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9화
다리가 많을수록 이동이 유리하다.
그래서 이족보행인 인간보다 사족 보행인 짐승이 훨씬 재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네는 우리보다 얼마나 신속하고 야비한 생물인 걸까.
“피해!”
내가 소리쳤지만 퀸소히니베의 대응은 반 박자 늦어버리고 말았다.
어둠 저편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큼지막한 지네가 그녀를 깨물었다.
“꺼지란 것이야.”
지네에게 팔뚝을 물렸지만 위급할 때 돋아나는 비늘이 독니를 막아냈다.
그녀가 지네를 밟아 터뜨렸다.
깨그작!
녹색 체액이 팍, 터졌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블라이넨은 별다른 혐오감을 표하지 않고 지네를 살폈다.
“독니에 도술을 발라놨군. 그래서 유령들도 쪽을 못 쓰고 당한 거야.”
“아까부터 도대체 도술이 뭔데?”
“신선들이 쓰는 청색대륙의 마법.”
블라이넨이 간략히 대답했다.
이곳 일생수련관에 있는 신선이라고는 오직 한 명뿐이다.
간석.
그가 이 지하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신선이 많이 강한 직종이냐?”
“오랜 수련이 필요하고, 각종 도술을 써. 최소한 마탑주만큼은 강해.”
요컨대 청색대륙의 고위마법사군.
간석은 나에 관한 일화는 지어냈지만, 도술 실력은 진짜배기인 듯하다.
기습해온 지네를 없애고 나자, 저편에서 커다란 지네들이 기어온다.
“모두 백 마리는 되는 것이야.”
“수련관 밑에 던전을 만들어놨네.”
나는 삼척검을 뽑아서 다가오는 지네의 몸뚱이를 내려쳤다가 경악했다.
‘뭐가 이렇게 딱딱해?’
베기는커녕 칼날이 튕겨 나온다.
지네의 외피는 석상의 내구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쇠붙이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부순 퀸소히니베의 괴력에 괜히 감탄하게 된다.
‘나는 괜찮겠지만…….’
블라이넨을 힐끔 곁눈질했다.
나야 마법을 쓰면 되지만 철강지네는 순수검사와 상성이 무척 나쁘다.
그러나 조금 뒤 나는 그녀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됐다.
“그게 뭐야?”
“불세출의 검 효과. 아까 신상 부수고 5레벨로 올랐으니까.”
블라이넨의 쌍검에서 푸르른 기운이 도사리더니, 지네 외피를 푹 가르고 단박에 그어서 찢어내 버렸다.
무용담에서나 접해봤던 검기(劍氣)!
그러나 그녀는 칼의 빛을 힐끔 보곤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직은 기가 옅군.”
저게 옅은 편이라고?
그런데도 벌써 저만한 공격력을 지녔다니, 완전한 검기를 익히면 그녀가 얼마나 강해질지 예상하지 못하겠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저 여자 걱정이겠군.’
어째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 밟는 맛이 있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외피를 와작 깨부수고, 블라이넨이 체내를 갈라버린다.
강력한 두 여자 덕분에 나는 후방에서 마법을 지원하기가 편해졌다.
파티원 세 명 전부 공격에 특화된 놈들밖에 없으니 싸움이 난장판이다.
‘화염마법도 자주 쓸수록 적중률과 파괴력이 괜찮게 숙련되어가는군.’
[철강지네를 불태웠습니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지네 떼를 몰살하고 있습니다!]
[마력이 3 추가로 오릅니다.]
[화기의 뱀 숙련도가 오르고 화염 계열 마법 파괴력이 증가합니다.]
빈사의 지네한테 계속 마지막 타격을 먹이자 능력치가 쭉쭉 올라간다.
블라이넨이 그런 나를 돌아보았다.
“야비하군.”
“그래 봤자 회귀자보다 더할까?”
“너는 그런 회귀자도 몰살시키지.”
“맞아. 언젠가 널 죽일 수도 있고.”
“…….”
블라이넨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목적이 같고, 서로 막대한 도움이 되어서 함께 다니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약간씩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싸웠던 기억이 이번 삶에 바로 무마될 리가 없고, 나도 그런 그녀를 방관하지는 않는다.
가끔 나와 그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양극인 것 같다.
어쩌면 재능으로 오르는 나와 노력으로 오르는 그녀는 어떤 삶이라도 친밀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적대하는 우리 둘의 경계선에 있는 퀸소히니베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싸울수록 친하고, 미워할수록 애증이라고 들어본 바 있는 것이야.”
