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83화 (83/200)

나만 1회차 083화

회귀자가 미치지 않기 위해서 택하는 도피처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은 방금도 말했듯 반려동물을 사육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종교는 피폐한 정신을 수복하는 데 도움이 됐으니까.’

정신이 불안정한 자들이 가득한 곳에는 언제나 종교가 존재하게 된다.

수없이 살아가는 회귀자들 사이엔 헤아릴 수 없는 사이비가 판쳤다.

카티에가 설명해줬던 바에 따르면, 깨어진 방패나 털 빠진 고양이를 숭배하는 해괴한 교단도 있다 한다.

‘그런 와중에.’

청색대륙의 회귀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신앙이 일생신교였다.

유일하게 회귀하지 못하는 인간.

그럼에도 검으로 정점을 찍었던 자.

그런 고유한 특이점이 맞물려 회귀자들은 나를 신으로 간택한 것이다.

‘이름 한 번 참 희한하게 지었네.’

일생신교(一生神敎).

세상이 평안하던 시절 누군가 내게 다른 대륙에서 나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집단이 있다고 말했다면, 비웃음조차 짓지 않고 무시했을 것이다.

“고개 좀 들어봐라.”

“시, 신께 감히 어떻게……! 잘못 바라보면 제 눈이 멀어버립니다요.”

“그딴 건 다 헛소리니까, 그냥 시선 맞춰. 말도 그만 좀 더듬고.”

“그, 그래도……!”

“거역하면 천벌 내린다.”

“……옙!”

사냥꾼 덕돌은 중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을 덜덜 떨며 날 바라보았다.

“날 신으로 모신다면, 내가 전생 기억이 없단 것도 알겠군. 지금 청색대륙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거든.”

나는 단도를 손아귀에서 굴렸다.

“네가 근처 인가까지 함께 가며 설명 좀 해줘야겠다. 이 대륙에 관해.”

* * *

덕돌은 20번의 삶이나 일생신교에 몸을 담아온 독실한 신자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아직도 믿을 수 없단 눈빛으로 보며 흥분해 있었다.

“지, 진짜로 범철 님이 맞는 거죠?”

“칼 한 번 더 휘둘러줘?”

“아, 아닙니다요! 하도 신기해서. 신을 직접 봤다고 생각을 해보십쇼. 거기다 생각보다 젊기도 하시고.”

신이라…….

난 숲길을 걸으며 턱을 매만졌다.

“일생신교의 교리는 뭐지?”

“범철 님 가라사대.”

덕돌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일생처럼 살아라, 길이 보이리라.”

“그게 무슨 말이냐?”

“전생의 범철 님께서 직접 남기셨단 말씀입니다. 기억에 없으십니까?”

“나는 회귀를 못한다니까.”

“헛되게 죽지 말란 의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던 많은 회귀자들이 범철 님의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전생의 내가 그런 말도 했었다고?

덕돌은 흥분해서 떠벌렸다.

“일생신교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각자 한 번의 삶을 사는 것처럼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라.”

흐음, 일단 교리 자체만 보면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걸.

하기야 해괴한 사이비종교 따위면 대륙의 기성종교가 됐을 리 없지.

덕돌은 봇짐에서 구겨진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그림쟁이 놈들은 회귀하면 곧장 범철 님의 전생을 회상해 그려 팝니다. 신도들한테 짭짤하게 잘 팔립죠.”

“줘봐.”

나는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서 먹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이게 나라고?’

나와 흡사한 외모의 칼을 든 중년.

최소한 50대는 된 듯하고 수염이 무성하며, 잔주름도 깊이 패여 있다.

머리칼의 모양새도 틀리고, 무엇보다 눈에 담긴 분위기가 근엄하다.

‘상당히 많은 과장이 들어갔겠지만, 나랑은 거의 다른 사람 같은데.’

이런 모습의 나를 숭배하고 있다면 첫눈에 나를 못 알아볼 만도 하군.

“처음에는 몰랐는데, 볼수록 초상화의 인상과 닮으셨단 생각이 듭니다요. 120회차엔 유독 청색대륙에 일찍 오셨군요. 20대 초반이신가요?”

“29살. 하여간 신기한 일이군.”

“이렇게 젊은 범철 님을 볼 수 있다니, 오래 숭배한 보람이 있습니다.”

덕돌은 눈물까지 글썽였고 나는 그런 태도가 거북해 주제를 바꾸었다.

“혹시 이 주변에서 황색대륙 사람들을 본 기억이 없냐?”

“흠. 이 숲에서 사는 것은 저뿐이라……. 인상착의가 어떻게 됩니까?”

“우선 카티에. 키가 작고 희고 검은 머리칼이 섞인, 예쁜 소녀인데.”

그러자 덕돌의 눈이 또다시 반짝였다.

“카티에? 범철 님의 다섯 사도 중 한 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도?”

“범철과 21회차부터 삶을 함께해 오고 있는 일행을 일컫는 말이죠.”

아아, 회차 극초반에 카티에만 남겨두고 자살한 그 사람들 말인가?

