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8화
‘진정한 신이 강림한다고?’
엿들은 얘기가 너무나 예상 밖의 내용이라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좀 더 귀를 기울였지만 간석은 그 이상의 얘기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간석이 제법 긴 시간 동안 예배를 마치고 떠나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토했다.
‘영신전에 너무 오래 숨어 있었어. 오늘의 조사는 여기서 마쳐야겠군.’
혹시나 다른 승려와 마주치게 되면 제아무리 숨더라도 들키게 되리라.
머릿속의 의문점들을 뒤로하고, 나는 일단 영신전을 벗어났다.
* * *
“전지전능한 신이란 세상을 기원으로 힘을 얻습니다. 자연, 생명, 대륙. 모든 것이 신의 근원이 되지요.”
일생수련관 입문 셋째 날.
오늘 일과는 검술수련 없이 일생신교에 관한 신화를 복습하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내 후일담을 취할 만큼 자기애가 넘치지 않는 나는 당연히 일과를 빼먹으려고 하였다.
하나 은근슬쩍 발 빼려는 날 노련한 승려가 회초리를 쥐고 막아섰다.
“오늘 하루도 빼먹으시면 단순히 수료가 늦춰지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쫓겨나고 싶으십니까?”
이 수련관에 숨겨진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는 수련생 신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팔자에도 없는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학술전(學術殿)에서 노승이 무릎을 꿇고는 수련생에게 설교를 하였다.
“82회차 범철 님께서 가라사대, 시나브로 삼라만상 고매해지되…….”
노승의 잔잔한 목소리에 휘감기자니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진다.
내가 나에 관한 신화를 전해 듣는데 이토록 살인적으로 재미없다니.
수련생들도 지루하단 기색은 느끼는 모양이지만 딱히 티내진 않았다.
일생수련관 수련생 모두가 일생신교의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중에 범철이 가장 강했던 전생은 몇 회차인 것이야?”
오직 맨 앞줄에 앉은 퀸소히니베만 질문을 하며 설교자를 기쁘게 했다.
그 바람에 노승은 열의를 띠었고, 더욱 재미없는 설교로 우릴 고문했다.
“범철 님의 강함에 관해서, 신학자들이 추측하는 가설은 넘치도록 있습니다만, 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때 반쯤 멍을 때리고 있다가 귓가를 스치는 말에 고개를 든다.
“45회차 시절, 유일하게 회귀자를 다스린 철가면 왕. 나는 그자의 정체가 범철 님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어랍쇼, 저 노승. 보기와는 다르게 분석력은 제법 뛰어날세.
45회차 시절, 난 철가면을 쓰고 신분을 숨긴 채 왕으로 군림했다 한다.
전생을 통틀어서 회귀자를 통치했던 유일한 왕, 그것이 바로 나였다.
‘그래 봤자 전생의 기억은 없지만.’
노승은 특유의 느릿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주장을 이어갔다.
“물론 신학자들이 반발하는 주장이겠지만, 내 생각은 올곧습니다. 철가면 왕이 범철 님이었다고 상정을 할 경우, 범철 님이 가장 완벽했던 전생은 분명 45회차 시절입니다. 청색대륙을 통치하신 것은 짧은 시기였으나, 그 시절 범철 님은 그저 대왕(大王).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온돌로 미적지근한 바닥 덕분에 몸에 온기가 퍼져 너무나 노곤해진다.
그러나 무슨 얘기는 경청해 듣는 퀸소히니베 때문에 노승은 과로를 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도대체 설교는 언제 끝나는 거야?
노승은 다리가 저리지도 않나 보다.
“청색대륙의 올바른 신이 범철 님이지만, 물론 세상에는 유일하게 그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도 있습니다.”
내가 힐끔 블라이넨을 곁눈질했고, 옆에서 노련하게 졸던 그녀가 말했다.
“뭘 쳐다봐.”
“잘 자라고.”
노승이 잡담한 우릴 찌릿 노려보곤 목탁을 탁 두드리고 엄숙히 말했다.
“일생신교 신자는 결코 모를 리 없는 악종이죠. 태아조차 늙게 하는.”
