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85화
춤을 추는 것처럼 실룩이는 배낭을 나는 당황해서 내려놓고 살펴봤다.
괴상한 진동을 일으키는 문제의 소지품은 다름 아닌 큰 꽃봉오리였다.
『심장 고동이 들려오는 꽃봉오리』
힘이 담긴 샘물을 듬뿍 머금고 자라난 꽃봉오리. 개화하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이다. 애정을 담아서 칭찬해주면 조금씩 꽃잎이 떨린다.
+개화 직전의 꽃봉오리는 여리고 약하다. 다치지 않도록 보관해야 함.
+하루에 다섯 번 물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시들어 죽어버리고 만다.
*심장 소리가 매우 커졌다!
*소유자가 직접 안고 다니며 영물과 함께할수록 개화 시기가 빨라짐.
나는 생물의 알처럼 동그랗고 두근대는 꽃봉오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물론 이전보다 커지긴 했지만.’
수련꽃 뿌리를 힘이 가득한 영화의 샘에 띄우고 획득한 꽃봉오리!
카티에나 헤르탄조차 모르는 120회차에서 최초로 획득한 아이템이다.
하나 그간 물은 꼬박꼬박 줬지만, 두어 달이 넘도록 개화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새끼 여우와의 이별에 꽃봉오리가 반응할 줄은 몰랐다.
나는 꽃봉오리에 손을 대고 두근대는 심장 고동을 느꼈다.
‘대체 무슨 꽃이 피려고 이렇게 오래 걸릴까. 식충식물이라도 피려나.’
하여간 용족이 오래 지켜온 영화의 샘의 힘을 듬뿍 흡수한 꽃봉오리다.
힘들더라도, 개화시키면 최소한 내가 득볼 일은 하나쯤 생길 것이다.
‘하여간 꽃봉오리가 영물과의 이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거기다 영물과 함께할수록 개화 시기가 빨라진다는 옵션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결국 하는 수 없겠군.
“함께 가자.”
아직은 새끼지만, 영물이라고 했다.
특히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 성장력도 빠르다니 쉽게 죽진 않겠지.
나는 새끼 여우의 귀를 쓰다듬었다.
“내 퇴폐해지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 네가 도움 될 것 같기도 하고.”
“컁!”
새끼 여우가 내 말을 이해한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짧게 울었다.
아직은 보송보송한 털의 꼬리를 흔들면서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다.
‘여기서 대충 필요한 것만 챙겨 떠나자.’
오두막 마당에는 덕돌이 평소 써왔던 사냥용 장비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관리를 게을리해 녹이 슬거나 땟국이 끼어 있었다.
‘우선, 이 호리병.’
어제 얼핏 스쳐본 것과 달리, 나는 연회색 호리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애완수 포획의 호리병(낡음)』
전투조련사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 길들인 생명체를 포획할 수 있는 신비한 도술이 깃들었다.
+일정 호감도 이상 높거나, 힘으로 복종시켜 길들인 생물만 포획 가능.
+호리병에 넣어둔 애완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력, 마나가 회복됨.
+최대 다섯 마리까지 보관 가능.
+이전 주인이 관리를 너무 소홀히 해 현재 두 가지 성능이 소멸됐음.
*E급 이상의 조련재능 필요.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호리병의 먼지를 닦아내고 손으로 잡자, 곧바로 문구가 나타났다.
[SSS급 조련 재능을 지니고 있어, 호리병의 사용조건을 충족합니다.]
[조련의 영역에 눈을 뜹니다.]
[패시브 스킬, ‘조련Lv1)’을 깨달았습니다. 짐승과의 호감도를 높이거나, 구타해 복종도를 높입니다.]
[대상과 무난히 포획이 가능할 만한 호감도를 쌓았습니다.]
[백여우를 애완수로 삼으시겠습니까?]
막대한 재능 덕분에 새 스킬을 곧바로 습득할 수 있었다.
내가 속으로 동의하자 이어서 문구가 떠올랐다.
