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6화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하다하다 가짜도 판치는군.
사실 지금 배낭에 약초 삼천 개 값어치의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멍청하게 바칠 생각은 없어.’
귀중한 소지품을 긁어모아서 수련관에 바치는 것보다, 날 사칭하는 사기꾼이나 한 번 보고 싶었다.
내 이름을 쓰는 가짜에게 죽었다는 시체들을 넌지시 바라본다.
“범철의 검을 배우려 와놓고 다들 범철한테 죽었다고? 좀 이상한데.”
“저들은 만일 죽더라도 범철 님과 칼을 겨루고 죽기를 원했으니까요.”
블라이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한 번에 한 명씩 가능해요. 범철 님과 일 대 일 맞대결로 20분간 살아야 하고, 무기는 검만 허용돼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당신들 중 한 명만 살아도 전원통과로 치겠어요.”
“쌍검도 되나?”
“검이라면 뭐든지 괜찮아요.”
“죽여도 되나?”
“예?”
동자승이 황당해했지만 블라이넨은 무뚝뚝한 어조로 되물을 뿐이었다.
“죽여도 되냐고.”
“상관없어요. 그런데 그럴 수 있어요?”
블라이넨은 말없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고, 내가 그런 그녀를 막았다.
“됐어. 내가 먼저 도전하지.”
“아니, 상대가 그 범철 님이라니까요? 두렵거나 떨리는 것도 없어요?”
“관계없으니까, 검으로 붙자고 해.”
동자승은 우리 두 사람을 이상하단 눈초리로 보다가 사찰로 돌아갔다.
블라이넨은 나를 흘깃 보았다.
“검은 내가 쓰고 싶은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 싸울 기회는 흔치 않잖아?”
“너를 죽일 기회도 흔치 않은걸.”
“내가 너를 살려줬잖아. 너도 나를 살려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녀는 나를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우선은 칼자루에서 손을 내렸다.
아까부터 참았다는 표정으로 퀸소히니베가 궁금해하며 질문했다.
“어째서 내 노예를 사칭하는 자가 저기에 있는 것이야?”
“믿겠냐? 내가 여기서 신이란다.”
“신?”
내가 놀란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할 때, 동자승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범철 님께서 나오셨어요!”
밤색 머리칼을 지니고 무성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칼을 차고 나왔다.
하나 같은 밤색이라도 색상이 나보다 좀 더 진하고, 수염은 입가 주위에 덥수룩해 턱도 덮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마주 보았는데도 그렇게 닮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위장 자체는 그럴듯한 편이군.’
나의 가슴 부근에 시선이 위치한 남자가 오만한 자세로 턱을 들었다.
“범철. 그쪽은?”
내가 싱긋 웃어 보였다.
“보잘것없는 놈은 이름도 알 것 없죠. 신이랑 붙게 돼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스러진 자가 수없이 많지.”
남자가 멋들어지게 말했고, 난 간지러워서 헛웃음이 튈 지경이었다.
‘아니, 사칭할 거면 고증을 좀 제대로 하던가.’
신격화된 나의 이미지와는 비슷할진 몰라도, 진짜 나와는 너무 다르다.
내가 저렇게 상시 진지하게 허세를 뿌리고 다니는 놈은 아닌데 말이야.
동자승은 볼 것 없다는 눈길로 우리 둘을 보며 모래시계를 뒤집어엎었다.
“20분이에요! 바로 시작합니다!”
모래 알갱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남자와 난 서로 살피며 다가섰다.
가까워지자 키 차이가 극명해진다.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의외로 키 작군. 혹시 조력자냐?”
날 사칭한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나는 참을성 없이 놈의 말을 도중에 끊는다.
그리고 가짜의 머리가 떨어졌다.
데구르르.
허무하게 끝났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놈의 시체.
“어?”
동자승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나는 피 묻은 칼을 휘저어 털었다.
‘이거, 예상보다 너무 손쉬운데.’
