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75화
생명그릇이 파괴된 순간, 아크 리치의 가슴뼈에서 마나가 뿜어졌다.
“크하아앗……!”
전장에서 급격한 이변이 벌어졌다.
원정대를 덮치려 하던 밴시들이 비명을 멈추며 영체가 소멸해버렸다. 기분 나쁘게 사방을 감싸던 흑마법의 기류가 옅어지고 힘이 샘솟는다.
‘생명그릇이 깨지니, 전장을 장악하던 리치의 마력이 흐려졌어.’
가장 처음 회귀자 살해 재능을 통해서 생명그릇의 비밀을 포착했을 때, 나는 아크 리치의 치밀한 안전 장치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생명그릇을 파괴하는 데 붙은 제약이 재능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을 줄은.’
원정대에 참전한 이상, 모두가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갖춘 자들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제약조건!
누구보다 둔재인 암론이 없었다면, 그릇을 쉽게 부수지 못했을 것이다.
잡역병 노릇을 하느라 성역에 있던 암론이 흥분된 얼굴로 일어서며 울었다.
“내, 내가 해냈어! 복수해줬다고!”
그동안 몸을 떨며 패닉에 빠져 있던 회귀자들도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밴시가…… 없어졌다.”
“어떻게…… 훌쩍! 된 거야?”
“아크 리치가 고통받고 있잖아!”
사악한 마나가 흩어지며, 바닥에 꽂힌 성물들이 제 빛깔을 되찾았다.
밴시의 울음에 경기했던 그들이 환한 빛에 본능적으로 다시 일어선다.
하나둘씩, 원정대 전원이 약속한 것처럼 눈부신 성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범철?”
“범철이다. 범철이 돌아오셨어!”
당혹한 원정대원들이 뒤편에서 나의 등을 바라보며 놀라 수군댔다.
그러나 지금 뒤로 돌아설 마음도, 그들의 시선에 응대할 생각도 없다. 옆을 돌아보자, 그는 당연한 것처럼 나의 곁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너무 일찍 왔군요, 헤르탄. 아직 내가 덜 아프게 죽지는 않았는데?”
“범철을 보좌하는 삶에서는 언제나 일찍 왔습니다. 그래야만 죽기 직전에 곁을 지킬 수가 있으니까요.”
“그거, 훌륭한 농담인데요?”
“이거, 무색한 진담입니다.”
그다운 말투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누구보다 빠르게 전장에 복귀한 헤르탄이 내게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범철.”
그 눈빛을 내려다본 순간, 그는 더는 120회차의 미쳐 있는 동료가 아니었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전생의 신하가 회귀자들의 왕이었다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엄숙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저희에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흘깃 히사네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수락한다.
나는 한 발짝을 나아갔다.
길고 긴 연설 따위는 지루할 뿐이지.
원정대 최전방에 선 내가 아크 리치를 향해 소리치며 대검을 뽑았다.
“진격!”
나의 명령에 잔재주 따윈 없었다.
목소리가 확장되는 마법도, 사기를 진척시키는 스킬도 아닌, 그저 외침.
그러나 나의 고함을 시작으로 원정대에서 가장 뜨거운 기세가 퍼져 나갔다.
튜크가 거칠게 웃곤 따라 외쳤다.
“하하핫! 죽이는데? 진격하자고!”
의식을 되찾고 일어난 밀밭기사단이 고함을 내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찢어 죽일 각오로 진격하라!”
암론은 칼을 뽑으며 달리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며 휘청댔다.
“진…… 으앗!”
하늘에서는 용들이 투지가 넘치는 눈빛으로 불꽃을 내뿜으며 날았다.
“크라아아아!”
푸른 눈의 히사네가 어느 때보다 호기롭게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아크 리치에게 안식을 선사하라!”
이윽고 어느새 원정대 모두가 사기를 불태우며 진격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아크 리치는 한없이 공급되던 불사의 생명력과 무한한 마나를 잃었다.
