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5화
“저자가 신선이라고?”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낮게 나는 구름에 앉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길게 늘어뜨린 수염이 없고, 고목 지팡이도 없는 데다 노인도 아니었다.
‘어째 신선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확 박살 내버리는 인상인걸.’
키가 멀대 같은 신선은 대머리였고, 귀걸이를 한데다 꽤 마른 체형이다.
거기다 외형적인 나이도 30대 근처로 보일 만큼 꽤나 젊어 보였다.
“찬 공기를 맞으며 산책하다 멈춰 섰지. 내가 검을 찬 초보들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말이야.”
대머리 사내의 얼굴에는 짓궂음이 그득했고 앉은 자세도 비뚤해 제법 건방져 보였다.
백야가 내 무릎에서 내려오고선 높이 있는 신선을 향해 마구 짖었다.
“캬아앙! 컁!”
“오호, 귀여운 여우시로군. 딱 보아도 보통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놈의 눈에 욕심이 그득해 보인다.
하기야 영물은 값비싼 존재이니까.
블라이넨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무슨 볼일이지?”
“신의 첫 스승이라 하면 알려나.”
“신의 스승?”
블라이넨이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나를 돌아봤고,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정녕 모르겠나? 내가 1회차의 시절, 그 범철을 주워 키운 스승이다.”
그래, 나를 주워서 키우셨다?
신선이 미소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자, 놀랍게도 전까지의 짓궂음은 사라지고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기일 때부터 내가 키우고 검술도 가르쳤지. 범철의 주된 활동지는 황색대륙이지만, 그가 청색대륙 출신인 건 이미 유명한 사실 아닌가?”
음, 일단 사기꾼인 것은 확정이고.
대외적으로 나는 청색대륙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몸이다.
그러니 아기 때부터 나를 키웠다는 저놈의 말은 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신선은 태연히 사기를 쳤다.
“혹시 자네들도 일생신교를 믿나?”
“전혀.”
블라이넨이 단칼에 답하자 신선은 아쉽단 어투로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런. 하지만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불세출의 검사, 범철의 위대한 명성을 모르는 자는 없을 테지.”
어째 장광설이라도 나올 기세로군.
내가 얼른 사기꾼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본론은?”
“범철의 검을 배우고 싶지 않나?”
뜻밖의 질문에 우리는 고개를 틀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블라이넨은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비틀며 살며시 인상을 구겼다.
“내가 뭣 하러 그딴…….”
“잠깐.”
내가 그녀의 욕설을 막았다.
범철의 검술이라 하니, 갑자기 덕돌이 보여줬던 책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확인했다.
“혹시 용살도를 쓴……?”
“저런. 내가 직접 저술한 검법서가 벌써 거기까지 퍼져 버렸나.”
신선은 짐짓 놀라기를 바란 것 같았지만, 나는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하여간.”
무안해하는 그를 향해서 말했다.
“만약에 배우고 싶다고 답한다면?”
“자네들이야말로 우리 수련관에 몹시 적합한 수련생들이 될 테지!”
그가 대뜸 목청껏 외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지금 수련관에 들어오면 숙식은 무료! 방세도 무료! 수업료만 지불하면 그만이야. 완전히 거저가 따로 없지. 정 수업료 낼 능력도 없다면 거기서 지내며 약초나 캐오면 돼.”
속사포처럼 재빠른 그의 말은 듣기 어려울 만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수련관? 뭘 가르치는데?”
“방금 말하지 않았나? 그 전설적인 범철의 검법을 직접 가르쳐준다고.”
난 턱을 만지며 신선을 바라봤다.
회귀자한테 사기 치는 회귀자라니.
대머리 신선은 꽤나 먼 산중턱 위의 허름한 사찰을 가리켰다.
“우리가 운영하는 수련관은 바로 저곳에 있지. 오면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테지.”
입 터는 것만큼은 먼지 한 톨 남지 않을 것처럼 뛰어난 기량이군.
대머리 신선은 씩 웃더니 낮추었던 구름을 다시 하늘 높이 떠올렸다.
“어디 깊이 고심을 해보라고. 회귀하면서 이런 기회가 쉽게 오던가?”
찬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대머리 신선은 구름을 타고 빠르게도 날아갔다.
