둠 저편을 가리켰다.
“사찰로부터 제법 멀어졌으니, 슬슬 몸부터 씻고 싶습니다만.”
오랫동안 고래 뱃속에서 조난생활을 겪은 그는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거기다 티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등에 기댔던 나도 좀 악취를 느꼈다.
역시나 감각이 예민한 퀸소히니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떨어져 있겠단 것이야.”
“저쪽 숲가로 가 있도록 해요.”
퀸소히니베를 으슥한 곳에 데려가는 블라이넨의 뒷모습이 왠지 묘했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
겨울의 냇가는 몸서리치게 추워 보였지만, 헤르탄은 곧장 옷을 벗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서 수면에 반사되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
당연히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헤르탄이 씻고 싶다고 한 것은 우리끼리만 할 얘기가 있단 것이겠지.
그가 한겨울인데도 옷을 걷어버리고 차가운 계곡에 맨몸으로 담갔다.
“카티에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까?”
“예. 그녀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몹시 심각하군요.”
의외로 헤르탄이 눈썹을 구부렸다.
“카티에가 오래 범철과 떨어져 있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설마 그녀가 자살한다는 겁니까?”
“차라리 그걸로 끝나면 값싸지요.”
헤르탄은 드물게 몹시 염려하는 눈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인류가 멸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
아무리 그래도 걱정이 너무 광범위하게 극심한 것 아니야?
헤르탄은 차디찬 냇물로 몸을 씻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범철의 여정은 위험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블라이넨과의 동행 말입니다.”
역시나 그거였나.
“이미 알아요. 전생에서 나를 가장 많이 죽여 본 회귀자라고 그랬죠?”
“물론입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범철을 죽이는 데 가장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회귀자일 겁니다.”
솔직히 꺼림칙하기는 한 일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통달한 여자와 동행하는 여정이라니.
그러나 날 가장 많이 죽였단 것은, 가장 연이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은 아크 리치를 죽이고 전생의 돌이라는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헤르탄에게 과업을 내리는 전생의 돌에 관해서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연이 깊은 회귀자들과 함께할수록 과업의 대기시간이 감소하는 것.
그리고 모든 과업을 완료하면 전생 관련 특전을 얻을 수 있단 것까지.
“전생 관련 특전. 처음 듣습니다.”
헤르탄은 수북한 수염을 쓸며 냇가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나는 세수를 하려다가 예상보다 훨씬 차디찬 물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차가운 곳에서 어떻게 몸을 씻었담.
“확실히 독특한 아이템이긴 하군요. 전생에 연이 깊은 회귀자와 함께해야 한다니.”
“예. 그래서 블라이넨과 함께할 겁니다. 특전을 획득하기 위해서.”
물론 그 특전이 어떤 무엇일지는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느 회귀자도 얻지 못한 특전이니만큼 불멸아귀를 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헤르탄은 날이 선 단검을 들고 능숙하게 자라난 머리칼과 수염을 밀었다.
털들이 짧게 깎여서 본래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날 즈음,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늘 그녀의 동향을 주시할 테니 범철도 블라이넨에 대한 경계심을 유념하십시오.”
“경계야 잘 때도 항상 하고 있죠.”
“잘 때는 괜찮습니다. 그녀가 범철이 자고 있을 때나 방심한 틈을 노려 암살하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예? 어째서요? 전생에서 블라이넨이 날 잘 때도 죽여 봤다 하던데.”
“그건 과거 일입니다. 지금 그녀의 목표는 범철을 칼로 꺾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날 늘 그렇게 올곧게만 죽이려 하겠어요?”
“120회차 회귀자 중에서 블라이넨은 제법 올바르게 미쳐 있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치면 그냥 미친 거지, 올바르게 미쳐 있다는 건 또 뭡니까?”
“제가 소년왕이 백치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일어났어야 할 일이란 것이지요.”
헤르탄이 확정지어서 말했다.
“그녀는 범철을 죽이는 데 있어서만큼은 비열한 공작이나 암투, 속임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히 할 겁니다.”
“그 의미는?”
“우리는 비열한 공작, 암투, 속임수를 써서 그녀를 죽일 수 있습니다.”
헤르탄의 명안에 고개를 끄덕인다.
“방비는 해둬서 나쁠 게 없죠.”
하여간 나는 슬슬 간석을 죽이고서 획득한 보상을 확인해보았다.
『대사범 허리띠(붉음)』
일생 수련관 대사범의 허리띠.
(거짓을 밝혀 새로운 정보 확인!)
지금껏 사기를 일삼아온 대사범의 허리띠. 불길한 온기가 남아 있다.
+선동의 효과를 크게 높여준다.
+검술의 성장도를 1.3배 높여준다.
대사범 허리띠는 검술 성장도를 올려주는 것 외에도 특수한 옵션이 한 가지 더 붙어져 있었다.
‘선동의 효과를 올려준다니.’
과연 사기꾼을 살해하고 획득한 전리품답지만 써봐야 효과를 알겠다.
이전까지 매고 있던 초심 수련관의 흰 띠를 풀고 나는 붉은 띠를 맸다.
그러고 보니 헤르탄도 찾았으니 전생의 돌이 다음 과업을 내릴 텐데.
‘과업 대기시간이 언제 만료될지 확인을 하지 못하니 꽤나 답답하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상류에서 흘러오는 뭔가를 발견했다.
“저건……?”
“시체로군요.”
헤르탄의 태연한 대답에 나는 괜스레 다시금 기절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