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87화
[심장 고동이 들려오는 꽃봉오리에서 드리아드가 피어났습니다!]
[드리아드는 아름다운 식물체 소녀로, 생물에게 기생하거나 꿀벌을 소환해 적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꽃봉오리에서 핀 드리아드는 평균보다 월등한 힘을 지녔습니다.]
드리아드(Dryad).
초록색 머리칼에 조그만 봉오리가 맺힌 아이가 무릎에서 고개를 든다.
떡잎으로 이뤄진 잎사귀 옷을 입었고, 대체로 어여쁜 소녀의 외견이나 무릎 아래부터 뿌리만 얽혀 있다.
방금 막 피어난 어린 드리아드는 나를 말없이 빤히 올려다보았다.
“…….”
“첫인상 좋네. 너도 똑같이 느꼈길 바랄게. 내가 널 개화시켰거든.”
“…….”
내가 말을 걸자, 소녀가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내 시선을 확 피했다.
나는 조금 생각해 보고 나서야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아, 무릎에서 내려달라고?”
“…….”
나는 무릎에서 소녀를 내려줬다.
“다리가 뿌리라서 걷기가 불편하겠다. 혼자서 걸어 다닐 수 있겠냐?”
“…….”
드리아드는 조그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삐진 것 같기도 한 기색이다.
‘막 태어나서 말을 할 줄 모르나?’
하도 말이 없어 그렇게 생각할 때.
드리아드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물.”
흐음, 보아하니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닌 모양인데.
“물이 마시고 싶단 거지?”
드리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서 어린 소녀의 입에 먹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드리아드가 고개를 저었다.
“…….”
“물 먹기 싫어?”
또다시 고개를 휘젓는 드리아드.
나는 턱에 손을 짚었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수통을 열고 소녀의 다리뿌리에 물을 적셔준다.
생각해 보면 식물체인 소녀가 입으로 물을 마실 리가 없지.
“……히.”
드리아드가 기분이 좋은지 뺨을 떨었고, 새끼 여우는 호기심을 표했다.
“컁! 캬앙!”
“……!”
명랑한 새끼 여우가 다가오자 드리아드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다리뿌리를 가진 드리아드는 꾸물꾸물 움직여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대충 드리아드의 성격을 파악했다.
‘엄청나게 내성적인 모양인데.’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면 의사소통에 무리가 가겠지.
나는 드리아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인마.”
“……!”
[SSS급 조련 재능이 직접 개화를 도운 생물체의 감정을 읽습니다.]
[드리아드가 너무나도 폭력적인 주인의 언사에 충격받았습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드리아드는 내게 벗어나려고 버둥버둥 뛰었다.
‘……인마, 한 마디가 그렇게 심한 말이었던가.’
갑자기 내 자신의 언행에 관해서 반성의 기미가 생기게 되는걸.
안타깝게도 드리아드는 다리가 뿌리인 탓에 달려봤자 무척 느렸다.
내가 앞질러 걸어가 앞을 가로막자 소녀는 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
“야. 나랑 얘기하기 싫냐?”
“……!”
[가녀린 마음씨의 드리아드는 주인의 거친 말투를 어려워합니다.]
어려서 그런지 마음 참 여리군.
나는 입술을 핥고 하는 수 없이 어조를 조금은 부드럽게 높였다.
“괜찮니? 내가 말이 심했지?”
제기랄, 간지러워 죽겠네.
드리아드는 내가 온화하게 말해주자 그제야 두려움을 거두었다.
“……나를 꺾어내지 않을 거야?”
“내가 뭣 하러?”
“……꽃한테 곱고 착해야지 좋아.”
“누구나 다 꽃한테는 신경을 써.”
“……날 꺾고, 뽑아, 장식할 거야.”
“그리고 귀한 물을 주기도 하지.”
“……줘.”
나는 수통의 뚜껑을 열어 드리아드의 뿌리에 또다시 물에 적셔줬다.
“……히.”
귀여운 소녀가 소소하게 웃자 머리의 작은 봉오리가 사르르 떨렸다.
드리아드는 몹시 수줍은 것 같았지만 성격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더.”
“이제는 없어. 네가 다 마셨거든.”
내가 빈 수통을 탈탈 털어 보였다.
그런데도 소녀는 고집을 피웠다.
“……더 줘. 모자라.”
“이젠 없다니까.”
“……줘!”
드리아드가 꾸물꾸물 내게 오더니, 갑자기 뿌리가 손을 타고 얽매였다.
“어, 어?”
난 당황해 드리아드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소녀는 꿈쩍도 안 했다.
살결에 달라붙은 뿌리는 팔부터 거슬러 올라와 내 어깨에 안착했다.
어깨에 앉은 소녀가 내 뺨을 짚는다.
“……내 꺼.”