[포획 성공!]
[애교 많고 명랑한 새끼 백여우를 최초의 애완수로 삼았습니다!]
[최초의 애완수 보너스로 백여우의 성장력이 5% 증가합니다.]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애완수는 성장해 전투를 돕거나 주인의 행복을 더해주게 됩니다.]
[몹시 희귀한 영물을 조련하여 모든 능력치가 1씩 상승합니다.]
[진귀한 영물을 포획했습니다!]
[조련(Lv2) 달성!]
[야생 몬스터와 호감도를 쌓기 쉬워집니다.]
[조련(Lv3) 달성!]
[체벌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조련(Lv4) 달성!]
[포획의 성공률이 증가합니다.]
[조련 5레벨을 달성하면, 해당 스킬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킬이 무려 4레벨이나 오르다니.’
경험상 보통 스킬은 3레벨이 되고서부터 오르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그런데도 스킬 레벨이 단숨에 4단계나 오른 것을 보면 그만큼 영물을 포획하는 일이 쉽지 않단 의미였다.
내가 백여우를 살펴보자 아주 자세한 정보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백여우(이름 없음)』
특이사항: 영물(성장속도 빠름)
힘: 1 체력: 2 민첩: 4 마력: 1 행운: 9
소지 스킬: 물어뜯기(Lv1). 냄새추적(Lv2)
주인에 대한 충성도: ‘착하고 신기한 어른! 함께 다니면 행복할 거야.’
현재 건강상태: 건강함(회복 빠름)
잠재력: A급(재수 없게 뛰어남)
명랑하고 호기심 많은 영물. 아직은 어려서 누구든 잘 따른다. 애교가 아주 많으며 누군가 자신의 털을 쓰다듬어주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활동력이 몹시 높아서 흰 털이 금방 더러워짐. 잘 씻겨줘야 한다.
+자주 털을 빗겨주면 호감도 상승.
+어쩌다 나오는 회색 털을 골라서 뽑아주면 주인의 행운 능력치 상승.
+건강히 잘 키워 성장하면 언젠가 구미호가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호감도를 쌓을수록 백여우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굳이 다른 몬스터와 비교해보지 않아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능력치창.
괜스레 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유독 덩치가 큰 것도 잠재력이 A급이라서 그런 건가?’
아직 새끼인데도 성견과 비슷한 몸집인데, 더 자라면 얼마나 커질까.
‘하여간 호리병의 사용법부터 익히고 싶은데.’
내가 호리병의 뚜껑을 열어보자, 갑자기 새끼 여우의 몸체가 병 속으로 휙, 빨려 들어왔다.
“어?”
[계약된 애완수가 호리병에 보관되었습니다.]
[백여우가 휴식을 취합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백여우의 생명력, 마나가 회복됩니다.]
‘……깜짝 놀랐네.’
백여우가 흡수된 호리병은 딱히 무거워졌다는 체감은 없었다.
이러면 확실히 여러 애완수를 거느려도 활동하기가 간편하겠군.
‘그럼 애완수를 소환할 때는?’
마개를 열고 새끼 여우를 떠올리자, 영물의 형체가 팍, 하고 튀어나왔다.
포획과 소환의 원리를 이해하자, 조련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왔다.
‘야생의 몬스터를 길들이고 강하게 키워서 내 전투원으로 삼는다.’
내 기억에 의하면 황색대륙에도 전투조련사들이 존재하기는 했었다.
물론 그들은 호리병 대신 마법소화함에 조련한 짐승을 넣고 다녔지만.
‘전투조련사에 관해 들었던 이야기 치곤 그리 긍정적인 게 없었는데.’
평범한 전투조련사가 길들이는 몬스터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엄연히 살아 있는 생물이기에 명령을 거부할 때도 있고, 질병에 걸리면 약화되며, 죽으면 살릴 수 없다.
‘골렘을 만드는 연금술사나 시체군단을 부리는 흑마법사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진다는 인식이 팽배했지.’
