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89화
챙! 채앵! 챙!
세 자루의 검이 교차한다.
내가 쥔 하나의 검이 두 칼을 상대로 부딪쳐 밀리고 몰아붙여졌다.
이미 적의 반경에 맞서며 들어간 이상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사라졌다.
‘제기랄!’
지금 내게 불멸자의 갑의는 없다.
날에 닿는 순간, 죽음에 직결된다.
빌어먹을 갑옷 하나 없다고 이렇게까지 떨리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내가 지금껏 실천해온 과감함은 전부 갑옷에서 나온 것이었단 말인가?
‘……아니야.’
회귀자만큼은 아니지만,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여진 위기는 숱하게 겪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해당 회귀자가 기피하는 변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속으로 동의하자 블라이넨이 기피하는 변수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펜타그램에 덧칠된 색채에 의해 상위변수 창출확률이 높아집니다.]
[최하급 변수 5개 획득!]
『현재 블라이넨은 금연 중입니다. 눈앞에서 연초를 맛있게 피워서, 그녀가 평정심을 잃게끔 하십시오.』
『그녀는 범철이 검과 섹스를 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라이넨의 취향은 몸매가 빼어난 미인입니다. 이상형을 대면시키면 그녀는 내심 흔들릴 것입니다.』
『블라이넨은 범철과의 대결을 무척 고대해왔습니다. 자살하십시오. 그녀는 크게 충격받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죽음까지의 시간이 짧아집니다.』
‘망할!’
빌어먹게도 최하급 변수 5개!
서로 능력치가 비슷하기 때문일까.
더럽게 운수 나쁘게도 그 흔한 하급변수 하나조차 창출되지 않았다.
‘내겐 극악의 변수만이 모였다.’
방금 떠오른 변수에 관한 설명을 흘깃 읽느라 꽤나 뒤로 밀려 버렸다.
그나마 이런 칼싸움 와중에도 정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겠지.
난 블라이넨의 쌍검을 힘겹게 받아치며 두뇌를 팽팽하게 회전시켰다.
‘과연, 그게 먹힐까?’
드물기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도 전혀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상황마다 늘 상위변수가 창출된다면 지나친 행운이겠지.
따라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극악의 변수를 활용하는 임기응변이다.
“잠깐!”
내가 단호하게 외쳤고, 그래서 블라이넨은 내 머리에 칼날을 그었다.
황급히 물러나 검을 튕겨낸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이루어진 틈.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고백하였다.
“난 연초를 태우며 검과 섹스를 할 것이고, 네게 몸매가 빼어난 미인을 소개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자살해버리겠다. 널 영원히 사랑하니까!”
“…….”
나의 진솔함이 담긴 애틋한 고백.
블라이넨은 짧게 한 마디만 했다.
“미쳤구나.”
“…….”
“역시 그 주둥이를 베어야겠어. 너는 그래야지만 진지하게 임하겠지.”
칼을 거두기는커녕 힘이 거세진다.
저런, 잔인한 여자 같으니라고.
나는 휘몰아치는 쌍검을 받아치느라 팔에서 진이 빠지며 탄식했다.
‘최하급 변수는 전혀 쓸모가 없군.’
결국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쌍검이 거칠게 삼척검을 쳐낸다.
챙!
손아귀에서 벗어나 허공을 빙그르 돌더니 눈 바닥에 꽂혀버리는 검.
블라이넨은 나를 빈틈없이 몰았다.
두 자루의 검이 무기를 잃은 나의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려고 할 때.
마나를 휘감은 손가락을 휘젓는다.
‘그래, 최하급 변수는 역시 쓸모없겠어. 지금처럼 특정한 때만 빼고.’
그녀의 등줄기를 화염이 덮쳤다.
흠칫 놀란 블라이넨이 몸을 던졌으나 불꽃은 피하느라 중심을 잃었다.
“네가 어떻게 마법을……?”
나를 노리는 회귀자의 특징은 검에만 대비하며 수련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마법은 역전의 수.
한순간의 기회지만, 싸움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카드가 되어버린다.
특히 괴상한 고백을 듣고서 기분이 상하거나 얼이 빠졌을 때는 더더욱.
‘지금뿐이다!’
화기의 뱀이 그녀의 양손을 뒤덮으려 했으나, 대처가 심하게 민첩하다.
양손을 노렸던 마법이 칼날로 빗나가며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 날린다.
그 틈에 내 발이 블라이넨의 가슴을 걷어차고, 불꽃을 얼굴에 겨눴다.
“지금 죽여야 하나.”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야. 실은 나도 널 사랑했으니까.”
