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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82화 (82/200)

나만 1회차 082화

짹! 짹짹!

그대 기절한 나를 깨운 것은 새소리였다.

귓불을 낱알처럼 쪼아대는 뱁새를 쫓아내고 눈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여긴…… 어디지?’

바닷가의 모래밭이다.

……파도에 쓸려서 여기까지 왔나.

그런데 입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투투퉷.”

짜디짠 바닷물과 모래를 뱉어낸다.

소매로 입을 닦고서 생각해본다.

‘배는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핀다.

화염에 그슬린 새까만 나무 파편이 몇 개 보였는데, 배의 잔해 같았다.

……망할, 침몰해서 쓸려온 건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둘러봤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곳 바닷가로 쓸려온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다들 무사할까?

그런데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에취!”

춥다.

너무 춥다.

온몸이 차게 식어서 힘이 없다.

저절로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몸이 마구 떨린다.

[체온이 35도 밑으로 낮습니다.]

[85%의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장기기능이 저하됩니다.]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몸부터 좀 데워야겠군.’

나는 바닷물에서 일어나 몇 걸음 못 가고 비틀대다 모래밭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마나의 불꽃을 지피자 몸에 없던 생기가 피어난 것 같다.

[체온이 오릅니다.]

[몸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여관, 주막의 불가에 앉아서 휴식하면 회복속도가 빨라집니다.]

얼추 몸이 따스해지자, 머리가 좀 돌아가며 판단력이 샘솟는다.

수통을 꺼내서 소금기로 버석거리는 마른입을 헹구고 목을 축이곤 생각을 정리한다.

‘불도깨비가 범선을 침몰시켰다.’

난데없이 습격해 돛대를 불태우고 배까지 전복시켜버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미묘하다.

‘마검사인 내가 청색대륙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고?’

어째서 불도깨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도저히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하여튼.’

불도깨비 탓에 배가 침몰하고.

나는 동료를 전부 잃고 말았다.

‘그러니 우선 일행부터 찾아야 해.’

바다 한복판의 배가 침몰해서 어쩌면 전부 뿔뿔이 흩어졌을지 모른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차디찬 바닷가를 보다가 돌아선다.

육지에는 따로 길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숲속을 걸었다.

‘정황상 여긴 청색대륙이 맞는데.’

우선 사람이 사는 인가부터 찾아서 일행의 위치를 파악해봐야겠다.

혹시나 나랑 아주 가까운 장소로 떠밀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거친 나뭇가지를 헤치고 눈이 쌓인 바닥을 걸으며 난 문득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혼자는 오랜만이군.’

120회차의 세상이 시작된 이후, 나는 줄곧 동료와 여정을 함께했다.

그 말은 항상 곁에서 정황을 설명해주는 회귀자가 있었단 의미였다.

내가 모르는 전생 지식을 듣거나 도움받아 히든 피스를 얻기도 했다.

‘혼자인 지금, 그런 이점은 없다.’

발걸음을 멈춰 선다.

갑자기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의혹이 커졌다.

‘굳이 일행을 찾아야만 할까?’

아니, 정확히는 단 한 명.

내 머릿속에 한 소녀가 떠올랐다.

‘카티에.’

과연 그녀를 찾는 것이 옳을까?

지금도 가끔씩 카티에가 나를 죽이는 예지의 악몽을 꾼다.

어쩌면 멀지 않은 훗날, 나를 직접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지금 내가 혼자라는 것은.’

카티에를 만나고, 처음으로 그녀가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카티에는 병적으로 내게 집착하고 나를 위해주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헤어지기 힘들기도 하였다.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예언된 미래가 몹시 불길하다.

오직 지금만이 내가 그녀와 온전히 이별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시선을 조금만 다르게 보자면.’

어쩌면 내가 죽게 될 미래로부터 성공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일지도…….

“캬앙!”

얄팍한 울음이 내 생각을 깼다.

긴장감을 되찾고 경계심을 세웠다.

지금 마땅한 검은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법으로 싸워야 한다.

‘설마 몬스터인가?’

언제든 마법을 부릴 수 있도록 손에 마력을 담고서 소리의 근원지로 걷는다.

그러나 울음소리를 내던 것은 엉뚱하게도 덫에 걸린 새끼 여우였다.

“캬앙……!”

눈처럼 희고 가여운 새끼 여우가 철제 덫에 걸려서 낑낑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덩치가 뭐 이렇게 커?’

솜털도 보드라워 보이고 이빨도 적은 것이 영락없는 새끼의 외견이다.

그런데 어지간한 성견과 맞먹을 만큼 몸집이 컸다.

‘어지간한 성체하고도 맞먹겠는데.’

청색대륙의 여우는 원래 다 저런가?

하여간 나는 흰 새끼 여우가 걸린 철제 덫을 내려다보았다.