“낭설이에요.”
“네 눈엔 우리가 친구로 보이냐?”
나와 그녀가 즉각적으로 반박했다.
모든 철강지네가 죽고 나서야 우리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계속 갈 건가?”
“그래야지. 지하에 뭘 숨겨놓지 않고서야 이런 지네가 있을 리 없지.”
블라이넨은 왼손으로 담뱃대를 꼬나물고 오른손에 검을 들고 걷는다.
그렇게 어두운 통로를 한참이나 내려갔다.
나는 수련관에 온 뒤로 정신이 없어 미뤘던 질문을 이제야 물어본다.
“불세출의 검이 성장을 멈췄어. 빠르게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몇 레벨인데.”
“4레벨.”
“…….”
블라이넨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벌써 그만큼이나 성장했다고?”
“하지만 너도 벌써 5레벨이잖아?”
“불세출의 검을 익힌 검사는 인류에서 오직 세 명. 그중에서 네가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 가장 어려워.”
“…….”
각 검사마다 스킬 레벨을 올리는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니.
“무슨 스킬이 그렇게 불공평하냐?”
“순전히 재능으로만 올라가는 너에게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나라고 노력을 안 했을까?”
“나보다 노력을 더 했을까.”
과연 나의 적수답게 블라이넨은 내 입을 닥치게 하는 실력도 상당했다.
‘내가 말재주로 이렇게까지 밀려본 여자는 또 처음이군.’
그런데 블라이넨도 나와 똑같았다.
“항상 너와 얘기할 때면 이런 식이야. 한 대 터지고, 한 대 때리고.”
“그럼 쌍방폭행이니 상해치사군.”
“역시 둘은 아주 친한 것이야?”
우리는 퀸소히니베의 오해를 무시하고 불세출의 검에 관해 얘기했다.
“네가 불세출의 검 4레벨에 오르는 시기는 마흔 중순은 되어서였다.”
그럼 나의 스킬 경지는 전생보다 10년 이상 훌쩍 넘어 앞선 것이군.
내가 불세출의 검을 벌써 4레벨이나 올릴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아크 리치를 살해했던 업적 덕분이겠지.’
대륙의 지배자를 죽이는 것만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내가 전생시절보다는 성장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건데.’
하지만 그저 능력치와 스킬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기고만장할 틈은 없다.
블라이넨은 나를 낮게 평가했었다.
능력치는 괜찮지만 오히려 검술 실력은 전생보다 훨씬 퇴화했다고.
‘스펙만 신경을 써서는 안 돼. 모든 재능을 정점까지 키워야 한다.’
나는 의지를 다졌고, 블라이넨은 불세출의 검에 관해서 설명했다.
“불세출의 검은 5레벨을 달성하면 각자 고유한 검술을 만들 수 있어. 나 같은 경우는 검기. 검의 절삭력, 내구력이 비정상적으로 상향되지.”
“그럼 나는?”
“못 알려줘.”
“뭐?”
“못 알려준다고. 네가 창설할 고유한 검술은 스스로 깨달아야만 해.”
나는 블라이넨이 일부러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을 믿든지 말든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거짓 정보를 줄 이유는 없어. 네가 최소한 전생만큼 검술 실력이 올라야 쓰러뜨릴 의미가 있으니.”
“하여간 불세출의 검 숙련도를 빠르게 올리려면 뭘 해야 하는데?”
“평범한 스킬은 비약을 마시거나 꼼수를 써서 빠르게 숙련할 방도가 존재하지만, 불세출의 검은 달라. 정석적인 방법밖에는 존재하지 않지.”
그녀가 검지와 중지를 폈다.
“크게 두 가지. 미치도록 수련하거나, 미치도록 강한 적을 죽이거나.”
블라이넨은 전자의 방법을 택했지만, 나는 시간이 촉박한 편이다.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에도 불멸아귀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택해야 할 것은 후자.
‘칼로 미치도록 강한 적을 죽인다.’
지하는 이제 보니 던전이 아니라 거의 미궁 수준으로 길이 복잡했다.
다섯 번째 세 갈림길이 나오자, 더 이상 기억력에만 의존할 순 없었다.
수련관 지하에 이렇게 위험한 미궁이 존재하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나.
“회귀자가 말해봐. 미궁에서 길을 제일 잘 찾는 방법이 뭐냐?”
“부숴버리고 뚫으면 제일 편하지.”
“…….”
당연한 소리지만 지하의 외벽은 두꺼워서 칼, 마법으로 뚫리지 않았다.