“……거짓말해서까지 살고 싶냐?”
“……죽기 싫어. 너한테만은 결코.”
블라이넨은 아주 진지하게 목숨을 구걸했고, 그것이 나를 웃게 했다.
“그래, 절조 있게 그냥 죽여 달라고 해대는 것보다야 훨씬 낫네. 그다지 회귀자스럽진 않지만 말이야.”
“흔치 않지만, 그 생각은 일치해.”
가만히 아래 있는 그녀를 살폈다.
바로 죽이지 않은 것엔 이유 있다.
“너는 전생의 원수들처럼 내게 엄청난 악의를 가진 것 같진 않은데.”
“내가 흥미 가진 것은 너와 칼을 겨루는 일뿐이야.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런 것치고는 목을 베려 하던데.”
“베고 붙여주려 했지. 안 아프게.”
기가 막힌 논리의 역설에 나는 감탄했고, 일단은 정보부터 캐물었다.
“지금 일행을 찾고 있는데, 엘프의 숲에서 생활하는 황색대륙 여자 한 명이 있다 해서 왔다. 알고 있냐?”
“그건 나야. 대형 마물 퇴치를 대가로 엘프 고을에서 생활하고 있지.”
“너였냐? 그럼 헛걸음했군. 잘 가.”
내가 마법으로 그녀를 죽이고 다음 일정에 관해서 고심해보려던 찰나.
블라이넨이 황급히 정보를 내놨다.
“네 일행 중 하나가 이곳에 있어.”
“뭐?”
“네 일행을 목격한 엘프가 있었지. 그리고 이번 삶에서도 네 목적은 역시 회차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겠지?”
“그래, 불멸아귀를 죽일 거다.”
“아귀가 서식하는 곳에 가기 위해선 엘프 고을에 가야 한다. 다만 그냥 혼자 갔다간 사격을 받고 말아.”
저 말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만일 맞으면 엘프 고을은 반드시 내가 가봐야 하는 장소이다.
블라이넨은 내게 역으로 제안했다.
“나와 함께 가지. 나랑 고을로 가면 엘프들이 너를 쏘지 않을 거다.”
“엘프들이 그렇게 강한가?”
“달보드레 숲에서 엘프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회귀자는 손에 꼽혀.”
하긴, 전에 뱃사공한테서 엘프한테 죽는 회귀자가 많다고 듣긴 했었지.
오래 살아선지 감정을 읽기 어려운 회귀자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블라이넨은 영리하게도 목숨을 구걸하면서도 전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너는 날 살려야 해. 네가 엘프 고을에 가려면 내가 필요할 테니까.”
짧지만 깊게 고민하고서.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래도 널 살려놓긴 좀 그렇다. 나중에 배신할지도 모르고.”
“…….”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깨달았다.
위험요소가 될 회귀자는 미리 제거해두는 것이 앞길에 편하다는 것을.
블라이넨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인사 두 번 하니 좀 그렇군. 이번에 번복하지 않겠어. 부디 잘 가라.”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며.
블라이넨의 생명을 끝내려 했을 때.
갑자기 배낭이 마구 꿈틀거렸다.
[배낭 안의 어떤 소지품이 블라이넨의 죽음에 민감히 반응합니다.]
‘뭐야?’
내가 갑작스레 떠오른 문구에 의아해할 때, 배낭에서 뭐가 튀어나왔다.
어렴풋한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자그마한 돌멩이가 떠오른다.
‘이건…… 전생의 돌이잖아?’
황색대륙의 지배자를 죽이고 얻은 보상.
그저 평범한 돌멩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것이 난데없이 앞에 떠올랐다.
[전생의 돌이 전생에 인연이 깊은 회귀자와의 다툼에 반응했습니다.]
[어느 회귀자도 가지지 못한 특전을 얻기 위한 길이 개방됐습니다.]
[전생에서 가장 많이 당신을 살해하고 살해당한 회귀자, 블라이넨.]
[그녀와 반드시 함께하십시오.]
[연이 깊은 회귀자와 오래 함께할수록 과업 대기시간이 단축됩니다.]
‘나한테 과업이 내려진다고?’
난 놀라서 문구를 깊이 바라봤다.
그 어느 회귀자도 가진 바 없는 특전을 얻기 위한 길이라니.
그런데 조건이 상당히 미묘하다.
‘블라이넨과 함께 다니라니.’
전생에서 날 가장 많이 죽여 본 회귀자와 함께 다녀야만 한다니.
평소라면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절대 승낙하지 않을 조건이지만…….