곰을 잡아도 될 만큼 큰 덫에 새끼 여우의 왼발이 물려져 있었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새끼 여우는 낑낑대며 발에서 피를 줄줄 흘렸다.

며칠은 덫에 걸려 있었는지 몸이 앙상하고, 새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가만 놔두면 발이 잘리든지, 여기서 죽어버리든지 하겠네.’

나는 양팔의 소매를 걷었다.

“보통 동물의 목숨을 살려놓으면, 나중에 은혜를 갚으러 온다던데.”

“캬앙……?”

“하지만 현실을 봐야겠지. 고작 짐승이 은혜를 갚아줄 리가 없지 않냐? 내 코가 석 자이고, 배도 고파.”

여우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의 손은 당장 덫을 푸는 데 쓰이지 않았다.

손아귀에서 화염을 불태우며 바싹 메마른 입술을 살짝 핥는다.

놈과 나의 시선이 교차하였다.

“캬아앙!”

흰 새끼 여우는 잔뜩 겁에 질려서 발을 끊어서라도 도망칠 태세였다.

그러나 나의 화염은 신속하였다.

“꾸에엑!”

숲속에 비명이 메아리쳤고, 배고픈 인간에게 가련한 짐승이 희생됐다.

* * *

“잘도 먹네.”

“캬앙! 캬앙!”

나는 픽 웃으며 익히지 않은 간을 던져줬고, 새끼 여우는 허겁지겁 주둥이에 피를 묻히며 마구 씹었다.

어찌나 굶주렸는지 생간을 통째로 먹고도 맑은 눈망울로 날 바라본다.

‘숲속에서 멧돼지를 보다니, 운이 좋았군. 별로 맛은 없는 고기지만.’

이곳이 짐승이 주로 다니는 길목이었는지, 운 좋게 멧돼지를 잡았다.

가죽은 태우고, 뱃살을 무거운 돌로 후려쳐 얼추 찢어 해체했다.

마법으로 죽인 멧돼지는 워낙 질겨 생고무를 씹는 것 같은 식감이었다.

불에 대충 구운 탓도 있겠지만, 차라리 닭고기나 사육한 가축고기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탄이었으면 이것보단 부드럽게 조리할 수 있었을 텐데.’

내심 그의 공백이 아쉬웠다.

‘그래도 배고플 때 이게 어디야.’

난 질긴 멧돼지 고기를 턱이 아프도록 씹으며 새끼 여우를 바라보았다.

철제 덫은 풀어졌고, 붕대를 어설프게 감은 왼발은 대충 지혈됐다.

“이리 와봐라.”

내가 말하자 새끼 여우가 알아들은 것처럼 내게 킁킁대며 살며시 왔다.

치유의 빛이 어린 손길을 내민다.

1서클의 조잡한 치유마법이지만 상처가 아무는 데 도움은 될 것이다.

‘만약 카티에가 있었다면 이깟 상처쯤은 곧바로 치유해 버렸겠지.’

항해하는 동안 카티에한테 치유마법을 배우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나의 마법을 질투했던 그녀의 불안증세와는 별개로, 내게 재능이 있더라도 이계에서 유일한 성녀의 치유력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불안이라.

‘그러고 보니 카티에는 나랑 헤어지게 되면 정신이 나갈 수도 있겠군.’

내가 없을 때, 그녀의 불안증은 배가 되고 자해까지 서슴지 않는다.

원래도 살짝 미쳐 있는 소녀인데, 거기서 좀 더 미치면 어떻게 될까.

조금은 호기심이 일지만, 그다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걱정되는군.’

과연 카티에는 무사할까.

단지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어떻게 되었는지 문득 걱정된다.

문득 되바라진 생각이 고쳐진다.

‘……멍청한 생각을 했었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 들고, 비어서 소중한 걸 조금은 깨닫게 된다.

‘역시 일행부터 찾아야겠군.’

그들은 내가 있어야 할 테고.

나에게도 그들이 있어야 한다.

설령 가끔씩 카티에가 나를 죽이는 악몽이 나를 찾아온다고 한들.

헤르탄이 죽는 미래를 보았다 한들.

그것이 지금에 와서 완벽히 결정된 미래는 아닐 것이다.

‘확정된 미래라면, 내가 바꾸겠다.’

물론 그저 동료에게만 의존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겠다는 것은 아니다.

동료 찾기와 별개로 지배자를 죽이기 위한 성장도 게을리할 수 없다.

그런 굳은 결심이 서던 와중에.

“캬앙.”

새끼 여우가 내 다리에 기대고 냄새를 맡다가 갑자기 발라당 누웠다.

“암컷인 건 딱 보면 아는데.”

“캬아앙.”

새끼 여우가 간지러운 울음소리를 냈고,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꼭 개 같구나.”

“크앙!”

