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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94화 (94/200)

나만 1회차 094화

그가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핑!

그러나 화살이 맞힌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뒤에 있던 생명체였다.

“끼엑!”

내 목을 물려던 박쥐 한 마리가 정확히 화살에 관통당해 떨어진다.

블라이넨이 박쥐의 시체를 살펴봤다.

“설파 박쥐야. 아까 쫓겨났던 무리 중 하나가 여기로 돌아온 것 같아.”

망할, 나한테 쏘는 건 줄 알았네.

내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자, 촌장이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보상이 죽음이라면서요?”

“아아.”

엘프 촌장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죽도록 맛 좋은 메밀묵이니까요.”

“예?”

내가 황당해서 따졌다.

“그렇다고 대놓고 남이 오해하게 죽음이라면서 활을 겨눕니까?”

“사실 좀 놀리고 싶기도 했고요.”

“…….”

나의 표정을 본 그가 픽 웃었다.

“안내해드리지요. 따라오십시오.”

* * *

엘프 촌장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고을에서 떨어진 외딴 토굴이었다.

지하로 통하는 돌계단을 내려가며 솔이가 재잘재잘 곁에서 떠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 집 메밀묵이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

“그러시냐.”

“응. 나는 맛깔 나는 묵을 만드는 데 인생을 바칠 거야.”

나는 벌써부터 비장하고 야심 찬 포부를 지닌 미래의 새싹을 바라봤다.

‘범파가 납치하려 했던 걸 보면 얘가 묵이나 만들 팔자는 아닐 텐데.’

뭐, 회귀자처럼 미래를 속속 꿰고 있지 못한 내가 간섭할 건 아니지.

토굴은 추운 바깥 날씨와 다르게 의외로 상당히 따스한 편이었다.

식재를 숙성시키거나 보관하고 있는지 항아리가 가득 세워져 있었다.

엘프 촌장은 구석진 상자의 자물쇠를 풀고 나비 문양의 검을 가져왔

“저희 고을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첫 번째 답례입니다.”

『절명환각의 단도』

엘프의 신비로운 환술의 힘이 깃든 단도. 짤막한 칼날을 조금만 쳐다봐도 꽤 어지러운 기분이 들게 된다.

+잦은 확률로 환각을 일으킨다.

+등 뒤를 공격하면 피해 3배 증가.

+암살의 효율도 대폭 증가.

환각효과를 일으키는 진귀한 단도!

암살에 특화된 단검류는 상태이상 효과가 있을 경우, 값을 높게 쳐준다.

절명환각의 단도는 어지간한 단검 사이에서 상위에 속할 진귀한 물건이다.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진다?”

“검 세 자루 쓰는 재주는 없으니까.”

블라이넨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고, 나는 주저 없이 단도를 챙겼다.

“아버지! 여기! 메밀묵!”

솔이가 호들갑을 떨면서 뛰었고, 촌장은 소매를 걷고 항아리를 열었다.

“오로지 엘프만의 전통비법으로 직접 만든 메밀묵입니다. 귀한 손님이 아니고서야 절대 대접해드리지 않는 아주 귀한 음식이니, 드셔보시죠.”

촌장이 큼지막한 메밀묵을 꺼내서 한입 먹기 좋도록 조금 썰어주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신비한 효력이라도 있는 겁니까? 능력치를 대폭으로 올려준다든지.”

“별거는 없고 그냥 맛있습니다.”

“…….”

연한 회색빛깔 묵을 입에 넣는다.

음, 메밀향이 좋은 것 같긴 하지만 내 평범한 입맛에는 그다지 별론데.

하기야 보통 묵은 양념을 곁들여 먹곤 하지만, 이건 본연의 맛이니까.

블라이넨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평가했다.

“소박한 맛이군.”

그런데 한 명의 평가만은 달랐다.

퀸소히니베는 묵을 뚝 떼서 우물대다 꿀꺽 삼키더니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환상적인 맛인 것이야.”

“어, 그 정도냐?”

“촌장. 조금만 더 달라는 것이야.”

