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100화 (100/200)

나만 1회차 100화

나는 숨을 가다듬고 힘껏 칼자루를 쥔다.

어두워서 뭐가 오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철강지네 떼가 도망쳐올 정도라면 허약한 적은 아닐 것이다.

다시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나아는…… 범처얼이다…….”

처음에는 음색이 워낙 느려 알 수 없었지만, 두 번째 듣자 감이 왔다.

“자기가 범철이라고 말한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눈살을 찌푸렸고, 내가 목소리를 높여서 소리쳤다.

“넌 누구지?”

“으아아아! 나아는 범처얼이다!”

저편의 중심부에서 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마구 뛰어왔다.

밤색 머리칼, 눈썹이 사납고, 수염도 멋지게 기른 게 어째 딱…….

“기분 나쁘게 닮았군.”

블라이넨의 표현에서 ‘기분 나쁘게’만 빼면 내 생각과 딱 일치했다.

이쪽으로 오는 남자의 외모는 기묘하게도 ‘신격화된 나’와 닮아 있었다.

어찌 됐건 좋은 의도로 이쪽으로 온다면 칼을 세우고 달릴 리가 없다.

‘말이 통할 정신은 아닌 듯한데.’

발음이 어눌한 것도 모자라 입가에는 게거품 비슷한 것을 뿜고 있다.

내가 칼자루를 세게 쥐었지만, 그보다 블라이넨이 먼저 대응했다.

봐주는 것 없이 목에 향하는 칼날.

그런데…….

퍼억!

이변이 벌어졌다.

남자가 목이 그대로 꿰뚫리면서 돌격한 블라이넨을 걷어찬 것이다.

단순한 발차기에 당할 그녀가 아닌데도, 그녀는 나가떨어졌다.

“큭!”

“나아아…… 느으은……!”

신을 빼닮은 남자가 날 바라본다.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데도 고통을 모르는 모양이다.

‘언데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놈이 검을 휘두르고.

그 단순한 공격을 받아치는 순간.

삼척검이 곧바로 부러졌다.

챙강!

“큭!”

엄청난 힘에 손목이 나갈 뻔했다.

얼굴은 닮았어도 나에 비해 골격과 체격도 비실한데 어디서 저런 힘이?

칼을 놓친 손을 뒤로하고 다른 손으로 마나를 충족해 불을 쏘았다.

화르륵!

“나아아……!”

‘……도대체 뭐야, 이놈?’

그러나 더욱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것처럼 남자가 얼굴을 태우면서 다가왔다.

“아아아아…… 느으은…….”

그러나 놈은 내게 닿지 못했다.

어느새 일어나 다가선 블라이넨이 뒤쪽에서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좀비처럼 몇 번이고 꿈틀대던 남자는 결국 숨이 끊어져 버렸다.

블라이넨이 눈살을 찌푸리고 시체를 내려다보곤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이 미치광이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나는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퀸소히니베가 날 보며 질문했다.

“내 노예가 형제를 뒀던 것이야?”

“이럴 수가. 설마 나의 이복형제?”

그 난데없는 출생의 비밀에 충격받으려 할 때 블라이넨이 내 팔뚝을 때렸다.

“헛소리 관둬.”

“하지만 신기하게 닮았단 것이야. 사찰에서 보았던 신의 초상화랑.”

의아해하며 대화를 주고받을 때, 수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우린 숨을 죽여야만 했다.

신을 닮은 미치광이 열댓 명이 중심부 저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나아는 버엄철이다아아……!”

* * *

“……도플갱어란 몬스터가 있지.”

침묵을 깬 것은 블라이넨이었다.

“적의 외견을 복사하는 몬스터. 그래서 도플갱어를 보면 누구나 살의를 느껴. 자신과 같은 존재니까.”

“그래서 저놈들이 도플갱어라고?”

“죽어도 모습이 변하지 않는 걸 보면 도플갱어인 것은 아니야. 외모가 신과 아주 완벽히 똑같지도 않고. 하지만 이론만은 같은 것 같군.”

“저놈들이 날 죽이려고 온 거라고? 왜냐하면 자기들이 범철이니까?”