이런 기습도 막아내지 못하다니.
범파 장로, 오삭보다 못한 놈이다.
시체를 내려다보다 문득 뒷목에 검게 새겨진 ‘48’이란 숫자가 보였다.
‘문신인가? 특이하군.’
나는 칼을 거두며 동자승을 봤다.
“이제 수련관에 들어가도 되겠지?”
순식간에 벌어진 결과에 동자승은 잠시 멍해 있다가 두피를 긁적였다.
“에이씨! 이 사람도 사칭이었구나. 그래도 이번에는 혹시나 했었는데.”
“가짜인 걸 알고도 놀라지 않는군?”
“범철이라 주장하는 인간을 사찰에서 재워주니, 하루 이틀 무전취식하고 가는 사기꾼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자면 이 수련관을 운영하는 신선 놈도 순 사기꾼이던데.
동자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이번 사람은 실력 있어 보여 거의 믿을 뻔했는데, 이름도 모르는 일개 도전자한테 단숨에 목이 떨어진 걸 보니 사칭이 확실하네요.”
사칭한 사기꾼이 약하단 생각에 내가 강하단 추측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동자승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대로 시험을 통과했네요. 그쪽 일행은 모두 입문할 자격 있어요. 이 문의 경계를 넘는 순간, 당신들 모두 일생 수련관의 수련생이에요.”
우리는 수련관의 문턱을 넘어섰다.
[일생 수련관에 입문했습니다.]
[수련관 수준은 중급입니다.]
[검을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초심 수련관 격파전적이 있기에 도장 깨기 도전이 가능합니다.]
* * *
여러 건물이 놓인 수련관의 중심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머리 신선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역시 여기 올 줄 알았지. 듣자니 범철을 사칭한 자를 죽이고 시험을 통과했다고? 고맙지만, 아쉽군. 내가 직접 그 사기꾼을 봤으면 당장 알아보고 내쫓았을 텐데 말이야.”
사기꾼이 태연스레 능청을 떨었다.
나는 의구심을 갖고서 물었다.
“그 범철이 수련관에 왔다는데 직접 얼굴을 보지도 않았던 겁니까?”
“뭐, 난 수련관에서 따로 할 일이 많아서 밖에 자주 나가진 않거든.”
참나,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신선이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일생 수련관에 입문한 것을 환영하지. 내가 간석. 이곳의 주승이자 너희가 몸소 모셔야 할 대사범이다.”
간석은 본인을 소개한 뒤, 초면에 봤을 때처럼 아주 유난을 떨었다.
범철의 첫 스승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1회차 시절 자신과 제자의 일화에 대한 얘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날 제외한 일행은 의외로 간석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는데, 그 집중은 범철의 성적 취향에서 절정에 달했다.
“내 기억에 범철이 놈은 붉은 머리칼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써서 하룻밤만 보내자며 늘 치근대곤 했는데…….”
블라이넨이 긴 눈썹을 구부렸다.
“사실인가?”
“그러겠냐?”
나는 단박에 속삭이며 반박했다.
“단지 어디 그뿐인가? 범철은 정력조차 남들보다 비상했지. 마흔 줄이 넘어선 어느 날 사라지더니, 무려 하늘에 승천하는 용을 겁탈하고…….”
퀸소히니베가 크게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날 경계하며 소곤거렸다.
“정말인 것이야?”
“아니라니까?”
간석은 알맹이 없는 얘기를 껍데기만 반듯하게 하는 재주가 비상했다.
초화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겁탈이 뭐야?”
“상대방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식기를 남의 것에 처박는 것.”
“……!”
[초화가 주인의 솔직하기 그지없는 교육에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초화의 지능이 약간 올랐습니다.]
흐음, 뭐, 어때.
성교육은 이를수록 좋다고 본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가르쳐줄 테니까, 너희는 일단 들어가 있어라.”
“컁컁!”