웬일로 그녀가 애타는 태도로 말했고, 촌장은 묵을 크게 잘라주었다.

퀸소히니베는 메밀묵을 볼이 빵빵하도록 우물대며 몹시 행복해했다.

“이렇게 맛좋은 음식은 황색대륙에서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이야.”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야?”

“이리 훌륭한 메밀묵을 먹고도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다니, 내 노예의 혓바닥은 너무 둔감한 것이야.”

그녀가 눈살 찌푸리며 나에게 면박을 주자, 엘프 촌장이 미소 지었다.

“역시 저 여성분은 인간이 아니신 모양이군요?”

퀸소히니베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걸 촌장이 어떻게 안 것이야?”

“인간의 입맛은 고려하지 않은 묵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 외에는 모두 맛좋게 즐길 수가 있지요.”

인간에게만 맛없는 묵이라니.

어째 상당히 불공평한 메밀묵이군.

“많이 싸드리겠습니다. 보통 메밀묵은 쉽게 상하지만 이 항아리에만 보관하면 오래 즐길 수가 있지요.”

엘프 촌장은 인심 좋게도 메밀묵 항아리를 무려 다섯 개나 선물했다.

덕분에 마법배낭이 빵빵해질 지경이었지만, 퀸소히니베는 아쉬워했다.

“더 가져갈 순 없는 것이야?”

“받아가는 처지에 무례하게 굴고 싶다면, 나에게 말릴 의무는 없어.”

“흥. 내 노예도 그 메밀묵 맛을 알면 제정신을 못 차리게 될 것이야.”

그녀가 무안해하며 입술을 틀었다.

그런데 인간의 입맛에 별로인 메밀묵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네.

‘배낭의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한다 싶으면 몰래 좀 버리든가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토굴 가장 깊숙한 곳에는 먼지 쌓인 보관함이 있었다.

엘프 촌장이 무언가 주문을 외우자 보관함이 꺼그럭대며 열렸다.

그곳에는 은백색으로 빛나는 손거울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거울에 고을에 사는 엘프 100인의 머리칼을 한 올씩 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용궁으로 나아가는 길이 여러분에게 비춰지게 될 것입니다.”

촌장의 도움과 고을에서 얻은 공헌도 덕분에 머리칼을 얻기는 쉬웠다.

엘프들이 머리칼을 한 올씩 뽑아서 거울로 가져가자, 스르륵 흡수됐다.

그렇게 100인 엘프의 머리칼을 모두 담그자 손거울이 파르르 빛났다.

[용왕의 손거울이 빛납니다.]

[출입이 금지된 특수한 금역으로 향하는 길이 개설되었습니다.]

[진로를 안내하는 빛은 거울 소유주의 일행에게만 보입니다.]

손거울로부터 뿜어져 나온 빛줄기가 우리가 나갈 방향을 제시해줬다.

배낭에 손거울을 넣어도 빛은 유지가 되었고, 우린 떠날 채비를 했다.

고을에서 필요한 여행 물품을 구매하고 대장간에서 무뎌진 칼을 갈았다.

엘프 고을에서 나온 수제품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았고,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씨앗도 많았다.

『찬란히 빛나는 달빛 낚싯대』

자정의 달빛을 맞으며 달보드레 숲의 수목을 깎아 만든 낚싯대. 기존의 일반 낚싯대보다 훨씬 월등하다.

+회귀한 엘프 장인의 수제품.

+내구력 몹시 높은 편.

+희귀한 대어를 낚을 확률 증가.

『폭화초의 씨앗(특별한정판매)』

매섭게 폭발하는 꽃이 피어나는 씨앗. 그 파괴력은 지형도 무너뜨린다.

+재배 난이도: 상(上)

+매일 12번씩 물을 줘야 함.

+작열하는 햇빛을 매주 비춰주지 않으면 시들 확률이 몹시 높음.

*외지인은 엘프 고을에서 드높은 공헌도를 쌓아야만 구입할 수 있다.

