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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77화 (77/200)

나만 1회차 077화

“죽었냐.”

“그래요. 죽었어요. 묻지 마요.”

요즘엔 시체가 말도 참 잘하는군.

그 유행에 편승하지 못한 내가 물었다.

“시체는 묻어야지, 아님 파낼까?”

“질문하지 말라는 의미예요.”

죽어 있는 카티에가 차분히 말했다.

“시체는 말 없는 게 관례 아니냐.”

“흥. 정말 형편없는 편견이네요.”

“시체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일어나는 건 어때?”

“생사가 평등한 시대가 오기를.”

카티에가 투덜대며 기어 나왔고, 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몸에 붕대를 몇 곳 휘감았지만, 목에 밧줄 또한 메고 있었다.

“목에 밧줄 메고 거기에는 또 왜 기어 들어갔어? 시체인 줄 알았잖아.”

“저 가증스러운 용이 대장을 탐할까 봐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침대 밑에서 감시하냐?”

“전생에서도 대장의 침대 밑에서 잤던 경험이 몇 번 있긴 하니까요.”

“그건 아주 심각한…….”

“걱정하지 마요. 대장의 침대 위에서 잤던 경험이 훨씬 많으니까.”

“…….”

아니, 오히려 더 걱정이 되는걸.

난 침대 위에 눕다가 잔뜩 쑤시는 몸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자 카티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 굳어진 손을 감싸 쥐었다.

“대소변을 받아줄까요?”

“…….”

“쑥스러워 말아요. 처음 해보는 것은 아니니까. 대장이 의식을 잃었거나 사지가 끊겼을 때, 내가 곁에서 돌봐주곤 했어요. 특히 기억 남는 것은 대장의 소변 줄기가 아주…….”

더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끊어버렸다.

“내가 사지가 끊긴 삶도 있었냐?”

“매일 내가 곁에서 부양해줬어요.”

“지극정성이셨군.”

“어련하겠어요?”

카티에는 치유의 빛을 뿜었다.

치유마법은 부상이나 저주를 낫게 하지만, 근육통이나 난치질환 같은 잔병은 완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성녀의 치유력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컨디션이 훨씬 나아졌다.

“어디 아프면 날 불러줘요. 대장.”

“그래, 고마워.”

카티에가 천막을 나가자 비로소 혼자 남은 나는 한숨을 쉬며 누웠다.

‘호의가 고맙긴 한데 역시 쉴 때는 혼자가 최고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곧바로 천막의 문이 활짝 열렸다.

“걱정했습니다. 범철.”

“제길, 이제야 좀 쉬려고 했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그를 돌아보며 픽 웃었다.

“헤르탄. 용케도 죽지 않았군요.”

“그저 지금은 범철이 보았던 미래가 허상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도 그래요. 하여간 지금 원정대 상황은 어때요?”

“전사자들도 있기에 대놓고 내색은 못하지만, 다들 기뻐하며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특히 인파가 범철의 천막에 몰려드는 것을 간신히 막았습니다.”

“잘했어요. 소란스러운 것은 질색이라.”

“깨어났단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전부 편한데, 딱 하나. 몸만 불편해요. 그보다 물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난 아크 리치가 죽으며 남긴 의미심장한 말에 관해서 그와 상담했다.

헤르탄은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신이 되기 위한 재료가 범철이라니. 영문을 알 수가 없는 말이군요.”

역시 헤르탄도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가.

나는 요 며칠 면도를 못 해서 까칠해진 턱을 문질렀다.

“아크 리치는 전지전능한 신을 꿈꾸는 것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생명체들이 있고, 본인 또한 신이 되려 했다는 거군요. 그래서 범철을 탐하려 했고.”

“예. 하지만 더 모르겠습니다. 왜 내가 신이 되는데 필요하단 건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진실을 추리하려 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청색대륙에 가야겠습니다. 그곳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니까.”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군요.”

아크 리치의 말을 따르긴 싫지만, 어차피 청색대륙에는 가야만 한다. 회귀를 멈추게 하기 위해선 청색대륙의 지배자 역시 죽여야만 하니까.

“고민에 해답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범철.”