“노화의 악신……!”
신앙심 깊어 보이는 수련생 몇몇이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치를 떨었다.
노승도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화의 힘으로 태산을 멸하고 선을 섬멸하는 악신. 모든 것이 범철 님께 반하는, 살아 있는 재앙입니다.”
감기던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간다.
청색대륙에 블라이넨 말고도 또 나의 숙적이 존재하고 있단 소리인가?
이미 그녀 하나로도 충분히 곤란한데, 노화의 능력을 지닌 악신이라니.
“전생 설화에 따르면 범철 님과 노화의 악신은 서로 마주친 것만으로도 격렬히 맞붙게 된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말이죠.”
혹시나 전생에서 내게 깊은 원한을 가진 회귀자의 소문이 와전된 걸까.
아니. 어쩌면 내 편견과는 달리 인간이 아닌 괴생물체일지도 모른다.
‘정보가 과장된 것도 많겠지만, 내게 대적할 수준이면 꽤 강하겠지.’
노화의 악신.
보는 것만으로도 날 죽이려 든다니.
앞으로 여정에서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처사이리라.
‘어떤 녀석일지 궁금하긴 하…… 아니다. 호기심 갖지도 말아야겠어.’
꼭 궁금해하면 마주치게 되더라.
하여간 그 기나긴 설교가 끝난 뒤에야 우리는 저린 다리를 풀고 일어섰다.
“수련관 생활은 내게 꼭 맞는 것이야. 훈련은 아주 쉽고 식사도 제때 주고 내 노예의 전생도 들려주고.”
“넌 그 지루한 설교가 재밌었냐?”
“귓속에 기어오는 모든 이야기에는 경청할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야.”
하여간 나는 영신전에서 목격했던 일을 두 여자에게만 털어놓았다.
“그 지하에 뭔가 있는 것 같군.”
“그 신선이 무척 수상한 것이야.”
우리는 승려들 경계가 느슨한 밤을 틈타서 영신전에 잠입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달이 밤하늘 중앙에 들어서자, 각자 몰래 방을 나선다.
각등을 들고서 경비를 서는 승려가 있었지만, 블라이넨이 기절시켰다.
“윽!”
뒷목을 칼집으로 치자 승려는 단박에 기절했고 퀸소히니베가 놀랐다.
“어떻게 정확히 딱 한 대만 쳐서 인간을 기절시킬 수 있는 것이야?”
“누구한테 딱 한 대 맞고 기절해본 경험이 많으면, 알아서 깨우치지요.”
블라이넨이 살며시 나를 쳐다봤고, 나는 무안하게 입술만 핥았다.
“네가 전생 얘기해봤자 우리는 못 알아먹으니까, 빨리 가기나 하자고.”
퀸소히니베가 망을 보았고, 나와 블라이넨은 영신전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지하와 연결되는 장소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 짚었나?’
구미호가 영신전을 조사해보라곤 했지만, 지하는 아니었던 것일까.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상에 대고 간석이 말을 했었지. 문지기의 몸체를 빌려서 말한다고.’
때마다 예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어디 가는 거지?”
“나의 신상이 있는 중심부로.”
영신전 중심부로 도달한 우리는 나를 본따서 만든 석상에 다가갔다.
가부좌를 튼 신상은 거의 5미터는 되었는데 아주 크고 무거워 보였다.
“이 석상 밑은 조사를 안 해봤지.”
“둘이서 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래서 간단한 해결책을 택했다.
마나를 휘감은 위력적인 화염을 쏘아서 석상을 파괴해버리려던 순간.
쿠웅.
나의 신상이 가부좌를 풀었다.
블라이넨이 곧바로 칼날을 세웠다.
“저 신상이 문지기였던 모양이군.”
굳건하게 모셔지던 신상이 자세를 바꿔 일어나 암석의 검을 움켜쥐었다.
“너희, 출입, 금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사찰에 있을 법한 조각상은 전혀 아니로군.
