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79화
“뱃삯은 뭐로 지불할 거요?”
120회차 세상.
주화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서 아이템을 이용한 물물거래가 주로 이루어진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외다리 선장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깨와 등짝이 근육질로 탄탄해 보였고 허리춤에는 날카로운 커틀라스(Cutlas)를 찼다.
“주로 어떤 아이템을 받습니까?”
“검 같은 장비는 받지 않소. 항해에 추진력을 얻거나 이 지겨운 삶에 자극을 덧칠할 수 있는 물건을 보이면, 적당한 몫의 뱃삯을 쳐주겠소.”
흰 사자 선수상이 장식된 중형범선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
대륙 사이를 오가는 백사자호!
청색대륙으로 가는 배를 모는 선장은 회귀자 승객들이 내미는 다양한 아이템을 칼같이 감별했는데, 그 판단 기준이 아주 세밀하고 깐깐했다.
심지어 앞줄의 어떤 회귀자는 흑진주를 내밀고도 승선을 거부당했다.
“이 진주가 얼마나 귀한 건데!”
“진주는 바다에도 많소. 특히 난 회귀하며 수천 번도 더 만졌지. 직접 양식을 해봤던 경험도 있고. 해양 관련 사치품은 어지간해선 내 눈에 차지 않소.”
굉장히 까다로운 감별기준!
선장이 만족할만한 아이템을 건네야 선박에 승선할 자격이 주어진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말고 다른 배는 없습니까?”
“황색, 청색, 적색을 넘나들며 배를 모는 선장은 카벨, 저자뿐입니다.”
“그 많은 회귀자 중에서요?”
“해적의 습격과 날씨의 변수를 뚫고 위험한 해역을 오갈 수 있는 실력을 지닌 항해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회귀해서까지 배를 몰고 손님을 맞는 자는 더욱 드물지요.”
이거 순 배짱장사로군. 하여간 빌어먹을 독과점.
‘삶에 자극을 줄 만한 아이템이라.’
곰곰이 고심해 보던 나는 배낭에서 적당한 아이템을 꺼냈다.
‘흉내쟁이 마법서.’
마법의 시련에서 얻은 물건으로, 날마다 여러 종류의 책으로 변신한다.
‘처음 변했던 경우 이후로 그다지 써먹을 일이 없었지. 마나 원천의 괴력술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다른 마법 물품도 가능하니까.’
이제 쓸모가 없으니 지불해도 되겠다.
마법서는 주인의 역량, 성향에 따라 독특한 서적으로 바뀐다.
오늘의 책은 붉었다.
새빨간 표지의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집 하녀는 체리향]
책을 살짝 펼쳐본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 상당히 유익한걸.”
“그만 읽고 얼른 지불이나 해요.”
카티에가 내 팔을 꼬집었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책을 덮어야 했다.
“일단 이 책부터 넘기겠습니다. 당신 눈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죠?”
투박한 선장은 붉은 표지의 책을 스르륵 넘기며 훑어보곤 판단했다.
“이걸로 네 명 뱃삯은 충분하오.”
“…….”
카티에는 할 말을 잃었고, 나는 선박에 올라서며 등 뒤를 가리켰다.
“저 선장. 나랑 취향이 맞는데?”
“카벨 선장은 최상의 항해 실력을 지녔지만, 까다롭고 눈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운이 좋았군요.”
“그래도 설마 책 한 권으로 승선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흑진주까지 거부하는 카벨 선장인데 말이에요.”
난 아까 그 책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차라리 나도 도색서적을 쓸까 보다. 잘만 쓰면 회귀자들 사이에서 웬만한 보석보다 비싸게 거래되겠는데.”
“취향 맞는 회귀자에 한해서겠죠.”
“하긴 그런가?”
내가 입맛을 다시자 퀸소히니베가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도색서적이 무엇인 것이야?”
“남녀가 섹스하는 책이다.”
내 말에 퀸소히니베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고, 카티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여가 섹스를 하기도 해요.”
그러자 헤르탄이 덧붙였다.
“남남이 섹스를 하기도 하지요.”
난 얼굴이 붉어진 퀸소히니베를 물끄러미 보다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색다른 취향이 많지. 가끔은 공주를 구하러 간 기사와 공주를 납치한 용이 섹스하는 소설도 있는데…….”
원래는 순진한 그녀의 동심을 골려 줄 생각으로 내뱉은 얘기였다.
그런데 의외로 퀸소히니베가 나의 소매를 수줍게 잡아당기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려달란 것이야.”
“…….”
* * *
저녁노을이 수면 위를 물들인다.
“바다 봐라. 미쳤는데.”
“너무 아름다운 것이야.”
나와 퀸소히니베는 감탄사를 남발하면서 멋진 바다 풍경에 취했지만, 카티에와 헤르탄의 반응은 뚱했다.
“나는 수없이 봐서 질렸어요.”
“지겨워서 별 감흥이 없습니다만.”
회귀자도 참 슬프겠어. 이렇게 멋들어진 장관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니.
‘출항한 지 8일쯤 지났나.’