“이대로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야. 저들이 출구를 막았으니까.”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왜 자신을 나라고 주장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나가든 다른 곳을 살펴보든 중심부에 저 수상한 미친놈들이 도사리고 있다면 이동할 수 없다.

내가 블라이넨의 말을 떠올리며 저편에 있는 미치광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모두 열넷이군.

“너의 추리대로라면 일단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공격하지 않겠네.”

“그럼 내가 가보겠단 것이야.”

곧장 퀸소히니베가 씩씩하게 뛰쳐나갔고, 가짜 범철들이 발 빠르게 몰려와 그녀를 마구 짓밟았다.

“꺄악!”

퍽퍽퍽!

내가 블라이넨을 휙 돌아보았다.

“굳이 나 아니라도 공격하는데?”

“…….”

그녀는 추리의 오류를 범한 것을 변명하기보다 행동으로 모면하였다.

번개처럼 뛰쳐나간 그녀가 검기를 실은 칼날을 휘둘러 목을 따버린다.

칼끝이 피에 젖고 나의 마법이 폭격해 미치광이들을 몰살시켜버렸다.

‘덩치에 비해 힘은 월등하지만, 머리가 나빠서 체계적이지가 못해.’

상대를 오래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이 왔다.

싸움은 순조로웠지만 의문점이 한 가지 들기는 했다.

‘이놈들, 강하긴 해도 철강지네 떼가 무서워 도망칠 수준은 아닌데?’

마지막 미치광이의 머리를 블라이넨이 검으로 꿰어 죽여 버렸다.

퀸소히니베가 괜히 꿍한 표정으로 먼지투성이인 몸을 털었다.

“…….”

“수고했어. 네가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좋은 정보도 얻었다.”

하나 나는 얼마나 눈치가 없는가.

퀸소히니베가 토라진 것은 고작 감사 인사의 유무 때문이 아니었다.

“왜 날 걱정해주지 않는 것이야?”

“넌 비늘 있잖아. 어지간한 갑옷보다 딱딱해 다치진 않을 것 같은데.”

“흥! 비늘도 내구력 한계가 있는 것이야. 내 노예가 아주 글러먹었어.”

“그래,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고.”

손수건으로 발자국이 묻은 뺨을 닦아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토라진 얼굴이었다.

“됐다는 것이야.”

잔뜩 삐친 그녀를 위해서 사과의 의미로 메밀묵을 꺼내주려던 찰나.

“먹을 것으로 내 화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큰 착오…… 응?”

퀸소히니베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저기!”

“나아는 버엄철이다!”

저편에서 미치광이 떼가 몰려든다.

이번에는 무려 서른에 가까운 수.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이 몰려오는 거야?’

어찌나 침을 많이 흘리면서 달려오는지 바닥까지 침방울이 떨어진다.

그만한 힘을 가진 미치광이가 저렇게 몰려오면 우리도 상대하기 힘들다.

블라이넨도 그 점을 인지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몸을 빼야 할 거야.”

“알겠다는 것이야.”

“잠깐.”

검과 주먹을 쥔 두 여자를 막는다.

내가 긴장하며 달려오는 미치광이들을 향해 메밀묵을 하나 던져줬다.

“으아아아! 나아는!”

“버엄철이다아아아!”

내가 메밀묵을 던져주자 미치광이들이 침을 흘리며 개떼처럼 몰렸다.

분명 인간의 입맛에는 맛이 없을 메밀묵을 정신없이 먹는 미치광이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들,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블라이넨이 아주 드물게 놀랐다.

“그것까지도 너와 같군.”

“…….”

* * *

일생수련관의 감춰진 이면 속에선 대놓고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나에 관해 사기 치는 신선, 지하에 위치한 던전, 그리고 미치광이들.

‘어떤 음모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의문점들의 연결고리를 정확히 연결 짓지는 못하겠다.

“나아는 버엄철이다!”

메밀묵을 모두 먹어치운 미치광이들이 우리를 노려보며 오기 시작했다.

“이리 오면 묵을 주겠단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내가 맡긴 항아리에서 메밀묵을 던지며 적을 유도했다.

그 사이 블라이넨의 검과 나의 마법이 빈틈을 노려 놈들을 멸살했다.