“괜찮습니다. 헤르탄.”

“아, 그리고.”

헤르탄이 잘생긴 얼굴로 돌아봤다.

“용변이 급하시면 부르십시오. 받아드리겠습니다.”

“…….”

혼자여서 좋다는 말, 취소한다.

힘겨울 때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겹다.

* * *

“사망자는 1만 8천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안타깝지만, 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몹시 적은 희생입니다.”

“혹시 밴시에 의해 백치가 되어버린 회귀자는 없었습니까?”

“현재는 없다고 판명됩니다. 회귀자가 밴시에게 홀려서 백치가 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하고, 범철의 활약이 아주 시기적절했으니까요.”

그거, 그나마 다행이군.

나는 히사네에게 빙의한 일레아흐에게 전쟁의 결과를 듣고 있었다.

“가장 사망자가 많은 곳은 당연히 오크입니다. 하지만 전사(戰死)에 익숙한 전사들이다 보니, 딱히 잔병들이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푸른 눈의 히사네가 병사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내렸

“용은 1마리가 죽었고, 17마리가 다년간 회복이 필요한 중상을 입었습니다. 강대한 종족답게 최전선에서 싸웠어도 사망이 몹시 적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피곤해 보였다.

본래 모든 전쟁은 뒤처리를 할 때가 가장 까다롭고 더러운 법이니까. 히사네가 문서를 내려놓고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평안합니까. 범철.”

“빨리도 묻는군요.”

“그저 너무 피곤…….”

히사네의 몸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푸른 눈빛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지만 조금 더 예의 바른 느낌의 어조가 들려왔다.

“영혼의 교신이 끊어졌어요. 본부장님이 잠드셨나 봅니다. 요 며칠 전쟁 때문에 항시 밤을 샜으니까요.”

“하기야 아이 몸으로 고됐겠군요.”

나는 히사네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히사네,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영광스럽습니다. 범철.”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은 대화를 처음 나누는군요. 말이 없어 보여서.”

“늘 군기가 잡혀 있으니 말입니다.”

히사네가 가볍게 웃었다.

“아크 리치가 죽었으니, 범철의 다음 목적지는 청색대륙이겠지요?”

“예.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예? 하지만…….”

“히사네는 가명입니다. 제 본명은 희산이지요. 청색대륙 태생입니다.”

“하, 그랬습니까?”

하긴 어쩐지 이름이 독특하다 했다. 거기다 그녀의 머리칼이 황색대륙에선 보기 힘든 검은색이기도 했다.

“청색대륙에서 태어나 장사꾼이셨던 어머니를 따라 황색대륙으로 건너와,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1회차 삶에선 가끔 차별을 겪었지만, 회귀가 시작된 이후로는 더욱 심해졌었죠. 그때 저를 거둬주신 분이 본부장님이셨습니다.”

“청색대륙 출생이라면, 고향에서 살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까?”

“고향인 청색대륙에 돌아갔던 적도 많지만, 저는 이곳이 더 좋더군요.”

확실히 그랬군.

내가 짐짓 궁금해하며 물었다.

“청색대륙은 어떤 장소입니까?”

“강산이 푸르고 정적인 땅입니다. 범철도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아, 이계에서 내 출신지는 대외적으로 청색대륙으로 알려져 있었지?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뭐, 저도 출신과 달리 살아가는 곳은 주로 황색대륙이었으니까요.”

“하여간 제가 출신지를 밝힌 것은 마법을 배운 이번 회차의 범철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해줄 말이요? 뭘 말입니까?”

히사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도깨비와 접촉하지 마십시오.”

도깨비라, 친숙한 단어라서 왠지 더 낯설군.

“어째서 말입니까?”

“놈들은 마검사를 증오하거든요.”

히사네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설명하는 것보다 청색대륙에서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더 빠를 겁니다.”

“그렇습니까? 조언 고맙습니다.”

몬스터와 마주치지 말라는 경고라면, 그걸 지키는 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

천막을 나서며 히사네가 고아한 인사말을 던졌다.

“그곳에서 범철의 신분은 특별합니다. 아무쪼록 행보를 사려하시길.”

