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7화
과연 회귀자는 고리타분한 절차 따위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향하였다.
여승이 옷을 꽃잎처럼 한 꺼풀 벗었고,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난다.
따스한 손이 나의 가슴을 쓸었다.
“오늘 낮, 수련하시는 걸 봤어요.”
“어땠습니까?”
“강해 보이셨죠. 검도 잘 쓰시고.”
여승의 손이 나의 옷깃을 만진다.
짧은 머리칼이나 승려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매혹적인 눈초리였다.
특히나 의복을 말끔히 벗자 굴곡진 자태가 눈을 떼기 힘들 수준이다.
그녀에 의해 나는 벗겨지고 있다.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내가 웃으며 놀란 기색을 숨겼다.
“무엇을 말입니까?”
“새로 온 수련생…… 아니, 사찰의 모든 이가 덤비더라도 검을 든 당신 하나를 죽일 수 없단 사실을 말이죠.”
여승의 눈 밑에는 점이 찍혀 있다.
그 자그마한 눈물점이 형용할 수 없는 매혹을 한층 더 관능적으로 보이게 했다.
내 상의가 벗겨져 맨몸이 보인다.
“오늘 밤, 내가 당신에게 끌렸네요.”
살결에다 어떤 기름을 발랐는지 여승의 육체가 보석처럼 반들거린다.
달라붙은 그녀가 나의 뒤통수를 붙잡고 숨결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풍겨오는 익숙한 박하향.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가 막는다.
멈칫한 그녀의 어깨를 부서지도록 붙잡고 벽까지 세차게 밀어붙였다.
“왜 입술에 독을 발랐습니까?”
“무슨 의미인가요?”
“왜 나를 죽이려 합니까?”
나의 두 번째 질문에도 여승은 대답하지 않고 오묘한 눈빛만 보냈다.
“죽이려는 것은 아니에요. 죽음 너머, 최상의 쾌락을 주려는 거지.”
“에둘러 말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나는 이불 밑에 숨겨둔 칼을 꺼내 쥐고 여승의 목에 가져간다.
가까이 붙은 데다, 옷도 벗고 있어서 그녀에겐 반격할 여지조차 없다.
방금 일부러 내가 그녀를 붙잡고 방 안으로 들였던 이유였다.
‘이러지 않았다면 분명 당했겠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지금 아주 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모르는 여자에게 목숨도 내놓을 만큼 욕정에 굶주리진 않았다.
평정을 찾으려 애쓰며 힘을 준다.
“너는 누구냐. 솔직히 털어놔. 나는 누구도 곱게 죽여준 적이 없거든.”
여승은 목에 닿은 칼날을 흘깃 내려다보다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짐작하는 바대로, 이 사찰의 평범한 여승은 아니겠지요.”
여승이 탐스러운 허벅지를 쓸었다.
“나와 입을 맞추면 최고의 쾌락을 경험할 수 있을 텐데. 후회할걸요?”
“그래서 지금 입술 씹잖아. 피나.”
“솔직히 죽더라도 상관없잖아요.”
여승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차피 회귀자는 무한히 살면서. 그중에 딱 하나만 버리면 될 것을.”
기가 차서 픽 웃고 고갤 휘젓는다.
“나의 삶은 이번뿐이니까.”
“……아니, 어머나. 설마.”
여승이 나를 놀란 표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웃었다.
“회귀자가 아니라…… 과연 그랬군요. 그러면 내가 올 필요도 없었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배후를 캐내려고 칼을 들이민 건데 들을수록 대화가 이상하게 흘렀다.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여승은 당황하지 않았고, 겁먹지도 않았다.
죽음에 초연한 것이야 회귀자 특성이지만, 그녀는 내가 자길 죽일 수 있을 거라 상정도 안 하는 듯한 태도였다.
“진심으로 유혹했다면 넘어올 테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낼게. 꼬마야.”
여승의 부드럽던 음색이 피로하게 바뀌더니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팔에 힘을 줬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은 무력했다.
“내 가벼운 장난을 눈치챈 걸 보니 머리는 있나 보네. 그 아이도 잘 키워주고 있으니 좋은 정보를 줘볼까.”
여승이 나를 탁 떠밀었다.
“영신전을 조사해 봐. 서둘러서.”
* * *
“윽!”
정신을 차렸을 때 씨암탉 우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고 있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벌써 날이 밝아온 것이다.
방에는 나뿐이었고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에 기침이 나왔다.
‘꿈이었나?’
하나 풀어헤친 상체는 그대로였다.
나는 여승이 부드럽게 쓰다듬어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꿈 치고는 너무 생생했는데.’
