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88화 (88/200)

나만 1회차 088화

달보드레 숲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큰 강을 하나 넘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삯을 받고 나룻배를 모는 사공이 보였고, 다가가 얘길 나눴다.

씹으면 물에 대한 적응력이 오르는 해초를 넘겨주고 탑승할 수 있었다.

‘확실히 해적선을 털면서 여러 물건을 얻어두니 거래에 편리하군.’

뱃사공이 노를 휘젓고 있고, 나는 햇빛이 비치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이 절경이 따로 없군.’

황색대륙이 분포된 밀밭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면, 청색대륙은 찬연히 뿌리내린 강줄기로 붙은 이름이다.

청색대륙은 그 이름답게 넓은 땅덩이 곳곳에 여러 강이 흐른다 한다.

“여기는 나중에 바다로 통하게 되는 강물이요. 참 아름답지 않은가?”

가끔씩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고, 맑은 물이 햇빛에 반짝인다.

두 애완수도 호리병에 집어넣은 상태였기에 난 오롯이 경치를 즐겼다.

강 한복판에서 사공은 보자기를 풀고 개떡을 우물대며 잠시 휴식했다.

“이 강을 넘어가면 외진 숲으로 향하게 되는데 뭐 때문에 가는 거요?”

“달보드레 숲으로 가고 있습니다.”

“엘프들이 사는 그곳 말이요? 허허! 납치인 거요? 아니면 자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삶마다 수많은 회귀자들이 엘프를 탐내며 숲으로 향하곤 하지. 그러나 대개 성과 없이 죽거나 쫓겨나. 회귀로 단련된 사람들임에도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엘프들도 인간은 아니니, 회귀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황색대륙의 오크가 생각나는군.’

120회차 세상, 회귀하지 못하는 이종족은 회귀자의 먹잇감에 불과하다.

그래서 회귀자와 이종족은 전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다.

‘특히 엘프라면 더할지 모르겠군.’

눈부시게 고아한 미모와 멋들어진 자태를 지녔다 전해지는 그들의 소문은 황색대륙에서도 유명하였다.

회귀할수록 본능에 충실해지는 회귀자들이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

‘어찌 보면 숲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이해는 가는군.’

뱃사공은 마저 남은 개떡을 꿀꺽 삼키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런데 형씨. 혼자서 엘프를 포획하려면 목숨이 위험할걸? 대형 종파가 일부러 조직을 꾸리지 않는 이상, 엘프를 납치하긴 어려울 거야.”

확실히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사실 나도 달보드레 숲으로 향하기 전에 인가에서 함께 이동할 동행인을 구해볼까, 생각해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인간 동행인을 구한다는 것은 나의 정체가 탄로 날 확률도 높이는 것이다.

‘신분을 밝히면 무슨 명령이든 따르는 신도를 포섭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은 날 잡아먹으려 하는 신식회처럼 극성스러운 신도를 조심해야만 한다.

청색대륙에 대한 정보가 극심하게 적은 편이고, 조심해야 할 게 많다.

“다 왔소. 혹시나 썩 괜찮은 엘프 납치하면 오는 길에 나한테도 좀 보여주쇼. 흐흐.”

나는 기분 나쁜 뱃사공의 말을 뒤로 하고 달보드레 숲으로 향하였다.

* * *

며칠 밤 노숙을 하고 밤새 걸으며 마침내 달보드레 숲에 당도했다.

‘저건 처음 보는 나무들인데.’

껍질이 거칠고 기둥이 굵직한 드높은 나무들이 숲속을 메우고 있다.

가는 잎사귀를 보니 소나무처럼 생겼지만, 키가 두 배는 높고 두껍다.

겨울임에도 모든 나무가 상록수처럼 푸르른 잎사귀를 흔든다.

‘마치 거인의 숲처럼 보일 정도군.’

나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보다 새삼 감탄하고야 말았다.

‘달보드레 숲속에 관한 지리까지 자세하게 표시가 되어 있다니.’

고을에서 산 싸구려 지도일 뿐인데도 청색대륙의 곳곳이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인간이 탐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빙산 금역이나 강력한 용이 서식하는 위험지대도 서술되어 있다.

1회차 세상이었다면 지리학자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할 최정상 지도!

회귀자는 120회차 동안 살아왔기에 대륙에 안 가본 곳이 없는 것이다.