강력한 몬스터일수록 조련의 난이도가 높고 다루기가 까다롭다 한다.
몬스터를 길들이다 사망했다는 전투조련사는 흔한 비웃음거리였다.
더군다나 재료를 구하기 까다롭지만 강력한 골렘이나, 허약하나 간단히 일으킬 수 있는 언데드에 비해, 조련은 명령에 복종하는 전투원을 얻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보통 내가 보곤 했던 전투조련사는 순회공연을 준비하거나 몬스터의 습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내가 한 도시에 처박혀만 살아 견문이 좁았던 것도 있겠지만.’
하여간 세상에는 장점보단 단점이 많다고 알려진 것이 조련사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SSS급 재능.’
남들은 타고나지 못한 높은 재능.
이미 앞선 여정에서 재능이 얼마나 전투에 도움이 되는지는 경험했다.
그리 유망하지 못한 분야라도 최정상의 재능이라면 뒤엎을 수가 있다.
‘차후에 다른 짐승들도 조련을 해 보면서 제대로 알아봐야겠군.’
만약 조련을 이용해서 강력한 애완수를 들일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서 막대한 전투원을 얻을 것이다.
잡생각을 그치고 나는 마당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호리병 외에도 조련에 제법 도움이 될 만한 도구가 꽤 눈에 띄었다.
‘입마개하고, 목줄, 채찍 등등. 일단 도움 될 건 전부 챙겨야겠어.’
조련에 필요할 만한 도구는 전부 배낭에 쓸어 담고 꽃봉오리를 안았다.
‘배낭에 넣어두는 것보단 품에 안고 다니는 게 개화가 빠르겠지.’
근처에 새끼 여우가 뛰어다닐 때마다 꽃봉오리의 심장박동이 세졌다.
그래서 나는 호리병에 새끼 여우를 넣지 않고서 함께 걷기로 하였다.
“가자. 근처에 인가부터 찾아보자.”
“컁!”
백여우가 또랑또랑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 옆에서 뛰기 시작하였다.
* * *
카티에는 퉁퉁 불은 눈을 닦았다.
어찌나 오래 목 놓아 울었는지 목까지 전부 쉬어버리고 만 것이다.
혼자 바다로부터 떠내려온 것보다 곁에 범철이 없단 사실에 괴로웠다.
“대장……. 대장…….”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 울고 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이성을 찾았다.
갈증, 굶주림으로 몸이 만신창이였으나 회귀자답게 위기에는 익숙했다.
쓰러지려는 몸을 광인처럼 일으킨다.
‘서둘러 그를 찾아야만 해.’
움직여야 한다.
또다시 그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그 남자 또한 같은 심정일 것이다.
‘대장은 분명 나부터 찾을 테니까.’
* * *
‘우선은 헤르탄부터 찾아봐야겠지.’
냉정히 생각하고서 내린 결단이다.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동료는 누가 보더라도 당연히 헤르탄이다.
‘처음엔 퀸소히니베를 먼저 찾을까 싶었지만, 역시 헤르탄보단 못하지.’
용도 강력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의 이성적인 판단력을 높이 산다.
‘카티에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건 너무 얕잡아보는 생각이었어.’
정신이 불안하긴 해도 120번이나 살아온 그녀는 내가 없다고 자립하지 못할 만큼 짐이 되거나 나약하진 않다.
누구보다 가장 그녀를 믿고 있기에 카티에는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그녀는 굳이 내가 찾지 않아도, 알아서 먼저 나를 찾아올 사람이니까.
‘뭐,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빨리 찾으면 좋지.’
나는 잡념을 털어버리고 앞을 살폈다.
‘하여간 인가는 언제쯤 나오려나.’
다행히도 숲을 조금 걷고 나자 오랜 세월 다져진 길을 발견했다.
그래서 해가 중천을 지날 때 즈음, 나는 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한적한 어촌마을…… 아니. 청색대륙이니까 고을이라고 불러야 하나.’
볏짚을 엮어서 지붕을 인 초가집이 수십 가구 보이는 자그만 고을이다.
