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92화 (92/200)

나만 1회차 092화

뒷산은 보통 작다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달보드레 숲의 영역답게 굵은 나무가 울창해 길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엘프 촌장은 빙판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발 빠르게 나아갔다.

“뭐가 저렇게 빨라?”

“그나마도 천천히 걸어주는 거야.”

옆에서 블라이넨이 짧게 대꾸했다.

참나, 하늘은 날아야 숲에서 달리는 엘프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걸.

엘프 촌장은 뒷짐을 지고서 가장 앞서더니, 저 너머로 크게 소리쳤다.

“이곳에 계시는군요.”

그가 멈춰선 곳은 작은 호수였다.

나는 맑은 물가를 들여다보았다.

수면에서 키 큰 그림자가 보였다.

“헤르탄?”

“…….”

그러자 수면에서 올라오던 그림자가 기포를 뿜으며 우뚝 멈춰 섰다.

“카티에?”

“…….”

어째 슬슬 누구일지 예상이 되는데.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설마 퀸소히니베냐?”

“……왜 내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는 것이야?”

샛노란 금발의 미인, 퀸소히니베가 눈을 찌푸리며 수면에서 올라왔다.

그녀는 청색대륙풍의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흠뻑 젖어서 도드라진 몸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 날씨에 호수를? 안 추웠냐?”

“가슴에 있는 애달픔을 식히려면 이가 추위 따위 별것 아닌 것이야.”

“꽤 쓸쓸했나 보지? ……됐다.”

손가락을 튕겨서 불꽃을 일으키자 그녀를 차갑게 적신 물기가 말랐다.

퀸소히니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간 못 본 사이, 내 노예의 마법 실력이 조금은 늘어난 것이야.”

내가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보고 싶었다.”

“흥.”

“너는 나 안 보고 싶었냐?”

“전혀.”

“그래? 꽤 섭섭한걸.”

“하! 내 노예라면 좀 더 일찍 주인을 찾아왔어야 했던 것이야.”

그녀가 토라지며 고개를 틀었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핥고는 무안하게 벌린 팔을 거두며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퀸소히니베가 등 뒤에서 나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안기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야.”

“껴안는 것은 취향이고?”

“내 노예가 조금은 그리웠으니까.”

“그만 떨어져. 이러다 반하겠어.”

“가련한 노예가 고귀한 주인에게 반하면 마음도 바치게 될 것이야.”

“왠지 내가 이미 육체는 바치도록 합의했단 것처럼 들린다?”

“어머, 아니었던 것이야?”

나랑 퀸소히니베는 각자 픽 웃었고, 떨어져 다시금 서로를 보았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내 노예와 재회해 기쁜 것이야.”

우리는 서로의 미소를 마주 보았고,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되었다.

‘조금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전생의 돌이 내리는 과업 대기시간을 줄이려면 전생에 인연 깊은 동료부터 찾는 것이 효율적이긴 했다.

안타깝게도 퀸소히니베는 동료 중에서 유일하게 회귀자가 아니라 과업 대기시간을 단축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퀸소히니베가 은근슬쩍 캐물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야?”

“아직 못 찾았어. 왜, 걱정되냐?”

“하, 내가 뭣 하러?”

그녀는 도도하게 코웃음을 쳤고, 문득 뒤에 있던 블라이넨을 보았다.

“저 여자는 누구인 것이야?”

“나랑 전생에 연이 깊었던 사람.”

“내 노예가 그새 짝을 둔 것이야?”

“살면서 날 가장 많이 죽였다지.”

“…….”

퀸소히니베는 나를 보호하며 아주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블라이넨은 짧게 목례했다.

“반가워요. 블라이넨입니다.”

“내 노예를 죽이러 온 것이야?”

“그렇게 될 확률이 적진 않아요.”

퀸소히니베가 경악해서 다가갔다.

“그 아무도 나의 허락 없이 내 노예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것이야.”

블라이넨은 차분히 그녀를 살폈다.

가까이 있는 퀸소히니베를 탐하듯 시선을 휘젓다가 한 발짝 다가선다.

조금 더 숨결을 느끼겠단 것처럼.

“당신을 알고 싶어요.”

“나는 퀸소히니베인 것이야.”

“참 아름다우신 이름이네요.”

“그 칭찬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자주 들어서 전혀 효력 없는 것이야.”

“그랬을 것 같아요. 당연하게도.”

어째 블라이넨의 눈에서 적지 않은 흑심이 엿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러고 보니…… 블라이넨은 몸매가 빼어난 미인이 취향이라 했지.’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동료를 흘깃 바라봤다.

“뭘 자꾸 힐끔대는 것이야?”

“……아니다. 뭐, 요즘 세상에.”

나는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하여간 설명해봐라. 배가 난파당하고 넌 어쩌다 여기로 흘러왔냐?”

