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90화 (90/200)

나만 1회차 090화

‘제기랄!’

몸을 깊게 낮추고 입술을 씹는다.

상황이 어쩌다 이리 됐는지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나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을 앞의 외지인에게 무턱대고 화살 쏠 리 없다.

‘하는 수 없어.’

첫 발로 시작해 화살비가 오겠지.

이만한 거리에서 화살이 쏟아지면 어떻게 막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일단 블라이넨의 시체를 화살막이로 써서라도 어서 도망치는 게…….

“엎드려서 뭐하나.”

“아직 안 죽었냐.”

“왜 내가 죽겠어.”

그녀가 무색하게 날 돌아보았다.

그리곤 이마에 찰싹 붙은 조그만 화살을 뾱, 뽑았다.

“장난감 화살이야. 평범한 화살이었으면 내가 이미 베었겠지.”

“크흠!”

헛기침을 내뱉고 한껏 엎드린 몸을 일으킨다.

고을에서 웬 밝은 의복을 차려입은 금발머리 꼬마가 뛰쳐나왔다.

“언니! 언니! 괜찮아? 내가 왔어!”

“화살은 내가 맞았는데.”

“빗나가버렸어!”

성격 밝은 소녀는 뾰족한 귀를 봐선 엘프가 분명해 보였다.

엘프 소녀는 블라이넨을 보호하겠다는 듯 양팔을 벌려 나를 막았다.

“사라져. 인간은 다 죽어야 해!”

“나도 인간인데.”

블라이넨은 아이와 지내는 것이 익숙지 않은지 그저 나직이만 말했다.

‘엘프는 처음 보는데.’

눈처럼 하얀 피부와 뾰족한 귀, 그리고 햇빛처럼 환하고 찬란한 금발.

나는 엘프 소녀의 작은 키를 아주 의심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너, 설마 조력자냐?”

“이상한 아저씨야!”

엘프 소녀는 확 소리치며 블라이넨의 허리 뒤로 숨어버렸다.

나는 헛웃음 짓고는 블라이넨에게 아까부터 물으려 했던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내가 찾는 일행을 엘프가 목격한 적 있다고 했었지?”

“일찍도 묻는군. 엘프 촌장이 너의 일행을 숲에서 봤다고 들었다. 자세한 것은 직접 가서 묻도록 해.”

나를 경계하는 엘프 소녀를 힐끗 곁눈질하고 말했다.

“너도 함께 가자고. 괜히 혼자 갔다간 또 화살 쏘아질 것 같으니까.”

“변함없이 눈치는 빠르군.”

우리 둘은 엘프 고을에 들어섰다.

“언니. 저 아저씨 나쁜 인간이지?”

“응.”

“…….”

아니, 정확히는 엘프 소녀까지 셋.

드넓은 고을 광경을 보고서 난 입을 벌리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프와 동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내 착각이었군.’

사방에 빼빼 마른 한겨울의 고목.

머리를 묶은 엘프들은 수를 놓고 화살을 만든다.

장독에서 장을 꺼내거나 물레로 뽑은 실로 베틀에서 옷감도 짰다.

수려한 엘프들은 토속적인 일상조차도 고귀한 멋이 흘러 아름다웠다.

“블라이넨이 인간을 데려왔잖아.”

“그럼 일단은 쏘진 않겠지만…….”

“회귀자는 믿을 수가 없어. 블라이넨처럼 유익한 검사가 아니고서야.”

고을에 있는 대부분의 엘프들은 활을 손에 쥐고 날선 눈초리로 나를 경계했다.

이거, 역시 혼자 들어왔으면 바로 고슴도치 꼴이 났을지도 모르겠군.

“여기가 촌장의 자택이야.”

중앙에 우두커니 놓인 나무집은 다른 집보다 오히려 작고 소박했다.

도포를 차려입은 엘프가 마루에 앉아 붓으로 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데다, 워낙 용모가 아름다워 당연히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의 굵직한 중저음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인간이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범철의 일행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렇다는 의미는.”

엘프 촌장이 고개 돌려 날 바라봤고, 짧은 순간 시선이 교차했다.

그가 붓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솔이야. 넌 물부터 길어 오거라.”

“예! 아버지!”

솔이라 불린 엘프 소녀가 씩씩하게 달려나갔고, 마루엔 우리만 남았다.

“앉으십시오. 블라이넨도 함께.”

우리 둘은 마루에 앉았고, 엘프 촌장은 종이를 바닥에서 치워버렸다.

“청색대륙의 신께서 저희 고을에 방문하신 것에 부디 인간사회의 정치적 모략 따위가 없길 바랍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구태여 신도가 일행을 찾을 리 없을 테고, 검도 차고 계시니 말입니다.”

나는 한적하게 우는 새를 보았다.

