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91화
피곤해 몽롱한 정신이 깨어난다.
내가 일어났을 때 블라이넨은 일찍 마당에 나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쌍검이 별빛을 베어낸다.
‘……아름답군.’
검이 그리는 궤적이 섬광을 부수고 쪼개며 새벽하늘에 빛을 흩뿌렸다.
칼끝에서 흐르는 빛의 윤곽이 밝은 기를 뿜으며 뱀처럼 혀를 날름댔다.
그저 멍하니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검이 다가와 베어버릴 것 같다.
‘FFF급 재능으로 저런 검이 발현되려면 얼마만큼 근성이 필요할지.’
눈앞의 검을 휘두르는 여자는 죽도록 노력해 정점에 오른 검사이다.
밀밭기사단 단장이니 회귀해도 육체는 단련된 상태였겠지만, 저 검술은 오롯이 그녀가 쌓아 올린 성이다.
보기만 했는데도 그녀가 회귀하는 동안, 그 어느 삶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단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잠은 안 자고 칼만 휘둘렀냐.”
“늘 수면은 2시간이면 충분했어.”
“사는 재미가 없겠군.”
“써는 재미는 있거든.”
블라이넨은 내 말을 가볍게 받아치고 축축이 젖은 상의를 벗어 던졌다.
십일자 복근에 땀이 번들거린다.
“밤새워 고심하고 결정을 내렸어.”
“어떤 결정을?”
“청색대륙에서 너와 함께하겠다.”
블라이넨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존경스럽군.
나도 그녀 곁에 서서 삼척검을 빼 들고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너와 동행하면 어떻게 네 검을 무너뜨릴지 파악하기도 수월하겠지.”
“나 보고 미래의 적을 키워주라고?”
“서로를 이용하자는 거야. 너도 날 보고 배우면서 이번 삶에서 퇴보한 검술을 훨씬 증진시킬 수 있겠지.”
확실히 이전에도 느꼈지만.
진부한 신뢰보다야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훨씬 믿음직하고 굳건하다.
“좋아. 앙숙끼리 잘해보자고.”
“언젠가 너를 벨 때까진 말이지.”
서로 반대되지만, 검으로는 세계에서 쌍벽을 이룰 우리가 칼을 휘둘렀다.
동이 터오고서야 수련은 끝났다.
블라이넨은 쌀쌀한 새벽에도 찬물로 등목을 하고는 곰방대를 집었다.
대통에 담배를 재우고 불씨를 붙여서 물부리를 척 물고는 연기를 내뱉는다.
“금연하는 거 아니었냐?”
“가끔씩 패하면 화가 나니까. 그런데 금연했던 것은 어떻게 알았지?”
“뭐, 그냥 그런 게 있다.”
차게 젖은 얼굴의 그녀는 씁쓸한 향취의 연기를 어스름히 내뿜었다.
“곰방대는 연기가 식어야 맛좋지.”
“여유롭게 연초 태우는 걸 보니 회귀자 살해에도 역시 통달했나 봐?”
내가 슬쩍 묻자 블라이넨은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백 명쯤 죽이는 것은 시답잖아.”
“왜?”
“난 천 대 일로도 싸워봤으니까.”
“그래서 어느 쪽이 이겼는데?”
“너 혼자. 내가 천 명 쪽이었거든.”
“…….”
도대체 전생에서 정점까지 완벽히 성장한 나는 얼마나 흉악했던 걸까.
내 표정을 읽은 블라이넨이 눈썹을 올리곤 픽 미소를 지었다.
“우쭐댈 것은 없어. 네가 나한테 허망하게 죽었던 경우도 있으니까.”
“가령?”
“네가 자고 있을 때 잠복해 있다가 화살을 쏘았더니 꿈틀대다 죽던데.”
“……앞에 비해서 너무 허무한데.”