“이거, 어째 좀 기분이 나쁜데.”

아까부터 느꼈지만 나를 닮은 사람들을 직접 죽이는 기분이 미묘하군.

뭔가 상당히 꺼림칙했지만, 블라이넨의 감상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사냥하기에 썩 괜찮은 곳인데.”

그녀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미소가 걸렸고, 나는 심히 기분이 괴악했다.

퀸소히니베가 항아리에 조금 남은 메밀묵을 꺼내 먹으며 가엾어했다.

“내 노예도 언젠가 죽으면 이런 추한 몰골이 되어버릴 것이야.”

“…….”

신을 닮은 시체들에서 눈을 뗐다.

모두 나와 닮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힘과 정신이 기묘한 놈들이다.

도대체 왜 이 지하에는 미치광이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는 거지?

그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바닥이 쿵쿵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아아느으는 버어엄처얼이다아!”

이제까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굉음.

저편에서 온몸 곳곳에 흉터가 새겨진 남자가 혼자서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닮은 것은 맞으나 다른 놈들보다 월등히 키가 크고 근육질이다.

나는 긴장하며 손에서 불을 태웠다.

“저게 이곳의 우두머리쯤 되나?”

철강지네 떼가 도망쳐오던 이유가 바로 저놈 때문이었군.

지하가 쿵쿵 울릴 만큼 돌격해오는 거체를 향해 우린 태세를 다졌다.

그러나 돌격해오던 남자가 불현듯 멈춰 서더니.

“끄헉……!”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거체 뒤에서 마력을 휘감은 대머리 신선이 거친 숨을 쉬었다.

“다들 괜찮은가?”

“간석? 네가 왜 거기서…….”

“지금 설명해줄 여유가 없어! 당장 나를 따라와. 여기는 위험하다고!”

퀸소히니베가 곧장 저쪽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내 손이 그녀를 막았다.

내가 그를 경계하며 지적했다.

“설명할 시간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판단한다. 어째서 네가 운영하는 수련관 밑에 이런 장소가 있는 거냐?”

“제기랄! 나도 저놈들한테 당했단 말이다. 또 놈들이 몰려오고 있어!”

간선이 다급하게 오른손으로 피에 젖은 복부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블라이넨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닥치고 질문에나 답해. 너의 등은 내가 뒤따를 만큼의 신뢰가 없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인가?”

“최소한, 나에게는.”

독선적인 블라이넨은 역시 단체보단 개인을 위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놈의 허술한 거짓말을 간파해야만 했다.

“이 지하에서 벌어진 일이랑 이곳의 물건들은 너랑 관계 없단 거군.”

“그래, 이곳은 사찰을 세우기 전부터 원래 있던…….”

“그럼 이 발모제는 누구 거냐?”

내가 숨겨진 비밀 방에서 발견한 약을 보였다.

이 발모제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사상 최강의 역대급 발모제」

제작자명: 간석

돌연 그의 눈빛이 돌변한다.

“원, 전생에서 대도라도 해먹었나.”

간석은 손등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도술로 자물쇠를 잠그고 골방에 숨겨놓은 비약을 어떻게 찾았는지.”

다급해 보였던 표정이 어느새 여유롭게 변하고 두피에 젖은 땀도 닦아 낸다.

복부에 묻은 피도 일부러 다른 남자의 것을 묻힌 것이겠지.

“쯧. 역시 연기는 과한 준비가 필수야. 임기응변으로 하려니 이런 풋내기들조차 속이기가 쉽지 않지.”

그가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이 ‘실패작’들을 죽여줬군. 고맙군. 이 골칫덩이들을 없애줘서.”

“이놈들이 ‘실패작’이라고?”

“사기를 치는 것은 고된 행위지. 특히 상대가 회귀자일 때는 더욱.”

내가 마력을 휘감은 손을 올렸다.

“잘해라. 말 돌리면, 목 돌아가.”

“조급해하지 마. 전부 말할 테니까.”

간석이 항복하듯 양팔을 올렸다.

“이곳은 단순한 지하가 아니다. 신을 창조하기 위한 나의 공작소지.”