“고을이 평화롭군요. 다들 인간이 회귀했단 사실도 인지하고 있고.”

“엘프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인간들이 백 번 넘게 과거로 돌아와 미쳐 버렸다는 건 이미 인지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시점 이후로 시간이 제법 흐르긴 했지만, 파악이 유연한 편이군.

“제 일행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범철을 찾는 일행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얼마 전에 저희 엘프에게 큰 도움을 주셨지요.”

“인상착의가 어땠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타인의 정보를 함부로 풀지 않으니까요. 이 숲에 거처를 두셨다는 것 외에는 아직 깊게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역시 섣불리 정보를 주지 않는군.

아직 신용을 얻지 못한 것이리라.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

엘프 촌장이 목격했다는 나의 일행은 과연 세 사람 중 누구일까?

내가 촌장에게 목적을 말했다.

“동료의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불멸아귀의 서식지로 가기 위해선 여길 들려야 한다 들었는데요.”

“불멸아귀요? 그런 마물이 청색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어째 회귀를 못하는 이종족들은 대륙의 지배자 얘기만 들으면 놀라는군.

여기서 유일한 회귀자인 블라이넨이 부연설명을 했다.

“불멸아귀가 서식하는 천지에 가려면 용궁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엘프 고을의 협력이 꼭 필요합니다.”

“어째 굉장히 자세히 아는군.”

“나도 거길 가야 하니까. 내가 구하려는 명약은 불멸아귀가 지키거든.”

아, 어쩐지 그녀가 죽이려던 나를 순순히 고을까지 끌고 왔다 싶었다.

서로 목적지가 동일하니 그녀도 나를 이용할 작정이었군.

단순히 온정에 이끌린 호의가 아니라 엄연히 계산적인 행동이었다니.

내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도 불멸아귀한테 가야겠군.”

“네가 말했잖아. 일단 함께하자고.”

“청색대륙에서만 같이 다녀볼까?”

“그것까지는 조금 고민해보지.”

그러나 엘프 촌장은 만만히 가진 것을 내어주는 자가 아니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다면 저희의 신뢰부터 얻어주셔야겠습니다.”

블라이넨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서 방금 폭포에서 엘프를 먹는 마물을 베어 죽이고 왔습니다만.”

“블라이넨의 마물 퇴치 덕분에 고을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에는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당분간 엘프 고을에서 생활하는 것도 허락해드렸죠.”

엘프 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진정한 고을의 평화를 위해서는 위험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위험요소요?”

“달보드레 숲은 넓고, 엘프를 노리는 회귀자가 한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이곳의 복잡한 지리도 알고 있더군요.”

회귀자에 관해서 얘기할 때 엘프 촌장의 눈빛에선 근심이 깊어졌다.

“숲을 산책하던 엘프들이 회귀자들의 손에 얼마나 많이 끌려갔는지 모릅니다. 자연과 풍경이 아름다운 달보드레 숲은 회귀자들의 피와 탐욕으로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환술을 써서 침입을 막고 있지만, 그저 회귀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입니다.”

그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회귀자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우리도 가끔 인간 행상과 거래를 위해 교류하니까요. 그러나 현재 숲에 있는 회귀자들은 엘프를 해하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촌장이 우리 두 사람을 바라봤다.

“불세출의 검사라 불리는 두 분의 명성은 인간과 교류하며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 간청합니다.”

엘프 촌장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숲의 회귀자들을 죽여주십시오.”

블라이넨은 즉각 무심히 물었다.

“몇이나?”

“못해도 스물. 고을 근방에 활개치는 회귀자는 대충 그쯤 될 겁니다.”

그녀는 바로 의뢰를 받아들일 각오를 했지만, 나의 경우는 좀 달랐다.

곧바로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설마 그 검으로 위협해 제게서 강제로 정보를 캐시려는 것은?”

내가 싱긋 웃으며 위를 가리켰다.

“불행히도 내가 눈치가 빨라서요. 저 나무에서 절 노리는 엘프 몇 명을 놓칠 만큼 눈이 나쁘지도 않고.”

자그마한 잎사귀가 살짝 떨어진다.

대기한 궁수들이 몸을 떤 거겠지.

엘프 촌장도 마주 보며 웃었다.

“물론 강제로 살생을 부탁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싫으시다면…….”

“아니요. 회귀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무 적어서요.”

“예?”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말하였다.

“스물은 지나치게 적습니다. 회귀자 백 명을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 * *

고된 일을 부탁하며 숙식을 외면할 만큼 엘프 촌장은 염치없진 않았다.

우린 촌장의 자택에서 묵기로 했다.

신선한 채소와 귀하디귀한 쌀밥을 비우고 깨끗이 씻으니 살 것 같다.

오래간만에 여독을 푸는 것은 좋았지만, 묵을 방에는 불만이 생겼다.