‘이러니까 회귀도 혼자 한 게 아니라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거지.’

히든 피스를 개나 소나 알고 있으면 그게 히든 피스란 말인가.

그러나 여정을 진행해오며 조금 더 깊은 생각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표기돼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도 있겠지.’

황색대륙에서 나는 회귀자조차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체험을 겪었다.

청색대륙의 지배자 불멸아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회귀자조차 모르는 히든 피스를 찾아내 손에 넣어야 할 거다.

‘우선, 엘프의 서식처로 가려면 숲에서 가장 큰 나무를 찾아야 한다.’

지도를 살펴보며 숲을 가로지른다.

나는 거인의 숲처럼 드넓은 땅을 걸으며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이 숲에 엘프들과 함께 생활하는 황색대륙 여자가 있다고 했었지.’

인간을 경계하는 엘프 사이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담력과 용기라면, 내 일행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렇게 숲을 지나고 있을 때, 문득 물소리가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꽤 커다란데. 폭포 소리인가?’

마침 수통에 있는 물도 거의 떨어져가고 있던 참이었다.

초화가 먹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저기서 물을 보충하는 편이 좋겠다.

내가 물소리가 들리는 장소로 걸어가자, 그곳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 * *

폭포 끝에는 고아한 여자가 있다.

날씨가 한겨울인데도 여인은 상의를 입지 않고 상체를 태연히 드러냈다.

목에 닿는 짤막한 적발, 청아한 외견 탓에 처음엔 엘프라고 느꼈다.

그러나 속으로 고개를 휘젓는다.

‘귀가 뾰족하지 않아. 인간이군.’

벌거벗은 상체지만 이상한 잡념이 들지 않을 만큼 조각 같은 근육이다.

균형을 이뤄낸 견고한 체형의 그녀는 양손에 쌍수검을 쥐고 있었다.

‘저건 처음 보는 자세인데.’

그녀가 취한 단호하고 일정한 검의 자세가 나의 발목을 사로잡았다.

여인의 자세는 가벼워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내게 칼을 쥐고 파고들라고 한들, 뚫을 확신이 없을 만큼 완전하다.

그저 자세만 보았음에도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게 전해져온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다.

어서 정신 차리고 물러나려 했다.

하나 그때, 폭포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구쳐 오르며 물방울이 튀었다.

“키라와아악!”

그것은 폭포의 절반은 될 만큼 커다란 물고기였는데,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몬스터.

그 흉측한 몬스터는 난생처음 보는, 청색대륙의 괴생명체였다.

‘젠장!’

서둘러서 검을 뽑고 뛰쳐나갔지만, 이미 그녀를 구해내기엔 늦었다.

동공 없는 흰 눈의 물고기 괴물이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키려고 할 때.

여인의 쌍수검이 싸늘히 응답했다.

서거걱!

“쿠로어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만큼 빠른 시각, 괴물의 목구멍이 뚫렸다.

비늘이 꽃잎처럼 사방에 흩날린다.

내장이 쏟아졌고, 여인은 찌푸림조차 없이 칼을 휘둘러 피를 털었다.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저곳에 진정한 검사가 서 있었다.

‘강렬해. 내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느 검사보다 제일 강렬한 인상.’

오늘 넋을 여러 번 놓게 되는군.

무심한 여인이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서 멍하니 있는 날 돌아보았다.

비늘, 피, 물방울이 난무하는 폭포.

우리가 처음 시선을 마주하였다.

“빠르게 가지.”

“뭐?”

“너는 나를 가장 많이 죽인 자다.”

“……그러는 너는?”

“너를 가장 많이 죽여 본 검사지.”

무정하고 고압적인 차가운 목소리.

몇 마디만 대화했는데도 파악된다.

나는 여인을 지키려고 쥐었던 칼을, 나를 지키기 위하여 고쳐 들었다.

상대를 향해 농담처럼 빈정거린다.

“그럼 전생에 마지막으로 패배했던 사람부터 선공할까? 누가 졌었지?”

여인의 검이 내 미간을 꿰뚫었다.

* * *

그저 미간만 꿰뚫린 것이 아니다.

여인이 쥔 두 자루의 검이 내 이마, 눈알, 팔, 발, 허벅지를 꿰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온몸이 꿰뚫려 있었다.