살아남은 원정대가 뼛속까지 힘을 짜내자 마침내 타격이 들어갔다.
“크허억!”
드디어 실금이 갈라지는 뼈다귀!
빗장뼈부터 시작해 어깨뼈, 엉덩뼈, 정강이뼈, 그리고 척추까지 금이 간다.
용들이 물어뜯고, 화염에 휩싸이고, 장검과 단검, 둔기가 마구 구타한다.
누가 봐도 전세가 역전된 상황!
그러나 나는 오히려 피가 말라붙을 지경이었다.
‘생명그릇을 부쉈는데도 저렇게나 끈질기다니. 얼마나 강했던 거야?’
평범한 리치는 생명그릇을 부수는 순간, 바로 무력화돼야 정상이었다. 들었던 바로는 리치는 그릇이 깨지면 마법을 상실하고 몹시 약해진다.
하나 아크 리치는 생명력과 마나를 크게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했다.
“꺼……져라……!”
아크 리치가 희미해진 마나를 손에 휘감자 대지가 급격히 진동했다. 땅에서 흑색 방벽이 수백 개씩 솟구치면서 원정대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제기랄!”
“어억! 바, 방벽이!”
리치에게 근접한 원정대원들은 방 벽에 부딪치거나 처맞고 튕겨 나왔다. 치솟는 방벽이 원정대의 진로를 곳곳에서 방해하고 있었다.
“크라아아아-!”
용들이 격노해 기둥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 했으나 긁히기만 할 뿐이다. 리치를 둘러싼 흑색 방벽은 어떠한 힘으로도 감히 부술 수 없었다.
최소 8서클 이상으로 추정되는 흑마법!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생명그릇까지 깨진 리치가 저런 마법을 써대? 미쳐 버리겠네.’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죽어줄 만도 한데, 완전히 잡초가 따로 없다.
난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봤다.
‘아냐. 그렇지만 아크 리치가 한계까지 몰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갈라진 뼈와 다급한 태도에서 놈의 위기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계속 쌓이는 흑색 방벽을 바라본다.
‘방벽은 마나를 쥐어짠 마지막 마법이겠지. 저걸 뚫어야 승산이 있다.’
모든 방벽들이 세워지면 아크 리치가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 만다. 비록 마나 공급은 끊겼지만, 리치는 각종 재생력이 뛰어난 몬스터다.
행여 아크 리치가 방벽 뒤에 숨어서 순간이동이나 몸을 은신할 만큼의 여유를 회복해버리면 큰일이다.
‘이대로 있으면 놓쳐 버리고 만다.’
지금 리치에게 회복하거나 숨을 돌릴 시간을 절대 줘서는 안 되었다.
‘결론은 방벽을 넘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누군가 리치에게 근접하기만 해도 방벽이 치솟아 내쳐 버린다.
최선의 수를 구상하는 찰나의 시간.
대검을 들고 달리던 나는 문득 원정대원의 어깨에 부딪히고 말았다.
‘뭐야?’
원정대의 거친 진격이 멈추었다.
단순히 원정대원들만 멈춘 것이 아니라, 아크 리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흩날리는 뼛가루도, 넘실거리던 짙은 안개조차 일제히 멈추어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했다.
‘이건…… 설마?’
나는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레샬피티에!”
“아무리 생각해도, 저 가증스러운 아크 리치에겐 네가 제일 천적이겠지. 정지된 세상 속에서 함께해라.”
레샬피티에의 시간을 멈추는 힘!
아크 리치에게 세뇌당해 정지되어 있던 용의 여왕도 어느새 정신을 되찾았다.
생명과 사물의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우리뿐이었다.
시간을 멈춘 대가로 그녀의 꼬리뼈가 모래시계처럼 소멸해가고 있다.
“시간 정지는 15초뿐이다. 달려라!”