* * *

‘한동안 쑤시는 몸을 억지로 풀었더니 삐걱대면서 움직이긴 하는군.’

나는 걸어가며 보상을 확인했다.

아크 리치를 살해하고 내가 획득한 보상은 그야말로 풍족해 넘쳐났다.

‘모든 능력치가 25나 오르다니.’

모든 능력치가 오르는 경우는 몹시 드물며 보통 남들이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루거나 믿기 힘들 만큼 강한 생명체를 사냥했을 때나 가능하다.

물론 이건 내 경험에 의거한 정보이기 때문에 온 능력치를 단번에 올리는 방법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건 25의 수치가 오른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가 분명했다. 하나의 능력치만 25가 오르더라도 전투력에서 크게 이득을 볼 정도니까.

‘근육통이 나아가니까, 확실히 몸 동작이 훨씬 유연해진 게 느껴져.’

검술의 절삭력과 마법의 파괴력도 전체적으로 훨씬 상승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잃은 것도 있군.’

리치 파멸의 대검은 아크 리치를 죽이고 나서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한 개체의 리치를 파괴하고 나면 자취를 감추는 검의 특성 때문이었다.

‘뭐, 검이야 새롭게 구하면 되고.’

장검, 대검은 써봤으니 다음은 새로운 형태의 검을 쓰고 싶긴 하다.

‘불세출의 검 레벨도 더 올려야 하고.’

오직 인류에서 인정받은 세 명의 검사만이 쓸 수 있는 스킬!

현재는 4레벨을 달성했고,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체감되는 힘이 컸다.

불세출의 검은 다양한 검을 다룰수록 숙련도가 빠르게 늘었던 것이다.

‘이번에 획득한 전리품은 뼈와 로브.’

아크 리치의 뼈는 특성상 강철보다 드높은 내구력을 자랑했고, 진홍색 로브는 마법에 특화된 방어구였다.

『아크 리치의 뼈다귀(206개)』

황색대륙의 지배자 아크 리치의 몸을 이루던 뼈다귀. 갑옷을 만들거나 무기를 제작하는 원료가 될 수 있다.

+최상급 대장장이 재료(S급).

+부위마다 내구력이 각기 다름.

+두개골에 검은 마력이 담겨 있다.

『진홍색 로브』

죽음의 지배자, 아크 리치가 애용하던 진홍색 로브. 최상급 마나 원단으로 짜여 있으며 찢기지 않는다.

+마나 회복속도 75% 상승.

+마나 전체량 80% 증가.

+강대한 투기 발산.

+고유마법, ‘뼈 분신’ 사용 가능.

+모든 마법의 파괴력이 3단계씩 오르며, 흑마법은 추가 보너스 적립.

+장시간 착용하면 해골로 변함.

“…….”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리치의 뼈다귀는 S급 재료였고, 진홍색 로브도 최상급 전투복이었다.

특히 진홍색 로브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최상의 전투무구나 다름없다.

‘분야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마법의 파괴력을 3단계나 올려준다니.’

지금 나의 마법 재능이 더해지면 군단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페널티가 없는 건 아니군.’

오래 착용하면 해골이 되어버린다.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옵션이니, 위급한 전투에만 착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돌멩이를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리품 전생의 돌. 이건 무슨 아이템이지?’

120회차에서 최초로 대륙의 지배자를 죽인 것에 대한 특별보상.

하나 별다른 문구가 뜨지 않는다. 고급감정 스킬에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냥 돌에 불과한 것 같았다.

‘뭐, 일단 계속 갖고 있다 보면 언젠가 쓸모가 밝혀지려나.’

내가 걸어서 도착한 곳은 아크 리치가 죽은 자리였다.

원정대가 이미 살핀 곳이지만 뼈와 로브는 내가 습득해 건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금속조각이었다.

‘불멸자의 갑의의 파편.’

주인을 충실하게 보호했던 갑옷은 이곳에서 본분을 다하고 박살 났다.

난 언뜻 평범해 보이는 쥐색 갑옷 파편을 모조리 긁어모아 주워 담았다. 녹이면 혹시나 다시 똑같은 갑옷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세상에 이 갑옷 파편을 녹일 수 있는 용광로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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