“아니, 왜 한방에서 재우는 거야.”

“사랑채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엘프 소녀 솔이가 얄밉게 나한테 혀를 삐죽 내밀고는 쌩 도망쳤다.

저걸 그냥 한 대 쥐어박을까 보다.

좁은 방이지만 블라이넨은 내가 민망할 만큼 편하게 이부자리를 폈다.

그녀가 칼집을 끌어안고서 누웠다.

“불편하면 마루로 나가 자든지.”

“…….”

하기야 딱히 한 이불 덮고 자는 것도 아닌데 내숭 떨 거야 있겠나.

내일은 새벽부터 바쁠 예정이라 나도 이부자리를 깔고 편히 누웠다.

“불 끈다.”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호롱에 담긴 붉은 불을 훅 불어서 꺼버렸다.

새까맣고 어두워진 조용한 방.

다만 어째선지 잠은 오지 않는다.

“어째서 백 명을 죽인다고 했지?”

아마 그녀도 잠이 오지 않나 보군.

“회귀자가 그리 좋지는 않아서.”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글쎄. 알아서 생각해라.”

사실 내가 구태여 회귀자 백 명을 죽이겠다 선언한 것엔 이유가 있다.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문구가 내 앞에 떠올라 있었다.

[전생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와 6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대기시간이 만료되어, 전생의 돌이 첫 번째 과업을 부여했습니다.]

[전생의 돌이 내리는 모든 과업을 끝내면 전생관련 특전을 얻습니다.]

[전생에 연 많은 회귀자와 함께할수록 과업 대기시간이 줄어듭니다.]

[회귀자 100명을 척살하십시오.]

[동행하는 일행이 살해한 회귀자도 척살 숫자에 함께 가산됩니다.]

‘전생의 돌이 내리는 과업.’

이것이 첫 번째 과업이다.

과연 모든 과업을 완수하면 나에게 어떤 특전이 주어지는 것일까.

‘일행을 빨리 찾아야 할 이유가 늘었군.’

전생에 인연이 많은 회귀자가 일행에 많을수록 과업이 빨리 내려진다.

나와 연이 가장 깊은 회귀자는 분명히 헤르탄, 그리고 카티에였다.

‘동료를 일찍 만날수록 과업도 빠르게 완수할 수 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블라이넨이 돌아누운 채로 말했다.

“넌 항상 회귀를 끝내려 했지. 그래서 이번 삶에 내가 할 말도 같아.”

“뭔데?”

“난 그저 명약만을 훔치려 하지만 넌 지배자 살해 그 자체가 목표다.”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낮게 말했다.

“그 목표, 포기해라. 대륙의 지배자는 결코 죽일 수 없는 생명체이니까.”

“이미 한 놈 죽이고 오는 길인데.”

“…….”

블라이넨은 몸을 돌려서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신이었나.”

“네 눈에는 그래 보이냐?”

“전혀.”

“신앙심이 부족해서 마음에 드네.”

내가 블라이넨에게 동행을 제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전생의 돌 효과를 빠르게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일생신교가 아니기에 나를 신으로 보지 않는다.

‘거기다가 극성스러운 신도처럼 행여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염려도 없고.’

물론 전생에서 날 가장 많이 죽였던 회귀자이니 완전히 믿진 않겠지만.

블라이넨은 낯설다는 듯 말했다.

“이번 회차는 의아하군.”

“뭐가?”

“내가 경쟁자인 너와 함께 잔 적은 전생을 통틀어도 거의 없었으니까.”

왠지 익숙한 말이라 한숨 쉬었다.

“나랑 같이 다니면 전생에 없던 일을 많이 겪게 될 거야. 기대하라고.”

그만큼 생고생도 많이 할 테고.

블라이넨은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지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아크 리치는 어떻게 죽였지? 나도 그 몬스터에게 도전했던 적이 있지만, 상처 하나 못 입히고 패배했다.”

“끝마무리는 내가 지었지만, 자살기도회의 도움이 컸지. 우리가 꾸린 원정대에는 많은 강자가 있었어. 오크 대군, 용, 도둑길드. 그리고 네가 이끄는 밀밭기사단도 있었고…….”

아크 리치 원정 무용담을 풀자 그녀는 유심히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어느덧 한껏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깊어져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아크 리치를 죽였지. 졸리니까 이쯤에서 끝나자고.”

“네가 뱉는 말솜씨, 꽤 흥미롭군.”

무슨 얘기는 집중해 들어주는 용과 늘 떠들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되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늦은 밤.

잠결에 나는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흐아암……. 어?”

기지개를 펴려다 실수로 손끝이 그녀의 옆구리에 스치고 만 것이다.

내가 흠칫 놀라서 사과하려 할 때.

블라이넨이 칼같이 나에게서 등을 돌려 누우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

“…….”

어련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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