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102화
어둠 속에서 먼 곳까지 보는 내 시력과 대변과 된장조차 구별하는 내 분석력은 다행히도 별 이상이 없다.
그러니 내 앞에서 강림한 이 악신은 틀림없이 내 동료, 헤르탄이다.
그런데 전생부터 날 섬겨온 그가 어째서 악신이라 불리고 있는 거지?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물어야 할 말인데요.”
우리는 헤어진 형제가 상봉한 것처럼 그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 고생하다 온 건지 헤르탄은 수염과 머리칼이 길게 자라 무성했고, 차림새도 별로 깨끗하지 않았다.
“왜 헤르탄이 노화의 악신입니까?”
“풀고 싶은 회포가 천지입니다만.”
헤르탄은 똬리를 트는 대왕지네를 힐끔 보고는 주먹을 쥐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서로 한 마디씩 나누고 일단 가지요.”
한 마디? 그거야 고민할 것 없지.
내가 고개를 지네로 틀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범철.”
헤르탄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대왕지네를 향하여 돌아섰다.
반면 간석은 여전히 헤르탄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조아린 몸을 떨었다.
“노화의 악신이시여! 제가 당신의 소환자입니다. 23회차! 당신을 소환하기까지 무려 23회차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신을 이곳에 강림시키기 위해 저는 오로지 외로이 혹독히 노력해왔습니다! 알아주소서!”
그러니까 저놈이 23회차 동안 헛짓거리를 해왔다는 거지?
너덜너덜한 몸인데 혀도 참 길다.
아마도 저놈은 원래 성격부터가 설명만 더럽게 많은 떠버리인가 보다.
독니를 드러낸 대왕지네에게 가던 헤르탄이 곧바로 간석을 돌아보았다.
“네가 저 대왕지네의 주인인가?”
“마, 맞습니다! 악신이시여!”
“멈춰라. 그를 해하지 않도록.”
“알겠…… 예? 그라니요?”
“범철 말이다.”
간석이 떨면서 헤르탄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화의 악신께선 범철과 영원한 적대관계…….”
“그는 내가 모시는 자다.”
“예? 왜 악신께서 범철을……?”
맹신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간석의 얼굴빛에 옅은 의심이 깃들었다.
현재 상황의 전후 사정을 모르는 헤르탄이니 판단이 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헤르탄. 그놈은 악신을 소환해 우리 모두를 죽이려 했던 녀석입니다.”
“싸워도 됩니까?”
“죽여도 됩니다.”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헤르탄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의 탄탄한 주먹에 간석은 정수리를 얻어맞고 바닥에 코를 찧었다.
“어억! 아, 아, 악신이시여! 왜?”
“난 악신이 아니다. 회귀자의 신앙은 허황된 소문을 많이 퍼뜨리지.”
헤르탄이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쥐자, 간석이 붉은 얼굴로 켁켁거렸다.
“놔…… 이거, 놔!”
간석의 숨이 끊기기 직전, 대왕지네의 꼬리가 헤르탄을 강타했다.
그의 몸뚱이가 날아갈 만큼 큰 일격이었으나 재빠르게 낙법을 했다.
그러나 간석은 놓치고 말았다.
“제, 제기랄! 악신…… 악신이 아니라고? 웃기지 마! 저 제단을 발견하고서부터 몇 날 며칠을 고생했는데! 네가 악신이다! 악신이어야만 해!”
피를 줄줄 쏟으며 쉰 목소리로 소리치는 간석은 광신도에 가까웠다.
어째서 회귀자는 본인이 부정해도 저렇게나 신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헤르탄은 침착하게 일어섰다.
“그럼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지.”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내려치자 나무뿌리가 마구 자라난다.
“드루이드 중에서 식물을 급속 성장시킬 수 있는 자는 손에 꼽힌다.”
“그, 그게 뭐!”
“급속한 성장도 노화의 일부지. 이것이 와전되어 노화의 악신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거다. 사람들은 신화에서조차 악역을 필요로 하니까.”
“하, 하지만 노화의 악신은 태아조차 늙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그것은 이게 와전된 것이겠지.”
헤르탄이 품에서 노란 씨앗을 꺼내서 바닥에 툭 던지자, 금세 싹이 트며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초화가 그런 헤르탄의 시범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신기해.”
“그, 그 짓이 무슨 상관인데?”
“씨앗도 넓게 보면 식물의 태아니까.”
간석이 피나게 입술을 씹었다.