퀸소히니베는 신선이 떠나간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내 노예는 저 신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야?”
“어떻게 생각하긴. 사기꾼이지.”
그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붉게 빛을 뿜는 왼쪽 손등을 흘깃 스쳐본다.
[악마의 펜타그램이 빛납니다!]
[필요한 기연을 접하게 됩니다.]
[고된 여정의 성공률을 높이고 싶다면, 꼭 수련관으로 향하십시오.]
“그런데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 사기꾼이 운영하는 수련관에.”
* * *
신선이 가리킨 수련관은 용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는 했다.
‘나의 검을 가르치는 수련관이라.’
비록 거짓으로 점철된 곳이겠지만 어떤 장소일지 꽤 궁금하기는 했다.
블라이넨은 처음엔 고개를 저었지만 기연을 겪게 하는 펜타그램의 효과를 듣고서는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불멸아귀에게서 명약을 구할 확률이 높아진다면 거부할 이유 없지.”
“그런데 용궁은 위험한 곳이냐?”
“외부인에게 우호적인 장소는 아니라고 들었다. 일단은 물속이니까.”
“물속인데 거기를 어떻게 들어가?”
“빛을 따라가면 답이 나오겠지.”
“상당히 대책이 없는 발언이군.”
“최대한 목숨은 아끼겠지만, 여차할 경우 나는 회귀할 수 있으니까.”
“그럼 나는?”
“유언을 말해봐. 다음 회차의 너한테 전해줄게.”
“…….”
하여간 동료를 찾고 전생의 돌 과업을 완수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하지만 악마의 펜타그램의 위력적인 변수도 무시할 수 없지.’
지금까지 악마의 펜타그램이 일으킨 기연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비록 카티에, 헤르탄을 조금 늦게 만나더라도 기연은 쟁취해야 한다.
퀸소히니베는 함께 걸으면서 블라이넨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표했다.
“블라이넨에 관해 궁금한 것이야. 뭘 하며 어떻게 살아온 것이야?”
“검을 쥐고, 휘젓고, 꺾어야 할 자에게 꺾이기도 하며, 그리 살았어요.”
“검술 말고는?”
“소년왕 전하께 충성을 바쳐 살아 있는 온 삶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흐음. 블라이넨은 너무 힘겹고 괴롭게만 살아온 것 같다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조금 가엾단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가 살며시 웃는다.
“가끔은 연애를 하기도 했어요.”
연애란 말에 퀸소히니베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어떤 연인과 사귀었던 것이야?”
“다양한 여성들. 스쳐가는 인연들.”
“블라이넨은 여자가 좋은 것이야?”
“여자가 좋았다기보다는, 사랑했던 사람 모두가 줄곧 여자였으니까요.”
“과거의 연인들은 어찌 된 것이야?”
“떠나보내고, 가고, 잊어버렸어요.”
“회귀자인데도?”
“이제 내 가슴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다 블라이넨은 조금 입가를 비틀었다.
“회귀란 것이 그래요. 평생 한 사람과 함께할 것 같다가도 과거로 돌아오면 눈도 돌아가요. 놀랍죠?”
“응. 몹시 신기한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자기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아주 신기해하며 경청했다.
블라이넨이 하늘을 보며 턱을 들췄다.
“그래서 가끔 시샘했죠. 회귀하며 한 사람만 사랑해오는 사람과…….”
곧이어 시선이 나를 따라 내린다.
“누군가의 그런 처절하고 지독한 순애를 독차지할 수 있는 녀석을.”
왜 저런 말을 나를 보면서 한담.
“어찌 되었든 이번 삶에서는.”
블라이넨이 고개를 돌려 퀸소히니베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웃는다.
“새 인연을 찾는 것이 좋겠네요.”
“흐음.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야.”
아직은 순진한 퀸소히니베가 턱을 짚으며 진지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블라이넨에게 작게 속삭였다.
“비켜줄까?”
“죽여줄까.”
가차 없는 살해 협박에 응답하려 할 때, 백야가 내 바짓단을 꾹 물었다.
“캬앙.”
“또 달라고?”
“캬아앙……!”
백여우가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린다.
난 하는 수 없이 큼지막한 항아리에서 메밀묵을 약간 꺼내서 던져줬다.
“컁!”