[드리아드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해 신체에 기생을 시작했습니다.]
[기력이 조금씩 빨리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귀여운 드리아드가 당신의 애완수로 편입되었습니다.]
[일방적 관계전향이기에 조련 스킬의 숙련도가 미약하게 오릅니다.]
[포획 성공!]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서 기생을 하겠다고?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어?
난 어깨 위에 뿌리박고 앉은 자그마한 소녀를 불편하게 돌아보았다.
“야, 내려라.”
“……흥.”
“내 몸의 주인은 나다. 집세라도 낼 것 아니면 떨어지지?”
“……집세가 뭐야.”
“됐다. 뿌리 잘라낸다.”
내가 검을 슬쩍 빼 들자.
“……!”
드리아드는 또 흠칫 놀라선 어깨에서 즉시 떨어져 도망치며 뛰었다.
나는 픽 웃으며 몇 걸음 걸어가 뿌리를 질질 끄는 소녀를 막아섰다.
“가지 마. 물 많이 줄 테니까.”
“……겨우?”
“영특해서 좋군. 뭘 더 원하는데?”
“……사랑?”
“그건 너무 값지고, 이미 다른 사람한테 기울어가고 있어서 안 돼.”
“……가족?”
“날 양아들로 삼겠다고? 미쳤군.”
“……아빠?”
“좋아. 그쯤에서 서로 합의 보지.”
나는 그 인형처럼 조그만 손을 붙잡고 악수했고, 소녀는 내가 뱉는 대화가 재밌는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아빠야.”
그 틈에 나는 드리아드를 자세히 관찰해 능력치를 살폈다.
『드리아드(이름 없음)』
특이사항: 희귀하고 강력한 샘물의 힘을 받고 태어난 식물체. 힘을 쓸 때마다 체내의 수분을 소모한다.
힘: 1 체력: 1 민첩: 1 마력: 1 행운: 12
소지스킬: 기생(Lv1), 흡수(Lv1), 꿀벌소환(Lv1), 땅의 힘(Passive)
주인에 대한 충성도: ‘아빠……!’
현재 건강상태: 목마름.
잠재력: A급(재수 없게 뛰어남)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리아드. 강력한 샘물을 먹고 꽃봉오리에서 태어나 놀라운 잠재력을 지녔다.
낯을 몹시 가리고, 수줍음을 탄다. 너무 어려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함.
+건강히 자라나며 사랑을 듬뿍 받으면 머리의 꽃봉오리에서 진귀한 꽃송이를 피어나게 할지도 모른다.
+다리뿌리가 마르거나 잘리면, 드리아드는 사망하니 유의해야 한다.
*호감도를 쌓을수록 드리아드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이 녀석도 A급이었군.’
막 태어났는데도 스킬이 무려 4개!
상당한 존재가 피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또 A급이라니.
새끼 여우까지 더하면 나는 무려 두 마리의 A급 애완수를 가진 것이다.
아직 둘 다 어리지만, 제대로 성장시킨다면 확실한 성과를 얻으리라.
“……물.”
드리아드가 바짓단을 당겼고 나는 거동이 불편한 소녀를 안아 들었다.
“……엄마는?”
“없는데.”
“……아빠는 엄마가 없구나?”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엄마 없다고.”
“……나, 엄마 없어?”
“응.”
“……그럼 얼른 만들어줘.”
“그분이 그리 쉽게 생기진 않아.”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 보니 아까 발견한 조그만 샘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바닥난 수통을 채웠고, 드리아드는 뿌리를 살짝 담갔다.
드리아드는 뿌리를 늘어지게 내리고 볼록한 배를 만족스레 두드렸다.
“……배불러.”
“컁컁!”
한편 목을 축인 새끼 여우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녔다.
나는 새끼 여우에게 고을에서 사온 어포 조각을 던져주고 말했다.
“너희 둘, 모여 봐.”
“컁!”
“……왜?”
두 애완수가 나를 바라본다.
어째 딸 두 명 키우는 기분인데.
“이제 너희 이름을 지어줄 거야.”
이름이야 뭐라도 지어서 부르면 이름이 되지만, 여긴 청색대륙이다.
그러니 청색 대륙에서 아주 흔한 두 글자 이름으로 짓는 것이 좋겠지?
“우선, 새끼 여우는 백색에 하야니까 백야. 부르기 쉽고 느낌 괜찮네.”
“캬앙.”
백야는 내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친근히 다가와 머릴 비볐다.
드리아드는 내심 기대를 품은 표정으로 내게 꾸물꾸물 다가왔다.
“……그럼 나는?”
“꽃이니까, 꽃님이.”
“…….”
“으억!”
드리아드가 펄쩍 뛰어 내 얼굴에 뿌리를 감싸곤 기생하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높이 뛸 수도 있었나?’