“아니. 카티에만 남고, 나머지 녀석 들은 전부 자살했는데.”

“……세상에 멸망이 도래한다!”

덕돌은 미친놈처럼 뛰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놈의 뒷목을 잡아챘다.

“아이고!”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사, 사도들이 자살하면 그건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고 사람들이…….”

왜 종교와 멸망론은 항상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처럼 붙어 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멸망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막아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여간 그런 녀석 본 적 있어, 없어?”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이 숲에선 범철 님 말고 다른 자는 본 적 없어요. 다른 곳에 계신 게 아닐는지…….”

역시 그런가.

어쩌면 일행을 전부 찾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군.

주위가 어두워지도록 걷자 숲속에 우두커니 놓인 오두막집이 보였다.

“고을까지는 거리가 꽤 됩니다. 오늘 밤은 저희 집에서 묵고 가시지요. 아이고! 종일 걸었더니 다리 쑤셔.”

덕돌은 활과 봇짐을 풀면서 오두막에 걸터앉았다.

난 마당에 놓인 사냥도구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연회색 호리병이었는데, 물이나 술을 담기에는 모양이 제법 괴상했다.

“저 호리병은 뭐지?”

“영물을 가두는 도구입니다. 신선한테 아주 비싸게 주고 샀습죠. 이것만 있으면 난폭하고 강한 영물을 포획해 들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영물이 뭔데?”

“일반적인 짐승과 달리 유독 엄청난 힘을 갖고 태어난 변종을 말합죠. 수만 마리에 고작 한 개체가 나올 만큼 귀하고 강력한 놈들입죠. 아주 오래 살 수 있고, 성장력도 빠른데 놈들의 선지, 가죽, 고기는…… 흐흐. 아주 비싸게 팔립니다. 특히 이게 몸보신에 아주 그만인데…….”

“그럼 나한테 화 좀 났겠군. 그 귀한 걸 나 때문에 놓쳐 버렸으니.”

그러자 덕돌이 손사래를 쳤다.

“아휴, 아닙니다! 범철 님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것만으로도 생애 최고의 영광인데요.”

덕돌은 조금 멍청하고 욕심이 많은 구석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하여간 피곤해서 오두막에 앉는다.

딱히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덕돌은 부지런히 술상을 내왔다.

“집에 있는 게 없어서 차린 게 없습니다. 그래도 허기 좀 채우시죠.”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곤 질긴 멧돼지 고기 몇 점이 전부였다.

식욕이 동한 나는 이계에 와서는 실로 오랜만에 젓가락을 쥐었다.

‘이게 얼마만의 젓가락질이냐.’

19살에 이계로 차원전이하고, 그 이후로 젓가락은 만져본 적도 없다.

거의 10년 만인 터라, 손에 익지 않아서 젓가락질이 서투르게 됐다.

덕돌은 술상 위에 괴상한 짐승내장 같은 걸 내왔는데 맛이 꽤 좋았다.

“양깃머리입니다. 소 밥통을 고기로 만든 건데, 쫄깃해서 안주로 그만입니다. 맛이 괜찮아 자주 해놓죠.”

“바닷가 근처 오두막에서 이런 걸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제가 사냥하는 활은 장식으로 들었겠습니까요? 생선보단 육고기죠.”

이렇게 손질된 내장은 황색대륙에선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식재였다.

덕돌이 술을 한 사발 따라주었다.

나는 질그릇을 받아들고서 말했다.

“먼저 들이켜라.”

“예?”

“집주인이잖아. 첫 잔은 양보할게.”

덕돌이 얼떨떨해하며 잔을 들이켰고, 그제야 나도 사발을 가져갔다.

딱히 뭐가 들어 있지는 않은가 보군.

‘섣부르게 신용을 줄 수는 없다.’

제아무리 덕돌이 나를 신으로 모시며, 극진히 대접한다고는 하더라도.

낯선 땅에서 만난 낯선 타인이다.

내 태도가 조금 쌀쌀맞은 것도, 완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어찌 됐건 마셔도 괜찮겠군.

술 한 사발을 기울여 입에 댔다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크읍……! 야, 이건?”

덕돌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탁주입니다. 아주 끝내주지요?”

“그래, 내 삶을 끝냈다. 죽이는걸.”

허연 탁주는 황색대륙에선 아예 양조가 되지 않는 술이었다.

또한,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도 제조되던 그리운 전통주이기도 했다.

‘뭐, 한국에 살던 때에는 학생이라 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참 그간 올바르고 정석대로만 살아오기는 했었다.

별일 없는 하루에 만족하던 내가.

설마 다른 세상, 외진 땅에서 낯선 이와 늦은 밤 대작을 하게 될 줄은.

‘어디 그뿐인가.’

지금 내게 가진 재능만 몇 개인가.

검술, 마법, 회귀자 살해, 잠금 해제, 보물탐색, 그리고 낚시까지.

평범하다고만 느낀 내게 이렇게 많은 재능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인류가 회귀해오며 갑자기 시작된 여정은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앞으로 또 얼마나 경악스러운 일들을 체험하고 겪게 될지.’