‘폭발의 꽃이 피는 씨앗? 이건 헤르탄이 전투용으로 쓸 수 있겠군.’

난 보관해오던 아이템을 아끼지 않고 모조리 내놓고 괜찮은 물품과 교환했다.

“이걸 제련해줄 수 있겠습니까?”

대장장이 엘프는 불멸자의 갑의 파편을 보자마자 첫눈에 고갤 저었다.

“내가 다룰만한 실력이 되지 않는 금속입니다. 다른 곳에 가보세요.”

도대체 이 파편을 다룰 수 있는 대장간이 이계에 있기는 한 것일까.

하여간 떠나갈 시간이 되었다.

“나중에 또 와! 목에 칼은 싫어!”

솔이가 꾸벅 인사했고, 촌장 엘프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손을 휘저었다.

“부디 악천후, 천재지변, 그리고 백룡이 없는 여행길이 되길 빕니다.”

그저 인사말이었으나 퀸소히니베가 유독 눈을 반짝였다.

“촌장은 청색대륙의 백룡에 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야?”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들에게는 거인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죠. 신출귀몰한 재앙이라 들었습니다.”

“과연…….”

그녀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엘프 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여간 몸조리 잘하시길 빕니다. 고된 여정, 부디 무운을 바랍니다.”

우리는 엘프 고을을 떠났다.

블라이넨이 넌지시 말했다.

“내가 고을에 머무르며 마물을 퇴치해도 보상으로 받지 못했던 거울인데, 너는 며칠 새에 바로 얻었군.”

“괜한 질투하지 마라. 왜인지 배신할 것 같아서 죽이고 싶어지거든.”

“또 메밀묵이 먹고 싶은 것이야.”

우리 셋은 빛을 따라가며 걸었다.

* * *

요 며칠 새, 나는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우선, 저 기특한 백야부터 보아라.

보통 여우라고 하면 교활하다는 편견부터 있는데, 이 녀석을 보면 딱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게 된다.

‘오히려 성격만 보자면 온순한 강아지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어린 새끼라 그런지 굉장히 순수하고 사람도 가리지를 않는다.

덫에 걸려 심하게 다쳤는데도 이젠 잘 뛰는 걸 보니, 회복력도 굉장히 빠른 모양이다.

‘보통 사람 덫에 걸린 경험이 있으면 인간을 미워할 법도 한데.’

새끼라서 호기심도 넘쳐나 나를 쫓아오다가도 샛길로 새기 일쑤였다.

썩어빠진 회귀자들만 보다 백야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치유되곤 한다.

그리고 또 여기 초화는 어떠한가.

초화는 백야의 폭신한 털에 얼굴을 파묻고는 행복하게 웃었다.

“……폭신한 여우야. 내가 좋아?”

“캬앙!”

“……내가 언니 할래. 너는 동생.”

“캬아앙? 컁.”

“……네가 언니를 하고 싶다고?”

“캬앙! 캬앙! 컁!”

“……안 돼. 내가 언니할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낯을 가리며 무서워하더니 일단 백야랑 친해지고 나니 얼마나 잘 떠드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당연히 말할 필요조차 없는 퀸소히니베에게 고개를 돌려볼까.

“너무 귀여운 애완수인 것이야.”

“…….”

퀸소히니베는 무척 환하게 웃으며 초화를 힘껏 들어서 꼭 껴안았다.

그러나 낯을 무척 가리고 수줍은 드리아드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내게는 말이 없는 것이야?”

“…….”

“어딘가 불편한 것이야?”

“…….”

“뺨을 만져보아도 되는 것이야? 침묵하면 긍정으로 알겠단 것이야.”

“……너, 싫어.”

초화가 폴짝 뛰어 퀸소히니베의 어깨에 뿌리내리고 기력을 흡수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용의 생존력은 이계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대하다.

특히 비늘이 돋은 성체는 더더욱.

조그만 드리아드가 악착같이 기생할지라도 기력은 남아도는 것이다.

“……끅.”

[초화가 한계치의 150%가 넘는 기력을 과도하게 흡수했습니다.]