“회상이 길면 지겹고, 늘리면 역해지니 짧게 줄여 말하겠단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얘기를 시작했다.

* * *

불도깨비에 의해 배가 침몰해 겨울 바다에 빠진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어느덧 정신을 되찾고 깨어나자 이름 모를 해변까지 밀려와 있었다.

혼자 청색대륙 땅에 떠밀려왔단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일단 움직였다.

본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외로워 울었다는 소리군-, 냉정히 나의 흔적을 탐색했지만 -사흘쯤 숲을 헤맸단 뜻이다- 결국 정처 없이 떠돌다 달보드레 숲에 닿았다 한다.

그러다 그녀는 우연찮게 숲을 떠돌던 엘프 정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몬스터가 엘프들을 습격하려 해서 내가 브레스로 내쫓아줬던 것이야.”

은혜 입은 엘프 정찰대는 고마워하며 퀸소히니베를 고을로 안내했다.

나를 찾던 그녀가 엘프 고을 뒷산에 머무른 것은 그런 간단한 이유였다.

‘네가 원하는 남자와 재회하려면 반드시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불현듯 그런 속삭임이 들려온 것이다.

* * *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확인했다.

“또 속삭임이 들려왔다고?”

퀸소히니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계속 있으면 내 노예를 만날 수 있다고. 누가 속삭여준 것이야.”

“예전이랑 같은 사람이었냐?”

“응. 예전에 혼자 둥지에 쓸쓸히 있을 때 붉은 별을 찾으라고 했던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였던 것이야.”

과거 우울증으로 죽을 뻔했던 퀸소히니베의 운명을 뒤바꿨던 속삭임.

그때와 동일한 속삭임이 이번에도 나와 그녀를 만나게 해준 것이다.

난 미간을 구기고서 턱을 짚었다.

‘또 그 의문이로군. 속삭임이라니.’

과거에 만났던 유랑자가 말했었다.

지금 회차에서 일어나는 기연과 변수는 나의 조력자가 꾸민 일이라고.

그럼 퀸소히니베에게 나에 관해 속삭인 것도 조력자가 한 짓일까?

“하여간 이제 어떻게 할 것이야?”

“일행을 찾고 불멸아귀를 죽여야지.”

“불멸아귀?”

“이번 대륙에서 죽여야 할 지배자. 놈을 죽이려면 용궁을 거쳐야만 해.”

나는 혼자 떨어져서 먼 곳을 주시하고 있는 엘프 촌장에게 물었다.

“우리가 용궁으로 향하려면 엘프 고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당연히 당신을 돕겠지만…….”

엘프 촌장은 긴 귀를 쫑긋거렸고 그 행동은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고을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군요.”

비명 소리?

하지만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이라곤 산속의 벌레울음뿐이었다.

블라이넨도 곧장 칼자루를 쥐었다.

“살기가 느껴지는군. 어렴풋해도.”

“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이걸 잡아내는 감각을 익히려면 수없이 끔찍하게 죽어봐야 하니까.”

그녀는 민첩히 칼을 뽑아 들고 앞서 달려가는 엘프 촌장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퀸소히니베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야?”

“나인들 알겠냐?”

지금은 그저 나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불안을 뒤로하고 우리 둘은 앞장선 두 사람을 따라 뒷산을 내려갔다.

* * *

범철이란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기억조차 희미한 나의 할아버지셨다.

범처럼 용맹하고, 철처럼 강고하게 살아가라고 지어주신 두 자, 범철.

그러니 만일 당신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뿌듯해하셨을지 모르겠다.

“범처럼 용맹하게!”

“엘프를 남김없이 납치해 담아라!”

내 이름 앞글자를 구호처럼 외치며 수백의 회귀자가 난동을 피워댄다.

엘프들은 힘없이 무릎을 꿇거나 머리칼을 쥐어 잡히곤 비명을 질렀다.

“크흑! 이거 놔!”

“꺄아아악!”

나는 산의 중턱에서 고을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병력을 얼마나 이끌고 온 거야?’

최소한 오백 명은 넘어가는 숫자.

무뢰배 놈들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장이 견고하고 병력도 많다.

그런데도 나와 블라이넨이 숲에 파견 갔을 때 보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지도 외의 루트로 침범한 것 같았다.

고을에 침입한 회귀자의 군대는 각자 호리병을 메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박쥐 떼가 시커멓게 날아다녔다.

삐이익! 삑! 찍!

“크흐흑……!”

엘프 촌장은 격노로 이를 갈면서도 귀를 틀어막고 비틀대며 쓰러졌다.

내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줬다.

“괜찮습니까?”

“박쥐…… 저 박쥐 떼들이……!”

블라이넨은 냉정한 눈빛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설파박쥐를 애완수로 포획했군. 초음파로 청력이 뛰어난 엘프들을 무력화시킨 거다. 영리한 계획인데.”