“아무리 대단해도 머리에 화살을 맞으면 죽게 되니까. 뭐, 내가 너와 동행한 인원을 전멸시켰던 이유도 있지만.”
그녀는 곰방대의 설대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었다.
“나에겐 외부적인 요인이나 권모술수로 널 죽였던 경험이 꽤나 있다.”
물부리를 물려던 입술이 멈칫한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나에게 움직인다.
“오로지 순수하게 칼만 써서 도전한 싸움 중에 내가 네게 승리했던 경우는 없어. 그래서 함께하겠다.”
그녀가 다시금 힘을 줘서 말했다.
“너를 진심으로 이기기 위해서.”
나를 바라보는 블라이넨의 눈동자에는 진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너는 내가 꺾어야 할 목표이니까.”
나에 대한 경쟁심, 집착, 승부욕.
보통 회귀자의 눈동자에선 보기 어려운 열망은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하여간 그건 그거고…….
“커흠. 아무튼.”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제 상의 좀 입어라.”
……왜 이렇게 회귀자들은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걸어 다니는 거야?
* * *
“달보드레 숲은 일반 숲에 비해 훨씬 크고 강력한 마물도 살고 있어.”
“마물?”
“청색대륙에서는 몬스터를 마물이라고 부르지. 이 숲의 마물들은 주변의 나무들처럼 몸집이 크고 거세.”
블라이넨은 적의 흔적을 추적하고 탐색하는 게 나보다 훨씬 능숙했다.
나라면 얼핏 스쳤을 발자국, 불씨의 흔적을 그녀는 귀신같이 잡아냈다.
“달보드레 숲에 침입한 회귀자는 엘프 납치가 목적이야. 그러니까 마물 서식지와는 떨어져 배회하겠지.”
“지금 숲에 침입한 회귀자라면 충분히 죽여도 괜찮을 악인들이겠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죽일 리가.”
딱히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녀도 날 보자마자 죽이려 하지 않았나.
하여간 회귀자의 흔적을 쫓으며 동시에 자취를 지우는 블라이넨을 보고서 나는 깊게 감명을 받았다.
‘검술에도, 사냥에도 노련하군.’
블라이넨과 함께하며 검뿐만 아니라 심층적인 회귀자 전투도 배웠다.
나에 비해 그녀는 회귀자 습성, 패턴을 훨씬 깊이 익히고 있었다.
두 시간쯤 흔적을 쫓아서 숲을 헤매고 있던 찰나.
“멈춰.”
그녀보다 눈이 좋은 내가 입술에다가 손가락을 올리고 먼 곳을 가리켰다.
몸에 문신을 한 사내 스무 명이 뭔가를 구워 먹으며 킬킬대고 있었다.
블라이넨이 멈춰서 눈을 찌푸렸다.
“무뢰배들이로군.”
“무뢰배라고?”
“폭력배란 의미다. 독특한 문신을 몸에 새기고 활동하는 범죄조직.”
일단 숲에서 연기가 날 만큼 불을 피우며 위치를 드러내는 걸 보면 그리 주의 깊은 놈들은 아닌 것 같다.
블라이넨도 나와 같은 판단을 내렸다.
“이번 삶에서 달보드레 숲에는 처음 와본 회귀자들인가 보군. 불 처리가 저렇게나 어설퍼서야.”
“자, 어떻게 시작할래?”
“너의 눈에는 그런 걸 괜스레 정할 만큼 저것들이 번거롭다고 판단되나.”
나는 픽 웃으며 칼을 뽑았다.
“전혀. 확실히 이런 쪽은 통하네.”
* * *
스물의 무뢰배는 풀밭에서 담비를 구워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형님. 엘프 잡으러 왔는데 왜 고을에는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요? 우리가 이럴 동안 다른 형님들은 벌써 엘프 열 명은 넘게 잡아갔겠다. 소식 듣자니 요새 범파 놈들도 엘프 잡으려고 잔뜩 혈안이라고 하던데.”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멍청아. 정신 제대로 박힌 회귀자는 절대 숲에서 엘프를 상대하지 않으니까.”