“그, 그럼 너는 아무도 노화시켜 멸할 수가 없다고? 그게 정말이야?”
“나는 신이 아니다. 급속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식물뿐이야.”
헤르탄은 특유의 성격답게 침착히 말했고, 간석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간결한 논증에도 나는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그럼 나와 악신이 마주치면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는 건 뭡니까? 그것도 헛소문이에요?”
“실제로 전생에서 저와 범철이 목숨 걸고 싸운 적이 있었으니까요.”
“예? 뭐 때문에?”
“제가 범철의 애완동물을 가축으로 착각하고 요리했기 때문입니다.”
“…….”
“괜찮아요. 제가 패배했었으니까.”
아니, 전혀 괜찮지가 않은데.
헤르탄은 천천히 회상했다.
“그 당시 성이 두 채 몰락할 만큼 싸움이 격했기에 구경꾼이 많았습니다. 싸울 때 로브를 걸쳤던 터라 제 신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비주의가 더해지고 능력도 와전돼 노화의 악신에 관한 소문이 퍼졌지요.”
참 헛소문도 스케일 한 번 크네.
어찌 됐건 헤르탄의 말로 입증됐다.
악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단 것을.
“아니, 노화의 악신은 존재한다!”
뭐?
간석이 이를 갈면서 악을 썼다.
“네놈은 분명히 가짜일 테니까!”
“뭔 소리냐? 상태창에서 노화의 악신이 강림한다고 쓰여 있었는데.”
“하! 그게 정말 ‘노화의 악신’이란 보장이 어디 있지? 저 자식은 흉내 내는 가짜고, 진정한 ‘노화의 악신’께서는 다른 곳에 계실 게 분명해!”
간석이 손을 들어 올리자 가만히 있던 대왕지네가 독니를 내세웠다.
“저놈들을 모두 죽여라! 목격자를 모두 없애고 진짜 악신을 찾겠어!”
도대체 저런 억지가 어디 있냐?
무슨 상황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한 저 미친 논리에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짝짝짝!
그런데 나와 마음이 통했던 걸까?
헤르탄이 손뼉을 처대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그물?’
그가 방금 논증을 벌이며 성장시킨 나무뿌리와 씨앗의 싹이 올라왔다.
손뼉을 칠 때마다 반응하며 나무뿌리와 씨앗의 넝쿨이 마구 얽혀댄다.
대왕지네가 민첩한 몸놀림으로 다가올 때, 식물 그물망이 확 퍼졌다.
[대왕철강지네가 상급 기력손실의 그물에 걸렸습니다.]
[최소 30초간 무력화 상태가 되며, 40%의 기력을 손실합니다.]
커다란 지네의 몸체와 다리에 넝쿨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속박했다.
“끼이에에엑!”
어찌나 속박력이 거센지 그 막대한 대왕지네가 제 힘조차 쓰지 못한다.
간석이 뒤편에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이런 젠장!”
대형 몬스터를 단박에 속박하다니.
나도 제법 놀라서 입을 벌렸다.
“헤르탄. 못 본 새 강해졌습니다?”
“청색대륙의 토종식물은 황색대륙보다 전투적인 것이 많으니까요.”
하여간 대왕지네의 몸이 속박되자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일행 모두가 가능한 최강의 공격을 준비하며 태세를 다졌다.
“후웁!”
퀸소히니베가 브레스를 뿜기 위해 한껏 숨을 들이마셨을 때.
“잠깐!”
“커, 켁!”
내가 일행의 공격을 제지했다.
퀸소히니베가 불발된 브레스 탓에 목이 아픈지 입에서 새까만 연기를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야?”
“지금 공격을 해야 합니다. 범철.”
나도 대형 몬스터가 무력화된 상태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는 안다.
1초, 1초가 황금처럼 귀중한 순간!
그러나 지금 공격할 때가 아니다.
‘느껴져.’
나는 배낭에서 메밀묵을 꺼냈다.
그리고 그물에 걸려 마구 꿈틀대는 대왕지네를 향해 던져주었다.
간석조차 내가 하는 짓을 방관하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짓을 하는군. 지네한테 씹어 먹히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그러나 씹어 먹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메밀묵이었다.
“끼이이엑.”
대왕지네는 큰 덩치답게 먹성이 좋았고, 나는 항아리 한 개분의 메밀묵을 모두 내주었다.
어느새 30초가 지나고 대왕지네가 풀려나 나를 향해 독니를 드러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고 그 이빨에 손을 가져갔다.