백사자호는 승선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안정적인 항해가 계속되었다.
바람이 선선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30명의 승객은 널찍한 갑판 위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얘기를 나누며 지루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청색대륙에 가는 건 이번이 열 번째입니다. 그곳 물이 참 맑지요.”
“북산 산기슭에서 저를 기다리는 탐험대가 있어요. 이번에는 반드시 꼭 영험한 영물을 찾아낼 겁니다.”
“그냥 거기 고추장이라는 것이 맛있대서 가봅니다. 꽤 맵다던데?”
“새로운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 갑니다. 청색대륙의 검법은 황색대륙의 검술과 다르다더군요. 무엇보다 그 명성 높은 범철의 고향이기도 하고.”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과연 회귀자가 이끄는 선박은 뭐가 달라도 달라.’
카벨 선장의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노련한 선원들은 알아서 움직였다. 해도조차 몇 번을 보지 않았는데도 배가 나아가는 방향은 올곧았다.
그뿐만 아니라 백사자호에는 각종 신비한 항해 도구가 즐비해 있었다.
밤엔 사분의로 북극성의 고도를 관측해 위도를 산출하고, 망루에 꽂힌 깃발이 항시 순풍을 불게 해줬다.
배에는 문외한이지만 이곳, 백사자호는 척 봐도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이런 배라면 남들도 탐내겠는데. 귀한 물자도 제법 적재된 것 같고.”
멀미가 심해서 얼굴이 창백한 카티에가 고개를 휘저었다.
“대장의 말이 씨가 되었어요.”
“응?”
“저기에 해적선이 보이잖아요.”
새까만 돛과 해골 깃발을 단 선박이 우리 쪽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난 날마다 도무지 지루할 틈 없는 사건 사고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출항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해적이 출몰할 해역까지 온 거야?”
“대장. 이곳은 120회차 세상이에요. 마땅한 법령과 치안은 없어요.”
회귀자의 세상답게 바다에는 해적이 아주 많았다. 해상법령이나 해군 함대처럼 치안을 관리하는 장애물이 없으니 말이다.
카벨 선장은 불행히도 승객의 안전을 크게 신경 쓰는 자가 아니었다. 그가 신경질 내면서 황금색 나침반을 한 손으로 깨부쉈다.
“쯧! 해적을 피해 가는 나침반이라더니 순 엉터리였군. 청색대륙까지 가고 싶으면 알아서 살아남으시오!”
삶을 통틀어 처음 이 배에 탑승한 것이 분명한 어느 승객이 경악했다.
“아니, 승선원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이 말을 그따위로 해도 됩니까?”
“그럼 지금 바다로 떨어져 회귀하든가! 반란을 일으켜 날 죽이든가!”
“맙소사! 그러다 진짜 당신한테 반란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괜찮소. 어차피 청색대륙까지 배를 몰 줄 아는 건 나밖에 없거든.”
“…….”
“모두 살려면 당장 싸워야 하오!”
배짱으로 배를 모는 악덕 선장!
나는 백사자호의 서비스에 항의하기보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적선이 쾌속하게 백사자호 쪽으로 붙으며 근접해온다. 해적들은 카벨 선장과 구면인지 장검과 갈고리를 들고서 킬킬거렸다.
“감히 어딜 또 우릴 피해가려고?”
“다시 만나 반갑소, 카벨 선장!”
“다섯 번째 습격이던가? 이번 삶에서야말로 그 배를 꼭 탈취해주마!”
카벨 선장은 간략하게 응수했다.
“쏘아라!”
펑! 퍼엉!
포문이 열리고 귀가 얼얼해진다.
해상전!
해적들은 우리 갑판에 갈고리를 던져서 걸고 이쪽으로 넘어오려 했다.
“참전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해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헤르탄이 품에서 씨앗주머니를 꺼내서 던지자, 넝쿨이 마구 자랐다.
그렇게 자라난 넝쿨은 갈고리의 밧줄로 뻗어가 해적들을 묶어버렸다.
“어억!”
“이, 이게 뭐야?”
밧줄을 타다가 몸이 묶여 버린 해적들은 허공에서 꿈틀대다 떨어졌다.
풍덩!
“꼬로록……!”
몸이 묶인 해적들은 수영을 하지 못해 말 그대로 익사해버렸다.
“하, 참. 저 빌어먹을 해적 놈들!”
“대륙 오갈 때마다 늘 고생이네.”
각자 검과 화살, 지팡이를 빼 든다.
일반 승객이었으나 싸움이 시작되자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회귀자들!
밧줄을 끊어버리고 침범해온 해적들과 맞서 싸우며 바다로 빠뜨린다.
“갈고리는 보는 즉시 전부 끊거나 쳐내라! 걸리면 움직일 수 없다!”
카벨 선장의 고함소리는 대포의 폭음을 뚫을 만큼 크고 선명하였다.
‘해상전은 처음이지만.’
남들을 보니 대충 어떻게 싸워야 할지 눈치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내 손에서 세찬 불꽃이 일렁인다.
4서클 마법, 화기의 뱀!