“잉? 어째서 말이우?”
“아둔한 새끼! 진짜 회귀자 맞아?”
“글쎄, 이 숲은 처음 와본다니까.”
“우선 숲에서 엘프는 빠르다.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쓰면 회귀자라도 싸우기 버겁지. 그리고 무엇보다 특유의 환술! 그 엘프 놈들이 회귀자가 두려워하는 환상을 보여주기라도 하면…… 누구라도 버틸 수가 없어.”
“꿀꺽! 설마 처녀귀신처럼?”
“그래. 그래서 우선은 숲을 배회하면서 고을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엘프를 찾아보자는 거지. 흐흐, 일단 그걸 잡기만 하면 아주 그냥…….”
두목으로 추정되는 무뢰배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을 툭 떨어뜨렸다.
무뢰배들은 멍하니 급작스레 나타난 날 보았고, 난 칼을 높이 올렸다.
“백 명 채워야 해. 빠르게 가자고.”
“습격이다!”
무뢰배들이 얼굴을 구기며 활과 그물을 챙겨 들며 내게 대적하려 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며 목을 벨수록 내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짙어질 뿐이었다.
‘내가 이전보다 강해지기는 했군.’
별것 아닌 잡졸들을 쓸어버리자 힘의 성장이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대륙의 지배자를 죽이고 오른 능력치!
모든 능력치가 25씩이나 오른 덕분이어서인지 기력도 크게 늘었다.
확실히 몸이 가볍고, 전투에 있어서 공격력이 늘어난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블라이넨은 특이하게도 무뢰배를 죽이기 전에 요상한 질문을 던졌다.
“블라이넨이 세나, 범철이 세나?”
“응? 그거야 당연히 범철 님…….”
푹!
“크어억!”
블라이넨은 단숨에 그 목에 구멍을 뚫었고, 다른 무뢰배를 바라봤다.
“너는.”
“브, 블라이넨! 당연히 블라이넨이 세계 최강의 검사이지!”
푹!
블라이넨이 더 세다고 소리친 무뢰배는 가슴에 칼이 꿰뚫려서 죽었다.
“내가 더 세다는 놈하고, 네가 더 세다는 놈의 처우가 뭐가 다르냐?”
“목에 구멍이 꿰뚫리는 것과 심장에 구멍이 꿰뚫리는 것의 차이지.”
“그래 봤자 둘 다 죽는 거잖아.”
“전자는 고통스러워하다 죽고, 후자는 단칼에 고통 없이 죽게 되지.”
블라이넨이 품에서 곰방대를 꺼냈다.
“너한테 그렇게 죽어봐서 잘 알아.”
“너, 의외로 약간 열등감이 있다?”
“…….”
블라이넨은 나를 매섭게 노려봤고 나는 마주 보고 픽 미소 지었다.
“웃어?”
“웃지.”
“내 눈빛에 위축되지도 않는군.”
“너랑 싸워서 이겨봤으니까.”
“너랑은 맞지 않아. 개 같은 새끼.”
“전적으로 동감한다. 블라이넨.”
무뢰배가 척살 당하는 데까지는 고작 30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무뢰배 19명을 처치했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엘프의 호감도가 늘어납니다.]
[척살한 회귀자 (19/100)]
“으아악!”
팔목을 삔 회귀자가 허겁지겁 우리를 피해서 저편으로 도망쳐 버렸다.
내가 놈에게도 마무리를 지으려 하자, 블라이넨이 어깨를 잡았다.
“한 놈은 일부러 살려뒀어.”
“왜?”
“저놈이 나머지 무뢰배도 데려올 테니까. 찾으러 다니기 번거롭잖아.”
확실히 사냥경험이 나와는 다르군.
“하긴, 회귀자는 복수심이 강하지.”
“대개는.”