‘전생의 돌은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유일하게 획득한 아이템이다.’
전회차를 통틀어서 최초로 대륙의 지배자를 살해하고 획득한 아이템.
어쩌면 전생의 돌은 나를 크게 성장시킬 잠재력을 품었을지 모른다.
내가 망설이며 문구를 바라보고 있자, 블라이넨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나를 살릴 건가.”
결국 내가 한숨 쉬며 손을 내렸다.
“전혀. 넌 지금 여기서 죽어야 해.”
“…….”
낮춰진 손아귀가 블라이넨 코앞에서 불꽃을 뜨겁게 이글거리게 했다.
전생의 돌이 어떤 힘이 있는지 몰라도 내게 선택을 강요할 순 없다.
세계권의 검사이자, 날 가장 많이 죽인 회귀자는 반드시 독이 된다.
“세 번째 인사군. 먼저 잘 가라.”
내가 그녀의 머리를 단숨에 불태우려고 할 때, 돌이 손등에 날아왔다.
그러자 손아귀에 휘감긴 불꽃이 갑자기 전혀 분출되지 않았다.
[전생의 돌이 당신의 막무가내 행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녀와 반드시 함께하십시오.]
“……나를 고문할 셈인가.”
블라이넨은 찌푸린 눈꺼풀을 감으며 코앞의 강한 불길에 괴로워했다.
그녀의 고통이 빨리 끝나게 생명을 끊고 싶지만, 마나의 기류가 끊겼다.
‘……하는 수 없지.’
끈질긴 전생의 돌의 방해 공작에 나는 끝내 항복하고야 말았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면, 맨손으로라도 죽이는 수밖에.’
지금껏 도구 없이 손으로만 사람을 죽였던 잔혹한 경험은 일체 없었다.
그러나 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인류의 회귀를 멈추기 위해선 이보다 잔인한 일도 많이 해야 하리라.
“고통스럽겠지만, 금방 끝내줄게.”
불꽃이 휘감긴 오른손으로 그녀를 겨눈 채로, 왼손을 쥐었다가 폈다.
정석적이게 목을 조르려던 순간.
전생의 돌이 과격하게 움직이며 내 왼손 손등을 팍 때리고 지나갔다.
[전생의 돌이 당신의 억척스러운 고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녀와 반드시 함께하십시오.]
[돌발행동을 계속하면, 다음은 돌이 당신의 머리를 때릴 것입니다.]
‘……그냥 부숴 버릴까.’
언뜻 그런 짜증이 스쳤지만 현존하는 유일한 아이템을 날릴 순 없다.
기어코 블라이넨도 한숨을 쉬었다.
“죽일 거면 빨리 좀 죽이든가 해.”
* * *
마지못해 나는 선택지를 변경했다.
‘이렇게까지 하면, 어쩔 수 없군.’
마음을 바꿔서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 내가 살려주면 어쩔 거냐?”
“그것은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를 것 같은데.”
“배신하지만 마라. 죽기 싫다면.”
“당연히 그럴 거야.”
내 손에서 불이 사그라지자 전생의 돌이 만족한 듯 배낭에 들어갔다.
블라이넨은 즉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쌍검 두 자루를 손에 챙겼다.
혹시나 그 쌍검이 내게 향할까, 삼척검을 집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너의 검술은 전생보다 약해졌어.”
블라이넨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도 너를 이기지 못했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상당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방금 나를 엘프 고을까지 안내해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금세 잊었는지.
블라이넨은 주먹을 떨다가 어디론가 걸어가려 하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가냐?”
“졌잖아. 자살할 거야.”
“아까까진 살려고 하더니?”
“너의 손에 죽는 것과 나의 손에 죽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 이번 삶에서 내가 끝내야 하는 일도 있고.”
“어디서 죽으려고?”
“어디든 따스한 곳. 추운 건 싫어.”
그런데 잘도 상의를 벗고 있었군.
나는 외투를 벗어주었다.
“입어라.”
“꺼져라.”
“애 같기는. 고집 거두고 껴입어.”
“내게 그러할 의무는 없을 텐데.”
블라이넨은 친절한 나의 호의를 경멸하며, 입을 열었다.
“……후에츳!”
“어라, 보기보다 기침 소리가 참 앙증맞군?”
“죽고 싶나.”
“살고 싶지. 너도 그럴 테고.”
“…….”
블라이넨은 끝내 내 외투는 받아 입지 않고, 젖은 상의를 주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마나의 불꽃을 태워 불가를 만들고 그곳에 앉았다.
“이러면 훨씬 따스하지.”
“…….”