난 두 애완수를 호리병에 넣고 간석의 장황한 거짓말을 끊어버렸다.
“범철과의 일화는 됐으니까, 수련관이나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그래?”
간석은 아쉬운지 혀로 입술을 핥고는 동자승에게 안내를 시켰다.
“제일 큰 건물이 검을 수련하는 본각이고, 저곳은 숙식처예요.”
동자승이 우리를 본각으로 데려가며 수련관 건물에 관해 설명해줬다.
사기꾼이 운영하는 수련관이라 허술할 줄 알았는데, 꽤나 체계적이군.
‘내가 범철 본인이 아니었다면 회귀자들처럼 속았을지도 몰랐겠어.’
외양만은 꽤나 그럴싸한 장소이다.
수련관에 상주하는 승려들은 오십쯤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유독 외모가 눈부신 여승이었다.
머리가 짧고 수수한 의복을 입었는데도 절로 시선을 홀릴 수 있다니.
걸어가던 여승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에게 엷은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사기를 치려면 때깔부터 고아야 한다는 이론이 정답인 건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동자승은 수련관에 관해 설명했다.
“이곳에는 두 가지 이름이 있어요. 수련관으로서의 이름은 일생 수련관. 사찰로서의 이름은 일생사예요.”
문득 승려가 숙식하는 부엌을 지날 때 군침 도는 냄새를 맡았다.
“승려들께서도 고기를 드십니까?”
“그건 종파마다 달라요. 범철 님께서는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댔어요.”
전생의 나는 현명하기 그지없었군.
동자승은 붉은빛이 감도는 가장 화려한 양식의 건물을 가리켰다.
“범철 님 신상(神像)은 영신전에 모시고 있어요. 믿음이 영원한 곳이죠.”
영신전이라 불린 기와 건물은 승려들이 신을 모시는 제단이 있었다.
가장 크고 멋들어진 건물이지만 수련생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했다.
“너희가 이번의 새 수련생들인가?”
“동자승이 내주는 시험을 통과하다니 놀랍군. 억지로 수업료 내게 하려는지 통과가 몹시 어렵다 하던데.”
“나도 지난 삶에선 시험에 도전했다가 죽도 못 쓰고 죽어버렸어.”
수련관 본각엔 우리 말고도 백 명이 조금 넘는 수련생이 더 있었다.
모두 험상궂고 칼 좀 오래 잡아본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은 안 된다.
사실상 약초 3천 개나 그만한 아이템을 수련관에 바친, 회귀자 사이에서도 특출한 호구들이란 의미니까.
검을 찬 승려가 본각의 연무장에 새로 온 수련생들을 집합시켰다.
“막 입문한 수련생들의 첫 하루일과는 각 통나무를 쪼개는 것입니다. 이전 삶에서 수련관에 입문해본 경험이 있는 수련생들은 빠져주십시오.”
굵직한 통나무는 건물 기둥으로 쓰여도 될 만큼 아주 커다랗고 굵었다.
‘이걸 부수는 게 하루일과라고?’
배정된 통나무와 훈련용 검을 보다가 나는 황당해 속으로 혀를 찼다.
‘딱 봐도 검술 가르치려는 것보단 시간이나 길게 때우려는 수작이군. 여긴 무협소설로 칼을 가르치나. 무슨 입문자들한테 통나무를 부수래?’
그러나 그런 나의 부정적인 생각과는 달리 값비싼 수업료까지 지불한 수련생들은 땀까지 흘리며 통나무를 쪼개느라 바빴다.
“흐랏!”
“헛! 아이고!”
새로 온 수련생들은 서툴게 검을 쥐고서 통나무를 부수려 애를 쓴다.
그러나 통나무는 흠집만 나버릴 뿐, 어지간해선 조각날 기미도 없다.
오히려 내려치다 손만 아플 뿐이다.
선배 수련생들은 그런 신입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추억에 젖어 웃었다.
