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86화 (86/200)

나만 1회차 086화

“……그런 약속을 해야 한다면, 이곳에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만.”

“농담이야, 농담. 다 큰 어른이 뭘 그리 숙맥처럼 쫄고 앉아 있어? 댁이 범철 님 고환을 뜯을 수나 있겠어?”

주모는 깔깔 웃다가 한숨 쉬었다.

“신앙심이 깊었다면 미안해요. 내 남편이 일생신교를 믿은 뒤부터 제정신 아니라서 그래. 나도 그렇고.”

“제정신이 아니라니요?”

“과한 정력을 얻겠다며 신을 사냥하러 나갔거든. 그래서 혹시나 댁이 범철 님의 고환을 떼어주면 집 나간 남편도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지.”

“…….”

돈 버는 것도 아니고, 고환 뜯으러 집 나간 남편 얘기는 또 처음 듣네.

내가 슬쩍 위로의 말을 던졌다.

“언젠가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현재가 불행한 것 안 보여요?”

“크흠.”

윽, 괜히 헛기침이 다 나오네.

“하여간 그 약속은 이행할 수 없으니, 밥값은 제대로 지불하겠습니다.”

“괜찮아요. 100회차 이후론 객지에서 온 사람한테 밥값을 받지 않거든. 이 촌구석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테고.”

이렇게 인심이 후한 회귀자는 처음인데.

“그냥 얻어먹기는 좀 그러니까.”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대신에 내가 나중에 당신 남편을 만나면, 살려주는 것으로 합시다.”

“그게 뭔 말이에요?”

“나도 그 신이랑 연관이 깊거든.”

“당신도 신을 사냥한다고? 어쩐지 손목이 딱 힘쓰는 손목 같더라니. 어쨌든 경쟁자를 살려준다니 감격스럽네. 우리 남편은 오른쪽 뺨에 큰 점이 있어요. 척 보면 알 거예요.”

주모와 그저 말문이 트였을 뿐 아니라, 첫인상이 괜찮게 보였나 보다.

“말을 예쁘게 하니 잡어전 추가. 그리고 내 기준에서 그럭저럭 귀엽게 생겼으니 청주도 데워주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주막 이름이 그래서 먼산바라기입니까?”

문턱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주모는 돌아서며 말했다.

“매 삶마다 간판을 바꿔요. 내 120번째 삶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죠?”

어쩐지 괜히 울적해지는 사연인걸.

주모는 주방에 들어가 따끈한 밥과 밑반찬부터 내왔다.

아직 대낮이라 그런지 먼산바라기 주막은 손님 없이 한적했다.

난 편하게 앉고 찬을 씹었다.

장아찌처럼 간장에 숙성시킨 야채 같은데, 짭짤해 밥이 술술 넘어갔다.

‘이런 식사를 얼마 만에 하냐.’

이계에 와서 10년간 서양식만 먹어왔던 내게 밥상이란 구원이었다.

‘역시 세상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

잡곡이 뒤섞인 밥이지만, 나는 한 술 떠서 먹고 감탄하고야 말았다.

“밥맛이 황색대륙이랑은 아예 비교가 안 되는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밥알이 윤기 나고 찰진 것이 씹는 맛이 황색대륙과는 비교도 안 됐다.

‘황색대륙에서 나는 밀이 품질이 무척 좋은 것처럼, 청색대륙도 벼의 품질이 워낙 뛰어난 모양이군.’

배도 허전하던 참이라 금방 밥 한 공기를 다 비워버렸다.

주모는 인심 좋게 술과 안주, 그리고 밥 한 공기를 더 퍼주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참 좋네. 요새 회귀자란 것들은 밥알이 모래알로만 느껴지는지 깨작깨작 처먹거든.”

나는 짭짤하게 말린 명태를 씹고는 추운 몸을 데워주는 청주를 마셨다.

“그런데 고을에 시체가 없군요?”

들어올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회귀자들이 사는 고을인데도 시체 썩은 내나 건조한 광기가 없다니.

그러자 주모가 다시 앉아서 대추씨를 까면서 핀잔을 줬다.

“시체? 이 사람 얼마나 멀리서 온 거람. 청색대륙에서 자살자 찾아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나 봐요?”

“어, 그래요? 하지만 이번 회차 목표가 어려워서 꽤 많이 목숨 끊고 다음 회차로 넘어가려 하지 않아요?”

“그건 무교인 사람들 얘기고. 청색 대륙 인구 태반이 일생신교잖아요. 교리가 모든 삶을 일생처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인데, 함부로 자살해서 목숨을 끊으려고 하겠어요?”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회귀자의 세상에서 힘도 없이 올바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니.