아침부터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동자승을 붙잡고 여승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동자승은 어리둥절해했다.
“눈물점이 있는 여승이요? 우리 사찰에 여승들이 계시긴 하지만, 눈물점이 있으신 분은 없으신데요.”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빠졌다.
‘내가 어젯밤 뭐에 홀렸던 건가.’
아침식사 때 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블라이넨이 턱을 짚었다.
“구미호의 소행이군.”
“구미호?”
“보기 드문 영물이야. 가끔 인간으로 변신해서 사람과 정사를 나눠. 하지만 구미호가 먼저 찾아오는 경우는 몹시 드문데, 희한한 일이군.”
구미호에 관한 일화라면 예전에 헤르탄한테서 들어봤던 적이 있었다.
나와 함께 동시에 구미호한테서 복상사를 당했던 적이 있다고 했었지.
블라이넨이 나를 보며 픽 웃었다.
“하여간 아쉽게 됐군.”
“……복상사 당할 뻔했던 게?”
“회귀자가 최고로 치는 죽음 중 하나야. 슬픈 후유증은 깊게 남지만.”
복상사를 즐기는 변태적 성애는 대체 얼마나 미쳐야 갖게 되는 거지?
내가 어찌나 수척했는지 퀸소히니베가 꽤 안쓰러워하며 뺨을 쓸었다.
“내 노예가 구미호한테 홀리지 않도록 오늘 밤 함께 있어 줄 것이야.”
“……고맙지만, 거절하지.”
왠지 그녀와 함께 잤다간 블라이넨이 날 죽일 확률이 높아질 것 같아.
하여간 아침밥을 빠르게 먹고 수련관 뒤편으로 가서 호리병을 열었다.
“컁!”
“……아침햇살이 좋아. 춥지만.”
백야와 초화가 각자 기지개를 켰다.
두 애완수를 소환한 난 부쩍 자라난 백야를 안아들고 자세히 살폈다.
『백야』
특이사항: 영물(성장속도 빠름)
힘: 11 체력: 13 민첩: 23 마력 : 11 행운: 19
소지 스킬: 물어뜯기(Lv3), 냄새추적(Lv3), 할퀴기(Lv2)
주인에 대한 충성도: ‘착하고 멋진 주인! 함께 다니면 마음이 행복해.’
현재 건강상태: 공복임(식욕 왕성)
잠재력: A급(재수 없게 뛰어남)
명랑하고 호기심 많은 영물. 아직은 어려서 누구든 잘 따른다. 애교가 아주 많으며 누군가 자신의 털을 쓰다듬어주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활동력이 몹시 높아서 흰 털이 금방 더러워짐. 잘 씻겨줘야 한다.
+자주 털을 빗겨주면 호감도 상승.
+어쩌다 나오는 회색 털을 골라서 뽑아주면 주인의 행운 능력치 상승.
+건강히 잘 키워 성장하면 언젠가 구미호가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보 두 개 추가!)
+비밀스레 수염을 무척 아끼고 있다. 함부로 뽑으면 싫어하니 주의!
+생간을 아주 좋아한다. 생간을 먹여줄 때마다 호감도가 크게 오른다.
*호감도를 쌓을수록 백여우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컸지?’
백야는 하루씩 꺼낼 때마다 몰라볼 만큼 부쩍 몸집이 자라나 있었다.
게다가 20일쯤 전과 비해서 모든 능력치가 10 이상씩 오른 데다 민첩 능력치는 벌써 20을 넘어섰다.
별다르게 사냥한 것도 없는데 오로지 성장만으로 이렇게 자란 것이다.
‘이제는 새끼라고도 못 부르겠네. 이래서 성장력이 빠르다고 했구나.’
“컁!”
백야는 살갑게 몸을 들이밀며 내 얼굴을 마구 핥았고 난 픽 웃었다.
‘건강히 잘 키우면 언젠가 구미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설마 밤에 진짜로 찾아올 줄이야.
상태창에 표시된 정보에 의하면 백야는 구미호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나는 보드라운 몸뚱이를 양손에 안고 백야의 눈망울을 마주 보았다.
“넌 대체 구미호랑 무슨 사이냐?”
“컁?”
내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야는 땅에 내려와 머릴 갸웃댈 뿐이었다.
한편 퀸소히니베는 초화랑 친해지려는지 붙잡고 열심히 말을 걸었다.
“참 상쾌한 아침인 것이야.”
“…….”
“나도 낯을 꽤 가리고 친구를 만들기 어려워하는 것이야. 그래서 초화가 말이 없어도 이해하는 것이야.”
“…….”