“내가 저 통나무 부수는 데만 세 번의 삶이 걸렸지. 날마다 연무장에 나와 수만 번씩 똑같은 통나무를 내려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었다고.”
“쯧쯧! 허약한 것들아.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통나무가 부서지겠냐!”
“지금은 마냥 헛짓거리 같지? 두고 봐라. 사범님께 감사하게 될 거다.”
저 무의미한 노동을 수련이라 칭하며 강요하는 꼰대들에게 나는 감탄한다.
‘누가 봐도 헛짓거리인데, 이딴 걸 수련이니 열심히 하라고 시키다니.’
나는 멀찌감치 그들을 지켜보다 짜증 나 훈련용 검을 들고 단숨에 내려친다.
쩌적!
내가 칼날을 내리찍자 통나무가 단숨에 두 쪽이 나서 갈라져 버렸다.
순간 주위가 사막처럼 고요해졌다.
통나무를 내려치던 신입들도, 지켜보며 비웃던 선배들도 나를 본다.
“뭐야…… 저놈.”
“지금 첫날에, 그것도 단 일격에 저 굵직한 통나무를…… 부췄어?”
커진 눈동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지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블라이넨은 통나무를 세차게 걷어차고 검을 휘둘러 열 토막을 냈다.
파각!
일개 초보자의 것이 아닌, 그 신적인 검술에 선배들조차 입을 쩍 벌린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부족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이걸론 수련이 안 돼. 바위는 없나.”
“…….”
군중이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
더욱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쫘악!
퀸소히니베는 아예 검조차 쓰지 않고 맨손으로 통나무를 찢어버렸다.
“이제 쉬어도 되는 것이야?”
“그, 그렇습……니다.”
승려들은 이런 수련생들은 처음 본다는 눈빛으로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우리 셋은 그들을 뒤로하고 본각 연무장을 떠나 흩어졌다.
‘우선은 입문하기는 했지만 이딴 곳에서 오래 지낼 생각 따윈 없어.’
어차피 내가 여기서 배울 건 없다.
오로지 여기서 쟁취할 목표는 여정의 성공확률을 높여준다는 기연.
‘악마의 펜타그램이 날 이곳에 안내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정에서의 성공률을 높여준다니.
혹시 어쩌면 불멸아귀 사냥에 도움 될 아이템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 일과를 끝내고 수련관을 세밀히 살피던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저 하수관은 뭡니까?”
“귀한 약초를 많이 끓여서요. 찌꺼기가 물과 함께 저곳으로 나갑니다.”
“여기가 약방도 아니고 수련관에서 약초 달일 일이 저렇게나 많아요?”
“수련생이 다칠 때가 많으니까요. 만약을 위해 약을 자주 제조해요.”
하수관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진다.
저녁이면 한 건물에 모여서 식사했는데, 우리는 각자 정보를 총합했다.
“수련관을 돌아다니며 조사는 해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곳은 없었어.”
“주방 안쪽에서 멧고기를 몰래 먹던 동자승 세 명을 찾아낸 것이야.”
오늘은 말 그대로 허탕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수련관을 돌아다니며 살폈지만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
‘아쉽지만 특별한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내일을 기약해봐야겠군.’
밤이 되고 숙식처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배정받았다.
방은 좁았지만 그런대로 편했고, 편히 누워 앞으로의 일을 가늠할 때.
퉁퉁.
누군가 창호지를 두드렸다.
문을 열자, 낮에 나를 지나치며 눈웃음을 지어준 그 여승이 있었다.
“저, 나리. 혹시 불편하신 것…….”
“기다렸어요. 어서 들어오시죠.”
여승이 웃더니 방문으로 들어왔다.
“갑갑한 남자들과 꽤 다르시네요.”
“멍청하게 본능을 내빼긴 싫거든.”
난 그녀의 손을 쥐고 미소 지었다.
“에둘러 말해 뭐합니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