뿌리를 떼려 악을 써도 붙어 있다.
눈앞이 어둡고, 생기가 쭉쭉 빨리는 기분이 심히 기묘하다.
“……그거 싫어.”
“왜, 꽃님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암튼 싫어.”
“일단 무거우니까, 내려와.”
내가 짜증 내고 나서야 드리아드는 팔짱을 끼곤 바닥에 폴짝 내렸다.
“……다른 이름.”
“그럼 초화는 어때?”
“……무슨 뜻?”
“풀에 핀 꽃이라는 의미지.”
“……좋아.”
초화가 발그레한 볼에 양손을 얹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화초를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 낸 말이지만, 뭐, 본인이 좋다면야.
나는 두 애완수를 내려다보았다.
‘백야와 초화라.’
어째 다분히 시적인 이름이 됐군.
어찌 됐건.
‘계속 새로운 짐승을 조련해볼까.’
* * *
“깨갱!”
[포획 성공!]
[욕심 많고 방탕한 방랑늑대를 애완수로 포획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제법 높은 중턱으로 도망친 늑대를 포획하자,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떨까.’
지겨워서 하품이 다 나오네.
나는 조련한 늑대를 노려보았다.
『방랑늑대(이름 없음)』
특이사항: 충치가 3개나 있음.
힘: 15 체력: 12 민첩: 9 마력: 0 행운: 2
소지 스킬: 물어뜯기(Lv3)
주인에 대한 충성도: ‘마음에 안 드는 인간. 틈나면 잡아먹어야겠다!’
현재 건강상태: 배고픔(공복 심함).
잠재력: F급(끝내주게 못났음)
욕심 많고 성깔 더러운 늑대. 우두머리의 암컷을 탐하다 무리에서 쫓겨났다.
+아직 주인에게 신뢰를 주지 않아서 어떤 정보도 확인할 수 없음.
*호감도를 쌓을수록 방랑늑대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확률이 극악일 수가 있나.’
날이 저물도록 짐승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숲에서 포획한 참새나 들개, 늑대 따위는 전부 F급이었다.
그나마 드물게 눈에 띄는 E급조차도 열 마리에 한 번 꼴이다.
그런데 백야와 초화의 잠재력은 흔치 않게도 무려 A급이었다.
‘A급 잠재력은 엄청 귀하구나.’
그냥 A급 애완수만 가졌을 때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보자니 무지막지한 행운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두 애완수는 벌써부터 전투에서 제 몫을 했다.
초화가 훌쩍 뛰어 뿌리를 박고 기생하면 작은 짐승은 기력을 잃는다.
그 틈에 백야가 뛰쳐나간다.
“캬아앙!”
새끼 여우라 아직 이빨이 다 나지 않았는데 나를 따라 적을 공격했다.
[백야가 ‘할퀴기’를 익혔습니다.]
[백야의 힘이 1 올랐습니다.]
애완수는 전투에 참여하다 보면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첫 전투라서 일부러 위험한 역할도 맡기지 않았는데 뭐든 금방 배운다.
‘어린데도 이만한 수준인데 다 크고 나면 얼마나 도움 될지…….’
초화의 녹색 머리칼에 머리핀처럼 얹어진 꽃봉오리를 쓰다듬어줬다.
“건강하게 어서 커라. 너무 빨리는 말고. 반항기 오면 서러울 것 같아.”
“……우린 가족이야?”
“이르지. 아직은.”
“……어떻게 해야 가족이야?”
“믿을 수 있어야 해. 진심으로. 혼자는 외로우니까. 곁에 있어 줄 사람.”
하늘이 불탄다.
우리는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서로 미워할 수도 있지만, 소중히 해야 하지. 이해도 해줘야 할 테고.”
말하다가 어째선지 미소 짓는다.
왜인지 지금 나는.
딱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고 있군.
“또 보고도 싶을 거고.”
“……응.”
[초화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봉오리가 아주 조금 커집니다.]
[백야가 자신도 쓰다듬어주길 원합니다.]
[방랑늑대가 주인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혓바닥을 날름거립니다.]
“넌 아직 안 갔냐?”
“깨갱!”
내가 칼자루에 살짝 손을 얹자, 늑대가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다.
[방랑늑대가 떠나갔습니다.]
[해당 애완수를 잃었습니다.]
“……아빠가 칼 뽑으면 다 죽어.”
“캬앙!”
두 애완수는 검을 쓸 때마다 입을 헤, 벌리며 날 거인처럼 쳐다봤다.
검은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게 하고, 신으로 숭배하게 만들기도 한다.
피로 날 치켜세우고, 죽음으로 적을 없애며, 날 위하는 것이 검이다.
그러나 세상은 드넓다.
12일 뒤.
날 뛰어넘는 검사가 나타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