항상 입을 다물고 있던 초화가 퀸소히니베의 바짓단을 꼭 잡았다.
“……엄마야?”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야?”
“……아빠랑 아주 가까워 보여.”
“내가 노예랑 부부를? 하! 전혀.”
“……그래도 엄마 해줘.”
“캬앙.”
조그만 초화랑 백야가 꼭 붙어서 애타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픽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들이 감히 고귀한 용을 노예의 짝으로 두려 하는 것이야.”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내 노예의 짝으로 블라이넨은 어떤 것이야?”
“……엄마야?”
“캬앙?”
두 애완수의 순진무구한 눈길이 대상을 바꿔 적발의 검사에게 향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블라이넨이 처음으로 난감한 미소를 짓고 허리를 낮춰서 애완수를 가까이서 바라봤다.
“안 돼. 나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나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저 녀석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네. 그런데도 어울리고.’
역시 회귀자랑은 같이 다녀봐야 성격의 양면성까지 알게 되는 법이다.
하여간 애완수들 아침을 챙겨주고 나는 오늘 훈련에 멋대로 불참했다.
‘구미호가 영신전을 조사해보라고 했었지.’
무슨 의도로 내게 그런 정보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사찰을 겸하고 있는 수련관은 영신전에서 나의 신상을 모시고 있었다.
영신전은 화려한 문양의 기와 건물인 데다가, 고승이나 대사범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성스러운 장소였다.
‘경계가 그리 삼엄하진 않네.’
청소를 하던 동자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몰래 영신전에 침입했다.
커다란 건물 중앙 깊숙이 향한다.
‘저게 나를 본딴 조각상인가?’
나의 모습을 조각한 조형물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다.
커다란 청석을 깎아서 제작된 석상은 가부좌를 튼 중년 남성이었다.
제왕처럼 골격이 벌어지고 흉터 많은 남성은 표면적인 외모는 나와 약간 닮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신자가 조각하면서 자기 취향과 편견을 상당히 많이 넣었나 보군.’
나를 모시려고 제작된 신상을 보자니 참으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지전능한 신이라…….’
아크 리치가 나에게 말했다.
자신은 전지전능한 신을 꿈꿨다고.
‘그러나 신이 되길 원하는 것은 아크 리치 혼자만이 아니라고 했지.’
아크 리치는 경쟁자를 경계했다.
그래서 지나온 회차 동안 스스로 회귀할 수 있단 사실을 은폐해왔다.
놈이 날 필요로 했던 것도 내가 신이 되기 위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내가 신이 되기 위한 재료라니.’
수없이 곱씹어봤지만 그 말의 의미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전지전능한 권능의 신이 되는데 왜 나 따위가 필요하단 거지?
‘신. 그깟 것 되어봤자 엿 같은데.’
이것은 진심이다.
무수한 소설과 설화의 창조주들이 분개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
경험자로서 충고하건대.
만일 누군가 우연히 신이 될 기회를 얻는다면, 부디 거절하길 바란다.
신이 된다는 것은 아주 엿 같다.
떠받들어지는 것은 매혹적이지만 신이란 것은 혹독한 봉사원이니까.
제정신이 아닌 신자들이 나를 숭배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식인하려고 들까 봐 억지로 신분도 숨겨야 하고 말이지.’
하여간 잡생각을 끝내고 영신전의 내부 곳곳을 자세히 살펴본다.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는데.’
나의 신상도 살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다.
‘시간을 오래 끌면 누가 올 텐데.’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앞으로 이곳을 자세히 조사하기가 힘들 것이다.
초조히 영신전 내부를 살피고 있을 때, 문득 바닥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이 소리는……?’
퍼뜩 엎드려서 바닥에 귀를 댔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하수관!’
하수관과 이어지는 지하가 영신전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혹시 구미호가 조사하라고 말한 것은 영신전의 지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수련관에서 필요 이상 약초를 달이는 것도 수상하고.’
그 구두쇠 신선이 다친 수련생에게 편히 약초를 달여 줄 것 같진 않다.
어찌 됐건 지금 당장 조사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면 여기 어딘가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텐데.’
사방을 열심히 찾아보고 있을 때.
누군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석상 뒤로 숨었다.
누군가 신상 앞에 털썩 앉았다.
“문안 인사 올립니다. 신이시여. 오늘도 비록 문지기의 몸체를 통해서나마, 성과를 보고 드리겠나이다.”
……간석의 목소리이다.
흠칫했으나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신상에 대고 인사 올린 것이었다.
한껏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비록 후보 한 명이 죽었으나 머지 않았습니다. 이번 회차를 집어삼킬 ‘진정한 신’께서 강림할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