하여간 더 이상 깊게 들어가면 종파에서 길을 잃게 될 확률이 높다.
이쯤에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때.
지하 깊숙이 들어갈수록 왼쪽 손등의 펜타그램이 진하게 빛이 났다.
[대륙의 지배자를 죽이고 생겨난 펜타그램의 새로운 선이 빛납니다.]
[새로운 권능이 추가됐습니다.]
[조력자가 필요한 기연을 위해서 당신을 곤경에서 1회 구제합니다.]
악마의 펜타그램에서 뿜어진 붉은 빛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가리켰다.
‘조력자가 날 도와줬다고?’
조력자가 내게 직접 도움을 줬다는 문구가 떠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내가 저곳에 있을 기연에 도달하길 바라고 있단 의미이리라.
블라이넨이 내 손등에서 빛나는 붉은 별을 보며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 펜타그램, 아주 편리하군.”
“그러게. 악마의 펜타그램이란 이름이 몹시 거슬리기는 하지만.”
“악마라고 반드시 악할 것이라는 관념은 편견일 수 있지.”
“어째 꼭 만나본 것처럼 말한다?”
“여긴 없고, 다른 세상에 가면 있어.”
“…….”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른 세상? 그런 데도 가봤냐?”
“가보진 못했어. 다만 다른 세상을 비추는 진귀한 아이템도 있으니까.”
하여간 간편한 길안내 덕분에 우리는 몬스터도 만나지 않고 이동했다.
붉은빛의 끝에는 어느 철문이 벽의 중앙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물론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단숨에 따고 들어갔다.
끼익…….
하수관이 연결되어 있는 장소였다.
각종 기구가 약초를 달이고 쓰디쓴 냄새가 온갖 사방에서 올라온다.
“이곳이 지하의 중심부로군.”
“뭔가 수상한 곳이란 것이야.”
이곳에 들어서자 붉은빛이 끊겨버려서 길안내가 중지되고 말았다.
두 여자는 약초를 끓이는 가마솥이나 바닥을 살폈지만 나는 달랐다.
보물탐색 재능 덕분에 내가 보상을 위해서 가야 할 곳은 명확히 보였다.
두터운 약초함을 밀어 치워버리고 뒤쪽에 숨겨져 있는 문을 열었다.
‘바로 여기인가.’
좁은 석실에는 고급스러운 약병 하나만이 덩그러니 진열되어 있었다.
얇은 관을 통해서 깔때기처럼 진액이 약병으로 한 방울씩 떨어진다.
목 끝까지 황금빛 용액이 가득 찬 약병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약초를 끓이던 이유가 이거였네.’
긴장하며 가득 찬 약병을 쥐었다.
‘이게 간석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자, 내가 얻어야 할 기연이로군.’
난 마른침을 삼키고 그걸 살폈다.
「사상 최강의 역대급 발모제」
제작자명: 간석
수십만 약초를 끓이고 졸인 발모제. 수없는 실패에 좌절한 회귀자가 마침내 제작에 성공한 완제품이다.
+완성된 지 40분도 되지 않았음.
+두피에 뿌리면 순식간에 머리칼이 풍성하게 자라남.
+탈모 완치 가능!
“…….”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두 사람이 나를 뒤따라서 들어왔다.
“그 약병이 무엇인 것이야?”
“……아주 획기적인 명약인데.”
내가 넘겨준 약병의 효과를 읽고서 두 사람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결국 우리는 허탈한 분위기에 잠겨야만 했다.
“간석은 오직 혼자서만 가슴 아픈 고민을 품고 있었던 것이야.”
“발모제 숨기겠다고 이런 지하에 미궁을 만들고 지네를 풀어두다니.”
“탈모가 굉장히 부끄러웠나 보다.”
나는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기연이 고작 이딴 거였어?’
이건 뭐, 헛걸음이 따로 없다.
날 여기까지 오도록 만든 조력자를 원망스럽게 여기고 있을 때였다.
츠스스스…….
중심부 건너편에서 지네 떼가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향해 접근해왔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출몰에 우리가 깜짝 놀라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나는 곧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지네 떼가 우리를 그냥 지나쳤다.
우리와 몸이 서로 부딪쳐도 공격을 하기는커녕 매섭게 지나쳐 버린다.
눈살을 찌푸리다 상황을 파악한다.
‘이건…….’
지금 지네 떼는 도망치고 있었다.
저편의 다가오는 적을 두려워하며.
“나아는…… 범처얼이다…….”
기분 나쁜 목소리가 흘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