이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라는 건가.

주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남편이 그 꼴 난 뒤부터는 일생신교라면 거들떠도 보기 싫지만, 그 교리로 사람들이 멋대로 죽지 않게 된 것만은 좋다고 느껴요.”

갑자기 그 남편이란 작자가 괘씸해지는군.

이렇게나 정신이 멀쩡한 부인을 놔 두고 남의 고환이나 따러 갔다고?

‘뭐, 부부관계에 상관할 바 없지만.’

하여간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다.

“황색대륙에서 온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만. 이런 자들 모르십니까?”

나는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설명해줬다.

주모가 기억을 더듬는지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고민하다 입에서 대답이 나온다.

“엘프의 영역에 황색대륙에서 온 여자가 지낸다고 듣기는 했었지요.”

“엘프?”

뜻밖의 이름에 고개가 갸웃해졌다.

엘프는 황색대륙에서는 살지 않아서 절대 볼 수 없는 이종족이었다.

“청색대륙에는 엘프가 삽니까?”

“살지요. 달보드레 숲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아서 그렇지.”

달보드레 숲?

이름 참 특이하군.

“그런데 엘프랑도 교류를 합니까?”

“그자들이 캐오는 나물이 끝내주거든. 어찌나 싱싱해 맛이 좋은지, 도붓장수가 내려오면 금방 다 팔리고 없어요.”

“…….”

나물 캐는 엘프라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 머릿속에 있던 환상이 좀 깨지는군.

주모는 훑어낸 대추씨를 쓸어서 손아귀에 담았다.

“보통 엘프들은 회귀자를 경계해 거래할 때를 제외하면 잘 나타나지 않는데, 아예 거기서 살고 있는 여자라니. 참 용감하고 대단하다 싶었죠.”

용감하고 대단한 황색대륙 여자.

일단 행적만 보고 유추하자면 내 일행일 확률은 높은 것 같은데.

‘엘프의 숲에서 지내는 여자라.’

내가 찾는 일행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는 것이 좋겠다.

그 외에 마땅한 단서도 없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 달보드레 숲은 걸어서 얼마나 걸립니까?”

“거기로 가려고? 회귀자가 혼자 가기에는 아주 위험한 곳인데.”

놀랍게도 주모는 나에게 희미하게 걱정스러운 표정까지 지어줬다.

전생에 연도 없는 회귀자가 내 목숨을 걱정해주다니, 왜 이리 낯설지?

나는 모처럼 만난 인간다운 인간에게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전 괜찮습니다. 명줄이 질겨서.”

“아마도 십 일은 가야 할 거예요. 도중에 큰 강이 있으니 더 걸릴 수도 있고.”

“가는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포목점에서 옷감뿐만 아니라 지도도 함께 파니까, 거기로 가 봐요.”

난 잔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으슬으슬한 몸에 뜨끈한 밥과 술이 들어가니 힘차게 기운이 샘솟는다.

“감사했습니다. 약속은 꼭 지키죠.”

주모는 깔끔히 골라낸 대추씨를 마당의 흙더미에 흩뿌렸다.

“나중에 또 들려요. 그때는 대추로 차나 끓여줄 테니까.”

* * *

나는 포목점에서 지도를 사고, 칼을 구입하기 위해 대장간에 들렸다.

“이 장검은 뭡니까?”

“삼척검이지. 여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칼이요. 베기 쉽고 예리해.”

“이걸로 한 자루 주십시오.”

청색대륙에서의 거래방식은 황색대륙과 크게 다르지 않아 지금 내게는 쓸모없는 아이템을 주고 교환했다.

똑같은 장검이지만, 미묘하게 황색 대륙의 검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다.

나는 허리춤에 칼집을 매고, 배낭에서 불멸자의 갑의 파편을 꺼냈다.

“혹시 이걸 녹여서 새 갑옷을 만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덩치가 우락부락한 대장장이는 금속 파편을 받아들고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갑옷을 제작하기에는 금속의 양이 좀 부족하겠는데. 녹이고 굳히고 하다 보면 원료의 양이 줄거든.”

“그러면 소형 방어구라도 괜찮습니다. 방패나 투구, 신발 따위처럼.”

“흐음. 일단 알겠소.”

대장장이는 금속 파편을 노련하게 화로 밑에 깔고 재련하기 시작했다.

깡! 까앙!

“흐량! 흐럇!”

대장장이는 근육을 떨면서 망치를 내려쳤지만, 금속은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질려 버린 그가 망치를 놨다.