우리는 복수하기 위해 돌아올 놈들을 기다리며 가만히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우리가 풀어준 놈은 예상보다 훨씬 능력이 출중한 녀석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십이 넘어가는 무뢰배 무리가 나타났다.
흠, 의외로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유일하게 말에 탄 남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둘이서 스물을 죽였다! 괜찮은 성과이지만, 회귀자 사이에서는 그리 듣기 힘든 무용담도 아니지 않나?”
“됐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쯧, 괜히 힘쓰기 싫다! 항복하거나 그 자리에서 즉시 자결해라. 지금 칼을 놓으면 적당히 벌만 주지.”
“네가 무뢰배들의 총대장이냐?”
내가 묻자, 팔목이 삐어서 도망쳤던 무뢰배가 비웃음 지으며 소리쳤다.
“불쌍한 놈. 이분이 우리 큰형님이시다! 그 범철 님의 곁에서 무려 10년이나 동고동락하며 함께 검을 수련했던 전설적 친우이시기도 하지!”
“커흠.”
큰형님이란 자가 점잖게 턱을 높였다.
나와 블라이넨은 서로 픽 웃으며 잠깐 시선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앞장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너, 내가 정말 누군지 모르겠냐?”
“웬 잡놈이 제 잘난 맛에 취했나! 너 따위 조무래기를 누가 알겠냐?”
큰형님이 가소로워하며 거들먹거리자 무뢰배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나는 웃음을 거두고 고갤 저었다.
“됐다. 어떤 놈인지 대충 알았다.”
고개 돌려 살며시 묻는다.
“그래서 너는 몇 놈 죽일래?”
“한창 죽일 때 숫자 세기 귀찮아.”
“하긴 머리 들고 가기 귀찮겠네.”
블라이넨은 곰방대를 빨고는 식은 연기를 내뱉었다.
“인생사 노가다지.”
* * *
“흐으으윽!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큰형님이 눈물을 쏟으며 싹싹 빌었지만 블라이넨은 자비가 없었다.
“블라이넨이랑 범철 중에서…….”
“응? 당연히 범철 님이 훨씬 센…… 끄악!”
큰형님이 사망했지만, 그것에 통곡해줄 아우 무뢰배들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모조리 우리 손에 시체가 되어버렸으니까.
[회귀자 124명을 척살했습니다.]
[첫 번째 과업을 완료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씩 오릅니다.]
[목표를 24% 초과 달성하여 과업 대기시간이 추가로 단축됩니다.]
지쳐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휴식한다.
과업을 완료하니 능력치가 올랐다.
‘아직 첫 번째일 뿐이야.’
얼마만큼의 과업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과업을 완료해야 전생 관련 특전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
‘전생 관련 특전이라니. 과연 뭘까.’
궁금하지만 현재 해결될 의문은 아니다.
하여간 우선은 우리가 백 명의 회귀자를 죽였다는 증표가 필요하다.
우리는 적당히 시체의 머리를 베어서 가져온 보따리에 싸서 묶었다.
“사람 머리도 오십 개를 싸 드니까, 더럽게 무겁네.”
“속에 든 건 별로 없겠지만.”
하루의 피로를 숲에서 노숙하며 풀고, 우리는 엘프 고을로 돌아갔다.
피투성이인 우리가 백 명이나 되는 사람 머리를 보따리에 싸오자, 우릴 보는 엘프들의 시선이 기괴해졌다.
“으힉!”
솔이는 피가 묻은 날 보고 깜짝 놀라 허겁지겁 아버지 뒤로 숨었다.
엘프 촌장은 침착히 고갤 숙였다.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숫자는 자세히 안 셉니까?”
“지금 세려 했습니다만.”
그는 우리가 가져온 회귀자의 머리를 대충 헤아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난 뺨의 핏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우선 제 일행부터 찾겠습니다.”
엘프 촌장이 활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분은 저희 뒷산에 계십니다. 직접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