백야는 떨어진 메밀묵을 고깃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었다.
아무리 엘프가 만들었어도 그렇지, 여우도 맛있게 씹는 메밀묵이라니.
인간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메밀묵이지만, 괜찮은 용도를 발견한 것이다.
‘몬스터 길들일 때 쓰면 딱이겠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일행 중 또 다른 짐승이 메밀묵이 든 항아리를 몹시 탐내고 있으니까.
“나도 조금만 달라는 것이야.”
“넌 안 돼. 메밀묵 금방 떨어져.”
“흥!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인 것이야.”
“식량이 귀중한 순간도 같을까?”
품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저런 거 못 먹는데.”
내 품에 꼭 달라붙어 안긴 초화는 백야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불행히도 드라이드라서 뿌리로 수분과 기력밖에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초화의 머리에 달린 작은 꽃봉오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초화야. 너, 잠깐 입안 좀 보자.”
“……아.”
내가 초화의 자그마한 입을 벌리고 살펴보자 그 속에는 식도가 없었다.
‘일반생물과 달리 장기가 없나 보군. 이걸 보면 먹이로 길들이는 것도 모든 짐승이 가능하진 않겠어.’
그렇게 반나절 넘도록 걷자 우리는 수련관이라 불린 사찰에 도착했다.
낡았지만 규모가 큰 수련관을 처음 보고 들었던 나의 감상은 이러했다.
“잘못 왔나?”
간판에는 크게 ‘일생’이 쓰여 있었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120회차 세상에서 시체야 흔하다지만 예상했던 광경과 너무 달랐다.
아직 부패가 진행되지 않은 걸 보면 죽은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하다.
“뭔 수련관 앞에 시체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어?”
황색대륙에서도 시체 쌓인 수련관에 가본 적 있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차 초기엔 사람들이 많이 자살했지만, 이제는 그럴 시기가 아니니까.
블라이넨은 침착함을 넘어서 거의 초연한 태도로 시체를 살폈다.
“자살은 아니야. 모두 날붙이에 베이거나 급소를 찔려서 사망했군.”
백야는 피 냄새를 맡곤 경계하며 킁킁댔고, 초화는 순수하게 물었다.
“……저것들 비료야?”
“…….”
뭐, 머지않아 땅의 양분이 될 테니까 굳이 틀린 말은 아니겠다만.
하여간 시체가 있다는 것은 근처에 살인자가 배회한다는 의미인데.
나는 초화를 땅에 내려두고 칼자루에 손을 넌지시 얹었다.
그때 피에 젖은 수련관 대문이 덜커덕 열리며 누군가 밖에 나왔다.
“어, 시체 치우려 했는데 또 누가 오셨네? 수련생 지원하러 오셨나요?”
머리를 짧게 깎은 작은 아이였다.
블라이넨이 물었다.
“동자승인가?”
“예. 여긴 수련관이지만 범철 님을 모시는 사찰도 겸하고 있거든요.”
앳되고 아담한 동자승은 영특하게 말했지만, 난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저래 봤자 알맹이는 어른일 테지.’
회귀자란 모두 속내가 검으니까.
내가 시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시체들은 도대체 뭡니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죠.”
“시험?”
동자승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우리 수련관에 입문하려면 약초 삼천 뿌리를 바쳐야 해요.”
“……삼천 뿌리나 내놔야 한다고?”
“예. 그게 싫으면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아이템을 내놓으면 되구요.”
어째 대머리 신선이 늘어놨던 달콤한 홍보와는 영 거리가 먼 얘기군.
“그럼 값을 치를 생각이 없다면?”
“간단한 시험을 통과하면 되죠.”
“그 시험이란 게 무엇인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질문을 던지자, 동자승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우리가 선별한 검사와 붙어서 20분 동안만 살아남으면 돼요. 쉽죠?”
“그게 쉬웠다면 시체가 이렇게 많을 리 없을 것 같은데.”
블라이넨이 지적하자 동자승은 쿡쿡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수련관에서 아주 강한 검사 분이 와 계세요. 그래서 도전했던 사람들은 10분도 못 버티고 죽었죠.”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도대체 누가 와 있기에?”
동자승이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지금 안에 범철 님이 계세요. 그 분께서 도전자를 모두 살해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