바닷가에 인접한 장소답게 그물에 생선을 말리는 집이 꽤 보였다.
“캬앙! 캬앙!”
새끼 여우는 생선이 먹고 싶은지 폴짝 뛰었지만, 난 호리병을 열었다.
‘되도록 이목을 끌어선 안 돼.’
덕돌의 경우에서 배웠듯 나의 신분을 섣불리 밝혔다가 피 볼 수 있다.
‘회귀자들은 신을 보면 모시는 게 아니라, 삶아 먹고 보신할 놈들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오싹하네.
어쨌든 커다랗고 깨끗한 백색의 영물은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나는 아쉬워하는 새끼 여우를 호리병에 집어넣고, 마개를 막아뒀다.
‘그나저나 이놈도 나중에 이름을 지어주긴 해야겠네.’
언제까지나 이름 없이 생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꽃봉오리도 배낭에 넣어뒀다.
그리고 본래의 장비를 벗고 오두막에서 훔쳐온 덕돌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아무리 청색대륙에 일생신교 신자가 많다지만, 감히 첫눈에 나를 범철이라고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가령 덕돌의 경우도 20번의 삶이나 일생신교를 믿었지만 처음 날 보고 범철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는가.
‘신격화된 범철의 인상과 현실의 나의 모습은 차이가 심할 테니까.’
나는 혼자 고을로 들어섰다.
‘확실히 황색대륙이랑은 다른걸.’
다들 정말로 머리칼이 검었고, 벽 안을 지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상투를 틀거나 비녀를 꽂은 사람이 흔했고, 거의 넓고 긴 옷을 입었다.
‘동양적인 문화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친숙해서 도리어 낯서네.’
그런데 유독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어째 회귀자들이 모여 사는 고을 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일상적인데?’
회귀자가 모여 사는 장소에는 특유의 삭막한 광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고을에는 그런 게 없다.
회귀자의 세상이란 걸 몰랐다면, 그저 안락한 고을로만 보였을 것이다.
촌놈처럼 감상을 하다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휘젓고 입술을 핥았다.
‘일단 일행의 행방부터 찾아야 해.’
불멸아귀를 혼자서 죽이려 하는 것은 미련하고 무모한 자살행위이다.
일행을 찾는 것이 곧 대륙의 지배자를 죽이는 길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정보를 얻으려면 술집이 최고지.’
다년간의 음주 경험에 입각해 판단을 내리고 나는 고을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주점은 어디 있습니까?”
“주막 말이오? 저기로 가보셔.”
문턱에 붓글씨로 ‘먼산바라기’라 적힌 종이가 붙여져 있는 집이었다.
들어서자 푸근한 밥 냄새가 났다.
“계십니까?”
어깨가 떡 벌어지고 인상 좋은 여자가 대추씨를 까다가 날 돌아봤다.
“어제 소쩍새가 울더니 운수도 좋네. 훤한 낮에 외지인이 찾아오고.”
나는 흠칫 놀랐지만 표정을 유지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천 년 넘게 장사하면 다 알아요. 딱 봐도 객지에서 오신 양반이구만.”
여자는 굽혔던 허리를 우드득, 소리 나게 쫙 펴고 두드렸다.
“내가 주모인데. 뭘 드시려나.”
휴,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니었군.
나는 상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 술이나 한 병. 안주는 여기서 제일 잘 팔리는 것으로. 그리고 밥 한 공기만 되도록 빨리 주시죠.”
“그 주문에 따르자면 술은 가장 비싼 것이, 안주는 제일 손 덜 가는 것이 나가게 될 텐데, 괜찮겠어요?”
어라, 꽤나 재미나신 주모일세?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상관없습니다만. 셈은 역시…….”
“안 받아요.”
“예?”
“안 받는다고.”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돌한 주모가 말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합시다.”
“뭘?”
“범철 님을 뵈면 고환을 뜯겠다고.”
“…….”
내 불알 값이 그것밖에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