회귀자들은 몹시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 끝에 엘프 고을에 침입했다.

역시 전생의 지식을 가졌기 때문일까, 엘프에 대한 방책도 아주 완벽했다.

그래도 저렇게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회귀자 집단은 흔치 않을 텐데?

“대체 저놈들은 뭐 하는 것들이냐?”

“범파 놈들이야.”

“범파라고?”

왠지 불안한 예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생신교에는 가장 거대한 두 종파가 있어. 범파, 철파. 저들은 그중 하나인 범파야. 호전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기로 유명한 종교집단이지.”

아주 이것들이 내 이름을 조각조각 내서 별의별 지파를 다 만들었네.

난 어이가 없어 고을을 가리켰다.

“대체 저게 어디를 봐서 포교냐?”

“억척스럽고, 강제적인 종교전파지.”

빌어먹을!

어째 상황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엘프 고을을 지켜내야만 하는데.’

단순히 정의심에 취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용궁으로 향하기 위해선 엘프 고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가만히 놔뒀다간 회귀자들이 엘프를 싹 다 납치해버릴 판국이다.

‘하지만 정면승부는 너무 불리해.’

아무리 나와 블라이넨이 회귀자 살해에 도가 텄어도 무장까지 완벽한 오백의 병력을 휩쓸어버릴 수는 없다.

진홍색 로브를 착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페널티가 극심해 피하고 싶다.

‘게다가 저놈들을 상대로 마법을 쓰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군.’

나는 앞서서 확인했다.

“대형 지파라면, 신을 먹겠단 이념을 품고 있는 이단 따위는 없겠지?”

“신식회를 말하는 건가? 그런 소수 지파는 대형 지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어. 서로 적대한다더군.”

좋아, 그럼 일단 극성스런 신도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어도 상관이 없겠지.

내가 고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와 목적지가 같지.”

“그래.”

“그럼 지금 할 행동도 똑같겠지?”

“그렇겠지.”

나는 삼척검을 뽑았다.

“퀸소히니베. 넌 박쥐를 쓸어버려.”

“당연히 그러려 했단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용의 날개를 펼쳤다.

비늘이 돋은 후부터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날개 활공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녀가 박쥐 떼를 향해 날아오르자, 블라이넨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니었나?”

“그건 나중에나 물어보고. 가자!”

우리 둘은 회귀자들이 학살을 벌이는 엘프 고을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 * *

“응? 뭐야, 이놈들…… 어억!”

“크흐억!”

“회귀자가 왜 엘프를…… 켁!”

악인을 베는 감각이 꽤 익숙해지자 살덩이가 나무토막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우리는 장작더미를 패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침없이 회귀자를 베는 나와, 쌍검의 찌르기로 적의 목숨을 빼앗고 앞으로 나아가는 블라이넨은 모든 회귀자들의 이목을 금세 사로잡았다.

앞을 가로막는 회귀자를 무참히 베어대는 와중에도 난 재빠른 시선으로 끝없이 몰려드는 회귀자를 살폈다.

‘가장 높은 회귀자.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보통 인가를 멸하는 적군의 행태를 고작 두 명이 막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 둘의 실력은 평범한 검사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우리 앞을 막는 순간 학살당하다시피 하니 회귀자들도 심히 당황했다.

“대, 대체 뭐야, 저놈들?”

“보통 검사가 아니야! 주의해라!”

바삐 검을 휘젓고 내달릴 때, 고을 중앙 촌장의 자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몇몇 회귀자가 바락바락 울먹이는 솔이를 붙잡고 오랏줄로 묶으려 했다.

“으아앙! 아버지!”

“잘 챙겨라. 회귀하면서도 납치하기가 힘든, 아주 귀한 년이니까.”

거만히 뒷짐을 진 회귀자는 호피 망토를 걸친 화려한 복장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놈들의 계획은 흐트러졌다.

우리가 촌장의 자택에 난입해 솔이를 붙잡은 회귀자 목을 따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악!”

“뭐냐! 네년은!”

내가 회귀자의 목을 베었고, 블라이넨은 침착히 소녀를 품에 안았다.

“언니……?”

“쉿. 얌전히 있어 줄 수 있겠지?”

솔이가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불행히도 그 속삭임은 아이를 안심시키려는 말이 전혀 아니었다.

블라이넨 또한 미친 회귀자이니까.

“……언니?”

그녀는 솔이가 도망칠 수 없도록 목을 세차게 팔뚝으로 휘감았다.

“켁!”

블라이넨이 회귀자에게 소리쳤다.

“전부 잘 들어. 너희가 가장 탐내는 엘프가 지금 내 손아귀에 있다.”

나와 달리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소실한 회귀자는 잔인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피 묻은 검을 솔이의 목으로 가져갔다.

“뭐라도 해봐. 당장 죽일 테니까.”

……저 새끼, 저거 진심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