블라이넨은 멈칫하다 결국 앉았다.
나는 불가를 보면서 하품을 했다.
“내가 너의 목숨 살리는 데 일조했으니, 이번 삶에서 빚은 꼭 갚아라.”
“죽이는 데도 상당히 일조하던데.”
“그건 너도 그러지 않았냐.”
“…….”
“전생이야 어찌 됐든 잠시 휴전해. 일단은 함께 다니기로 했으니까.”
“진심으로 내가 너를 엘프 고을까지 안내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지 않을 거면, 쌍검을 쥐었을 때 칼끝이 곧바로 나를 향했겠지.”
블라이넨은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한쪽 무릎을 끌어 앉고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지. 또.”
“또?”
“네가 패배한 내게 휴전을 제의한 것은, 이번 삶이 처음은 아니니까.”
전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걸까.
나란 놈은 가끔 참 나약해.
“그야 간단하지.”
나는 블라이넨을 보며 씩 웃었다.
재능으로 올라가는 나와는 다르게.
순수하게 노력만으로 강해진 검사.
“너를 이용해먹고 싶어졌거든.”
나의 생각을 밝히자 블라이넨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기연이군. 내 생각과 일치하다니.”
* * *
“난 전하의 백치를 치유하는 명약을 구하기 위해 청색대륙에 왔다.”
“그러면서 바로 자살하려고 했냐?”
“아까 끝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 약을 전달하고 죽으려 했어. 그래서 너한테 목숨까지 구걸했고.”
블라이넨은 내 반박을 간단히 일축했고, 난 가만히 입술을 두드렸다.
‘검으로만 붙었다면 분명히 졌다.’
그것은 확실히 인정할 문제였다.
다른 재능을 더하지 않고, 칼로만 싸웠다면 나는 분명 그녀에게 졌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전생보다 검술이 퇴보했다고 말했지.’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의 재능만 지녔던 전생과 다르게, 120회차의 나는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한꺼번에 여러 재능을 갈고닦으니 자연히 전생보다 검술에 투자하는 수련시간이 줄어들 수밖에는 없다.
‘그래 봤자 블라이넨 수준의 강자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폭이겠지만, 내 검술은 엄연히 하락한 것이다.’
불멸아귀를 죽이려면 꼭 검술을 전생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할 텐데.
그렇게 고민에 잠겨 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살짝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보였다.
“왜 그래?”
“오래 걸으면 좀이 쑤셔. 평발이라.”
블라이넨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저 너머에 있는 그루터기를 바라봤다.
“저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해.”
“시력도 좋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래서 예순 살쯤에 실명해.”
“…….”
자신의 운명을 알고도 저렇게 덤덤할 수 있는 회귀자가 새삼 놀랍다.
‘평발에다, 눈까지 나쁘면서 나를 그렇게나 몰아붙일 수가 있다니.’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칼은 얼마나 수련했지?”
“의식이 있는 모든 때. 잘 때는 칼을 안고만 잤지. 쥐니까 놓게 돼서.”
“아까 폭포에서도 수련했던 건가?”
“1회차에서 120회차까지.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다 블라이넨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미려한 인상의 그녀가 긴 속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돌아본다.
“개 같은 새끼.”
“…….”
“내가 너한테 이겼어야 했어.”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상심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넌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나도 모든 걸 쏟아붓지 못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나는 기본적인 검과 마법만 썼을 뿐, 유용한 전투 스킬은 쓰지 않았다.
순간가속, 공간왜곡, 마나 원천의 괴력술, 유령기사단 소환 같은 것 말이다.
“확실히, 아까 승부는 불완전했지.”
“만족하지 못해. 나중에 다시 붙어.”
“글쎄. 그때도 지면 어쩌려고?”
“안 져. 더 노력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심성이 굳센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걸어갔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다셨다.
‘그렇게 매진했는데 내게 진 건가.’
만약 내가 저 상황이면 피눈물을 쏟을 만큼 분하고 질투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쏘아붙이고 끝내다니.
블라이넨은 나와는 다르게 감정통제에도 악착같이 노력했나 보군.
‘어찌 됐건 저렇게 근성이 강한 회귀자라면 명줄은 꽤나 질기겠네.’
그렇게 몇 시간을 걷자 인가가 나왔다.
‘저기가 바로 엘프 고을인가?’
소도시에 버금가는 커다란 고을.
잘 지은 나무집들이 멀리 보인다.
그러나 그때 내 눈동자가 커졌다.
“엎드려!”
그러나 너무 늦고 말았다.
피잉!
블라이넨의 이마에 화살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