뱀처럼 교묘하게 움직이는 불이 허공을 넘어서 적의 함선에 침투했다.
“아악! 부, 불이야! 당장 꺼트려!”
“어어억! 피, 피할 수가 없어!”
불이 붙어서 바다로 뛰어드는 해적들!
황색대륙의 지배자를 쓰러뜨리고 나서부터, 내가 쓰는 마법의 화력은 이전보다 훨씬 거세져 있었다.
‘해상전엔 원거리 공격이 최고군.’
침범을 허용하면 싸움이 귀찮아진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해적이 갑판에 넘어오지 않았을 때 전부 처리해야 한다.
전투마법을 수련하다 보면 가끔 새로운 전법을 혼자 터득하기도 했다.
원거리에서 마나를 꽤 소모해 던져진 마법 불꽃의 이동을 손가락으로 휙 비틀고 난잡하게 조종하였다.
“키, 키가 타고 있잖아! 조타수!”
“조타수 놈은 이미 타죽고 없어!”
“빌어먹을! 좀 봐! 돛도 타잖아!”
해적선의 중요 기관마다 나의 불꽃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습격했다. 청소를 게을리해 기름을 먹은 해적선은 불에 태워지기 딱 좋았다.
해적들은 황급히 배에 붙은 화재를 진압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때 커틀라스로 해적의 다리를 베고서 카벨 선장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지금이다! 전 포문 개방! 포격!”
“크하! 우리도 질 수 없다! 포격!”
펑! 퍼엉! 퍼엉! 펑!
포격전!
양쪽 선박에서 포환이 오가며 갑판이 거칠게 요동치는 가운데, 승선원에게 축복을 불어넣던 카티에의 얼굴이 차츰 새하얘졌다.
“속이 엄청 울렁거려요……!”
갑판이 파도처럼 요동치는 싸움에선 뱃멀미도 극심한 지옥이었다. 뛰다가 말고 갑판에 엎어져 구토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재의 영향으로 해적선은 우리보다 훨씬 기울기가 급격했다.
승기를 잡았단 확신이 들던 찰나.
“이보게! 카벨! 설마 벌써 내 얼굴을 잊어먹은 것은 아니겠지?”
“마저 남은 외다리까지 잘라주마!”
“115회차에서 침몰한 시스터호의 원수! 이제야 만났구나! 키하하핫!”
어느새 세 척의 해적선이 따라붙었다.
배가 불타는 검은 연기를 보고 이곳까지 쫓아 따라온 것이다.
나는 갑자기 카벨 선장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의 원수를 꽤 많이 뒀군요?”
“전생에서는 내가 해적이었으니까. 저놈들은 선량한 선장이었고. 살다 보니 어째 입장이 반대가 됐소만.”
“…….”
선장만 넘겨주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런다고 넘어갈 해적들이 아니다.
무려 세 척의 배가 붙자, 들러붙는 갈고리를 막는 것도 한계에 부딪혔다.
갈고리가 걸리고 적들이 다가온다. 수십 명의 해적이 침범해와 물자가 적재된 창고를 털려고 하였다.
“놈들을 가만두지 마라!”
함상 전투!
선원들은 함상 전투용 도검을 들고서 해적과 검을 마구 맞부딪쳤다. 배가 기울며 수십 개의 포환이 적중하며 배에 파손이 크게 일어난다.
난 해적의 시체로부터 가볍고 더러운 나이프를 훔쳐 주워들었다.
『이름 없는 해적의 낡은 나이프』
오래된 녹슨 단검. 술통에 담겨 있던 터라 술 냄새가 진동한다.
+날이 무뎌가고 있다.
+방어에 막히면 부러짐.
녹슬었고 능력치까지 형편없다.
그러나 마땅한 검이 없는 판이다.
나는 그 녹슨 단검을 들고 해적들의 목을 그어댔다.
‘그래도 짧고 가벼워서 적재적소에 급소를 찌르기가 간편하군.’
어지러운 선상에서 손아귀의 나이프를 돌리며 해적의 목숨을 뺏는다.
[악조건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검으로 악인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나이프가 적의 급소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불세출의 검 숙련도가 오릅니다.]
나이프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서 아직 완벽하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튜크 녀석이 썼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던지거나 긋지는 못하겠군.’
그러나 한동안 무거운 대검만 쓰다가 짧은 검을 쥐니 확실히 가볍다.
나이프는 대검처럼 정면승부 따윈 하지 않았다. 뒤를 노리고 검을 빗겨 그으며 적은 몸놀림으로 목숨을 빼앗아간다.
“뭐, 뭐야? 저 사람?”
“칼 쓰는 게 보통이 아니잖아? 회귀하면서도 저런 칼놀림 처음 봐.”
“녹슨 나이프 하나로 해적을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저게 가능해?”
승선원들은 싸우다가도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그것에 뿌듯해할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내 옆의 퀸소히니베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후욱……!”
나는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야, 토할 거면 좀 멀리 가서…….”
“푸아악!”
콰가광!
……그녀의 입에서 벼락이 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