“칭찬이야, 인마.”

내가 배를 긁적여주자 흰 새끼 여우가 가르릉대며 몹시 좋아했다.

보통 야생동물은 경계심이 강하다던데, 이놈은 어째 그런 것도 없네.

‘헤르탄이 왜 애완동물 키우는 걸 추천했었는지 알겠는데.’

반쯤 미친 회귀자들 사이에서만 지내다가, 순수하고 여린 동물을 보니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 썩 괜찮았다.

“캬아앙.”

호감을 꽤 얻었는지 새끼 여우가 부드러운 머리를 내게 비비적댔고.

난 곧바로 여우를 발로 걷어찼다.

“케엥!”

팍!

여우를 스쳐 나무에 꽂히는 단도.

날이 잘 들긴 했지만, 날아오는 각도를 봐선 영 멋진 솜씨는 아니군.

“컁!”

흰 새끼 여우가 놀라서 도망쳤고, 나는 칼이 날아든 쪽을 노려보았다.

“넌 뭐냐?”

“너, 이 개자식!”

“난 인간의 자식이다. 부모부터 욕하고 보잔 거냐? 배은망덕한 새끼.”

“뭐, 뭐라는 거야, 이놈?”

다짜고짜 단도를 던지고 내 부모를 개로 만든 것은 상투 튼 남자였다.

우선은 내 또래처럼 보이는 나이.

등에는 기다란 활을 메고 있다.

동양풍의 옷을 입었는데, 처음 보는 천이었고 결도 거칠어 보였다.

청색대륙 사람은 처음 봤지만, 확실히 문화가 다르단 것이 느껴진다.

“내가 잡은 사냥감을 풀어주다니!”

“내가 푼 사냥감을 잡으려 하다니?”

“그 여우는 영물이었단 말이다!”

“네가 방금 단도를 어설프게 던져서 도망친 여우 말하는 거냐?”

내가 쉴 틈 없이 말을 비꼬자, 그 남자는 더욱 열이 뻗쳐서 소리쳤다.

“아, 시끄러워! 이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사냥꾼 인생을 통틀어 처음 영물을 잡을 기회였는데, 그걸!”

사냥꾼 행색을 한 남자는 분통을 터뜨리며 나를 죽일 듯이 째려봤다.

그러나 나는 눈도 뻥끗 안 했다.

‘오히려 잘 됐군.’

때마침 근처의 인가까지 안내해 줄 현지 회귀자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사냥꾼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주절거렸다.

“여우 영물 꼬리를 부적으로 만들면 그게 값이 얼만데. 특히 회귀자들이 얼마나 비싸게 사는 줄 알아? 최소한 비기서적 한 권이랑 교환…….”

내가 사냥꾼의 말을 끊어버렸다.

“내 이름은 범철이다.”

“뭐?”

황색대륙에서도 좀처럼 밝히지 않았던 나의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정체를 드러낸 것은 확인해보고 싶은 사항이 있어서다.

그러나 사냥꾼은 코웃음부터 쳤다.

“범철? 네가 게 감히 범철이라고?”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기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까닥였다.

“의심 가면 시험해 보든가.”

“허참! 회귀자한테 사기 치려면 말 재간 좀 늘려야 하겠다. 밤색머리 남자면 전부 다 범철인 줄 알아?”

사냥꾼이 구시렁거리더니 노란색 알밤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진짜 범철은 알밤을 하늘로 던져서 4등분을 낼 수 있다 들었는데.”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었어?”

“하, 역시나 넌 가짜…….”

나는 나무에 꽂힌 단도를 뽑았다.

사냥꾼이 콧등을 찌푸리며 알밤을 일부러 낮게 던졌고, 난 움직였다.

단도가 민첩하게 8번 휘둘러진다.

타다닥.

노란 알밤이 16등분으로 쪼개졌다.

눈밭에 떨어진 밤알 조각의 크기가 자로 대고 썬 것처럼 균등하였다.

밤알 조각의 개수를 세어보던 사냥꾼이 휘둥그레한 눈으로 날 봤다.

“서, 설마 진짜로……?”

“범철 맞다니까.”

내가 짜증을 내보이자, 사냥꾼은 한동안 아주 멍한 표정을 지었다.

“…….”

하도 멍을 오래 때려서 뺨이라도 한 대 때려야 하나 고민해보던 찰나.

놈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확 펴졌다.

“으, 으, 으어엇!”

사냥꾼이 기겁하며 날 살피더니 곧장 엎드리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유명인을 마주한 태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회귀자라도 유명인 좀 됐다고 눈물과 식은땀을 쏟진 않는다.

“소, 소인 덕돌! 감히 청색대륙의 신을 눈앞에서 직접 뵙사옵니다!”

사냥꾼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카티에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군.’

난 청색대륙에서 신으로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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