“제기랄! 화로에 달궈도 백열되지 않고 두드려도 튕겨 나가 버리네. 회귀하며 이렇게 말 안 듣는 쇳덩이는 처음 보오. 대체 무슨 금속이요?”

“제련이 불가능하겠습니까?”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하겠소. 촌구석의 나 같은 놈 말고 더 실력 있는 사람한테 가서 맡겨보시오.”

나는 차게 식힌 갑의 파편을 도로 배낭에 챙겨 넣고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일반적인 대장간에서는 재가공이 불가능한 건가.

시간을 들여서 갑의 파편을 다뤄줄 만한 실력자를 찾아봐야겠다.

회귀한 대장장이도 어쩔 수 없는 금속을 다룰 수 있을 만한 기술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을을 벗어나 새끼 여우를 소환하고, 꽃봉오리를 품에 안았다.

“컁! 캬앙!”

길가에 핀 꽃밭에 뛰어들어 마구 뒹구는 새끼 여우를 바라본다.

‘조련재능을 잘만 닦으면 불멸아귀를 죽이는 데 도움 될지도 몰라.’

청색대륙의 지배자 불멸아귀.

아직 자세한 정보는 모르지만, 놈을 죽이려면 쉼 없이 성장해야 한다.

‘혼자서는 결코 대륙의 지배자를 죽일 수 없다.’

아크 리치를 죽이는 데만 해도 26마리의 용이 과감히 동원되었다.

하물며 그보다 강하다는 불멸아귀는 감히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래서 일행을 찾아야 하고, 조련 스킬의 레벨을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혹시나 대형 몬스터처럼 강력한 존재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역시 조련의 재능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진다.

때마침 엘프의 영역으로 가는데, 작지 않은 숲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나는 이 숲속에서 야생짐승들을 조련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짐승을 조련하려면 호감도를 쌓거나 힘으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했지?’

때마침 땅바닥에서 종종걸음으로 벌레를 찾는 참새무리가 보였다.

뒤쪽에서 몰래 접근해 둔해 보이는 참새를 손아귀로 날쌔게 낚아챘다.

“잭짹!”

참새는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20분여를 쥐고 있자, 참새가 제풀에 지쳐서 반항이 잦아졌다.

[포획 성공!]

[뚱뚱하고 의지박약한 참새를 애완수로 포획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강제로 복종시켜 주인에게 반항적이고 호감도를 쌓기 힘듭니다.]

[해당 애완수는 언제든 주인을 버리고 떠나갈 수 있습니다.]

‘힘을 써서 강제로 복종시키면 이런 단점이 존재하는군.’

손을 놓아주자 뚱뚱한 참새가 짹짹 화를 내며 나에게 새똥을 쏘았다.

그러나 나는 딱히 화내지 않았다.

“못난 주인을 두게 해 미안하다.”

“짹?”

검을 뽑아 참새를 반으로 가른다.

“짹!”

[애완수 참새를 죽였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애완수를 죽여서 악명이 쌓입니다.

[해당 행위를 반복하면 애완수들을 공포로 충성시킬 수 있으나, 유대감이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조류 계열 애완수와의 호감도가 오르기 몹시 어렵게 되었습니다.]

[교묘한 살해 행각이었습니다.]

[백여우는 꽃에 정신이 팔려 애완수 범죄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소득 없고 페널티 높은 행위였지만, 나는 한 가지 정보를 습득했다.

‘애완수는 굉장히 죽이기 손쉽다.’

반항심 세더라도 일단 길들여졌기에 야생 때만큼 능력발휘를 못한다.

일반적인 조련사라면 모든 애완수를 애정을 기울여 키우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접근방식이 조금 다르다.

‘애완수에 관한 모든 경우의 수를 점검해 봐야 한다.’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정석을 비틀면 해답이 나온다.’

그것이 회귀자와의 싸움을 통해서 내가 깨달은 진리이다.

하여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조련을 어떻게 할지 감이 왔다.

‘더 큰 생물도 조련을 해봐야겠군.’

내가 조련할만한 짐승을 찾아서 숲 속 깊은 곳까지 가보려고 할 때.

불현듯 품에 안고 있던 꽃봉오리가 빛나며 꽃잎이 떨리기 시작했다.

“컁! 캬앙!”

새끼 여우가 놀라서 마구 짖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그러나 곧 상황을 이해했다.

꽃봉오리에서 태동이 느껴진다.

‘드디어 개화하는구나!’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잎에 나는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침내 기나긴 기다림 끝에 꽃봉오리에서 피어난 것은 놀랍게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