술이 들어가니 괜히 감성이 찬다.

사발을 부딪치고 탁주를 들이킨다.

밤이 깊어갈수록 술맛이 달았다.

“범철 님은 검으로 하늘도 찢으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마주 보며 술을 마실 수 있다니, 무릉도원에 온 것처럼 아주 황홀합니다요.”

덕돌은 나에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얘기로 풀었는데, 기가 막혔다.

검으로 벼락을 흩뿌려 박살 냈다거나, 한 획 그어 하늘을 갈랐다거나.

누가 들으면 내가 칼만 쥐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겠다.

‘이건, 뭐 과장 수준이 아니라 망상에 가까운데?’

하긴 신화라는 게 거의 그런가.

분위기가 달궈지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 둘 다 기분 좋게 적당히 취해서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을 즈음.

“잠깐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덕돌이 눈을 반짝이며 새 술병과 함께,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평소 제가 신앙심이 깊어, 삶마다 범철 님과 관련된 물건은 사서 모았습죠. 그중에서 제일 귀한 겁니다.”

“샀다고? 이런 걸 어디서 팔아?”

“어느 신선이 팔던뎁쇼. 저랑 친분이 좀 있어서 싸게 구매했습니다.”

나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누런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화려하고 멋들어진 붓글 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범철류 제1초식 용살도』

덕돌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건 범철 님의 검법비서입니다. 생전에 쓰셨다는 ‘용살도’의 초식에 관해 적혀 있죠. 검격 세 번으로 용도 찢어버리고 만다는 비전검법! 이걸 얼마나 힘들게 구했냐면…….”

나는 책을 넘겨보며 중얼거렸다.

“순 엉터리인데.”

“예?”

“가짜야. 난 이렇게 검 안 써.”

애당초 내 칼부림은 이렇게 책으로 쓰여질 만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가 막아내기 고되고 누구도 검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

세상 어느 예술이 논리로 설명될 만큼 형식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비서를 읽으면서 픽 웃었다.

“내용은 제법 그럴 듯이 썼네. 내가 칼을 안 썼으면 넘어갔겠는데?”

“그 망할 대머리 신선 놈!”

덕돌이 주먹을 쥐며 탄곡했다.

나는 그 모습에 픽 웃고 말았다.

사기에 통달한 회귀자도 많나 보군.

사발을 입을 대다 문득 멈칫한다.

‘…….’

잠시 멈추었다가 술을 들이마신다.

입에만 담을 뿐, 삼키지는 않는다.

목에 닿는 공기가 차갑게 식는다.

‘약은 열네 번째 잔에다가 탔군.’

나는 술을 머금은 채 이빨을 악물었다.

* * *

간과했다.

약을 첫 잔에 타는 머저리는 없다.

무색하고 무미한 약이라도 첫 잔은 경계심과 위험이 담겨서 첫 잔이다.

첫 잔을 무사히 넘기면 그 이후 잔도 괜찮다고 스스로 방심해버린다.

최소한 약을 타는 것은 얼큰하게 취한 대작의 중반 이후가 당연하다.

술이 찰랑거리는 질그릇을 꽉 쥔다.

‘……아직도 멀었어.’

아로즈의 사건을 몸소 겪었음에도.

또다시 섣불리 남을 믿을 뻔했다.

원한을 품은 자의 접근과 암살 위협을 막아주는 동료들은 현재 내 곁에 없다.

의지하거나 엄살을 받아줄 자도 없다.

정신 차려라.

지금 나는 오롯이 혼자이다.

‘첫 잔에서는 없던, 박하향이 나.’

술을 머금으니 향이 더욱 심하다.

이전에 일행과 여관에서 식사할 때, 독살당할 뻔한 위기가 있었다.

그때도 이것보다 진하긴 했지만 비슷한 박하향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

술에 조금만 더 취해 있었더라면 멋도 모르게 그냥 삼키고 말았으리라.

‘그저 나의 착각은 아닌 것 같군.’

어느새 덕돌은 안주만 씹고 있다.

달아오른 고개가 흘깃 비틀어진다.

순간, 훔쳐보는 시선을 포착했다.

‘내 눈치를 슬슬 살피는 걸 봐서는 술에 약을 타긴 탄 게 확실한데.’

나는 믿고 있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다.

덕돌은 나를 진심으로 신이라고 믿으며 숭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독실한 신자가 신을 해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지?

‘놈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결정을 내렸고, 행동에 임한다.

입에 담긴 술을 소매로 입을 닦는 척하며 몰래 뱉고 다음 잔을 든다.

그것을 네 번쯤 반복하다가 느릿한 어투로 나지막이 말한다.

“꽤 피곤한데…….”

“허! 신자보다 술이 약하십니다?”

“아니, 그것보단…….”

나는 약에 취한 척하며 술상 위에 얼굴을 처박고 스르륵 엎어졌다.

“범철 님? 범철 님?”

날 흔들어 의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더돌이 잔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남김없이 먹을게요. 신은 처음 해체해 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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