[전투력이 폭주하나 기력 과부하에 걸려 소화불량 상태가 되었습니다.]

배가 볼록해진 초화가 소화불량을 일으키며 퀸소히니베한테 떨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옷깃을 살짝 걷고는 쇄골이 보이는 맨 어깨를 드러냈다.

“좀 더 먹어도 되는 것이야?”

“……!”

초화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뚱뒤뚱 걸어와 나의 뒤에 꼭꼭 숨었다.

“컁!”

백야가 살갑게 뛰어와서 나의 무릎에 꼬리를 내리고 사뿐히 앉는다.

“왜 내 노예만 좋아하는 것이야?”

두 애완수에게 점령당한 나는 퀸소히니베의 질투 어린 시선에 웃었다.

“호사군.”

“뭐가.”

“미인에게 둘러싸인 여행이니까.”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어.”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대화하면 가끔 공감대가 맞아서 편하군.

엘프 고을을 떠난 지 어언 열흘째.

우리는 계속 빛을 따라가고 있다.

“용궁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냐?”

“직접 가본 적 없어서 몰라. 회귀해오며 가는 정보만 알고 있었지.”

난 무릎에서 캬아앙거리는 백야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카티에랑 헤르탄은 괜찮을지.’

어느덧 이제 두 사람을 못 본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먼저 날 찾아오진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시간만 흐르고 있다.

‘서로 길이 엇갈렸거나, 두 사람한테 무슨 일 생겼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일행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때.

내가 잠시 휴식할 때마저도 땀을 흘리며 꿋꿋이 검을 수련하던 블라이넨이 갑작스레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하늘을 향해 대뜸 칼을 힘껏 내던진다.

“끼익!”

자유로이 날던 꿩이 불쌍하게도 검에 꿰이는 불상사를 맞고 추락했다.

“……너, 지금 뭘 잡은 거냐?”

“점심.”

블라이넨은 꿩의 목을 비틀어 쥐었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시력 나쁘다고 하지 않았냐? 나도 안 보이는 거리인데 어떻게 맞췄어?”

“기척.”

짧은 대답에 황당할 따름이었다.

확실히 같이 다니며 새삼 느낀다.

그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나는 그녀가 할 수 없는 재주를 할 수 있고, 그녀는 내가 할 수 없는 재주를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나와 그녀는 전혀 맞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서로 단점을 보완한다.

날 죽이려 할까 봐 경계심이 생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적의 동료인 셈이다.

그녀가 별 주저도 없이 꿩의 목을 땄고, 나는 마법으로 불을 지폈다.

한겨울, 불가에서 익어가는 꿩고기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스친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나처럼 불세 출의 검을 익히고 있겠군.’

이계에서 인정을 받는 세 검사만이 지닐 수 있는 스킬, 불세출의 검.

스킬 레벨이 1씩 오를 때마다 검으로 생명을 죽일 때 감각이 다르다.

청색대륙의 회귀자를 학살할 수 있었던 것도 불세출의 검 효력이 컸다.

아크 리치를 죽이고 스킬 레벨이 두 개나 올랐지만, 현재 불세출의 검은 4레벨에서 계속 정체되어 있었다.

‘그동안 검을 많이 쓰긴 했는데 왜 스킬 레벨이 오르지 않는 걸까?’

보통 이런 의문은 혼자서 알아내야 하지만 회귀자는 법칙을 깨버린다.

전생에서도 불세출의 검을 익혀봤을 블라이넨에게 질문하려던 찰나.

땅에 낯선 그늘이 졌다.

하늘을 떠도는 구름이 그늘을 드리우는 경우야 흔하겠지만, 그 위에 대머리 한 명이 타고 있다면 다르다.

“뭐야, 저 사람은?”

“신선.”

블라이넨이 검을 매섭게 세웠다.

구름 위에 쭈그려 앉은 남자가 나와 블라이넨을 보며 히죽 웃었다.

“검 찬 꼬락서니만 봐도 너무 귀여워 미치겠군. 그리 허접해서야 이 광란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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