레샬피티에가 활주하고, 난 멈춰진 장벽을 넘으며 리치에게 돌격했다.
현재 나의 힘과 체력은 평소보다 월등히 강력해져 있는 상태.
[마나 원천의 괴력술(1단계)을 사용해 비기의 숙련도가 오릅니다.]
[재능의 영역이 광범위해 현 마법 경지에 맞는 괴력이 선택됩니다.]
[‘뼈다귀를 깨물어 부수는 흑사자의 힘’이 육체에 깃들었습니다!]
[체내의 모든 마나가 태워질 때까지, 상승한 괴력이 유지됩니다.]
마나 원천의 괴력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마나는 최대치까지 회복해두었다. 그리고 미리 배낭에서 꺼내뒀던 모든 약물과 강화의 물품도 써두었다.
[과부하의 종이를 태웠습니다.]
[혼신전력 물약을 마셨습니다.]
[흥분정수를 삼켰습니다.]
…….
[힘, 체력 능력치가 평소의 3배 이상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육체가 강한 힘과 탄성을 축적하나 제한시간 후 근육통이 옵니다.]
[전투 이후, 탈진하고 사흘간 능력치 저하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일행이 구해다 준 각종 히든 피스!
뒷일 따윈 두려워할 겨를이 없다.
한 걸음씩 높이 뛸 때마다 다리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솟다가 멈춘 방벽을 단숨에 뛰어넘고, 대검을 한 손만으로 쥔 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아크 리치에게 공격이 닿을 만한 거리에 근접한 그 순간, 정지된 시간이 딱 풀려 버리고 말았다.
“이딴 쥐새끼가 어느 틈에……!”
진노한 아크 리치가 갈라지고 있는 손뼈를 나를 향해 내뻗었다.
다만 내게 신경이 팔린 놈은 하늘로부터의 기습을 방비하지 못했다.
“크라아악!”
레샬피티에가 아크 리치에 달라붙어 거칠게 목뼈를 물어뜯었다.
꽈드득!
생명그릇이 깨져서 방어력이 낮아진 덕분에 이빨이 뼈다귀를 부쉈다.
그러나 질기고 질긴 아크 리치는 레샬피티에를 땅에다 휘둘러 쳤다.
“내게 복종해야 할 언데드 따위가!”
리치의 주먹이 본드래곤을 강타했고, 레샬피티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두 대형 몬스터의 난전!
나는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관찰했다.
‘끼어들어도 방해될 뿐이다. 내가 할 건 마지막 일격을 거두는 것이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더욱 관찰이 중요했다.
나는 이제껏 없었던 그 장중한 싸움을 지켜보며 리치의 상태를 살폈다.
‘본드래곤을 다루는 세뇌력은 잃었지만, 아직 힘은 굉장히 강력하군.’
황색대륙의 지배자 본연의 힘!
반면에 레샬피티에는 연속해서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파각!
따그덕!
아크 리치의 주먹뼈가 박살 나고, 본드래곤의 날개 한쪽이 부러졌다.
레샬피티에가 쓰러지자 아크 리치가 짓밟기 위해서 다리뼈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 동작!
레샬피티에의 아가리가 확 벌어진다.
화아아악!
“끄아악!”
본드래곤의 흑색 숨결이 리치의 가슴뼈 반쪽을 고스란히 날려 버렸다.
힘은 비등하더라도 마법사인 아크 리치는 접근전에 능숙하지 못했다.
“나의…… 나의 몸이!”
아크 리치가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신체파손을 겪고 고통스러워할 때, 레샬피티에가 전투 후유증으로 기절하기 직전, 나에게 외쳤다.
“지금이…… 기회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그녀의 뼈를 타고 달리던 참이었다.
레샬피티에의 다리뼈에서 두개골까지 뛰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생명그릇이 깨지고, 다수에게 당한 아크 리치의 생명력은 한계치였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돌진하면서 아크 리치를 향해서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최대의 속도로 검을 휘둘렀음에도 아크 리치의 반응속도는 끔찍할 정도로 빨랐다.