“주인에게 아주 불만이 많았구나.”
“범철!”
헤르탄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독니에 찔리진 않더라도 직접 손을 가져가는 것은 미친 행위이니까.
실제로 독니를 감싸 쥐자 손아귀의 피부가 시큰거리고 화끈거렸다.
[철강지네의 독니가 오른쪽 손아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계속 독니를 만질수록 치명적 맹독에 감염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치더라도, 독니를 쓰다듬는다.
이것은 내가 대왕지네에게 적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표현이었다.
“끼이이엑.”
[SSS급 조련재능이 타인 소유 애완수의 감정을 읽어냅니다.]
[대왕철강지네는 징그러운 자신의 독니를 쓰다듬는 인간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애완수를 다루는데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 바로 당근과 채찍이다.
그러나 간석은 채찍만을 써서 대왕지네를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대왕지네에게 써줄 것은 바로 당근이었다.
[맹독에 감염되었습니다!]
[서둘러서 치료하지 않으면 오른손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상태창이 뜨든 상관없다.
나는 지금 멈출 생각이 없으니까.
간석이 대왕지네의 이상스러운 돌발행동에 이를 갈면서 명령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저놈을 죽여!”
그러나 대왕지네는 약간 움찔했지만, 그저 멈춰만 있을 뿐이었다.
[대왕철강지네가 흔들립니다.]
[주인의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SSS급 조련재능으로 충성도 낮은 상대방 애완수를 유혹합니다.]
[유혹 성공!]
[간석의 애완수 대왕철강지네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 조련했습니다.]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 짧은 새에 타인의 애완수를 조련해 빼앗는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내게 강력한 애완수를 강탈당한 간석은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 어째서 내게 몸바쳐온 애완수가 바로 네놈에게 돌아서는……?”
“비록 회귀는 하지 못했지만, 네가 갖지 못한 재능은 타고났거든.”
SSS급 조련재능!
대왕지네를 척 보자마자 전 주인에게 불만이 심각한 것이 딱 보였다.
덩치는 커도 관리를 안 해줘서 비늘이 갈라진 흠집이 많고, 다리, 수염엔 오물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무엇보다도 먹이를 제때 주지 않았던 게 분명하군.’
애완수와 먹이는 중요한 관계다.
배를 채워주진 못하더라도 먹이를 제때 줘야 애정도 채우고 주인이란 신분도 각인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헤르탄조차 나를 보며 어이없는 미소를 흘렸다.
“못 본 사이 더해졌습니다. 조련된 상대의 애완수를 자기 것으로 빼앗는 행위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어요.”
“새 재능을 찾아냈으니까요.”
“마,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저 지네는 내 소유야!”
간석이 악을 썼지만, 나는 독니로부터 변색되어가는 오른손을 뗐다.
“애완수한테 이름도 안 지어줬냐? 그렇게 애정이 없으니 떠나가지.”
대형철강지네가 나의 곁으로 붙으며 이전 주인에게 독니를 드러냈다.
“서, 서, 설마……!”
창백해진 간석을 향해 나는 말했다.
“네 말이 맞았어. 막상 직접 마주하면 신이란 것도 참 별것 없지.”
내가 손가락으로 놈을 가리켰다.
“저놈을 죽여라.”
“끼이에엑!”
만신창이인 간석은 도술조차 제대로 쓰지 못해 대형지네의 몸놀림을 피하지 못했다.
“아, 안 돼! 저리 가! 내가 네 주인이라고! 이번 회차만은! 아아악!”
[소유한 애완수가 타락한 대사범의 허리를 두 동강 내 죽였습니다.]
[본인의 승리로 판정됩니다.]
[일생 수련관 도장 깨기 성공!]
[힘이 6 올랐습니다.]
[싸움의 명예가 올라서 상위 수련관에 도전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대사범 허리띠를 얻었습니다.]
나는 허공에서 빛나며 내려진 붉은색 허리띠를 손에 넣었다.
“불쌍하게 죽었지만 동정조차 가지 않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매몰차게 말하며 기절한 블라이넨을 편히 눕혀두었다.
다들 한숨 돌렸다는 분위기지만.
난 초화, 백야를 호리병에 넣었다.
“쉴 때 아니야. 전부 전투 준비해.”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야? 이제는 쓰러뜨려야 할 적이 없는 것이야.”
난 대왕지네를 향해 칼을 뽑았다.
“사냥 안 한다는 소린 안 했는데.”
이제는 내 애완수를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