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78화
마침내 향연의 산맥을 내려오자, 원정대는 각기 해산할 시간이 되었다.
카티에는 지도조차 훑지 않고 오로지 기억력만으로 길을 설명했다.
“청색대륙으로 가려면 항구도시로 가야 해요. 자살기도회 본부와는 가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네요.”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나는 자살기도회 본부장과 헤어짐의 악수를 나누었다.
“직접 못 봐 아쉽군요. 일레아흐.”
“영혼을 마주하고 계시잖습니까?”
히사네가 푸른 눈가를 가리키며 픽 웃었고, 나도 마주 웃었다.
“다음에 봅시다. 일레아흐.”
“그때도 살아 있길 바랍니다. 범철.”
그녀가 등을 돌린 순간, 헤르탄이 마지막으로 낮게 질문했다.
“황색대륙의 지배자가 죽었는데, 너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거지?”
“이제 함께 새 목표를 구상해봐야겠지. 그러려고 사니까. 네놈처럼 한 사람한테만 미쳐 있긴 쉽지 않아.”
“끝까지 옳은 말이군. 잘 있어라.”
“너야말로. 옛 왕 항상 잘 모셔라.”
몇몇 오크들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크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안도니크는 아쉬운 얼굴로 오크들의 진한 슬픔을 내게 통역해주었다.
“카파콜은 너와의 이별에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파보는 너를 신랑으로 납치하지 못한 것에 관해 땅을 치며 후회했다. 바얀은 통돼지를 먹고 싶다며 울고 있다.”
“……오크들은 본인의 감정에 참 솔직해서 좋군요.”
안도니크가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목숨을 구해준 빚도 갚지 못했다. 족장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신다.”
“감사하다고 안부 전해주세요.”
“참, 그래서 라임 차 괜찮은 걸 몇 개 싸왔는데…….”
“즐거웠습니다! 이만 헤어지죠.”
수많은 오크들이 저 멀리 떠나가면서 높이 손을 들고 흔들었다.
“레카팔시타!”
분명 오크어로 싸우거나 성교하다가 죽으란 의미의 극찬이었던가?
다시 들어도 참 솔직한 찬사로군.
나도 떠나가는 오크들을 향해 외쳤다.
“레카팔시타!”
그다음, 튜크가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 볼 때 주머니 조심해. 내가 형님에게 뭘 훔칠지 모르거든.”
“내 금화주머니는 돌려주고 말하지?”
“여, 많이 늘었는데?”
그가 킬킬대며 금화주머니를 던졌고, 그것을 한 손에 받아든 내가 말했다.
“하여간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라. 시궁쥐처럼 처박혀 있지 말고.”
“하여간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 너나 몸 성히 잘 다녀오라고.”
튜크를 비롯한 정예도둑들은 나타날 때와 똑같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밀밭기사단 부단장 세그라는 떠나갈 채비를 서둘렀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소년왕에게 돌아갈 겁니까?”
“전하를 경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까. 넌 청색대륙으로 가나?”
“그래야겠죠. 회차 목표를 위해선 청색대륙의 지배자를 죽여야 하니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곳에서 단장님을 만나면 안부를 전해주라. 이곳에서의 우린 잘 지내고 있다고.”
세그라는 나에게 확고히 인사했다.
“네가 살든, 죽든. 재회했을 때 너와 다시 한번 검을 맞대어보겠다.”
그렇게 밀밭기사단이 떠나가고, 자살기도회 병력도 떠나갈 채비를 마쳤다.
암론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돼서 내 양손을 꽉 잡았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범철. 덕분에 부하들에게 한을 갚았습니다.”
“그 아크 리치에게 한 방 먹인 용사가 내 손을 잡아주시는 겁니까?”
픽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암론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 농담도! 범철이 아니었다면 생명그릇을 부수지 못했을 거예요.”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더 강해져 있길 바랍니다. 검술도, 내면도.”
“물론이죠! 매일 수련할 겁니다.”
자살기도회마저 떠나가고,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용의 무리뿐이었다.
레샬피티에가 리치에게 부서진 날개 뼈를 훑으며 말했다.
“중상을 입은 용들이 많다. 회복할 때까진 각자의 둥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근처에 머물러야 할 것 같군.”
“그 날개는 괜찮겠습니까?”
“너희 성녀가 나의 동족들을 치유해줬던 일만으로 충분하다. 고맙군.”
“저희야말로 감사했습니다. 레샬피티에.”
드디어 떠나갈 시간.
우리는 항구도시를 향해서 걸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한 명이 멈춰 서 있었다.