“흡!”

숨을 삼키며 물러선다.

칼끝이 머리칼 끝을 스쳐 베었다.

내가 피하는 곳마다 교묘히 노리는 두 자루의 칼날이 근접해와 찌른다.

‘제기랄!’

검을 꽉 쥐었지만,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계속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섣불리 휘둘렀다간 베일 테니까.

서둘러 찌르려 했다간 꿰일 테니까.

손에 검이 있음에도 이토록 칼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처음이다.

‘움직임만 보자면, 능력치에서 그리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야.’

황색대륙의 지배자를 죽이고 나도 이전보다는 훨씬 성장하고 강해졌다.

그러나 지금 여인이 나를 압도하고 있는 부문은 칼에 대한 경험치였다.

물론 나는 평범한 회귀자의 경험 따윈 억누를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나 이 여인만큼은 전혀 달랐다.

‘가장 검술이 뛰어나.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그 어느 회귀자보다도.’

그녀의 칼부림에서는 이제껏 다른 회귀자에게선 보지 못했던 경험치가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연결 동작 하나하나, 칼끝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전혀 쉽지 않다.

식은땀이 이마에 뻗친다.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다.

검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쳐낸다.

그러는 동시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나는 발을 헛디뎠다.

누가 보아도 치명적인 실수!

“크윽!”

그러나 여인은 접근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레 뒤로 물러난다.

허리 뒤로 칼을 쥐었던 나는 바짝 타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핥았다.

‘속임수 동작도 완전히 읽혔군.’

여태껏 검술의 상대로 이렇게 막대한 적수를 만난 적 있기나 했던가.

‘아니, 없었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칼을 꽉 쥐고 감각을 최대한으로 세운다.

약간도 실수하면 죽게 될 테니까.

‘죽일 각오로 임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된다.’

그런데 여인은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화내듯 눈살을 찌푸린다.

“왜 약해졌지.”

“뭐?”

“내가 바란 승부는 이게 아닌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째서 검술이 퇴보한 거지?”

퇴보?

내가 칼 쓰는 모습을 보고서 저렇게 말하는 회귀자는 난생처음이군.

“내가 퇴보했다니, 무슨 소리지?”

“지금의 시기가 이르긴 하지만, 전생의 너는 이보다 검술이 나았어.”

이런 평가는 처음이었다.

지금껏 사람들은 내가 검을 쓰는 모습을 보고 감탄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여인의 독설은 냉담했다.

“능력치만 살벌하게 쌓았군. 지금 네가 쓰는 검술은 오히려 같은 시기, 전생의 너보다 훨씬 못해졌어.”

처음에는 무슨 헛소린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간다.

여인은 나를 가장 많이 죽인 검사라고 했고, 내게도 죽어봤다고 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내 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선지, 도리어 헛웃음이 나온다.

“역시 나를 가장 많이 죽여 본 새끼라 일반인이랑 관점이 다른가 봐?”

“그 비아냥대는 말투는 좀 관둬라. 이유를 뱉어라. 왜 칼이 무뎌졌지?”

“글쎄. 이번 삶에선 내가 재능 하나만 수련한 게 아니라서 그럴까.”

120회차.

나의 재능은 검술 하나가 아니다.

여인이 의아한 기색을 보인 찰나.

나는 살의를 담은 눈빛으로 여인을 향해 회귀자 살해 재능을 발동했다.

《블라이넨 소드러》

설명: 불세출의 검사. 인류에 현존하는 세 명뿐인 최정상 칼잡이다.

*고급감정(Lv2)을 사용해 대상에 대하여 조금 더 정보를 입수합니다.

+FFF급 검술재능 보유자. 평균보다 심각히 열등한 소질을 지녔다.

‘저 여자가…… 블라이넨?’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불세출의 검사 중 하나이자 밀밭기사단의 단장.

그러나 내가 진정 놀란 것은 이름보다 그 아래에 있는 정보였다.

‘FFF급 재능 소유자라고?’

믿기지 않아서 기막힐 지경이었다.

평균보다 심각히 열등한 소질?

그런데도 저런 칼부림이 나온다고?

“너, 재능도 없으면서 어떻게…….”

“피나게 노력했어. 너와 겨루려고.”

블라이넨의 검이 내게 쇄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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