역시나 간석은 이곳에 비밀스러운 뭔가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골렘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막대한 내구력을 지닌 적에겐 검보단 마법으로 싸우는 게 적격이겠지.
신상이 바위로 된 장검을 둔기처럼 과격하게 휘두르며 그녀를 노렸다.
블라이넨이 앞에서 시선을 끌 때, 나는 뒤에서 마법으로 저격했다.
“이단, 살해, 은멸.”
바위로 된 검을 내려칠 때마다 바닥이 움푹 패일 만큼 파괴력이 컸다.
회귀자라도 애먹을 몬스터였지만, 우리의 눈에는 허점이 훤히 보였다.
워낙 동작이 느렸고 화염과 냉기마법을 번갈아 쓰자 몸체가 갈라진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청석은 외부 장식에나 쓰이는 소재라 암석치고는 무딘 편이니까.”
나와 블라이넨의 협공에 신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크, 허, 헉!”
[문지기 석상을 깨부쉈습니다.]
[힘이 3 오릅니다.]
[신상을 부숴 악명이 오릅니다.]
산산이 갈라진 신상이 지키고 있던 자리에는 드넓은 문짝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열 수는 없었다.
문짝에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것이다.
“도술로 잠가놨군. 귀찮게 됐어.”
자물쇠가 안개로 감싸져 있었다.
블라이넨이 눈살을 찌푸린다.
“이 자물쇠는 검으로 부술 수가 없어. 우선은 열쇠를 구하거나 도술을 풀 수 있는 부적을 구해 와야…….”
철컥!
“뭐해, 퀸소히니베 안 불러오고.”
“…….”
* * *
문짝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로 연결된 통로였다.
하수관이 곳곳에 있어서인지 계속해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세 사람은 승려한테 빼앗은 각등을 들고 지하를 걸어 내려갔다.
“이 지하에 무엇이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야.”
“제발 뭐라도 보상이 있기나 했으면 좋겠다. 신상까지 부있으니 승려들이 우리를 아주 죽이려고 들걸.”
지하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고 섣불리 움직였다간 길을 잃기 쉬웠다.
그래서 난 유령기사단을 소환했다.
「하, 청색대륙의 기운! 내가 죽은 고향에 돌아오니 퍽이나 반갑군.」
「반가워요! 우리에게 어떠한 명령을 내려주실 건가요, 주인님?」
「설마 또 길 찾기는 아니겠지?」
내가 성장할수록 최대 20인까지 인원이 늘어나는 유령기사단!
아크 리치를 죽이고서 내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인지 새 유령기사단의 일원이 2인이나 편성되어 있었다.
고글을 쓴 유령폭탄병과 차가운 투구를 쓴 얼음영혼기사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폭탄을 다뤄요. 영혼까지 터뜨려 버리죠!」
「잘 부탁한다. 나는 한 번 모신 주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사단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이야. 그러니 너희가 길을 찾아라. 유령은 암흑 속까지 잘 보고 벽도 통과하니까.”
그러나 나의 명령에 전투에 호전적인 기마병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또 길이나 찾으란 말인가!」
「우리의 힘을 쓸 줄 모르는군.」
「고귀한 주인을 만났어야 했어.」
청색대륙이 고향이라던 쌍방패 엘프 유령기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우리 처지에 어쩔 수가 있나. 시키면 해야지. 다녀오겠어.」
「얼른 다녀오겠어요. 주인님.」
10인의 유령기사단이 어둠 저편의 지하를 향해서 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저편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려댔다.
「꺄아아악!」
「이, 이놈들이…… 아, 안 돼!」
「사, 살려다오! 이미 죽었지만!」
뜻밖에도 통로를 탐사하러 갔던 유령기사단의 고통에 찬 목소리였다.
뜻밖의 비명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려던 찰나, 갑자기 문구가 떠올랐다.
[유령기사단 전원이 처치당해 명계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유령들이 전멸당할 정도면 저 너머에 대체 뭐가 도사리는 거냐?”
“분명히 끔찍한 사신일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마른침을 삼켰고, 블라이넨은 자세를 낮춰 칼을 쥐었다.
“온다.”
그녀의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 돌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