“안 따라오고 뭐 해?”
퀸소히니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시선을 고개 돌려 외면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 것이야.”
“어? 너는 왜 갑자기?”
“황색대륙의 용은 특성상 태어난 대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야. 어르신들께서도 당연히 허락하실 리 없고.”
“아, 그러냐? 잘 있어라.”
“…….”
카티에도 눈치 있게 정을 뗐다.
“그동안 즐겁지 않았고, 함께해서 구역질났어요. 또 보지 않도록 헤어져요.”
“…….”
헤르탄이 무심하게 쐐기를 박았다.
“우리의 여정에 함께할 수 있는 다른 용은 없습니까, 퀸소히니베?”
“…….”
퀸소히니베는 화난 눈길로 우릴 노려보다 대뜸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야. 원래 세상을 살다 보면…….”
이별에 초연한 내가 어른스럽게 그녀를 위로하려다 팔이 뜯길 뻔했다.
“으헉!”
간신히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이젠 불멸자의 갑의도 없었기에 잘못 처맞으면 진짜 죽을지 몰랐다.
그때 그 구슬픈(?) 이별의 광경을 지켜보던 레샬피티에가 낮게 말했다.
“부탁이 있다.”
“무슨 부탁 말입니까?”
“나의 딸을 데려가 주길 바란다.”
본드래곤이 대가리를 깊이 숙였다.
“여왕이시여!”
“어찌 한낱 인간 따위에게!”
뒤쪽에서 다른 용들이 경악했지만, 레샬피티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다른 대륙까지 퀸소히니베와 동행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나이 많은 자의 편협한 방식이 젊은이를 가두는 것은 옳지 않으니.”
그때 카티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황색대륙의 용은 태어난 대륙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서요?”
“퀸소만은 가능하다. 내 딸에겐 청색대륙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 대륙을 오가는 것에 제약은 없다.”
퀸소히니베가 눈물 젖은 눈동자로 레샬피티에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제가 혼혈이었다고요?”
“불행히도 네 아버지는 청색대륙에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을 숨긴 것은 네가 헛된 마음을 먹을까 염려해서였고.”
“어째서 그걸 이제야…….”
“본래 혼혈로 태어난 용은 어려서 죽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다. 그러나 퀸소. 너도 이젠 비늘이 돋은 성체이니 말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하, 그래서 원래 퀸소히니베가 성체가 되기 전에 죽을 운명이었군. 다행히 내가 대륙의 지배자를 죽이고 펜타그램이 그 운명을 비틀었지만.
레샬피티에는 담담히 말했다.
“죽어서조차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네가 성체식을 마치고도 이렇게 버젓이 건강하니, 나도 하나쯤은 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줘야겠지.”
비록 언데드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모성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너희와 다니는 딸을 보면서 느꼈다. 이 세상을 살기엔 황색대륙은 너무 좁다. 내 딸아이가 견문을 넓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하길 바란다.”
“……감사해요. 어머니.”
퀸소히니베가 입술을 깨물고 레샬피티에의 다리뼈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끝까지 그녀와 여정을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그다지 구미가 당기진 않지만 동행해야 한다면 어쩔 수가 없겠네요.”
“다른 용은 찾아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퀸소히니베.”
퀸소히니베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시치미 떼며 붉은 눈시울을 닦았다.
“뭐, 내 노예가 정 원한다면 함께 걸어주기는 하겠단 것이야.”
“응. 이제 와서 말하지만 같이 가고 싶었어.”
“흥. 지금 와서 말해봤자 이미 늦은 것이야.”
동행인과 재회를 기약하며 헤어지면, 사무치게 사람이 아쉬워진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모든 사람과 헤어지고 걸어갔다.
개간된 땅을 걷는다.
황무지를 거닌다.
대륙을 나아간다.
누런 밀밭이 펼쳐지고 거친 황무지가 드넓은 황금의 땅, 황색대륙.
이계에 온 10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오래도 머무르며 살아왔다.
‘마침내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우리가 항구도시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 * *
“시간 참 빨라. 벌써 추워죽겠네.”
“초겨울이 왔으니…… 에취!”
카티에는 눈사람처럼 옷을 두껍게 껴입었는데도 몸을 벌벌 떨었다.
나는 상점에서 구입한 값싼 외투를 벗어 몹시 추위를 타는 그녀에게 걸 쳐주었다.
“대장은 벌써 내게 반했나 봐요.”
“쉽게 마음을 주기는 싫었는데.”
“어디까지 벗어줄 수 있나요?”
“아직은 외투까지만.”
“치. 분발해야겠어요.”