“어림……없다……!”
또다시 대지가 흔들리며, 나의 앞으로 올라서는 흑색 방벽!
정면에 칼이 비집을 틈조차 없다.
“커헉!”
쾅!
그 속도 그대로 내 몸이 방벽에 부딪쳤고, 땅바닥에 추락해 떨어져 버렸다. 끔찍한 충격이지만 그나마 불멸자의 갑의 덕분에 큰 피해는 막았다.
생명이 꺼져가는 아크 리치가 안광을 불태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쥐새끼를…… 내 편에 두려 했다니. 참 어리석었다. 여기서…… 네놈의 하나뿐인 목숨을 갈취한다.”
아크 리치의 거대한 주먹 뼈가 나를 내리쳤다.
콰아앙!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먹 뼈의 힘이 먼저 닿은 곳은 불멸자의 갑의 가슴 부위였다.
갑옷 중심에서부터 파열이 시작된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예견했던 일이 아크 리치에 의해 벌어졌다.
쩌적……! 챙강!
“커헉!”
끔찍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지금껏 어떤 순간에도 실금조차 가지 않았던 갑의가 산산이 부서졌다.
‘제기랄……. 갑옷이 부서질 줄은.’
도대체 얼마나 힘이 강대하기에?
신의 경지에 가장 근접한 몬스터.
대륙 지배자의 앞에서 최상의 방어력을 지닌 갑옷마저 부서지고 말았다.
“귀찮은 방어구 따위를……! 어서 죽어라……! 어서…… 빨리!”
분노에 미쳐 버린 아크 리치가 다음 타격을 위해 주먹 뼈를 들어 올렸다.
불멸자의 갑의는 부서졌고, 눈앞에 선 새로운 방벽이 리치를 보호했다.
진득한 좌절감이 몸을 휘감는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최악의 순간.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일말의 전략.
나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있었다.
갈라 터진 입을 열자, 내 목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아크 리치. 헤어질 순간이 왔다.”
“하! 죽음을…… 받아들인 건가?”
“그래, 네가 받아들이게 해주겠다.”
아크 리치의 안광이 일렁인 순간, 세상의 사물이 또다시 느려졌다.
[순간가속이 활성화됩니다.]
[요정장화가 가속 강화합니다.]
[속도 +95%! 지속시간 +3초!]
[6초간 공격력 500% 증가!]
주먹 뼈가 내려오기 전, 나는 일어섰다.
순간가속!
신속함은 파괴력을 배로 부풀린다.
갑옷이 깨지며 방어력은 잃었지만, 나의 체감무게는 더욱 가벼워졌다.
‘지금 일격을 놓치면 다시 기회는 없다.’
최후의 힘을 짜내 검을 쥐었으나 흑색 방벽이 리치에게 향하는 진로를 봉쇄해 공격할 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검을 휘두른다.
‘이제 이 방법뿐이다!’
칼날이 그어지는 순간, 바로 체내서 태워지는 마나를 크게 소모했다.
휘익!
정면에서 휘둘렀던 칼날이 놀랍게도 아크 리치의 뒤쪽에서 솟구친다.
재능의 합성, 공간왜곡!
그 짧은 순간, 아크 리치의 마지막 최고급 살해변수정보를 되새겼다.
[아크 리치의 신체적 급소는 뒤통수입니다.]
다시금 분명히 말하지만, 내게 회귀한 녀석의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 뛰어난 재주가 없다.
“이제 그만 좀 뒈져라!”
“망…… 할……!”
머리 뒤쪽에서 솟구친 대검을 아크 리치는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한계까지 강화된 힘과 한계를 넘어선 속도가 대검에 파괴력을 더한다.
신속한 괴력이 담긴 대검의 일격이 아크 리치의 뒤통수를 부숴 버렸다.
콰자악-!