* * *

나와 퀸소히니베는 물론이고 블라이넨조차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신을 창조하기 위한 공작소라고?”

“다들 회귀로 미쳐가며 종교에 의지할 때, 난 의아했지. 왜 찾으러 다녀도 보이지 않는 신을 굳이 모시는 걸까. 그저 만들면 그만일 텐데.”

“그래서 지하에 범철과 빼닮은 미치광이들이 이렇게 많았던 거냐?”

“물론. 일생신교의 신은 복제하기도 몹시 적합했어. 추상적인 형태도 아니고, 실존하고 있으며, 정보가 있으니 그나마 창조하기 적합하달까.”

간석은 전생을 떠올리듯 말했다.

“처음에는 볏짚을 사용했었지. 재료 구하기도 쉽고 도술로 외형을 바꾸는 것도 아주 빠르게 되니까. 다만 겉만 똑같고 힘은 형편없었어.”

블라이넨이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 연기에 간석은 코를 찡그렸다.

“그렇다고 회귀자를 납치해서 실험에 쓰자니 문제가 많았지. 인간은 도술로 변신시키기 불가능하고, 약물세뇌도 어렵거든. 거기다 실험체로 쓰이다 죽으면 다음 회차로 넘어가 나의 비밀을 폭로해버릴 테니.”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떠올랐지. 아! 회귀하지 못하는 맹수를 도술로 변신시켜 세뇌하고, 범철로 만들면 되겠구나. 세뇌를 위한 약초는 수련관 세워서 벌고, 겸사겸사 내 발모제도 만들어냈지.”

저런 또라이 같은 발상을 태연히 내뱉는 것은 역시 회귀자 뿐이다.

잘 생각해 보니 뒷목에 숫자가 새겨져 있던 나의 가짜도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입문시험을 거칠 때 범철을 사칭하던 놈도 너의 소행이냐?”

“48번 후보생 말인가? 그 친구는 도깨비를 납치해 세뇌한 실험체였지. 여기서 가장 성공작에 가까웠어. 그래서 제일 공들였고 언어능력도 탁월해 처음 실전에 투입됐었지. 승려들도 속일 만큼 감쪽같았는데 자네한테 죽다니. 참으로 아깝게 됐어.”

블라이넨이 눈매를 좁혔다.

“수련관 승려들도 너와 한패인가?”

“오, 헛된 의심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들은 그저 순수한 신자야. 내가 범철의 스승이라 믿는다고.”

그녀가 의구심을 갖고서 물었다.

“캐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다 뱉는군. 어째서 알아서 자백하는 거지?”

“그야 말하지 않으면 고문할 거잖나. 이 ‘실패작들’ 처치한 걸 보면 자네들도 일개 칼잡이는 아닐 테고.”

간석의 여유로움은 어째선지 이쪽이 유리한 상황임에도 내 신경을 긁어댔다.

회귀한 사기꾼은 범죄가 들킨 상황도 처음 겪어보는 게 아니란 건가.

하여간 신을 만들려는 회귀자라니.

내가 의심을 하며 물었다.

“너, 설마 신식회냐?”

나를 잡아먹고 신이 되겠다는 의지를 가진 일생신교의 소수 종파.

그러나 간석은 콧방귀를 뀌었다.

“신식회? 배탈이라도 날 일 있나.”

“그럼 왜 신을 창조하려는 거지? 보아하니 신앙심도 없는 것 같은데.”

간석이 침묵했다가 낮게 말했다.

“목적을 위해 필요하니까. 악신을 불러내는 ‘제단’이 이곳에 있거든.”

난 그저 눈살만 찌푸린 반면에.

“설마.”

블라이넨은 처음 보는 창백한 얼굴로 물고 있던 담뱃대를 떨어뜨렸다.

탁.

담뱃대가 땅바닥에 부딪힌다.

간석이 그 반응에 픽 미소 지었다.

“그래, 그 얼굴이 보고 싶었지. 노화의 악신! 그분을 소환하려면 반드시 일생신교의 신이 필요해. 아무리 잘나더라도 회귀자라면, 곧바로 공포에 질리는 게 당연한…… 크헉!”

내 주먹이 간석의 앞니를 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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