황색대륙 제일의 항구도시, 베스톨.
우리는 이곳에서 청색대륙으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륙을 오가는 뱃삯은 몹시 비싼 편입니다. 범철.”
“알아요. 120회차 세상에선 현금거래보단 물물교환이 통용되죠?”
부두에 서 있는데 뱃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크 리치가 죽었다는 얘기 알고 있어? 자살기도회, 그 미친 것들이 결국 지배자를 죽이고 말았다던데.”
“뭐야? 허구한 날 죽을 짓만 해대던 놈들이 웬일이람? 그럼 대륙의 지배자도 죽일 수 있는 거였나? 허 참! 그 소문 듣고 지배자를 죽인다며 청색대륙으로 몰리는 놈들 꽤 있겠는걸.”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꽤 재밌어. 가장 앞장서서 대륙의 지배자를 직접 죽인 놈이 바로 범철이었다더라고.”
“그 범철이? 유명한 소문답게 진짜 무섭기는 한가 보네. 기억하게. 회귀하면 얼굴 한 번만 봤으면 좋겠군.”
확실히 내가 유명인이긴 한가 보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다.
‘다른 대륙에 가면 이런 일도 이제는 없을 테니까.’
황색대륙이야 내가 쭉 살던 대륙이지만, 청색대륙은 완전히 외지이다. 배를 타고 한 달은 가야 할 만큼 멀고,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검은 머리칼이 흔하고, 동양적인 문화를 지녔다는 이질적인 대륙.
‘그러니 나를 아는 사람도 없겠지.’
그래, 차라리 그것이 마음 편하다. 전생에서 내가 청색대륙에 갔다 하더라도 횟수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
한편, 퀸소히니베는 항구의 바다를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저렇게 큰 강은 처음 본 것이야.”
둥지에서만 자라났던 그녀는 난생처음 보는 바다를 몹시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퀸소히니베를 바라봤다.
‘퀸소히니베는 서로 다른 대륙 출신 용들의 혼혈이기 때문에, 원래 성체가 되기 전에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처음에는 꽤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퀸소히니베란 용의 이름을 기억하는 회귀자는 전혀 없었다. 그 말은 퀸소히니베가 원래 단명하게 될 운명이었단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펜타그램에 의해 운명이 뒤바뀌어버리다니.’
다만 쉽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물론 죽을 운명을 바꾸는 일은, 그렇게 자주 벌어질 수는 없겠지.’
이번 퀸소히니베의 경우도 무려 대륙의 지배자를 죽여서 얻은 결과이다.
확실히 조력자는 내가 회차의 목표를 이루길 바라는 것이다.
기쁘지만, 한편으론 궁금하다. 펜타그램으로 단명할 운명마저 바꿀 수 있는 조력자는 대체 누굴까.
그나마 지금 조력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라곤 하나뿐이다.
‘악마의 펜타그램을 통해서 나를 돕고 있는 조력자는 키가 작다.’
아크 리치는 펜타그램으로 나를 돕는 조력자를 ‘키 작은 자’라 불렀다.
하나 그걸 유용한 정보라고 하기엔 너무 피상적인 단서가 아닌가.
세상에 키 작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난 하늘의 갈매기를 쳐다보고 있는 카티에를 의심스럽게 곁눈질했다.
“솔직히 고백해. 네가 조력자군?”
“대장의 헛소리가 멈춰지게끔 어서 배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나는 배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고심에 빠져서 의문들을 정리했다.
‘아크 리치는 신이 되기를 원했다.’
신의 경지에 가장 근접한 몬스터.
그 몬스터가 완전한 신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재료가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나라고? 당최 의미를 모를 말이다.
‘거기다 어째서 아크 리치는 몬스터인데도 회귀할 수 있었을까?’
의문은 많지만, 해답은 없었다.
머리가 아파진 나는 관자놀이를 긁었다.
‘어찌 됐건 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선 청색대륙으로 가야 해.’
그곳에도 대륙의 지배자가 존재한다. 청색대륙의 지배자를 찾으면 그 의문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배가 더럽게 늦는군.
“청색대륙에 가면 황색대륙과는 많은 것이 다르겠죠?”
헤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색대륙에서의 범철의 명성은 황색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긴 그렇겠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전부 아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러자 카티에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청색대륙은 외지잖아. 그러니 나를 아는 사람도 이곳보단 적겠지.”
“전혀 아니에요. 대장의 유명세는 청색대륙에서 훨씬 극심할 거예요.”
“뭐? 어째서?”
카티에가 태연히 대답했다.
“대장은 그곳에서 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